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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학자 이고(李翺)《복성서(復性書)》상 중 하편 원문과 해석
《복성서》는 인간이 본래의 성품(性)을 회복하는 방법을 다룬 글로, 후대 송나라 성리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저작입니다.
1. 《복성서(復性書)》 상(上) 원문
1. 人之所以爲聖人者性也, 人之所以惑其性者情也.
사람이(人之) 성인이 뒬(爲聖人) 수 있는 까닭은(所以-者) 성이고(性也), 사람이(人之) 그 성을(其性) 미혹하게 만드는(惑) 까닭은(所以-者) 정이다(情也).
喜怒哀懼愛惡欲, 七者皆情之所爲也. 情旣昏, 性斯匿矣, 非性之過也.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은, 일곱 개가(七者) 모두(皆) 정이(情之) 만든 것이다(所爲也). 정이(情) 이미(旣) 혼탁하면(昏), 성도(性) 이에(斯) 숨어버리고(匿矣), 성의(性之) 과실은(過) 아니다(非也).
七者循環而交來, 故性不能充也. 水之渾也, 其流不淸; 火之煙也, 其光不明, 非水火淸明之過.
일곱 가지가(七者) 순환하고(循環而) 차례로(交) 오고(來), 그러므로(故) 성이(性) 채울(充) 수 없다(不能也). 물이(水之) 혼탁하면(渾也), 그 흐름이(其流) 맑지 않고(不淸); 불이(火之) 연기를 내면(煙也), 그 빛이(其光) 밝지 않지만(不明), 물과 불의(水火) 맑고 밝음의(淸明之) 잘못이 아니다(非過).
沙不渾, 流斯淸矣; 煙不鬱, 光斯明矣; 情不作, 性斯充矣.
모래가(沙) 혼탁하지 않으면(不渾), 흐름이(流) 곧(斯) 맑아지고(淸矣); 연기가(煙) 체하지 않으면(不鬱), 빛이(光) 곧(斯) 밝아진다(明矣); 정은(情) 짖지 않으면(不作), 성은(性) 곧(斯) 가득 찬다(充矣).
2. 性與情不相無也. 雖然, 無性則情無所生矣.
是情由性而生. 情不自情, 因性而情; 性不自性, 由情以明.
성과(性與) 정이(情) 서로(相) 없을(無) 수 없다(不也). 비록 그러해도(雖然), 성이 없으면(無性則) 정은(情) 소생이(所生) 없다(無矣). 이것은(是) 정은(情) 성 때문이며(由性而) 생긴다(生).
정은(情) 스스로(自) 정이 없고(不情), 성 때문이며(因性而) 정이다(情); 성은(性) 스스로(自) 성이 되지 않는다(不性), 정 때문에(由情以) 밝아진다(明).
性者天之命也, 聖人得之而不惑者也.
情者性之動也, 百姓溺之而不能知其本者也.
성은(性者) 하늘의(天之) 명이다(命也), 성인이(聖人)얻는 것이면(得之而) 불혹(不惑)인 것이다(者也). 정은(情者) 성의(性之) 움직임이다(動也), 백성이(百姓) 빠지면(溺之而) 그 근본을(其本) 알(知) 수 없는(不能) 것이다(者也).
聖人者豈其無情耶? 聖人者, 寂然不動, 不往而到, 不言而神, 不耀而光.
制作參乎天地, 變化合乎陰陽, 雖有情也, 未嘗有情也. 然則百姓者, 豈其無性耶?
성인은(聖人者) 어찌(豈) 그(其) 정이 없겠는가(無情耶)? 성인은(聖人者), 고요하게(寂然) 움직이지 않고(不動), 가지 않으며(不往而) 이르고(到), 말이 없으며(不言而) 신이고(神), 빛남 없으며(不耀而) 빛이다(光).
만듦은(制作) 천지에(乎天地) 참여하고(參), 변화는(變化) 음양에(乎陰陽) 합하는데(合), 비록(雖) 정이 있을 뿐이다(有情也), 일찍이(嘗) 정이 있지(有情) 않았다(未也).
그렇다면(然則) 백성은(百姓者), 어찌(豈) 그(其) 성이 없는가(無性耶)?
百姓之性與聖人之性弗差也. 雖然, 情之所昏, 交相攻伐, 未始有窮. 故雖終身而不自覩其性焉.
