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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회개
제목 : 멸망을 피하는 길
성경 : 눅 13;1-9
찬송 : 254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00301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눅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눅 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눅 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지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코로나19’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중국은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나라도 31번 확진 환자 발생 이후 급격하게 환자가 늘어나 2000여명을 넘어섰고, 사망자도 16명이나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환자가 늘어나고 사망자가 발생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 재앙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엄중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대부분이 이 재앙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코로나19’가 어디에서 발생했습니까?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나라는 중국 사람들이 입국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두 번째로 많은 환자가 발생하였다고 중국에서는 한국 사람의 입국을 차단하고 격리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우리 교민들이 아파트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역지사지가 안 된 것 아닙니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오늘 봉독해 드린 말씀을 중심으로 “멸망을 피하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 민족은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정했고, 백성은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의 지배 아래,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자신들의 유익만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은 천지의 기상만 분간할 것이 아니라, 시대를 분별해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돌아올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진실한 청지기처럼 항상 깨어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회개의 필요를 강조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가지 이야기는 동일한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는데, 앞의 두 사건은 모두 빌라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AD26년 디베료 황제 때에 유다와 사마리아를 포함한 유다의 총독으로 본디오 빌라도가 10년 간 재임했습니다. 빌라도는 하급 사령관인 군사 호민관으로 군대에 들어가, 능력을 인정받고 30세가 되기 전에 유대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을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은 그의 포학성과 잔인성을 잘 드러냅니다.
죽임당한 갈릴리 사람들
✔눅 13: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사건이 나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빌라도는 AD26부터 10년 간 유대 총독으로 재임하였습니다. 그는 유대 민족을 가혹하고 무자비하게 대했고, 산헤드린 공의회가 소유했던 사형집행 선고권을 로마 총독의 권리로 옮겨 언제든지 자기 뜻대로 집행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AD31년 봄 유월절에 이스라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왔을 때, 메시아를 대망하던 갈릴리의 민중 사이에서 폭동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빌라도는 잔혹한 방법으로 유대인 다수를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살육한 폭도들의 피를 성전으로 가지고 가서 제물의 피에 섞는 일까지 저질렀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빌라도에 대해 큰 분노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당시에 짐승을 도살해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는 예루살렘 성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연중 일상적으로 바쳐지는 희생 제의는 주로 유대 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행해졌습니다. 이 사건처럼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일은 일 년에 세 번, 절기 때에만 일어났습니다(눅2:41-51).
출애굽기 13장에 따르면 유월절에 가족의 수를 따라 각자가 어린 양을 도살해야 했으므로 갈릴리에서 온 유대인들은 짐승을 가지고 성전에 가서 직접 도살해야 했습니다. 이때 유대 총독 빌라도가 군대를 성전에 보내서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피를 제물의 피와 섞은 것입니다.
빌라도가 왜 이렇게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갈릴리에서는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저항 운동 세력이 강했고, 명절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모였기 때문에 로마군의 감시와 통제가 엄격해진 상태였습니다.
빌라도의 포악한 성격은 AD35년에 빌라도가 그리심 산으로 제사 드리러 올라가던 사마리아인들을 살육했다는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왜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했는지 아무런 설명도 없습니다. 단지 ‘두어 사람’(원문에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그 일을 아뢰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분명 제자들은 아니고 외부 인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왜 이 중대한 사건을 예수님께 아뢰었을까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런 불행의 원인이 갈릴리 사람들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라’였습니다.
