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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포도주
마르셀 에메 (1902 ~ 1967)
프랑스를 대표하는 국민작가. 1928년 <낙오자들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수상하고, <이름없는거리>(1930)로 국민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 <초록 망아지>(1933),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이야기>(1934), <카메라>(1941),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1943)등이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유명한 그는 저널리스트로도 활약했다.
[좋은그림]
몽마르트의 생 뱅상 거리에 있는 한 작업실에는 열정적이고도 절실히, 고집스럽게 작업하는 ‘라살구’라는 화가가 살고 있었다.
라살구 군의 그림은 누구도 한 번 들여다보기만 하면, 예를 들어 고기파이라든지 통닭구이, 감자튀김, 치즈. 초코크림, 과일 등등을 배불리 먹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 물감을 구하러 나온 라살구 군은 일 관계로 몽마르트 언덕을 들른 라보에티 거리의 화상 에르메스 영감을 만나게 되었다.
자네의 작품을 보게 되어 기쁘구먼, 틀림없어,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게야. 정말 자넬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으이. 자자 내 이중에서 대여섯 점을 가져감세. 됐나? “봐서 , 제값을 쳐준다면.” “팔천을 줌세. 나로선 모험이지만, 하는 수 없지. 큰맘 먹기로 했네. “ “없던 걸로 하자구. 대신 영감한테 단 한 점이라도 아직 내 작품이 남아 있다면, 내 당장 만 오천에 도로 사드리지.” 화상은 허허 웃었다. 그저 좋고 편안한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란 영감은 급히 심각한 표정으로 되돌아오더니, 다시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화가들이란 전부 다 똑같아. 쪼금만 추켜세워 주면 금세들 우쭐해한다니까. 재수로든 깡으로든, 좌우간 화풍 상의 쥐꼬리만 한 변화를 집어넣게 되었다 싶으면, 당장에 기고만장이야. 온 파리 시내가 난리를 치면서 앞 다투어 몇 백 만원씩 싸들고 올 거라는 착각들을 한단 말씀이야. 진정한 애호가들은 더 이상 그림을 사지 않고, 오늘날의 유일한 고객이래야 기껏 해야 화가의 이름에나 목을 매는 졸부들이라고 암만 말해봐야 뭣해. 입만 아프지. 다들 꿈속에서만 살고들 있으니……. 허 참, 전쟁 때문에 고생들도 무진장 했을 터인데. 예전에 유망한 화가들이나 이름 날리던 대가들조차도 반평생을 굶다시피 살았거나, 빵 한 조각에 그림을 팔곤 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참 세상도 많이도 변했지. 이렇든 저렇든, 자네 말마따나 없던 걸로 함세나.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가브리엘 거리에 들를 짬이나 날까 모르겠구먼. 배나무 군에게 인사나 하러 갈까 하던 참인데. 요 근래에 그 친구가 진짜 놀랄 만한 그림을 그렸다는 소문이 들려서 말씀이야. “
‘배나무’란 이름이 나오자마자 라살구 군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고 입은 앙다물어졌다. 두 화가는 일찍부터 해묵은 경쟁심으로 사이가 벌어져 있었고, 세월이 갈수록 그것은 앙심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일단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자네의 그림이네. 조금만 도 생각을 해준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내 장담하지. “
“알았어, 영감 내가 또 졌어. 능구렁이 같으니. 만 이천으로 갑시다.” 화가가 대답했다. 화상은 좀 더 깎아 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아까 전부터 느끼고 있던 나른한 행복감이 화가와의 실랑이 도중에 점점 더 뭉게뭉게 피어오르게 되자, 그제는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하긴 어차피 흥정의 결과에도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참이었다.
여담이지만 , 배가 전혀 고프지 않은 것이 놀라울 지경이로구먼. 아까까지만 해도 무지무지하게 고팠거든.
잠시 후, 그림을 옆구리에 끼어든 화상은 화가의 작업실을 나와 버드나뭇길을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길은 그날따라 몹시도 가파르게만 느껴졌다. 사월인데도 날은 여름날 저녁 같기만 한 날씨였고, 화상은 등에 달라붙는 셔츠의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오두 막길 위쪽에 높다란 담벼락을 둘러친 채 벌써부터 녹음을 드리운 동원의 풍경은 휴가철과 시골과 긴 낮잠에 대한 동경을 불러 일으켰다. 화상은 이틀 전 ‘후기 추상파’들의 회장 격인 어느 청년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장을 나서면서도 똑같은 기분이었음을 기억해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숨을 헥헥거리며 오르막길의 맨 끝에 이른 화상은 때마침 룰체트 방방 양과 함께 노르뱅 로 쪽에서 나오던 배나무 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악수와 상냥한 인사말이 오가고 난 후, 화상은 라살구 군의 작업실에서 오는 길임을 수태여 숨기지 않았다. 배나무 군은 콧방귀를 뀌었다. 황갈색 눈동자 속에는 아까 그의 앙숙에게서 보았던 것과 엇비슷한 눈빛이 담겨 있었다.
배나무군과 룰레트 양은 한동안 길거리를 쏘다니다가는, 여덟 시경에 이르러 저녁을 들기로 한 어느 골목 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메뉴판을 들어 흘끔 살핀 뒤, 배나무 군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배가 안 고파, 정말 하나도 고프지 않은걸” 룰레트 양이 대답했다. ‘ 이상해, 나두 , 단 한 숟가락도 못 뜰 것 같아. “
이튼 날 11시경, 파리 시내에 있는 한 교외선 역의 대합실에서 너저분한 형색에다 구린내를 풍기는 한 삼십대의 사내가 혹 누군가의 지갑에서 지폐 쪼가리라도 흘러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매표소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쩔쩔매는 것 같아도, 아무리 서툴고 허둥대는 듯 보여도 사람들은 절망적이라 만치 저마다의 애로점을 잘도 해결해나가기만 했다. 돈은 도통 흘러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은 단 한 치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이 외톨이 사내의 주위를 비껴가고 있었다. 사내는 이내 초조함을 접어둔 채 단지 쓰린 위장과, 머리와 눈알을 짓누르는 통증과, 텅 빈 몸뚱이로 둥둥 떠다니는 어지러운 느낌을 잊으려는 일념만으로 사람들의 거동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를 통해 외부의 소음이 마치 저승의 소리인양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득 이 시간의 정지가 죽음의 시초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피곤에, 두통에, 세상과의 단절감에, 그리고 절망에 시달리는 사내는 악착같이 삶에 매달렸다. 그러자 다리 힘이 미치는 데까지 죽음을 피해 있는 힘껏 달아나기 시작했다. 극도의 피로로 달리기가 느려지고, 죽음이 어디까지 따라와 있나, 하고 뒤를 흘끔 돌아보았을 때쯤, 사내의 시선이 가게의 진열창 속에 있는 얼룩덜룩한 물체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림의 형체와 윤곽에 먼저 반하고 사내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ㅊ우족감과 더불어 행복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되었다. 지친 육신 속에 새 기운이 솟아오르고, 피는 더 한층 빨리 돌고, 전신에는 훈기가 배어들고 있었다.