백성의(百姓之) 성과(性與) 성인의(聖人之) 성이(性) 차이가 없다(弗差也). 비록 그러나(雖然), 정에서(情之) 혼탁함이고(所昏), 번갈아(交) 서로(相) 공벌하는데(攻伐), 애초에(始) 다함이 있지(有窮) 않다(未). 고로(故) 비록(雖) 결국 몸이지만(終身而) 스스로(自) 보지 못한 그 성(其性)인 것이다(焉).
* 여기서 이고의 성과 정에 대한 논의가 한유보다 훨씬 더 송유의 철학적 틀로 기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한유는 성에 대해서 정을 대적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고는 성의 방해자로서 정을 말하고, 성의 본모습을 찾기 위해서는 정의 작동이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성을 무위의 '리理'로 보고, 정을 유위의 '기氣'로 보는 이원론적 틀을 이미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정론은 정명원각의 본심이 무명번뇌에 덮여 있다는 불교의 일반 논리에 유교적 언어를 입힌 것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이고가 성에 대해서 정을 폄하하지만, 성과 정을 존재론적으로 이원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고는 인간 존재에 어둠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한계 상황을 인정한다. 그러면서 어두운 존재를 끊임없이 밝은 존재로 나아가게 하는 수양 공부가 복성이라고 본다. 정을 부정하면서도 정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고가 말하는 성인유정이다.
이고의 복성에서 주목할 것은 주역의 '적연부동寂然不動'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복성의 성은 주정주의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동적인 정의 세계를 불식시키고 정적인 성의 세계로 복귀하는 것이다.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말한 '성인정지이중정인의이주정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도 주정주의적 복성을 말한 것이다. 이런 발상에는 항상 '열반적정'이라는 불교적 색채가 보인다. (대학학기 한글 역주, 김용옥)
3. 火之潛於山石林木之中, 非不火也; 江、河、淮、濟之未流而潛於山, 非不泉也.
불이(火之) 산 돌(山石) 숲 나무(林木之) 가운데에(於中) 잠겨도(潛), 없는 불이 아니다(不火) (非也); 장강, 황하, 회수, 제수가(江、河、淮、濟之) 흐르지 않으며(未流而) 산에(於山) 잠김은(潛), 없는 샘이(不泉) 아니다(非也).
石不敲, 木不磨, 則不能燒其山林而燥萬物; 泉之源弗疏, 則不能爲江爲河, 爲淮爲濟.
돌은(石) 두드리지 않고(不敲), 나무는(木) 다듬지 않으면(不磨, 則) 그 산림을(其山林) 태우며 만물을 마르게 할 수 없다(燥); 샘의(泉之) 근원이(源) 트이지 않으면(弗疏, 則) 장강이 되고(爲江) 황하가 되고(爲河), 회수가 되고(爲淮) 제수가 될(爲濟) 수 없다(不能).
東匯大壑, 浩浩蕩蕩, 爲弗測之深. 情之動靜弗息, 則不能復其性而燭天地, 爲不極之明.
동으로(東) 바다에(大壑) 물이 흘러가는(匯) 것이, 넓고 끝이 없어서(浩浩蕩蕩), 잴 수 없는(弗測之) 깊이가(深) 된다(爲). 정의(情之) 움직임과 고요함이(動靜) 그치지 않으면(弗息, 則) 그 성으로(其性) 돌아가서(復而) 천지를(天地) 밝힐(燭) 수 없고(不能), 끝이 없는(不極之) 밝음이(明) 된다(爲).
故聖人者, 人之先覺者也. 覺則明, 否則惑, 惑則昏. 明與昏謂之不同, 明與昏性本無有, 則同與不同二皆離矣. 夫明者所以對昏, 昏旣滅, 則明亦不立矣.
옛 성인은, 사람의 선각자이다. 각이면 밝고, 아니면 혹인데, 혹이면 혼이다. 명과 혼이란 같지 않다, 명과 혼은 성본 유무이면 같음과 다름 둘 모두 離矣. 무릇 명은 거기에서 혼을 대하고, 혼은 이미 사라졌으면, 명도 서지 못하는 것이다.
是故誠者, 聖人性之也. 寂然不動, 廣大清明, 照乎天地, 感而遂通天下之故. 行止語默, 無不處於極也. 復其性者賢人, 循之而不已者也, 不已則能歸其源矣. 《易》曰: 「夫聖人者, 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不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勿違, 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此非自外得者也, 能盡其性而已矣.