✔눅 13: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아니라’(우키)는 평서문을 부정할 때 사용되는 부정어 ‘우’가 강화된 형태로, 더욱 강하게 부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특히 문장 서두에 사용됨으로써 더욱더 강한 부정을 의미하면서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예수님은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빌라도에게 학살을 당한 갈릴리 인들이 죄가 많아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외동딸 레오포르딘의 시체가 세느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에게서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거기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 때문에 살 의욕을 잃었다는 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위고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후일 공무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일해 프랑스 교육부장관까지 지냈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의 문학도 더욱 깊어갔습니다. 그가 바로 세계적 문호 빅토르 위고입니다. 한 사람의 회개는 자신과 세계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부흥사 무디는 “회개란 꽃병 속에 넣은 주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가리가 좁은 꽃병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습니다. 돈 명예 지위 권력 구습과 옛 생활 등을 고집하면 회개는 어렵습니다. 주먹손을 비운 ‘열린 손’이 회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깨닫습니까? 코로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죄를 지어서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의 대답은 ‘아니라’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예수님은 회중들이 알고 있는 중대한 사건인 실로암 망대의 붕괴 사건을 언급하셨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붕괴되어 몇 명이 희생을 당했습니까? 열여덟 명이 치어 죽었습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내 동남부에 있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만든 인공 저수장입니다.
왕하 20:20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업적과 저수지와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망대’는 실로암 부근에 남아 있는 옛 다윗 성벽의 일부로, 감시 또는 방어용으로 사용되었던 구조물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망대가 빌라도가 성전의 자금을 유용해 만들었던 수로의 일부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 망대가 무너졌습니다. 이 일은 유대인의 관점으로 보면 이교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정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 사건으로 치어 죽은 열여덟 명이 다른 예루살렘 시민들보다 더 큰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하지 않으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명처럼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차이점을 살펴보면, 하나는 빌라도라는 포악한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인재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재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19’도 인재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연재해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자에서는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들이 희생을 당했고, 후자에서는 예루살렘 시민들이 죽었습니다. 공통점은, 죽임을 당한 개인들이 특정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이 당해야 하는 보편적인 형벌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누구든 그들처럼 ‘망한다’(아폴뤼미-단지 육체적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죽음 이상의 파멸, 멸망을 뜻합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신호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롬 3:23).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절에 사용된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톨로이’인데, 이는 ‘죄인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4절에 등장한 죄는 ‘오페일레타이’로, 이는 ‘빚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빚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만약 서로 간에 ‘내가 더 잘났다’라는 태도로 대하면 ‘서로를 무너뜨리는 비교의 상처’만이 남을 뿐입니다. 하지만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용서 받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서로 대한다면, 죄의 정도에 대한 비교를 통해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노력 대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과 더러움을 회개하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와 올리브(감람)나무는 제물을 태우는 용도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전 지역에 흔하게 분포했고, 1년 중 많게는 5회까지 많은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그리 중요한 나무로 여겨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밭에는 무화과나무를 굳이 심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해 속에서 볼 때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며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라고 하셨을 때, 듣는 사람들은 비상식적으로 여기며, ‘왜 그랬을까?’라고 의아해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비상적인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계속됩니다.
✔눅 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셨고, 오랜 기간을 두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인내하며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열매가 없으니 찍어 버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주인의 분노에 포도원 지기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눅 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서 찾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열매, 사역의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은 죄인인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죄인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은혜로 구원을 받아 의롭게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주인의 분노에 대해 포도원 지기는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포도원지기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하면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최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가장 아름답게,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이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의 기회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처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시카고의 한 작은 교회에서 세 살 된 소녀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관 앞에 나아가 아이의 모습을 대하며 작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한 사나이가 술 냄새를 풍기며 붉게 충혈 된 눈에 누더기 같은 바지를 끌고 관 앞으로 가서는 아무도 모르게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리고 식이 끝난 후 그는 그 신발을 35 센트에 팔아 싸구려 술을 사 먹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얼마 후 그는 십자가 앞에 눈물로 회개하며 돌아와 치유 불가능한 천여 명의 알콜 중독자들을 전도하여 갱생시킨 장본인이 되었으며, 시카고 역사상 유명했던 복음 전도자 ‘멜 트라더’가 되었습니다. 현재의 내 삶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아직 기회가 주어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언제나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한다면 우리의 남은 삶은 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멸망을 피하는 길은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후회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죄악을 향해 나아가던 삶을 돌이켜, 우리를 의롭게 해 주시고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남들보다 더 의롭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은 징벌을 당해도 나는 그 징벌에서 제외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기 힘으로 이 명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의롭다 인정을 받습니다. 엄중한 시기에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바로 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