화상이 다가올 무렵, 무두리는 정물화 한 점을 먹어치우는 중이었는데 화상의 따가운 눈총에 문득 자신의 차림새를 의식하게 되었다.
진열창 속에 있는 라살구 란 화가의 그림에 몹시 감탄했습니다. 가격을 여쭤보려고 들어왔지요. 오만 프랑이오. 화상이 대답했다. 불행히도 저한텐 너무 비싸군요.
안 돼, 화가의 주소는 아무한테도 가르쳐 주지 않소. 이건 우리 업계의 철칙이요. 대신, 할 말을 편지로 써서 나한테 맡기면 내가 라살구 선생에게 꼭 전해드리리다.
내 말인즉, 저 그림의 비밀을 알자면 하루 세끼를 꼭꼭 챙겨먹으며 항상 배가 든든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외다. 요는 말이요, 화상 영감, 오늘 아침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굶주려 있어야 해. 그래, 굶주려 있어야만 해.
화상이 안절부절 하기 시작했다. 설마 조금 전 그 자의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말도 안 돼, 바보 같은 소리야.
밥을 먹기 전에 실험을 하나 해야겠어. 아냐, 싫어! 일단은 밥부터 먹고 보자고! 라오넬은 반발했으나, 화상은 그를 구석방으로 끌고 가 오 분 이상을 함께 틀어박혀서는 무언가를 쑥덕거렸다.
십오 분이 지나고 나자 실험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라오넬은 십여 분감을 더 서서 쩝쩝거리다가는, 마침내 뒤돌아서며 이렇게 말했다. “이 이상은 못해.” 화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사람은 저녁 내내 이 놀라운 발견과 여기에서 나올 이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에티엔 무두리는 화랑이 문을 닫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식사를 들러 온 참이었다. 이윽고 셔터 문이 내려옴과 동시에 <노란 옷의 소녀>도 사라져버리자, 그제는 가게 앞을 떠나 사람들이 북적 거리는 큰길가로 나왔다.
무두리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뱃속으로부터의 까달음은 바스티유 근방의 누추한 골방을 함께 쓰는 친구 발봐리를 떠올리게 해주었다.
‘먹고 왔군, 먹고 온 사람의 낯짝이야. “ 발봐리가 비꼬아서 말했다. 무두리가 대답했다. “아아 그래 맞아. 희한한 방식이긴 하지만. 먹는 거 없이 먹었단 말이거든.”
비밀경찰 장교 셋이 벽장 속에서 걸어 나와 눈앞에서 그림을 몽땅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그런가 하면 화랑 앞에 막 도착하려는 순간, 덜컥 잠에서 깨어 꿈이었구나 하는 꿈도 꾸었다.
화가는 있었다. 작업실의 문 저편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라살구 군은 직접 문을 열고는, 조용한 얼굴로 둘을 맞이했다. “선생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무두리가 문틈으로 재빨리 비집고 들어가며 말했다. 작업실을 흘끔 들여다보던 그는 안에 있는 화상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화상도 이쪽을 알아보고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이 되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다그쳤다. “여긴 뭣 하러 왔나, 자네가? 썩 꺼져버리고 두 번 다시는 얼씬대지 마! 알겠어?”
라살구 선생, 선생은 선생의 그림이 엄청난 진수성찬이란 사실을 아시오? “ “진수성찬? 무슨 말씀이신지?”
“라살구 선생. 요즘 입맛이 있소? “ “맙소사, 아니오. 몇 달 전부터는 거의 굶고 살았다고 해야 할 거요. 그나마 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먹어보려고 애쓰는 참이오.” 안 그랬다면 이상했을 거요. 라살구 선생. 작업실에서만 지내시다보니 아무것도 모르시는 모양인데, 제가 이렇게 알려드리게 되어 무척이나 영광스럽소이다. 입맛이 없는 건 선생의 그림이 음식이기 때문이오. 선생의 그림 중 아무거나 한 점을 들고 한 이십 분만 잘 들여다보시오. 마치 푸짐한 식사를 한 것 같을 테니까. “
어안이 벙벙한 채 반신반의하는 라살구 군은 조금 전에 유달리 유리한 조건으로 그림을 몽땅 사들이겠다며, 당장에 계약할 것을 종용하던 화상의 기이한 거동을 떠올리고 있었다.
“넘어가지 마시오! 이런 그림이라면 부르는 게 값이란 걸 다 알고 저러는 거요. 알고 있다는 건 벌써 먹어봤다는 뜻이지. 어디 어저께 밥을 먹었는지 물어보시구려.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뭐라고 대답 할는지 한 번 두고 보시오.”
“여보게, 화가 양반. 말은 바로 해야지. 난 자네의 그림을 도합 이만에 사들이려고 했네. 황재 아닌가? 생각해보게, 무릇 미슬 애호가들이 그림을 사들일 때는 작품의 예술적인 가치밖엔 따지지 않는 법이라네. 그들에게 있어서 빵이란 결코 덤 이상의 것은 못돼!” “흥, 기어코는 도둑놈 심보에 사기꾼 기질을 드러내고야 마는군! 하지만 그 더러운 혓바닥일랑 도로 집어넣으시지!” “들어보게, 라살구 군 내 큰맘 먹고 자네에게 최대한 양보하지. 삼만으로 함세 나.” “어림없는 소리! 더러운 놈, 일단 여기서 꺼져! 두 번 다시는 내 작업실에 나타나지 마!” “십만!” “나가라니까” 라살구 군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며 화상에게 문 쪽을 가리켰다. 발봐리 곁에서 식사를 하던 무두리가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며 다가와서는 씩씩하게 말했다. “손이 부족하면 기꺼이 도우리라. 라살구 선생.” “이십만!” 화상이 문 쪽으로 떠밀려가며 소리 질렀다. “이십만이 아니라 이백만이라도 안 돼. 나갓!”
