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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리 공소 - 강릉 지역에 처음 신앙의 씨앗이 싹튼 곳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어단리 417-5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금평로 514
병인 박해 무렵 강원도 영동지역에 신자들이 거주했음은 여러 종류의 기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경향잡지1921년 9월호에 “영동 교우로 말하면 50~60년 전 병인박해때에 전라, 충청, 경기도 교우들이 피난하기 위해 영동으로 넘어와 근근이 사는 교우들이다.”라고 했고, 드브레(Devred)주교가 1923년 가을에 이 지역을 방문한 뒤 “병인박해 이후에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보고서도 있다. 그리고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는 “구한말 19세기 말경에 구정면 금광리와 내곡동 등지에 천주교인들이 이주하여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은밀하게 전교를 하고 있었다”라고 기록도 있다.
이는 현존하고 있는 금광리 공소 현판에 ‘1887년 창립’이라고 적혀 있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신자들이 강릉에 이주한 것은 오히려 병인박해보다 훨씬 이전이었을 것이다. 박해를 피해 이주한 신자들은 깊은 산속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옹기 굽는 일이나 농사를 지으면서 교우촌을 형성하였고, 이웃에게 신앙을 전파하며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교우들의 증언도 있다. 금광리 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봉사한 김중철(필립보) 씨에 의하면 그의 증조부, 증조모가 교우들과 함께 박해를 피해 경주에서 금광리로 왔다고 하며, 이영녀 씨도 그의 시아버지인 조중서(趙仲署) 씨가 소년 시절에 경기도 여주에서 금광리로 피난해 왔다고 한다. 또한 현북면 명지리 공소의 김정옥 씨도 그의 증조부인 김 요한이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금광리에 정착했다고 한다(노암동 본당 13년사).
금광리 공소 초기에는 원산의 백응만 신부가 배를 타고 와서 전교했고, 그 후 안변과 원산 본당의 주 신부, 표 신부도 배를 타고 와서 전교했다고 한다.
해가 지나면서 강원도 북쪽 양양에도 본당이 생겼다. 하지만 금광리 공소를 비롯한 영동 지방 강릉 이남의 공소들은 신자 수가 많았지만 소속인 양양 본당(1921년 4월 17일 설립)과의 거리가 멀어 불편하였다. 그리하여 1921년 가을 판공 때 금광리 신자들은 최문식 양양 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했다. 이에 최문식 신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락하여 보좌 이철연 신부를 그해 12월에 그곳으로 보내 금광리 본당(주문진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향후 신자 수의 증가 및 발전 가능성을 고려하여 1923년 11월 23일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여 금광리 본당은 이 이후 지금까지 다시 공소가 되었다. 현재 금광리 공소는 노암동 본당 소속의 공소이다.
금광리 공소에서 약 6km 떨어진 노암리 본당은 금광리 공소가 설립된 지 꼭 100년 만인 1987년에 축성된 본당으로 노암동 신자들과 공소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15가구 42여 명의 신자들이 함께 월 1회 공소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공소 보존 관리에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 공소 건물은 1949년에 본래 있던 공소터에서 지금의 길가 쪽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공소 바로 옆에 김중철(필립보) 공소회장의 집이 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금광리 공소에 도착. 공소라기보다는 가정집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작고 좁다. 그리고 마을도 그리 잘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런 곳이 영동 중남부 지역 신앙의 요람이라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맵시 있는 철제 대문 옆에 공소의 연혁비가 커다랗게 서 있어 읽어본 후에야 이 공소가 유서가 깊은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연혁비에는 병인양요 때 박해를 받던 서울, 경기, 경상도 지역에서 신자들이 모여 교우촌을 형성했고 공소 설립이 1887년이고 본당 승격이 1921년이다. 하지만 2년 후 주문진으로 이전하고 다시 공소로 격하되었고, 그후 이곳으로 터전을 옮겼다.
