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여인
퇴근길에 가끔 들르는 여의도의 한 작은 카페가 있었다. 그 카페에 가면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여주인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는 말동무도 되어주었다. 그녀는 그리 빼어난 미모는 아니지만 깔끔한 용모에 예의 바르고, 언제나 조곤조곤 말을 하는 여인이었다.
흘러간 팝송을 좋아하는 나는 팝송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녀를 만난 것이 더없이 기뻤다. 내가 아는 여성 중에는 흘러간 팝송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팝송이나 세미클래식을 다양하게 선곡해 연주하고 가끔 노래도 불렀다. 그녀는 7080세대인데도 5060 팝송을 잘 불렀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 경력을 세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카페를 열기 직전에 어느 특급호텔에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고 했다.
그녀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노래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은 레이 찰스가 부른 “you don't know me"였다. 손을 내밀며 ‘안녕’이라고 말한 후 떠나는 연인을 쓸쓸히 바라보며, ‘당신은 나를 몰라, 당신은 나를 몰라요~’ 라며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그 노래를 그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를 때에는 내가 그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감격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술이 거나해 실없는 얘기를 해도 항상 잘 웃어주었다. 이젠 어느 정도 친숙해 성격도 알게 되었을 무렵 그녀가 넌지시 나에게 물었다.
“우리 카페에 가끔 오는 멋쟁이 언니가 한 분 있는데, 아주 팝송에 대해 해박하고 성격도 좋은 분이니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요?”
그러면서 그녀에 대한 신상을 대충 소개했다. 그녀는 명문여대 출신으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는데, 서구형의 미모에, 성격도 밝고, 팝송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가끔 카페에 오는데 자기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언니라고 부른다고 하며, 나하고는 여러모로 잘 맞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며 말했다.
여주인이 중년이니 그녀는 꽉 찬 중년이거나 그보다 조금 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모에, 성격 좋고, 팝송까지 좋아하다니!’ 그러나 여주인 앞에서 속보이게 들어내 놓고 반길 수는 없어, 시큰둥한척하며 기회가 되면 한번 보자고 슬쩍 맘에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벌써 나는 속으로 별 상상을 다 하고 있었다.
나이 들어 애인이 있으면 가문의 영광이라느니, 신의 은총이라느니 하는 마당에 이제 이 나이에도 드디어 영광과 은총이 내리려는 것 같아 가슴이 뛰기도 했다. 집에 와서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한번 보지도 않은 그녀의 모습을 별 상상을 하며 떠올렸다. 옛날 좋아했던 외국 여배우들을 다 한 번씩 대입시켜 보기도 했다.
언젠가 마음에 맞는 여성을 만나면 이제라도 영화 같은 밀애를 해보겠다고 꿈꿔왔는데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 꿈은 꿈꾸는 자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아무리 영광이요, 은총이라지만 지금 이 나이에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찰나에 아내의 도끼눈이 순간적으로 번쩍하다 사라졌다. 잘못하면 가문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먹칠이요, 신의 은총이 아니라 신의 저주가 될 수도 있는 것이거늘! 불륜이 아니라 로맨스라던 유명 인사들의 스캔들이 심심치 않게 장안을 흔들고, 패가망신하는 것을 보아오지 않았는가?
‘아니 아직 만나보기도 전에 이게 무슨 방정맞은 생각이란 말인가, 요즘 친구들을 보면 사랑을 잘들 하더구만! 친구들 만나면 으레 노년에 갖춰야 할 3대 요건이 건강, 경제력 그리고 신도 모르게 감춰놓은 애인이라고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겁부터 내다니!’ 그 후 혼자서 온갖 그림을 다 그리고, 질의응답까지 거의 마쳤을 즈음 드디어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 밤이었다. 퇴근 후 저녁 식사 약속을 끝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지난번 여주인이 말하던 그녀 생각이 났다. 차를 세우고 카페에 들어서니 피아노 앞좌석에서 주인 여자가 처음 보는 여인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주인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평소에 앉는 피아노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여주인이 그녀를 데리고 오더니 지난번에 말한 그 언니라며 인사를 시켰다. 일견 내가 상상했던 외국 여배우들을 닮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체구에 눈 코 입의 윤곽이 뚜렷한 개성 있게 생긴 여인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밖으로 말아 올린 헤어 스타일에 베이지색 투피스와 옅은 보라색 스카프가 잘 어울렸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들어 칠레산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시켰다. 콜크를 직접 빼고 와인잔에 조금 따라주자 잔을 살짝 코에 대고 향을 맡은 후 와인을 조금 입 안에 넣어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맛과 향이 괜찮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도 향을 맡았다. 청포도의 상큼한 향내가 그녀의 향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하면서 가끔 쓰는 작은 제스처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녀의 잔에 와인을 한 잔 더 따르자, 그녀도 내게 한잔 따라주었다. 와인 잔을 들고 내가 말했다.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시나 보죠?”