“와주신 덕분에 낭패를 면할 수 있었소. 정말 제때에 나타나주신 게요. ~~~~ 그러자 무두리가 위선이 살짝 묻어나오는 간드러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저와 제 친구는 얼마나 기쁜지 모른답니다.
라살구 군은 작업실 한구석으로 가서 버드나뭇길에 내리비치는 햇살을 그린 최근의 작품 한 점을 집어든 다음, 발봐리에게 건네주었다.
“내 그림의 신비한 힘을 발견한 것은 두 분이오. 그 날카로운 통찰력에 대한 증거로 기념품 하나쯤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무두리가 두 사람을 대표해 정중한 말투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그러면서 화가가 건네준 몽마르트의 풍경화 속에 담겨있는 식품으로서의 가치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 체 그와 같이 훌륭한 작품을 감상함으로써 얻게 될 기쁨과 감동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드높은 교양을 보여주었다. 반면, 발봐리쪽은 훨씬 더 요란하게 감격을 표현했지만, 보다 솔직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었다. “평생 먹을 게 생겼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살아볼 용기가 생깁니다요.”
라살구 군은 배나무 군을 밟아버리기에 어찌나 급급했던지, 모든 일을 즉각 실행에 옮겨 당장에 스타가 되기로 했다. 그러다가는 이내 스스로의 신념과 그림을 모독하는 그토록 치졸한 감정에 굴복한 자신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배나무 군을 모욕할 계획을 포기한 라살구 군은 맨 처음의 결심으로 되돌아왔다.
“라살구 선생이시겠죠? <프랑스 반만년>지에서 나왔습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신문들은 연일 라살구 군의 그림에 관해 막대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한 초등학교의 교장을 찾아가 아이들의 급식용으로 그림 한 점을 전달했다.
화랑의 주인은 그림을 육백만 프랑에 사들이는 한편, 앞으로의 지속적인 거래를 위해 진행금 십오만 프랑이 명시된 약속어음도 함께 제시했다. 라살구 군은 물론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가게에는 손님들이 끊일 줄을 몰랐다. 바깥 진열창에 보란 듯이 내걸린 채 어마어마한 인파를 끌어들이는 <노란 옷의 소녀> 외에도 화랑 안에는 또 한 점의 라살구 군의 작품이 벽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었다.
작품이 전시된 루브르박물관에는 대번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발봐리가 말했다. “행복하다고 큰소리쳐도 되겠어. 임금님도 장관도 부럽지 않아. 그 사람들한테야 물론 자동차다 뭐다 없는 게 없겠지만, 그게 다 언제까진 지야 알 수가 없지. 반면, 우린 안전하고 확실하잖아?”
끔찍하리만치 지루한 나날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가한 시간은 휴식을 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게 만드는 고달픈 세상살이의 단면만을 떠올리게 했다. 발봐리가 말했다. “돼지 모양 살만 피둥피둥 찌우는 건 사람 사는 게 아냐. 난 좀 덜 먹어도 남들처럼 살고 싶어.”
버러지 같은 인생살이에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다락방에 삐뚜로 걸린 <버드나뭇길의 풍경>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튿날 아침, 둘은 <버드나뭇길의 풍경>을 들고 일찌감치 다락방을 나왔다. 그림을 떼어내는 순간에는 약간 마음이 아파왔다.
화상은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괘씸함과 궁금함으로 마음이 엇갈리는 그는 처음에는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설욕이나 해볼까 하는 기대로 두 거렁뱅이를 맞아들였다. “라살구 선생이 준 그림이외다.” 무두리가 <버드나뭇길의 풍경>을 내보이며 말했다. 화상이 대답했다. “파시려고요? 미리 말해두지만, 얼마 못 받을걸. 이건 작품이 아냐, 단순한 습작이지.”
내부에는 식탁이 사라지고, 대신 이백 개의 의자가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손님들은 영화관에서처럼 의자에 앉아 안쪽 벽에 걸린, 각광이 밝게 비추는 라살구 군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다.
자릿값은 사십오 프랑이었다.
정부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장관회의가 나흘 연달아 소집되더니, 파리와 파리 근교의 전 주민들에게 잼 배급표 한 장씩을 지급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프랑스 반만년>지는 라살구 군의 ‘국유화’를 제일 먼저 언급한 신문이었다.
화내고 싶지 않소. 농담은 집어치우고 당장 이곳을 떠나주시도록 정중히 부탁드리는 바이오. “ “어린애 같은 짓마시오. 이곳은 이미 국가의 기관이고, 우린 법에 의가하여 왔소이다.”
“감옥살이라는 거군. “
물자 보급 부는 우선 생 뱅상 로의 주변 건물 십여 채를 징발해 ‘라제국’(라살구 제작, 보급소)부터 설치하기 시작했다. 건물 안에는 미술부를 비롯하여 운송부, 총무부, 기술부, 인사부가 들어섰다. 이 ‘정부기관’에는 한 명의 본부국장광과 부국장, 열 한 명의 각종 소장들과 부소장들, 그 밑의 실장들과 부실장들과 이천칠백팔십 명의 평직원이 배치되었다.
일 년이 지나자 라살구 군의 국유화를 기다려온 파리시민들의 희망은 실망으로 바뀌게 되었다. ‘라살구’를 외치는 시위대가 또 한 번 시가행진을 벌였다.
정부는 내달 중에 빵 배급권이 딸린 XX 급식 권으로 일회분씩의 그림식(食)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한 달간의 그림식 수혜자들은 고작해야 사십만 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위조식권 소지자들도 수두룩하게 있었다.
여론에 밀린 국회는 라살구 군의 국유화 폐지를 의결했고, 화가는 마침내 육군호위부대와 도청 및 행정감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또 하나의 희소식이 들려왔다. 존폐의 위기 속에 여론을 진정시키고자 고심한 정부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식용 가치가 있으면서도 급식에 조달되지 않았던 라살구 군의 작품 전부를 압류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상은 수억대의 돈을 하루아침에 날리게 되었다
화상은 어찌나 울화통이 터졌던지, 화병으로 그만 몸져눕고 말았다.