성전 앞문 위에는 1887년 창립이라는 글씨가 분명하게 남았다. 성전 내부는 벽을 보는 옛날식 제대가 오늘날 교우들을 향하는 제대로 바꾸었고, 제대 뒷벽에는 십자고상 좌우에 성모님과 예수님 액자를 모셨다. 그리고 뒷벽 좌우에 고해소와 제의실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성전 좌우 벽에는 전통식 격자형 창문이 있고 창문 위로는 역시 액자형 십자처가 배치되고 천장은 방바닥 장판 무늬처럼 되어 있다. 제대 앞 오른쪽 벽 앞에 성모상이 있다.
성전을 나와 살펴본 공소 경내는 성당 건물 뒤편의 성모상과 담밑을 따라 조성된 화단 이외에는 별다른 시설이 없다.
다들 떠난 마을에 이나마 공소를 유지하고 가꾸어나가는 공소 교우들의 정성과 신앙심에 경의를 표하며 더 북쪽으로 강릉을 향한다. 다음은 임당동 성당이다.
임당동 성당 - 금광리 본당을 모태로 설립된 영동지역 신앙의 중심지 |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159
강원도 강릉시 임영로 148
공소 시대와 본당의 설립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형성된 때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다시 충청 · 전라 · 경기도의 신자들이 산간 지대로 피신해 오면서 이곳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1868년 강릉 굴아위에 살았던 심능석 스테파노와 이유일 안토이노가 잡혀 서울로 끌려가 순교한 사실은 당시 영동 지역에 교우촌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강력히 말해준다. 현재 심 스테파노와 이 안토니오는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시복을 추진하고 있다.
박해 시대가 끝난 1882-1883년에 강릉 지역에는 삼정평 공소(강릉군 구정면 여찬리), 새울 공소(강릉군 구정면 어단리)가 설립되었고, 1887년에는 금광리 공소(강릉군 구정면 금광리)가 설립되는 등 병인박해 이후 꾸준히 신자들이 꾸준히 늘어났다.
당시 영동 지역은 1893년 이후 북한 덕원 교구에 속한 함경남도 안변의 내평 본당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내평 본당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신자수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당의 설립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 결과 서울교구에서는 1921년 5월에 양양 본당을 설립하고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양양 본당의 신설 당시, 교구에서는 이미 영동 남부 지역에 또 하나의 본당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에 최문식 신부의 보좌로 임명된 이철연(李喆淵) 프란치스코 신부는 1921년 12월 강릉군 구정면 금광리에 본당(주문진 본당과 임당동 본당의 전신)을 설립하고 강릉 지역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금광리는 거주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발전 가능성도 적어, 이철연 신부는 1923년 말에 주문진(강릉군 신리면 교항리 133번지)에 새 부지를 매입한 뒤,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주문진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하지만 주문진에서의 전교는 활발하지 않았고, 또 지역적으로도 주문진보다는 강릉 지역의 발전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9년 1월 주문진 성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2대 주임 김인상(金寅相) 야고보 신부는 1931년 6월 당시 강릉읍 임정(林町)에 12칸짜리 가옥을 매입하고 본당의 이전을 준비하였다.
본당 이전 후의 변모와 발전
193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본당은 점차 본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던 가운데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 후 본당에서는 본당의 내실화는 물론, 사회 복지 · 교육 사업을 통해 지역 속의 본당 공동체를 구현했는데, 1946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초청하여 본당 사목의 내실화를 기하는 한편, 성심보육원과 성심공민학교(1957년 폐교)를 설립하여 고아 보육과 불우한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6 25 전쟁 중임에도 1951년에는 1,128평의 대지를 매입한 뒤 종전 후인 1955년 10월에 성당을 신축하였고, 1956년 12월에는 ‘증거자들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단하여 레지오 마리애 활동도 시작하였다. 이어 1962년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본당 사목을 맡았고, 1964년 3월에는 갈바리아 의원을 개원하여 의료 봉사에도 힘을 쏟았다. 또 1967년에는 소화유치원을 개원하여 유아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68년에는 강릉시 내곡동과 강릉시 성산면 위촌리에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 강릉 본당은 외형적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성숙해 갔다. 그리하여 1973년 3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여 신자와 지역 주민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고, 4월부터는 울뜨레야 · 효성회 · 안나회 · 빈첸시오회 등 여러 신심 단체가 설립되어 개인 및 가정 성화의 기초를 확립해 갔다. 그런 가운데 본당의 신자수가 증가하면서, 1974년 11월에는 옥천동 본당을 분가시켰고, 아울러 본당 명칭도 강릉 본당에서 임당동 본당으로 바꾸었다.