이러하므로 정성은(誠者), 성이 성인의 것이다聖人性之也. 寂然不動, 廣大清明, 照乎天地, 感而遂通天下之故. 行止語默, 無不處於極也.
다시 그 성은 현인이고, 순환하며 이미 없는 것이다, 이미 없으면 능히 그 근원이 돌아올 것이다.
《역》왈: 「무릇 성인은, 더불어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은 그 명을 합하며, 사시는 그 순서를 합하고, 귀신은 그 길흉을 합한다. 먼저 천이면 천은 배반이 없고, 후 천이면 천시를 받든다. 하늘 그것 배반 말며, 하물며 사람이겠나? 하물며 귀신이겠나?」
이것은 스스로 밖에서 얻은것은 아니다, 능히 그 성을 다하였을 뿐이다.
4. 子思曰: 「惟天下至誠爲能盡其性,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 其次致曲, 曲能有誠, 誠則形, 形則著, 著則明, 明則動, 動則變, 變則化, 唯天下至誠爲能化.」
聖人知人之性皆善, 可以循之不息而至於聖也, 故制禮以節之, 作樂以和之. 安於和樂, 樂之本也; 動而中禮, 禮之本也. 故在車則聞鸞和之聲, 行步則聞佩玉之音, 無故不廢琴瑟, 視聽言行循禮法而動, 所以教人忘嗜欲而歸性命之道也.
道者, 至誠而不息者也; 至誠而不息則虛, 虛而不息則明, 明而不息則照天地而無遺, 非他也, 此盡性命之道也. 哀哉! 人皆可以及乎此, 莫之止而不爲也, 不亦惑耶?
5. 昔者聖人以之傳於顔子, 顔子得之, 拳拳不失, 不遠而復其心, 三月不違仁.
옛날에(昔者) 성인(聖人)으로(以之) 안자에게(於顔子) 전하고(傳), 안자가(顔子)얻어서(得之), 품고(拳拳) 잃지 않으며(不失), 멀지 않지만(不遠而) 다시 그 마음(其心)이고, 삼개월은(三月) 어긋나지 않은 어질 인이였다(不違仁).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其所以未到於聖人者, 一息耳, 非力不能也, 短命而死故也.
其餘升堂者, 蓋皆傳也.
공자 말씀하시기를(子曰): 회는(回也) 아마(其) 거의 <도에> 가깝지만(庶乎), 자주 비는구나(屢空). 그(其)에게서 아직 성인에(於聖人) 이르지 못한(未到) 것은(所以者), 한 번 쉼이니(一息耳), 힘써(力) 할 수 없음이(不能) 아니다(非也), 명이 짧으며(短命而) 죽기 때문이다(死故也). 그 나머지(其餘) 승당(升堂)은, 대개 모두 전했다.
一氣之所養, 一雨之所膏, 而得之者各有淺深, 不必均也.
한 기운이(一氣之) 기르는 것과(所養), 한 번 비가(一雨之) 윤택하게 하며(所膏, 而) 얻은(得之) 것은(者) 각각 얕고 깊음이(淺深) 있고, 반드시 균일하지 않다.
子路之死也, 石乞、孟黶以戈擊之, 斷纓.
子路曰: 「君子死, 冠不免.」結纓而死.
由非好勇而無懼也, 其心寂然不動故也.
자로가(子路之) 죽었다(死也), 석을과(石乞) 맹염이(孟黶) 창으로(以戈) 찔렀는데(擊之), 갓끈이 끊어졌다(斷纓). 자로가 말하기를: 군자(君子) 죽음은(死), 관을(冠) 벗지 않는다(不免)라 했다. 갓끈을 매며(結纓而) 죽었다.
이유는 용맹을 좋아하며(好勇而) 두려움이 없는(無懼)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이(其心) 숙연하여 부동했기(寂然不動) 때문이다(故也).
曾子之死也, 曰: 「吾何求焉? 吾得正而斃焉斯已矣.」此正性命之言也.
증자가(曾子之) 죽었다(死也), 말하기를(曰): 내가 어찌 구하겠는가? 내가 바름을 얻으며 죽는 것 이것 뿐이다, 이것은(此) 바른 성명(性命)의 말이다.
子思, 仲尼之孫, 得其祖之道, 述〈中庸〉四十七篇以傳於孟軻.