어느 날인가는 기린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렸다. 영감의 묘는 생 뱅상로 근처의 자그마한 묘지에 쓰기로 했고, 장례행렬에는 몽마르트의 전 패거리들이 뒤를 따랐다. 기린은 어찌나 슬퍼했던지 혼자서는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추모식’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되었다. 친구들은 영감이 드나들었던 술집들마다 들려 경건한 순례행진을 벌이기로 했다. 일당은 밤새도록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몽마르트의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녔다. 기린이 먼저 소리쳤다. “이 늙은이야, 어디 있어! 대답해. 이 늙은이야!” 그러면 기린 못지않게 취한 일당들은 영감의 묵묵부답에 부아가 치민 나머지 뒤를 이어 이렇게 합창했다. “또 그놈의 술을 처먹었구나! 썩 나와, 이 주정뱅이 영감탱이야!”
몽마르트의 화가들 중 네 명이(그러니까 기린과 함께 초상을 치렀던 이들 가운데 네 명) 그들의 첫 식용 화를 그리게 된 것은 그 다음 주 중의 일이었다.
식용 화는 금세 충분해져서 암시장은 저절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물가가 정상적으로 되돌아오고, 프랑스의 전역에서는 누구든 닭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화가는 어딜 가나 과거 수백 년 동안의 거장들과 나란히 추앙받았으며, 프랑스 안에서나 밖에서나 맨 처음 이 ‘실제력’을 달성한 사람으로서 실제파 예술가들의 아버지 내지는 젊은 기수로 통하고 있었다. 라살구 군은 동류 예술가들을 갖게 된데 대해 아무런 저의 없이 좋아했으며, 배나무 군이 드디어 식용파 화가가 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기뻐해주기도 했다.
기린이 보르도 거리의 대 실제파 시인 루에베에게 반해 보름 후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은 이런 경사의 와중이었다. 엘르테르 루에베는 드물게 고결한 정신과 진중한 몸가짐을 가진 예순의 노인이었다. 성실한 주부로서 가사에 전념할 것을 맹세한 기린은 친구들과 저녁나들이와 알코올에 과감하게 결별을 선언했다. 두 번 다시는 저녁 불빛 아래 친구들 앞에서 밋밋한 가슴을 드러내 보이는 일도 없었다.
[가짜 형사]
마누라에 자식 셋이 딸린 마르탱 씨는 레오뮈르 거리의 한 상점에서 월급 삼천오백 프랑을 받고 일하는 계산원이면서, 또 어떻게든 먹고 살아가야 했으므로 빈 시간에는 가짜 형사 노릇을 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가짜 형사란 탁월한 관찰력과 함께 냉철함과 노련함을 겸비한 재빠른 판단력을 요하는 직업이었다. 진짜 형사는 고객을 고를 필요가 없다. 고객은 경찰서와 검찰청과 밀고자들에 의해 주어졌으면, 이는 곧 시간과 위험부담과 노력의 절약을 의미했다. 그밖에도 진짜 형사에게는 실수할 권리도 있다. 자선 사업가를 창녀촌의 포주로 볼 수도 있고, 흥분한 순간에는 죄 없는 사람을 눈탱이 밤탱이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스러워 보이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반면 가짜 형사는 눈치가 귀신이어야 했다. 법에 명시된 중형의 위험부담 앞에서 사기꾼을 퇴역장군으로 본다든지, 가난뱅이를 부자로, 악질을 숙맥으로 보는 일 따위는 있을 수가 없었다. 주머니 사정을 헤아리는 데는 대부분 불확실한 정보밖엔 없고, 고객의 집 문을 두드릴 때면 상대의 개성과 ㅅ어격을 한눈에 파악해 행동지침을 선택해야 한다.
마르탱 씨는 그 진지하고 성실해 보이는 선량한 인상 때문에 약간은 손해를 보는 사람이었다.
한번은 교회 거리 근방의 어느 집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마르탱 씨의 부주의로 상대가 그만 눈앞에서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양심이 몹시 괴로웠다. 다행히 며칠 후의 공중폭격이 문제의 집과 함께 같은 건물의 전 세입자들을 몰살해버렸고, 덕분에 신의 뜻이라고 생각한 마르탱 씨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일단 설득을 시키고 집안에 여유가 생기고 나자 이따금씩 그녀는 남편의 무심함과 불성실을 탓해가기까지 하며 오히려 그를 들볶아대고 있었다. “밍코코트 값을 보면 잠이나 자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가 벌이고 다니는 짓거리를 전혀 알아챌 턱이 없었다. 어린 천사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삼백 프랑짜리 안심과 이백 프랑 짜리 버터빵을 받아먹었으며, 덕분에 확실히 통통한 징미빛 뺨만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자신의 이중생활에 대해 얼마간의 죄의식이 스며들 때면 마르탱 씨는 ~~~ 양심 때문에 이 아이들을 질병과 배고픔에 허덕이게 할 순 없다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희생양은 주로 암거래상이나 불법 사재기상이나 곤경에 처한 유대인이나, 혹은 중간 부류의 어수룩한 조무래기들 중에서 물색했다.
마르탱 씨의 자랑거리는 또 다른 가짜 형사 패거리에서 오만 프랑을 후려냈다는 사실이다.
원천만 깨끗하다면야 아래의 시냇물이 흐린 건 잠깐일 뿐이지.
해방의 서관이 비치던 날, 그는 거리낌 없이 기뻐할 수 있었다. 파리가 해방 되던 날, 마르탱 씨는 마누라를 부둥켜안은 채 감격의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외쳤다. “해방이래, 여보! 해방! 우리의 가정에도, 전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가짜 행세도 이제 끝이야! 양심의 빛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드디어 걷혔어!”
마르탱 씨는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짜 형사 노릇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여가시간이면 마르탱 씨는 재미라기보다는 열렬한 애국심에서 점령기 동안에 봐두었던 미심쩍은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해 불순ㅂ누자들을 관청에 밀고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일흔한 명의 사람을 감옥에 처넣는 흐뭇함을 맛 볼 수 있었다. 마르탱 씨가 아내에게 말했다. “경찰 쪽의 일을 거드는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 반면, 기분이 언짢았던 그의 아내는 버터 값이며 고기 값, 포도주 값, 그리고 그 외 다른 식료품들의 값이 올랐다고 투덜거렸다. 마르탱 씨가 본급 삼천오백 프랑을 갖다 주던 날, 그녀는 돈을 받아 챙기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다음 달 내 파마 값이로군요. 그건 그렇고 이만 프랑을 줘야겠어요. 사야 할 게 …….”