1981년으로 설립 60주년을 맞은 임당동 본당은, 11월에는 신자 재교육을 위한 교육관을 건립하였고, 1987년 10월에는 노암동 본당을 분리하였다. 또 1991년 4월에는 성당 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청동 십자가, 제대, 14처,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2년에 걸쳐 갖추었으며, 1992년 11월에는 본당 설립 70주년 기념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1998년 11월에는 노후화된 사제관, 수녀원, 유치원을 신 · 증축하여 본당의 면모를 일신하였으며, 2001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80주년을 맞아 사진전 등 경축 행사를 거행하였고, 12월에는 춘천교구 대희년 전대사 지정 순례지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2017년 성당 옆 건물을 매입해 유물전시관, 역사전시관, 수장고, 조망대, 사제관, 사무실 등을 갖춘 건물을 신축했다. 특히 2019년 1월 30일에 축복식을 거행한 임당동 근대문화유산 유물전시관 은 본당 역사와 영동 지역 교회 사료들을 모아 후손들의 신앙 교육장이 되고 있다.
금광리 공소를 출발하여 약 20분 만에 임당동 성당 입구에 도착. 넓직한 정문에 비해 성전 건물이 바싹 다가 있어 성당 경내가 매우 좁음을 말해준다. 정문 왼쪽에는 성전이, 오른쪽에는 큼직한 가톨릭 역사박물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성전 앞에는 성사(聖事) 동산이라고 이름하는 길다란 정원을 조성하여 성당과 시가지를 구획하는 울타리를 겸하고 있다. 7개의 표지팻말로 7성사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성전
임당동 성당은 6 25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1955년에 완공되었다고 믿기엔 너무도 당당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뾰족한 종탑과 지붕 장식, 첨두형 아치 창호, 부축벽을 이용한 입면 구성 및 내부의 정교한 몰딩 구성 등 의장 기법에서도 1950년대 강원도 지역 성당 건축의 전형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따라서 보존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영동 지역 신앙의 중심지로, 그리고 영동 지역 많은 본당의 모(母)본당이라는 역사성도 겸비하고 있어 2010년 2월 19일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성전 건물 하단에는 몇 분의 석상과 안내판이 있다. 간 토마스 신부, 이문근 요한 신부, 그리고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이다.
간 토마스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1년 6 25 전쟁 중에 본당 12대 주임으로 재임하면서 성당 부지를 확보하여 성전 건립을 준비하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1954년 11월에 선종했다. 성전은 후임 표 파트리치오 신부가 완료하고 1955년 10월 구인란 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성품이 엄격하여 미사시간에 조금만 늦어도 문을 잠궜다고 한다. 그런데도 교우들은 담을 넘어왔는데 토마스 신부는 “도둑놈 잡아라”고 소리쳤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으며 선종에 이르러 고아들과 함께 살 테니 고아원 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유언대로 지금 성심보육원(현 갈바리아 의원이 자리한 곳)에 묻었다.