자사는(子思), 중니의(仲尼之) 손자로(孫), 그(其) 할아버지의(祖之) 도를(道) 얻어(得), 중용(中庸) 47편을(四十七篇) 지어서(述以) 맹가에게(於孟軻) 전했다(傳).
軻曰: 「我四十不動心.」
軻之門人達者公孫丑、萬章之徒, 蓋傳之矣. 遭秦滅書, 〈中庸〉之不焚者, 一篇存焉.
맹가가 왈(軻曰): 내가(我) 사십에(四十) 마음이(心) 움직이지 않았다(不動).
맹가의(軻之) 문인 중에(門人) 통달한 사람은(達者) 공손추와(公孫丑) 만장의(萬章之) 무리인데, 대개는 전하였다. 진나라(秦)에 당해 책이 사라짐은, 중용이 타지 않은 것은, 한 편(一篇) 남았다(存焉).
於是此道廢缺, 其教授者, 惟節文章句威儀擊劍之術相師焉. 性命之源, 則吾弗能知其所傳矣.
그래서 이것은 도 폐결이고, 그 교수는, 오직 절 문장 장구 위의 격검의 술로 서로 스승이다.
성명의 근원이면, 나는 능히 알고 그것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다.
6. 道之極於剝也必復, 吾豈復之時耶? 吾自六歲讀書, 但爲詞句之學, 志於道者四年矣. 與人言之, 未嘗有是我者也. 南觀濤江入於越, 而吳郡.陸傪存焉. 與之言之, 陸傪曰: 「子之言, 尼父之心也. 東方如有聖人焉, 不出乎此也; 南方如有聖人焉, 亦不出乎此也. 惟子行之不息而已矣.」於戲! 性命之書雖存, 學者莫能明, 是故皆入於莊、列、老、釋. 不知者謂夫子之徒不足以窮性命之道, 信之者皆是也. 有問於我, 我以吾之所知而傳焉. 遂書於書, 以開誠明之源, 而缺絕廢棄不揚之道幾可以傳於時, 命曰「復性書」, 以理其心, 以傳乎其人. 於戲! 夫子復生. 不廢吾言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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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핵심 개념 구도)
이고는 인간의 마음을 맑은 물(性)과 그것을 흐리는 모래(情)의 관계로 비유했습니다.
개념성품 (性)감정 (情)
| 비유 | 맑은 물 (水), 밝은 불빛 (火) | 흐린 흙탕물 (渾), 불의 연기 (煙) |
| 특징 | 하늘이 내린 본성, 성인의 경지 | 칠정(喜怒哀懼愛惡欲), 성품을 가림 |
| 목표 | 감정이 요동치 않게 하여(情不作) 본성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復性) |
《복성서》는 총 상·중·하 3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리학의 핵심이 되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이고의 수양론
당나라의 학자 이고(李翺)가 지은 《복성서(復性書)》 중(中)편과 하(下)편은 상편의 '성선정악(性善情惡)'론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성을 회복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수양론(방법론)을 묻고 답하는 문답체 형식 및 귀중한 생명의 의미를 다룬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2. 복성서 중(中)편 원문
중편은 질문자와의 문답을 통해 감정을 일으키지 않고 본성으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마음 공부법을 제시합니다.
ㅡ7.
或問曰: 「人之昏也久矣, 將復其性者, 必有漸也, 敢問其方.」
누군가(或) 물어 말하기를(問曰): 사람이(人之) 어두운 것이(昏也) 오래 되었고(久矣), 장차(將) 그 성을(其性) 회복하는 것은(復者), 반드시(必) 차즘 나아감이 있으니(有漸也), 감히(敢) 그 방법을(其方) 묻습니다(問).라고 했다.
曰: 「弗慮弗思, 情則不生. 情旣不生, 乃爲正思. 正思者, 無慮無思也.
《易》曰『天下何思何慮』, 又曰『閑邪存其誠』, 《詩》曰『思無邪』.」
말하기를(曰): 생각하지 않고(弗慮) 생각하지 않으면(弗思), 정이란 것이(情則) 생기지 않는다(不生). 정이(情) 이미(旣) 생기지 않으면(不生), 곧(乃) 생각을(思) 바르게 하게 된다(爲正). 생각을 바르게 하는 것은(正思者), 생각이 없고(無慮) 생각이 없음이다(無思也).