마르탱 씨는 환멸감에도 불구하고 마누라의 잔소리와 점점 더 심해져가는 성화를 재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에 맞춰 살던가, 아니면 콱 죽어버리든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침내 많은 갈등과 고통이 뒤따른 후, 마르탱 씨는 단 요번만큼은 양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다시 가짜 형사 노릇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다음날 저녁, 암시장에 막대한 물자를 대고 있던 어느 불법 점화석 거래상을 후려냈다. 이 일은 그에게 만 오천 프랑을 가져다주었다.
남편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가짜 행세를 걷어치우지나 않을까 염려한 그의 아내는 일거리를 마련해줄 필요를 느끼고는, 좋은 ‘건수’ 하나를 알려주었다. 여남은 사람들을 게슈타포에 밀고한데다가, 스무 살짜리 젊은 독립군 하나를 총살당하게 만들기도 한 어떤 노파에 관한 것이었다. 노파는 체포령을 피해 ‘파란길’ 거리의 어느 골방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확실한’ 친구들끼리의 입방아를 통해 그 은신처가 쥬스틴의 귀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마르탱 씨는 역겨움을 눌러가며 저녁때쯤 노파의 집을 찾아간 다음, 마지못해 협박을 했다. 그러고는 돈을 챙겨 나오던 순간, 일시적인 기분에 끽소리 내지를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노파를 목 졸라 죽였다. 이렇게 자신의 부정을 정의와 애국심으로 만회하고 나자 어찌나 큰 안도감이 느껴졌던지. 나흘 후에도 그는 젊은 의용병 하나를 후려낸 뒤 죽이고 말았다. 이후부터는 아무도 살려두지 않았다.
집안에는 다시 웃음과 평화가 찾아들었다.
마르탱 씨는 꾸준히 사람들을 죽여 나갔고, 매번 희생자가 나올 때마다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기게 되었다. 마르탱 씨는 혹시 자기 마누라가 그늘 속의 반동분자는 아닌지, 다른 매국노들처럼 응징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탁에 둘러 앉아 있던 마르탱 씨는 아닌 게 아니라 1943년의 어느 날 밤, 사이렌과 대포소리에 잠을 깬 마누라가 영국놈들은 모두 머저리라고 욕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쟁쟁했다. 물론 아주 중대한 죄였다.
사람이란 한번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되면 돌아올 때는 그 돌이킬 수 없는 고뇌의 무게에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마르탱 씨가 불쑥 물었다. “1943년 12월의 어느 날 밤, 그러니까 사이렌 소리에 우리 둘 다 잠에서 깼을 때 당신이 ‘영국 놈들은 모두 머저리야!’ 라고 소리쳤던 일을 기억해?” “그랬었나? 하긴 그 말이야 수도 없이 했으니까…….” 쥬스틴이 절반쯤 수긍했다. 마르탱 씨가 다시 말했다. “내 기억은 틀리는 법이 없어, 여보, 진지하게 대답해줘. 그 말 한 걸 뉘우치겠어?” “그럼요.” 적잖이 꾀부릴 줄도 아는 쥬스틴이 대답했다. 마르탱 씨가 휴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뉘우친다니까 이걸로 없던 걸로 하지.” 편리한 속죄, 재빠른 용서, 웃기는 정의……. 마르탱 씨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누라를 용서하고부터는 다른 ‘죄인’들도 용서하기 시작했다.
그제는 일주일 동안 하나도 죽이지 않고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경리 보조직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이렇게 빡빡한 시간 때문이었다.
직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부터는 좀 더 본격적으로 달릴리의 치마폭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가시간을 정의의 구현에 쓰는 대신, 사랑에 몽땅 갖다 바쳤던 것이다.
어느 날 오후, 붉은 명주 파자마 차림으로 정부의 집에 들어앉은 마르탱 씨는 거금 이만 프랑을 들인 뜨끈뜨끈한 난롯가에서 엉덩이를 지지고 있었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아 족집게로 눈썹을 뽑아내던 달릴리는 잠시 벌거벗은 상체를 일으키고 탁자 위에 족집게를 내려놓더니, 이어 불만인 듯 자신의 맨 젖가슴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가는 버릇처럼 어루만져가며 생각에 ㅈ마기기 시작했다.
“마르탱 형사요. “ 마르탱 씨가 가짜 신분증을 들이밀며 말했다. 뒤풍은 싱글벙글 웃으며 무시했다.
“형사 나리, 아닌 밤중에 홍두께 로군요. 전 절대로, 절, 절, 절, 절대로 암거래를 한 사실이 없습니다요. 있다면 손님으로서, 그것도 형편이 하락할 때의 이야기입죠. 양심에 거리낄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가 하면 말썽은 또 질색이거든요. 나리께서도 헛보고서 때문에 야단을 맞으셔서는 안 되니까. 일을 이쯤에서 끝 낼 수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얼마를 생각하고 계시는지…….” 마르탱 씨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오만 프랑이면 사건을 새로운 각도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 같소.”
뒤풍이 꽥 비명을 지르며 땡전 한 푼도 없다고 소리쳤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만 프랑에 합의를 하고는 돈을 가지러 금고로 갔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마르탱 씨는 달릴라에게 선물 할 상아 장신구 몇 점을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 사이 뒤풍은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가짜 형사는 일금 사만 프랑이 그의 손끝에서 파라락 세어지며 넘어가는 순간, 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경찰서에서는 콧수염을 달지 않은 진짜 형사들이 자신들의 명예에 먹칠을 했다며 펄펄 뛰었고, 허공으로는 마르탱 씨의 이빨 두세 개가 날아올랐다. 소송은 조용히 끝났다.
[죄악의 구렁]
[당통]
그는 몇 해 전부터 탐내오던 멜로디 상자를 갖기 위해 일가족 셋을 살해한 살인범이었다.
죄인에게는 만장일치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집채만 한 몸집과 황소 같은 목덜미와, 또 이마라곤 아예 없는 온통 턱밖에 안 보이는 넓적 편편한 얼굴을 가진 죄인은 단춧구멍만 한 눈에 흐리멍덩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당통 씨, 죄를 뉘우칩니까?” “그럭저럭 이요. 그렇다면 그렇고. 아니라면 아니에요.”