이문근 요한 신부는 임당동 성당 출신 두 번째 사제로 한국 천주교 교회 음악의 개척자이시다. 성심대신학교 등에서 수학하고 1949년 로마로 유학하기까지 명동성당(明洞聖堂) 보좌신부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가톨릭합창단의 반주자로 활동했고, 1945년부터 대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는 한편 1948년 자작곡 5곡을 포함한 『가톨릭성가집』을 출판했다. 1952년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로 석사학위를,1955년 작곡과 디플롬(학위증)을 받았다. 1955년 귀국해 1964년까지 가톨릭신학대 교수로 있으면서 1957년 『정선 가톨릭성가집』을 출판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가톨릭신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지금 사용학 있는 성가에 이문근 신부의 편곡, 작곡이 다수 있다.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는 강원도 양양 태생으로 1939년 명동성당에서 사제 서품 후 춘천교구 설정 후 첫 한국인 사제가 되었다. 1942년 평양교구에 자원하여 1943년 6월 의주 본당 주임이 되었다. 1945년 북한에서 공산정권이 수립되어 의주 보안서에서 총회장 박덕현 마태오에게 김교명 신부에 대한 정보를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자 총회장은 김교명 신부에게 월남할 것을 권유했으나 신부는 신자들을 남겨놓고 혼자 갈 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결국 총회장과 많은 신자들은 월남하고 신부는 남아서 성당 단체를 지도하면서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49년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가 납치되고 이듬해 전쟁이 발발하여 정치보위부원에 납치되어 신의주 보안서로 이송되었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지 못한다.
김대건 신부상을 바라보며 옆문으로 성전에 들어갔다. 성당내부에 들어서면 순백색의 단순한 천장과 벽면, 주황색 장의자와 바닥재에 변화를 주려는 듯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눈부시게 조성되어 있다. 유리화를 통해 들어오는 햇빛으로 성전 전체가 화사하고 따뜻한 느낌을 준다. ‘화려하면서도 사치하지 않다’는 화이불사(華而不奢)란 이런 것을 말하는가 싶다.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이 수녀님을 만난 촬영 장소였다고 한다.
제대 위의 천정은 궁륭형이며 제대 후벽에는 유리화가 좌우에 2개씩 조성이 되어 있고 제대 좌우에는 예수성심상과 성모상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벽면에 유리화 사이에 조그만 고뇌의 인물상인 십사처가 지나간다. 제대 뒤 감실 아래쪽에는 김대건 신부 유해 성광이 안치되어 있다.
성전을 나와 이제 역사박물관을 갈 차례다. 역사관은 성당 옆문 바로 맞은편에 있다. 역사관 건물은 2017년 성당 옆 건물을 매입해 유물전시실, 역사전시실, 사제관, 사무실 등을 갖춘 건물이다.
역사관 건물 오른쪽 입구엔 착한 목자 예수님상이 있다. 이 상은 예수님께서 어린이를 안고 축복해주셨다는 성경 말씀(마르코 16,10)에 따라 2010년 본당 설립 89주년을 기념 감사미사 때 봉헌했다. 제작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김봉자 수녀이다.
그리고 역사관 건물 왼쪽 언덕에는 100주년 성모님 상이 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는 말씀에 따라 성당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교우들이 모금으로 제작했는데 제작자는 역시 김봉자 수녀이다. 앞에 촛불봉헌대가 있다.
역사관 입구는 사무실이 있고 옆에 쉼터 셔튼홀이 있다. 그리고 유리창에 층별 안내가 있다. 1층은 사무실과 성물방, 2층은 유물 전시실, 3층은 역사 전시실, 4층은 사제관이다.
유물 전시실
2017년 지어진 가톨릭 역사박물관은 연면적 약 820㎡에 4층 규모로 유물전시실, 역사전시실, 수장고, 조망대, 사제관, 사무실 등을 갖췄다. 전시관에는 전례 용품과 서적, 문서 등 사료 137점을 비치했으며, 보유 유물도 370여 점에 이른다. 영동 지역의천주교 유입의 역사적 흐름과 교우촌 형성, 본당 발전사 등도 함께 볼 수 있으며, 사제 제의와 성작 등 본당이 보유하던 유물과 신자들에게서 새로 기증받은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역사 전시실
역사전시실은 강릉지역 천주교 유입사, 그리고 본당의 역사를 정리하여 주로 판넬로 전시하고 있다.
역사 전시실 사진 및 판넬 자료들
역사전시실을 마지막으로 성당 순례를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소화유치원과 요한 바오로2세 교육관을 지지났다. . 소화유치원 건물은 1968년부터 사용해오던 유치원 건물이 낡아 다시 지은 건물인데 지상 3층 규모로 새로 지어진 이 건물에는 사제관과 수녀원, 유치원이 함께 들어있다.
오후 4시 반 경 강릉도호부 관아로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