역(易)에 이르기를(曰) 천하가(天下) 무엇을 생각하고(何思) 무엇을 생각하는가(何慮), 또 말하기를(又曰) 사악함을 막아서(閑邪) 그 성을(其誠) 보존하니(存), 시(詩)에 이르기를(曰) 생각에(思) 사악함이 없다(無邪)고 했다.
8. 曰: 「已矣乎?」
말하기를(曰): 그뿐인가요(已矣乎)?」
曰: 「未也. 此齋戒其心者也, 猶未離於靜焉. 有靜必有動, 有動必有靜, 動靜不息, 是乃情也. 《易》曰: 『吉凶悔吝, 生於動者也. 』焉能復其性耶?」
말하기를(曰): 아니다(未也). 이것은(此) 마음을(其心) 재계하는(齋戒) 것이니(者也), 고요함에서(於靜) 떠나지 않는(未離) 것과 같다(猶焉). 고요함이 있으면(有靜) 반드시(必) 움직임이 있고(有動), 움직임이 있으면(有動) 반드시(必) 고요함이 있으니(有靜), 동과 정이(動靜) 그치지 않음이(不息), 이것이 바로(是乃) 정이다(情也).
역(易) 왈(曰): 길흉과(吉凶) 회린(悔吝)은, 움직이는 것에서(於動者) 생겨난다(生也). 어찌(焉) 그 본성으로(其性) 돌아갈 수 있겠는가(能復耶)?
9. 曰: 「如之何?」
曰: 「方靜之時, 知心無思者, 是齋戒也. 知本無有思, 動靜皆離, 寂然不動者, 是至誠也. 〈中庸〉曰『誠則明矣』, 《易》曰『天下之動, 貞夫一者也』.」
왈(曰): 어찌합니까(如之何)?
왈(曰): 바야흐로(方) 고요한 때, 마음은 생각이 없음을 아는 것은, 이것은 재계이다. 본이 없이 생각이 있음을 아는 것은, 동정(動靜) 모두 떠나고, 적연하여 부동한(寂然不動)것은, 이것은 지극한 성이다. 중용 왈(曰) 정성하면 밝다, 역(易)왈 천하의 움직임은(動), 곧은 마음은 무릇 하나다.라고 했다.
10. 問曰: 「不慮不思之時, 物格於外, 情應於內, 如之何而可止也?以情止情, 其可乎?」
曰: 「情者, 性之邪也. 知其爲邪, 邪本無有. 心寂然不動, 邪思自息. 惟性明照, 邪何所生. 如以情止情, 是乃大情也. 情互相止, 其有已乎?《易》曰: 『顏氏之子, 其殆庶幾乎. 有不善未嘗不知, 知之未嘗復行也. 』《易》曰: 『不遠復, 無祇悔, 元吉. 』」
11. 問曰: 「本無有思, 動靜皆離. 然則聲之來也, 其不聞乎?物之形也, 其不見乎?」
물어 말하기를(問曰): 본래(本) 생각함이(有思) 없으면(無), 동과 정이(動靜) 모두(皆) 떠나간다(離). 그렇다면(然則) 소리가(聲之) 오는 것이(來也), 그(其) 듣지 못하는지요(不聞乎)? 물이(物之) 형태를 드러낸 것이(形也), 그가(其) 보지 못하는지요(不見乎)?」
曰: 「不覩不聞, 是非人也. 視聽昭昭而不起於見聞者, 斯可矣. 無不知也, 無弗爲也, 其心寂然, 光照天地, 是誠之明也. 〈大學〉曰: 『致知在格物. 』《易》曰: 『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 非天下之至神, 其孰能與於此. 』」
말하기를(曰): 보지 못하고(不覩) 듣지 못한면(不聞), 그것은(是) 사람이 아니다(非人也). 보고 듣는 것이(視聽) 분명하지만(昭昭而) 보고 듣는 것에서(於見聞者) 일어나지 않으면(不起, 斯) 괜찮다(可矣). 알지 못함이(不知) 없고(無也), 하지 못함이(弗爲) 없어도(無也), 그(其) 마음이(心) 적연하고(寂然), 밝음이(光) 천지를 비추니(照天地), 이것이(是) 성의(誠之) 밝음이다(明也).