유일한 관심거리는 자신을 살인으로 몰고 간 그 죄 많은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일이었고, 그나마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9월의 어느 날 저녁, 변두리의 세 늙은이의 집으로 그를 인도했을 것이다. 집에는 시집 못 간 늙은 자매와 국민훈장을 주렁주렁 단 자매의 소심한 삼촌이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오찬의 디저트 시간이면 언니 쪽이 멜로디 상자의 태엽을 감았고, 여름에는 식당 쪽의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당통은 삼 년 동안 꿈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집 담벼락에 쭈그리고 앉아 일요일의 음악을 듣고 나면, 그런 다음에는 한주일 내내 전체 멜로디를 생각해내려고 애쓰곤 했다.
가을로 접어들자 소심한 삼촌은 식당 쪽의 창문을 닫아버렸고, 멜로디 상자도 세 늙은이를 위해서밖에는 울리지 않았다. 삼 년 내내 당통은 음악 없는, 기쁨 없는 길고 쓸쓸한 겨울을 보냈다. 차츰차츰 멜로디가 희미해지고 날이 갈수록 가물가물해졌다.
사 년째는 또 한 번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찌나 견딜 수 없었던지 어느 날 저녁, 예의 그 세 늙은이의 집으로 숨어 들어가고 말았다. 이튼 날 아침, 경찰은 세 구의 시체 곁에서 멜로디 상자의 음악에 정신없이 빠져 있는 살인범을 발견했다.
딩동댕 ……. 딩동댕…….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형수는 노래하고 있었다.
감옥으로 찾아온 신부는 죄인에게서 나무랄 데 없는 착한 심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만 죄인의 머리가 조금만 더 트여서 복된 말씀이 가슴속으로까지 파고 들어갈 수 있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당통은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 짤막한 대답이나 무표정한 얼굴로 보면 영혼의 구제에 관심이 있는지, 아니 영혼이 있기나 한지조차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던 12월의 어느 날, 성모 마리아와 천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신부는 죄인의 흐리멍덩한 작은 눈이 일순 반짝이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하도 순간적이어서 제대로 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면회가 끝나갈 무렵, 당통이 불쑥 물었다. “그럼, 그 아기 예수님은 아직 살아 계시나요?”
간수가 대답했다. “하루 종일 저놈의 ‘딩동댕’을 멈추지 않습니다요. 노래 같기라도 하면 모를까, 저건 노래도 아닌 걸 입쇼.
신부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용서와 회개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죄인이 말끝마다 가로 막으며 아기예수의 이야기를 도로 끄집어내는 통에 설교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문을 나설 무렵, 당통이 신부의 손에 두 번 접은 검은 쪽지를 슬며시 쥐어주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예요.” 당통이 웃으며 말했다. 편지를 받아든 신부는 몇 분 후 내용을 알게 되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기 예수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편지를 썼어요. 제 이름은 당통 이예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요. 변두리의 세 늙은이를 해치운 걸 탓하시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요. 그 나쁜 놈들의 집에서는 안 태어나셨을 거예요. 머지않아 끝일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달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일단 천국에 가게 되면 멜로디 상자를 내려주십사 하는 거예요. 먼저 감사드리고요. 건강하시길 빌게요. 당통 올림.’
그날 저녁, 교도소 내의 예배당으로 돌아온 신부는 당통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그런 다음 석고로 만든 아기 예수상의 요람 속에다 편지를 찔러두었다.
“당통군, 용기를 갖고 들어주게, 자네의 항소가 기각됐네.” 아까보다 좀 더 크고 분명한 신음이 대답을 대신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당통은 꼼짝하지 않았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모양인지, 밖으로는 손가락 하나 나와 있지 않았다. 소장이 다시 말했다. “여보게 당통군, 시간 끌지 마세나. 한 번쯤은 좀 성의를 보여주게.” 간수 하나가 죄수를 깨울 요량으로 참대로 다가가 엎드렸다. 그러고는 다음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놀란 표정으로 소장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인가?” “모르겠습니다, 소장님. 움직이기는 하는데. 그런데…….” 애처로운 옹애옹애 소리가 한참 동안이나 이블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락 담요를 걷어낸 간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기웃이 들여다보던 나머지 일동도 앗, 하는 소리를 내질렀다. 이불이 걷힌 침대 위에는 당통 대신 몇 달 짜리 갓난아이가 누워 있었다. 밖을 보게 되어서 기쁜지 ㅅ애긄애글 웃는 얼굴로 천진난만하게 일동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여기 가슴을 보라구! 당통과 똑같은 문신이 있는걸! “
당통 쪽의 변호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설마 갓난아이를 사형시키겠다는 건 아니겠지요! 천벌이 내릴 거요! 당통에게 죄가 있고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손 치더라도 그래, 갓난아이의 죄과가 증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란 말이오?”
죄인을 봐주었다는 문책이 두려워진 이들은 승진을 염려해 바들바들 떨었다. 숙덕공론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죄책감의 무게 및 기타 유사한 원인에 의해 죄인의 신장이 다소 찌그러졌다는 사실은 법의 심판을 피해 갈 하등의 사유가 되지 아니한다!”
처형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부는 당통이 아기 예수에게 편지를 올렸던 사실을 무스 변호사에게 들려주었다. “신의 죄책감이라곤 털 끔만큼도 없는 살인범을 천국으로 맞아들이실 수 없으셨던 것이오. 하지만 당통은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지. 때문에 신은 그의 삶에서 죄로 얼룩진 부분을 지우고 백지상태로 되돌려놓으신 게요.” “하지만 당통의 죄가 지워졌다면 그는 살인을 하지 않은 것이고, 변두리의 늙은이들도 죽지 않았어야 하오.” 무스 변호사는 꺼림칙한 마음을 떨치기 위해 그 길로 문제의 변두리 동네를 찾아갔다. 도착하고 나서는 골목 안의 어느 구멍가게로 들어가 살인사건이 났던 집을 물었으나, 아무도 그런 소문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반면, 브리댄 자매와 소심한 삼촌의 집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새 늙은이는 약간은 경계하며 변호사를 맞아들였다. 그러고는 이내 안심하더니, 간밤에 누군가가 부엌 쪽의 식탁에 올려둔 멜로디 상자를 훔쳐갔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파리의 포도주]
포도주의 명산지인 아르보아 고장의 한 마을에 포도주를 싫어하는 포도농사꾼 펠리시앵 게리요 씨가 살고 있었다.
