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0. 한국 大佛의 원류
大佛만큼 큰 '신심' 상징, 불교전파로엔 꼭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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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부처님 자리> |
사진설명: 3~4세기 초 조성된 높이 55m 부처님(바미얀 서대불)이 계셨던 바미얀 석굴. 탈레반이 2001년 3월 파괴했으나 세계 각국이 복원을 위해 노력 중이다. |
한국불교계는 몇 년 전 ‘대불(大佛)문제’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적이 있다.
주변 환경과 조화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대불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됐는데, 마치 대불 자체가 문제인 것처럼 잘못 오해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대불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 있는 국가엔 반드시 대불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대불이 적지 않다. 10세기경 조성된 중원 미륵리석불입상(높이 10.6m), 근.현대에 만들어진 법주사 청동대불.설악산 신흥사 대불.천안 각원사 대불 등이 대표적이다.
막상 대불이라고 말하지만 대불의 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장육상 보다 큰 불상을 대불이라 부르기에, 먼저 장육상(丈六像)에 대해 알 필요가 있는데, 불신(佛身) 길이가 1장6척(16척. 1장=10척. 1척=30.3cm. 4.848m)인 불상을 장육상이라 한다.
부처님 생존 당시 보통 사람의 신장이 8척 정도였는데, 부처님은 사람보다 배나 커16척 크기의 불상을 만들었다 한다.
좌상(坐像)인 경우엔 7~8척 정도면 장육상으로 본다. 바로 이 장육상 보다 큰 불상을 대불로 보는데, 장육불의 배(32척. 9.69m)나 10배인 160여척(약 48m) 불상, 혹은 8장(80척. 약24m) 등 크기가 다양하다.
불상은 물론 인도 마투라나 파키스탄 간다라 지방에서 태어났지만, 아프가니스탄 바미얀대불을 흔히 거대한 불상의 기원으로 간주한다.
바미얀대불에 관한 기록은 당나라 현장스님이 남긴 〈대당서역기〉에 보인다. 〈대당서역기〉 권1 ‘범연나국(梵衍那國)’편의 내용은 이렇다.
“범연나국은 동서로 2000여 리이고 남북으로 300여 리에 달하며 설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부처님에 대한 두터운 믿음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돈독하다. 왕성 동북쪽 산 후미진 곳에 돌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입상이 있다.
높이는 140~150척이며 금색이 찬란하게 빛나고 온갖 보배로 장식돼 있다. 동쪽에 가람이 있는데 이 나라의 선왕이 세운 것이다. 가람의 동쪽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부처님의 입상이 있는데 높이가 100여 척에 달한다. 몸을 나누어 각기 따로 주조한 뒤에 그것을 모두 합하여 완성한 것이다.
성의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가람에는 부처님의 열반와상(涅槃臥像)이 있다. 길이는 1000여 척에 달한다. 왕이 매번 이 곳에서 무차대회를 여는데 위로는 자신의 처자로부터 아래로는 나라의 귀중한 보물에 이르기까지 창고를 완전히 열고 베풀며, 자기 몸을 베풀기도 한다.”
바미얀 부처님이 대불의 기원에 해당
바미얀에서 시작된 대불 조성은 다르마로드(dharma road)를 따라 점점 동진(東進)하게 된다. 서역북도의 쿠차, 서역남도의 호탄에도 각각 대불이 있었다는 기록이 〈대당서역기〉 등에 남아있다. 서역 남.북도를 따라 동진한 대불조성은 돈황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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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천제산 석굴 부처님. 무위 동남쪽 60km 지점에 위치한 천제산 석굴에 있는 높이 28m의 부처님. 천제산 석굴엔 13개의 굴이 있었으나, 황양호 공사로 수몰되고 대불만 남아있다. |
당나라 시기에 조성된, 돈황 제130굴에 봉안된 미륵대불은 대불이 얼마나 큰 위용을 가질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대불 조성은 하서주랑을 따라 계속된다. 무위 동남쪽 60km 지점에 있는 천제산 석굴에도 28m 높이의 큰 부처님이 참배객을 맞이하고 있다.
한 때 천제산 석굴엔 13개의 굴이 있었다. 천제산 석굴 앞을 흐르는 강물을 막아 황양호를 만든다고, 석굴 속에 있던 모든 불상과 벽화들은 감숙성박물관으로 옮겨, 현존하는 석굴은 1개뿐이다.
높이 28m의 부처님이 그곳에 있었기에, 박물관으로 옮길 수 없었던 것이다. 큰 부처님을 중심으로 제일 앞에 신장, 가운데 2위 부처님, 맨 뒤 쪽에 가섭존자.아난존자가 각각 시립한 모습이다.
2002년 10월1일 천제산 석굴에 가보니, 저수지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큰 방수벽이 석굴 앞에 있었다. 언제까지 물을 방어할 수 있을지, 대불 보존상 상당히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대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중국 서북부 교통의 요지인 난주 병령사에도 대불이 있다. 병령사 석굴은 4세기 말부터 개착되기 시작했으며, 183개의 석굴이 현존한다.
석굴 사이의 가파른 바위틈엔 무수한 불보살 조각이 남아있다. 병령사 계곡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역도원이 지은 〈수경주(水經注)〉에 - 북위(北魏)때 학자 역도원이 저술한 중국의 하천지(河川誌) - 남아있다.