대학에(大學) 이르기를(曰): 지에 이르는 것이(致知) 물을 격함에(格物) 있다(在).라고 했다. 역(易)에 이르기를(曰): 변화(易)에는 생각이 없고(無思也), 일부러 함이 없어서(無爲也), 고요하고(寂然) 움직이지 않고도(不動), 감응해서(感而) 마침내(遂) 천하의(天下之) 법칙에(故) 통하니(通), 천하의(天下之) 지극한 신묘함이(至神) 아니라면(非), 그 누가(其孰) 이와 같음에(於此) 참여할 수 있는가(能與).
12. 曰: 「敢問『致知在格物』, 何謂也?」
왈(曰): 감히 물어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은, 무슨 의미인가(何謂也).
曰: 「物者, 萬物也. 格者, 來也·至也.
物至之時, 其心昭昭然明辨焉, 而不應於物者, 是致知也, 是知之至也.
知至故意誠, 意誠故心正, 心正故身修, 身修而家齊, 家齊而國理, 國理而天下平, 此所以能參天地者也.
왈
(曰): 물이란(物者), 만물이다(萬物也). 격이란(格者), 오는 것이고(來也), 이르는 것이다.
물이 이르는 때(物至之時), 그(其) 마음이(心) 밝고(昭昭然) 분명하게 분별하여(明辨焉, 而) 사물에(於物) 응하지 않는다는(不應) 것이니(者), 이것이(是) 치지이고(致知也), 이것이(是) 앎의(知之) 다다름이다(至也).
앎이 다다르기 때문에(知至故) 뜻이 성실하고(意誠), 뜻이 성실하기 때문에(意誠故) 마음이 바르고(心正),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心正故) 몸이 닦이고(身修), 몸이 닦여서(身修而) 집안이 가지런해지고(家齊), 집안이 가지런해져서(家齊而) 나라가 다스려지고(國理), 나라가 다스려져서(國理而) 천하가 평안해지니(天下平), 이것이(此) 천지에(天地) 참여할(參) 수 있다는(能) 것이다(所以-者也).
《易》曰: 『與天地相似故不違, 知周乎萬物而道濟天下故不過, 旁行而不流·樂天知命故不憂, 安土敦乎仁故能愛.
範圍天地之化而不過, 曲成萬物而不流, 通乎晝夜之道而知, 故神無方而易無體. 一陰一陽之謂道. 』此之謂也.」
역(易)에 이르기를(曰): 천지와 더불어(與天地) 서로(相) 닮았기 때문에(似故) 어긋나지 않고(不違), 지혜는(知) 만물에(乎萬物) 두루 미치고(周而) 도는(道) 천하를(天下) 구제하기 때문에(濟故) 지나침이 없고(不過), 두루 행하지만(旁行而) 방탕함이 없어서(不流), 하늘을 즐기고(樂天) 명을 알아서(知命故) 근심하지 않고(不憂), 편안하게 거처하고(安土) 인에 두텁기 때문에(敦乎仁故) 사랑할 수 있다(能愛).
천지의 범위는 화이며 지나침이 없고(不過), 굽혀 만물을 이루며 흐르지 않고(不流), 밤낮을 통하는 도이며 알므로, 신은(神) 방법이 없으며(無方而) 역은(易) 형체가 없으니(無體). 일음 일양의(一陰一陽之) 도라고 한다(謂道). 이것을(此之) 말한다(謂也).
* 이고가 이렇게 해석한 것은 결국 대학을 불교적 인식론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적연부동한 '심心'의 본체에 사물이 다가오면 '심心'이 소소연하게 밝게 빛나서 명백하게 분별하고, 결과적으로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익, 이것을 유가의 성인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가 결국 송유들이 말하는 '도심道心'에 해당하고 중용의 '성誠'에 해당한다. 그러면서도 감응하면 천하의 이치에 통달하고, 물이 다가오면 마음이 소소연하게 명변하는 것이 '명明'이다.