펠리시앵 씨는 그 고장 최고의 포도밭뿐 아니라, 최고의 포도주 저장실도 갖고 있었다. 온화하고 순종적인 성격인 아내 레오틴 게리요 여사는 한 건실한 농부가 불안에 떪만큼 지나치게 예쁘지도, 잘빠지지도 않았다.
제 아무리 목마른 계절이었다 해도 펠리시앵 씨는 단 한모금도 들이켤 수가 없었고, 그것은 마치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어린 시절의 간유를 먹는 고역인 것만 같았다.
레오틴 여사는 남편의 이런 무시무시한 비밀을 알고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펠리시앵 씨는 포도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차마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한 말일 수도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세상 어디에도 자기 아들을 미워하는 아버지는 있을 수 있어도, 이 아르보아 고장에서 포도주를 싫어하는 사람이란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주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천벌이자 자연의 기현상이요, 끔찍한 돌연변이였다. 당근이나 우엉이나 무말랭이나 우유 비린내는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포도주라니. 이왕이면 공기도 싫어하지.
자, 이만하면 꽤 괜찮게 시작한 포도주 이야 기렸다. 그런데 갑자기 지겨워진다. 철이 아닌지라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는 느낌이다.
나에게는 자기 고장 사람들 앞에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손을 부들부들 떠는 척해 보이는 펠리시앵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깜박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놀라서 감탄을 연발해가며 자기들끼리 이렇게 수군댈 것이다. “저걸 좀 봐! 펠리시앵 서른도 못 돼 부들부들 떠는구먼! 제 아비도 (그러니까 아쉴 게리요 말야) 술꾼이었지. 암, 술꾼이었고말고! 거 왜, 다들 잘 알잖아. 어이, 말해보라구! 아쉴 게리요는 덜덜거리지는 않았지.”
슬픈 포도주 이야기 한 편을 들려주겠다. 이야기는 파리에서 벌어진다. 주인공의 이름은 듀빌레다.
그러니까 1945년 1월, 파리에는 에티엔 듀빌레라는 포도주에 환장한 서른일곱인가 여덟인가를 먹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불행히도 포도주는 구할 수가 없었다. 당시의 포도주 값은 한 병에 이백 프랑이었고, 듀빌레 씨는 부자가 아니었다. 한 공공기관의 말단 직원인 그는 뇌물이야 주기만 한다면 두말 않고 받았을 테지만, 워낙에 시시한 자리를 맡고 있던 터인지라 돈 될 거리라곤 전혀 생기지 않았다.
장인은 월 천오백 프랑에 합당한 음식도 편의도 제공받지 못한다는 것이 불평이었다. 그러면 사위는 딴 데 가서 사시라고 맞받아쳤고, 종내에는 딸도 노망이라고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듀빌레 씨의 가족들은 자나 깨나 먹을 것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와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소시지와 쇠고기파이와 통닭과 초콜릿과 케이크가 한보따리씩이었다. 하지만 듀빌레 씨만은 포도주를 생각했다.
홀로 있는 시간이면 수천수만 톤씩 흘러내리는 포도주의 몽상에 빠져들곤 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포도주에 가슴을 태우기 전 어느 토요일 밤, 마누라 곁에 누워서 잠을 설치던 듀빌레 씨는 이런 꿈을 꾸게 되었다. 아침 9시경, 어스름한 여명 속에 집을 나온 듀빌레 씨는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지하철역의 입구는 텅 비어 있었다. 개찰구에 서 있는 여직원은 그 얼굴로 보아 마누라임을 알 수 있었다. 표를 끊어준 뒤, 그녀가 무심하게 내뱉었다. “우리 아이들이 죽었어요.” 듀빌레 씨는 어찌나 괴로웠던지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땅속으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돌계단에 발을 들여놓은 채 아이들 생각은 잊어버렸다. ~~~샌드위치는 맛도 포만감도 겉보기와는 달랐다. 약간 실망한 듀벨레 씨는 꿈이 아닐까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자 꿈을 깰세라 얼른 적포도주 분수 쪽으로 달려들어서는, 받침대에 엎드린 채 꿀꺽꿀꺽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애를 써 봐도 포도주는 아주 조금밖엔 마셔지지 않았고, 솔직히 어찌나 조금이었던지 맛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 마누라가 말했다. “아버지를 좀 맡아줘요. 바구니에 계세요.” 그러자 그녀의 뒤쪽으로부터 두 세 걸음 떨어진 곳에 놓인 포도주 바구니 속에 두 발을 집어 넣은 채 우뚝 서 있는 장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차렷 자세로 꼿꼿이 서 있는 장인은 붉은색 손뜨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듀빌레 씨는 장인이 든 바구니를 어렵지 않게 들어 올려 마누라와 함께 승강장 끝으로 간 다음, 가장자리에다 내려놓았다. ~~~두빌레 씨는 신음하며 잠에서 깨어났다.
머릿속에서는 졸졸졸 흘러내리는 포도주 분수 소리가 연방 처량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듀빌레 씨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물은 전혀 마시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는 끔찍하리만치 무색투명한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식사는 한찬 진행 중이었고, 듀빌레 씨는 간밤의 꿈을 되새기고 있었다. 별안간 포도주 바구니에 대한 생각에 장인 쪽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흐릿하던 눈동자가 일순 호기심과 놀라움으로 반짝 빛났다. 듀빌레 씨는 문득 장인의 몸이 기묘한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홀쭉한 몸통과 좁고 미끈한 어깨와 가느다란 목덜미 위에 얹힌 둥굴둥굴한 벌건 대머리는 무언가를 연상시키고 있었다. “꿈이 아냐. 영락없는 포도주 병인걸.” 듀빌레 씨가 중얼거렸다.
보면 볼수록 닮은 것 같았다. 불그스레한 대머리를 얹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마개 뽑지 않은 포도주라고 할 수 있었다.