중국 당(唐)나라 도세(道世)스님이 지은 〈법원주림〉 권53에도 “병령사 계곡에 석문(石門)이 있는데, 이는 서진(西晉. 265~316) 태시(泰始. 265~274) 연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있다. 물론 〈법원주림〉이 편찬된 것은 668년, 태시와는 약 400년의 차이가 있다. 이를 통해 병령사 석굴이 적어도 서진(西晉)시대부터 개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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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석굴 봉선사동> |
사진설명: 사진은 당나라때 조성된, 용문석굴의 중심인 봉선사동. 가운데 노사나불의 얼굴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조각한 것이라 한다. |
병령사 석굴 가운데 가장 초기의 것은 서진(西秦. 385~431)시대 만들어졌다.
사마의 중달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西晉. 265~316)이 아니라, 선비족 일족인 걸복(乞伏)씨가 세운 5호16국 중 한 나라를 말한다. 병령사 석굴 169굴 바로 옆 171감에 그 유명한 병령사 대불이 봉안돼 있다.
높이 27m. 상반신은 절벽에 새기고, 하반신은 소조(塑造)한 부처님. 동서 문화교류가 한창 꽃피던 당나라 초기에 조성된 부처님인데, 천 수백 년의 세월이 준 무게가 어깨에 그대로 남아있는 듯, 훼손이 심하다.
세월의 무게가 어깨에 앉아 있지만, 그래도 부처님은 부처님이었다. 감은 듯한 눈, 의자에 앉은 자세, 무릎에 놓인 두 손, 아직도 선명한 가슴의 두 젖꼭지, 깔고 앉은 옷자락 등 모든 것이 생생하다. 그리고 너무도 당당했다.
바미얀에서 시작된 대불은 쿠차.호탄.돈황.천제산.병령사.맥적산을 지나 낙양의 용문석굴에도 조성됐다. 낙양시 남쪽 13km 지점, 북쪽으로 흐르는 이수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용문산과 동쪽의 향산 암벽 위, 1km 거리에 걸쳐 조성된 용문석굴은 중국 3대 석굴 가운데 한 곳.
북위 효문제(471~499)가 낙양으로 천도한 493년 이후부터 개착되기 시작한 용문석굴은 선무제 때 본격적으로 조영됐다. 이후 동위, 서위, 북제, 수, 당, 송 등 여러 왕조를 거치며 끊임없이 개착됐다.
자료에 의하면 현존하는 굴감(窟龕)이 2345개, 비각제기(碑刻題記)가 2800여 편, 불탑이 40여 기, 조상(彫像)이 14만여 위(位)나 된다. 14만여 위의 조상(彫像) 가운데 북위 시대의 것이 30%, 수.당대의 것이 60%, 기타가 10%를 각각 차지한다.
2002년 10월8일 용문석굴의 여러 굴들을 보고 봉선사동에 올랐다. 거대한 노사나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도 붐볐다. ‘노사나’는 “밝은 빛이 태양처럼 널리 세계를 비춘다”는 광명보조(光明普照)라는 뜻. 속설에 따르면 노사나불은 당나라의 실력자 측천무후(624~705)를 모델로 조성됐다고 한다.
“석굴엔 반드시 존재, 없으면 허전”
낙양으로 천도하기 이전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현 대동) 부근에 있는 운강석굴에도 대불은 조성됐다.
주지하다시피 운강석굴은 용문석굴과 함께 북위시대를 대표하는 석굴. 당시 사람들은 운강을 북석굴사, 용문을 남석굴사로 불렀다. 운강석굴은 현재 산서성 대동시 서쪽 16km 지점에 위치한 무주산(武州山) 남쪽 산기슭, 동서 약 1km거리에 걸쳐 조성돼 있다. 현존 주요 석굴은 53개(번호가 붙은 것은 43개), 총1100여 개의 작은 감실로 이뤄져 있다.
석굴 안엔 크고 작은 조상(彫像) 5만1000여 위(位)가 봉안돼 있으며, 석조(石彫) 면적만도 1800㎡나 된다. 운강석굴은 편의상 동구(東區. 1~4굴), 중구(中區. 5~13굴), 서구(西區. 14~53굴)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개착 시기는 문성제 화평 초년(460)설이 유력하다.
웅장한 운강석굴 가운데 초기에 만들어진 석굴은 ‘16굴~20굴’(소위 담요 5굴)이다. 이 석굴 안에는 거대한 다섯 위의 불상들이 안치돼 있는데, 어떤 불상은 서있고, 어떤 불상은 앉아 있다. 큰 것은 70척(약 21m)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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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바미얀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대불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서도 조성됐다. 사진은 법주사 대불. |
‘담요 5굴’의 불상들은 “황제는 현세의 여래”라고 한 법과스님의 사상에 따라 조성된, 북위의 다섯 선조(도무제 명원제 태무제 경목제 문성제)를 상징한다고 한다. 이처럼 석굴이 있는 곳에, 아니 불교유적이 집중된 곳엔 반드시 대불이 조성됐다. 대불이 없으면 무언가 허전함을 느낀 듯 당시 사람들은 대불을 조성해 신심을 고취하곤 했던 것이다.
372년 고구려에 처음으로 공인된 불교는 이후 한반도 곳곳에 많은 불적(佛蹟)을 남겼다. 불적이 있는 곳엔 반드시 대불이 있는데, 중원 미륵리사지 석불입상이 현존하는 대표적인 대불에 속한다.
근.현대에도 조성됐는데 법주사 미륵대불, 설악산 신흥사 청동대불, 천안 각원사 대불 등이 대표적이다. 대불은 당대 사람들의 신심(信心)의 상징이었는데, 최근 들어 약간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프가니스탄.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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