“네, 다 좋아하는데 오늘은 그러고 싶어서요. 근데 요즘 와인 마니어가 늘어 와인 바가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와인 수입이 해마다 엄청 늘어난다고 하네요. 그에 비해 ‘와인 문화’는 아직 별로인 것 같아요. 이 와인 문화라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요지는 와인 문화도 무슨 유행처럼 번지지만 맛도 모르면서 멋만 내려고 한다거나, 와인의 종류별 그 오묘한 맛도 모르면서 무조건 비싼 와인이 좋은 와인인줄 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와인에 대해 얘기를 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아 한잔을 따라주며 슬쩍 말 머리를 돌렸다.
“여사장의 피아노 연주 솜씨가 뛰어나 나는 그 음악을 들으러 여길 옵니다.”
“나도 그래요.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이 많이 향상되긴 했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음악 문화가….”
와인 한 병을 다 비워갈 무렵, 그녀는 홍조를 띤 채 내가 말 머리를 돌리거나 다른 대화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다방면의 문화를 끄집어냈다.
획일화된 현상을 얘기할 때는 군사문화, 맛집 얘기를 할 때는 음식문화, 외국 얘기를 할 때는 여행문화, 연애문화, 카페문화, 골프문화, 키스문화’등 그녀의 말은 문화가 안 들어가면 말이 되지 않는지 접미사에는 꼭 문화가 붙어 다녔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주로 듣는 편이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한참 문화를 들먹이는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속으로 다른 문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가 1950년대 말인가, 60년대 초였던가? 최초의 상업방송으로 종로 인사동 어디 쯤에 문화방송국이 생겼지. 물론 라디오 방송국이었지. 그 인근에 문화극장이라는 삼류 극장도 있었고. 라디오 광고로 문화연필 선전을 엄청해서 그 노래 가사를 나는 아직도 외우고 있지.
그때 국산 연필은 조금만 눌러쓰면 연필심이 부러지기 일쑤고, 칼로 깎으면 연필 살찜이 뭉텅뭉텅 떨어져 나가 금방 몽당연필이 되었지. 그나마 너무나 흐려 연필심이 조금만 나오도록 깎아 침을 발라 눌러썼고. 그래서 미제나 일제 연필의 인기는 대단했지.
특히 미제 색연필은 귀했지. 나는 어찌어찌해서 겨우 미제 빨간 색연필 한 자루를 구해서 일 년 동안이나 썼지. 그 당시 학생들은 문화연필 시엠송을 무슨 동요처럼 부르고 다녔지.’
“외국산만 좋다 말자 말마저 빼앗길라, 날로날로 좋아지는 우리 국산 문화연필….”
나는 하마터면 그 노래를 부를뻔 했을때 쯤 그녀가 나를 불러 깜짝 놀랐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아, 예, 문화에 대해서 생각 좀 하는 중입니다.”
“예~, 그 문화라는 것이….”
그녀는 아예 문화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설명할 태세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말한 문화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나는 그녀의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 지쳐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가 말하는 문화의 장르가 바뀔 때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자꾸 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택배 문화가 발달하게 된 이유는 우리 민족이 배달 민족이기 때문이다.’ 뭐 이런 유(類)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그녀와 보이지 않는 문화의 충돌이었다.
그 문화 때문에 그녀와의 만남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밖으로 나와 나는 별이 빛나는 여의도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 중얼거렸다.
“가문의 영광이나 신의 은총이 그리 쉽게 내게 오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