13. 曰: 「生為我說〈中庸〉.」
曰: 「不出乎前矣.」
曰: 「我未明也. 敢問何謂『天命之謂性』?」
曰: 「人生而靜, 天之性也. 性者, 天之命也.」
「『率性之謂道』何謂也?」
曰: 「率, 循也. 循其源而反其性者, 道也. 道也者, 至誠也. 至誠者, 天之道也. 誠者, 定也·不動也.」
「『修道之謂教』何謂也?」
故曰: 「『誠之者, 人之道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修是道而歸其本者明也, 教也者, 則可以教天下矣. 顏子其人也. 『道也者, 不可須臾離也, 可離非道也. 』
說者曰: 『其心不可須臾動焉故也, 動則遠矣, 非道也. 』
變化無方, 未始離於不動故也. 『是故君子戒慎乎其所不覩, 恐懼乎其所不聞, 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慎其獨也. 』
說者曰: 『不覩之覩, 見莫大焉. 不聞之聞, 聞莫甚焉. 其心一動, 是不覩之覩·不聞之聞也. 其復之不遠矣, 故君子慎其獨. 慎其獨者, 守其中也. 』」
14. 問曰: 「昔之註解〈中庸〉者, 與生之言皆不同, 何也?」
曰: 「彼以事解者也, 我以心通者也.」
曰: 「彼亦通於心乎?」
曰: 「吾不知也.」
曰: 「如生之言, 修之一日則可以至於聖人乎?」
曰: 「十年擾之, 一日止之, 而求至焉, 是孟子所謂以杯水而救一車薪之火也. 甚哉!止而不息必誠, 誠而不息則明, 明與誠終歲不違, 則能終身矣. 造次必於是, 顛沛必於是, 則可以希於至矣. 故〈中庸〉曰: 『至誠無息, 不息則久, 久則徵, 徵則悠遠, 悠遠則博厚, 博厚則高明. 博厚所以載物也, 高明所以覆物也, 悠久所以成物也. 博厚配地, 高明配天, 悠久無疆. 如此者, 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為而成. 天地之道, 可一言而盡也. 』」
15. 問曰: 「凡人之性, 猶聖人之性歟?」
曰: 「桀·紂之性, 猶堯·舜之性也. 其所以不睹其性者, 嗜欲好惡之所昏也, 非性之罪也.」
曰: 「為不善者非性耶?」
曰: 「非也, 乃情所為也. 情有善有不善, 而性無不善焉. 孟子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夫水, 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其所以導引之者然也. 人之性皆善, 其不善亦猶是也. 』」
問曰: 「堯·舜豈不有情耶?」
曰: 「聖人至誠而已矣. 堯·舜之舉十六相, 非喜也; 流共工, 放驩兜, 殛鯀, 竄三苗, 非怒也, 中於節而巳矣. 其所以皆中節者, 設教於天下故也.
《易》曰: 『知變化之道者, 其知神之所為乎. 』
〈中庸〉曰: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
《易》曰: 『唯深也, 故能通天下之志; 唯幾也, 故能成天下之務; 唯神也, 故不疾而速·不行而至. 』聖人之謂也.」
16. 問曰: 「人之性猶聖人之性, 嗜欲愛憎之心何因而生也?」
曰: 「情者, 妄也·邪也. 邪與妄, 則無所因矣. 妄情滅息, 本性清明, 周流六虛, 所以謂之能復其性也.
《易》曰: 『乾道變化, 各正性命. 』
《論語》曰: 『朝聞道, 夕死可矣. 』能正性命故也.」
問曰: 「情之所昏, 性即滅矣. 何以謂之猶聖人之性也?」
曰: 「水之性清澈, 其渾之者沙泥也. 方其渾也, 性豈遂無有耶?久而不動, 沙泥自沈, 清明之性, 鑒於天地, 非自外來也. 故其渾也, 性本勿失. 及其復也, 性亦不生. 人之性, 亦猶水之性也.」
17. 問曰: 「人之性本皆善, 而邪情昏焉. 敢問聖人之性, 將復為嗜欲所渾乎?」
曰: 「不復渾矣. 情本邪也·妄也, 邪妄無因, 人不能復. 聖人既復其性矣, 知情之為邪. 邪既為明所覺矣, 覺則無邪, 邪何由生也.
伊尹曰: 『天之道, 以先知覺後知, 先覺覺後覺者也. 予天民之先覺者也, 予將以此道覺此民也, 非予覺之而誰也. 』如將復為嗜欲所渾, 是尚不自覺者也, 而况能覺後人乎?」
18. 曰: 「敢問死何所之耶?」
曰: 「聖人之所明書於策者也.
《易》曰: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精氣為物, 游魂為變, 是故知鬼神之情狀. 』斯盡之矣.
