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응대군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8남 2녀 중 막내아들이며 전주이씨 영응대군파의 파시조이다.
1441년 영흥대군(永興大君)으로 봉해졌으며,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으로, 1447년에 다시 영응대군(永膺大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영응대군은 세종이 38세, 소헌왕후가 40세 때 낳은 늦둥이였는데 세종은 막내 아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실록에도 대놓고 세종이 영응대군을 편애했다는 기록이나 영응대군의 집이 지나치게 화려하다고 비판하는 기록등이 자주 등장한다.
또한 영응대군의 묘지문에 따르면 다른 왕자들과 달리 영응대군만 장성할 때까지 세종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응대군은 대마도 정벌 때 공을 세운 이순몽의 집으로 피접(避接, 아픈 사람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요양함)을 자주 나갔는데 이순몽 역시 영응대군을 지극히 사랑했다고 한다.
세종의 사랑은 이순몽에게까지 미쳐 주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순몽을 고관대작으로 삼기도 했다.
세종이 영응대군의 집에서 승하한 뒤 뒤를 이은 문종과 세조도 막내동생을 지극히 사랑해 내탕고의 진귀한 보물을 영응대군에게 내려주었다.
하지만 영응대군은 천성이 검소해 재산을 잘 쓰지 않고 사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응대군의 혼인 과정은 조금 특이한데, 세종은 송복원(宋復元)의 딸과 영응대군을 혼인시켰다.
그러나 송씨가 병이 있어서 세종이 명하여 송씨와 이혼시키고 정충경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게 하였다.
문제는 정씨의 아버지 정충경은 이미 고인이 된 상태였고,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여읜 자식은 혼인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당시 왕실 관행상 왕자의 아내가 될 수는 없는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영응대군을 강제로 이혼시키면서까지 정씨와의 혼인을 강요하였다.
결국 세종은 영응대군을 재혼시킨 후 말년에 영응대군의 집으로 피접을 나갔다가 그 곳에서 승하했다.
그러나 영응대군은 첫 부인인 송씨를 사랑하였는지, 세종이 죽자 다시 송씨와 만나기 시작했다.
이 때 도움을 준 인물이 영응대군의 둘째 형 수양대군이었는데, 수양대군은 동생을 딱하게 여겨 영응대군이 송씨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결국 영응대군은 송씨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면서 정씨와 이혼하고 송씨와 다시 재결합할 수 있었다.
영응대군은 이후로는 크게 정치에 관여하는 일 없이 둘째형 세조의 비호를 받으며 무탈하게 살다가 34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자택에서 사망한다.
세조는 영응대군을 지극히 아껴 그가 죽자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경기도 시흥시에 묘가 있다.
오늘 공부는 영응대군 묘소의 혈장으로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기룡혈 2) 장지중요혈 3)평면혈
1번과 2번은 같은 이론의 기룡혈이라 할 것이다.
처음 공부하던 시절에 기룡이라 생각했는데 그때는 다른 이론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허나 구성혈법을 공부하니 조금 더 세밀한 분석이 가능하고 혈장에 대한 확신이 명확해진다.
平面(평면)
平面穴一曰戊己土二曰川字水三曰橫杖木四曰開花金五曰楊柳火
평면혈일왈무기토이왈천자수삼왈횡장목사왈개화금오왈양류화
也
야
◉평면의 혈;무기토, 천자수, 횡장목, 개화금, 양류화.
最上十字土堆曰戊己 戊己下一字橫文曰橫杖杖有文如川曰川字, 川字下開窩曰開
최상십자토퇴왈무기 무기하일자횡문왈횡장장유문여천왈천자, 천자하개와왈개
花, 花下餘氣逆抱曰楊柳枝也
화, 화하여기역포왈양류지야
◉평면;최상 십자상에 토퇴를 무기라하고 무기아래 일자횡문을 횡장이라하며 횡장아래 무늬가 川字와 같으면 천자라하며 천자아래 와가 있으면 개화라하고 개화아래 여기가 역포하였으면 양류지라한다.
1) 무기 2) 횡장 3) 천자 3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곳입니다.
4) 개화
5) 양류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