子曰: 『未知生, 焉知死. 』然則原其始而反其終, 則可以盡其生之道. 生之道既盡, 則死之說不學而自通矣. 此非所急也, 子修之不息, 其自知之, 吾不可以章章然言且書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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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복성서 하(下)편 원문
하편은 시간의 덧없음과 인간 본성의 소중함을 역설합니다. 사람은 만물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새나 짐승과 달리 '도덕적 성품'을 온전하게 부여받았기에 존엄한 존재입니다. 저자는 인생의 짦은 순간(少頃)을 방탕하게 마음대로 보내지 말고, 끊임없이 사색하고 행동하여 대도(大道)와 참된 성품을 회복하는 수양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며 글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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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晝而作,夕而休者,凡人也。
作乎非作者也,與萬物皆作;休乎非休者也,與萬物皆休。
吾則不類於凡人,晝無所作,夕無所休。
作非吾作也,作有物;休非吾休也,休有物。
作耶休耶,二者離而不存。予之所存者,終不亡且離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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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되면 일하고 밤이 되면 쉬는 것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다.
일하는 것은 진정으로 일하는 주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물과 더불어 다 같이 일하는 것뿐이다. 쉬는 것 역시 진정으로 쉬는 주체가 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만물과 더불어 다 같이 쉴 뿐이다.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니, 낮이라고 해서 일하는 바가 없고 밤이라고 해서 쉬는 바가 없다.
일하는 것은 내가 주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외물(外物)에 의해 일함이 생겨나는 것이요,
쉬는 것 역시 내가 주도해서 쉬는 것이 아니라 외물에 의해 쉼이 생겨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나 쉬는 것, 이 두 가지는 (외물과) 떨어지면 존재하지 않는다.
내 안에 늘 존재하는 것은 끝내 없어지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
人之於萬物, 一物也.
其所以異於禽獸蟲魚者, 豈非道德之性全乎哉?
受一氣而成形, 一為物而一為人, 得之甚難也.
人에 있어서 만물은 하나의 물건이다.
그가 조류, 수생생물, 곤충 등과 다른 까닭은 어찌 도덕적 본성이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나의 기운을 받아 형상을 이루니, 하나는 물건이 되고 하나는 사람이 되는데, 이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生乎世, 又非深長之年也.
以非深長之年, 行甚難得之身, 而不專專於大道.
肆其心之所為, 則其所以自異於禽獸蟲魚者亡幾矣.
세상에 태어났으나 또 깊고 긴 나이가 아니다. 깊고 길지 않은 나이로써 심히 얻기 어려운 몸을 행하면서도 대도에 오로지 하지 않는다.
그 마음이 하는 바를 방자히 하면 곧 그 금수나 벌레, 물고기와 스스로 다른 바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昏而不思, 其昏也終不明矣.
吾之生二十有九年矣.
思十九年時如朝日也, 思九年時亦如朝日也.
혼미하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평생 깨닫지 못한다.
나의 생은29세이다.
생각하니 19세와 9세 때가 마치 어제 아침 일처럼 생생하다.
人之受命, 其長者不過七十、八十年, 九十年、百年者則稀矣.
當百年之時, 而視乎九年時也, 與吾此日之思於前也, 遠近其能大相懸耶?
인생의 수명이 길어봤자 70, 80이고, 90,100세가 되면 희박한것이다.
당100년의 때면, 9세 때를 보고, 더불어 내 지금 전에 생각한것과 그 원근이 서로 크게 다르겠는가?
其又能遠於朝日之時耶?
然則人之生也, 雖享百年, 若雷電之驚相激也, 若風之飄而旋也, 可知矣.
그것이 또한 아침 해가 뜰 때보다 얼마나 더 멀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의 삶이란 비록 백 년을 누린다 한들, 번개가 깜짝 놀라게 번쩍이는 것과 같고 바람이 휘몰아쳐 소용돌이치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况千百人而無一及百年之年者哉.
故吾之終日志於道德, 猶懼未及也.
彼肆其心之所為者, 獨何人耶?
하물며 천백 명에 백 년을 채우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인가.
고로 나의 하루 종일은 도덕에 뜻이고, 여전히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한다.
저 방탕은 그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자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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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4. 중·하편의 가치와 성리학에 끼친 영향
이고의 《복성서》 중편에 나오는 '격물치지' 해석은 훗날 주희(주자)나 왕수인(왕양명)의 해석과 사뭇 다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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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