듀빌레 씨는 이 집착을 떨치기 위해 오후 내내 집을 비웠다. 하지만 저녁 식탁 앞에서 장인을 다시 대하게 되자 그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닮은 모습에 가슴이 다 두근거리는 것이었다. 사위의 끈질긴 시선을 알아차린 장인이 마침내 발끈 성을 냈다. “계속 쳐다보는 걸 보니, 내 머리가 퍽이나 괴상하기도 한 모양이지? 틀림없이 많이도 먹는단 생각일 테지. 양배추 심에, 묵은 감자에, 얼어터진 당근이나 주면서, 그래, 월 천오백 프랑이 모자란단 말인가? 나 원!”
사위는 얼굴을 붉히며 공손하게 사과의 말을 더듬거렸다.
그날 밤은 몹시도 잠을 설쳤다. 악몽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포도주나 장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현관으로 막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듀빌레 씨는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장인의 방으로 달려가서는, 바닥에 납작하게 뻗어있는 장인을 발견했다. 영감은 무언가에 걸려 미끈하고는, 넘어지면서 서랍장의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사위는 부들부들 떨며 장인을 부축해 세운 다음, 욕실까지 데리고 갔다. 눈썹 언저리의 작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듀빌레 씨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꼼짝 않고 서서는, 그 금쪽같은 포도주의 아름다운 붉은 빛깔을 바라보고 있었다. 몽상에서 깨어난 것은 마누라가 달려온 다음이었다. 아내가 상처를 닦아내는 동안, 듀빌레 씨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마개 근처에 부딪혔어. 그나마 찬만 다행이지.”
이날 이후 듀빌레 씨에게는 직장으로 나가는 일이 끔찍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은 혹 자신이 없는 사이에 장인이 깨어지지나 않을까 벌벌 떨었던 만큼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안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되는 미친 듯이 지하철을 ㅈ비ㅓ타고 헐레벌떡 집까지 달려와서는, “장인어른 잘 계셔?” 하고 묻곤 했다.
한 발짝 한 발짝을 살펴 줘가며, 또 문짝을 조심하라고도 당부해가며, 어떻게든 편안하게 모시려고 고심하는 것이었다. 이 태도의 변화에 감동한 장인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답해주었고, 덕분에 집안에는 이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손에 병따개를 쥔 채 자신의 주의를 맴도는 사위를 볼 때면 영감은 왠지 막연한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침내 영감이 물었다. “헌데 자네, 그 빌어먹을 병따개는 뭣 하러 만날 들고 있는 겐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듀빌레 씨도 수긍했다. “옳은 말씀이군요. 확실히 너무 작아요.” 그러고는 못내 아쉬워하며 병따개를 부엌의 서랍장에 챙겨 넣었다.
어느 날, 점심때쯤 직장에서 돌아오던 듀빌레 씨는 1940년도의 퇴각을 함께했던 같은 연대 내의 옛 전우를 지하철에서 만나게 되었다.
“모로 중사가 그때 포도주를 어떻게 땄는지 기억하나? 부지깽이로 한 방에 퍽! 주둥이를 깨버렸지. “
듀빌레 씨는 추억에 가득 잠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에는 뭔지 모를 기쁨이 감돌고 있었다.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장인어른 잘 계셔?” “까꿍!” 영감이 직접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며 대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허허 웃었다. 식사시간이 되었다. 영감이 자리에 앉을 무렵, 듀빌레 씨가 오른손에 부지깽이를 들고 다가왔다. 그런 다음 장인의 턱을 한 손으로 받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세요.” 영감은 벙긋 웃었다. 듀빌레 씨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적당한 거리를 마련한 다음, 부지깽이로 영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났으나,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련한 늙은이가 비명을 꽥 질렀다. 듀빌레 씨의 아내와 아이들이 달려와 울며 고함치며 말리려고 애썼다. 하지만 듀빌레 씨의 눈에는 붉은 포도주밖엔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비명을 듣고 달려온 이웃 한 사람이 부엌 안으로 뛰어들었다. 부르고뉴산 포도주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에 평소에 부르고뉴산을 특별히 아꼈던 듀빌레 씨가 이번에는 이쪽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이쪽으로는 워낙에 완강한 저항이 느껴졌던 터라 금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구르다시피 계단을 내려간 그는 한손에 여전히 부지깽이를 거머쥔 채 아파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길거리에는 황홀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모양도 가지각색인 수십 수백 병의 포도주들이 때론 한 병씩, 때론 두세 병씩 무리를 지어 보도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듀빌레 씨는 우람한 부르고뉴산과 날씬한 알자스산 한 쌍을 한동안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먼지를 뒤집어 쓴 행색 때문에 특별히 구미가 당기는 듯한 거지에게로 다가가 사정없이 부지깽이로 후려갈겼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듀빌레 씨는 지금 정신요양소에 있다고 한다.
[은총]
가브리엘 거리는 물론, 전 몽마르트를 통틀어 1939년도에 가장 착실했던 기독교인은 뒤페리에라는 사람이었다. 어찌나 경건하고 올바르고 자비로운 사람이었던지, 하나님은 그가 죽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아직 한창 나이일 때부터도 머리에 하늘나라의 둥근 테를 달아 밤이나 낮이나 떠나지 않게 하셨다.
확실히 이 같은 특별한 총애에 대해 그의 아내가 설령 기뻐해주진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울화통에 분통만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소리쳤다. “저게 무슨 꼴이람? 어떤 꼴인지 좀 보라니까. 이웃들한테나, 동네사람들 한 테나, 사촌 레오폴한테나, 정말 자랑이겠구려! 한마디로 가관 이예요! 두고 봐요, 온통 우리들 얘기로 수군덕거리게 될 테니!”
뒤페리에 부인은 남다른 신앙심과 반듯한 품행을 지닌 훌륭한 아낙이었지만, 속세의 허망함은 아직 그녀의 눈앞에 나타나주질 못했다. 그리고 무지로 인해 선을 비켜가게 되는 여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창조주보단 자기네 아파트의 관리인에게 잘 보이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층의 이웃이나 달걀집의 아낙네가 둥근 테에 관해 묻지나 않을까하는 조바심은 대번에 그녀를 앙칼진 성격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수차례에 걸쳐 그녀는 남편의 머리 위에서 밝게 빛나는 동그란 하얀 고리를 떼어내려고 애써보았지만, 그것은 마치 햇살을 붙잡으려 들 때와 마찬가지로 단 일 센티미터도, 꼼짝도 해주지 않았다. 머리칼이 돋아난 이마 언저리로부터 뒷목덜미까지 제법 낮게 뱅 둘러쳐진 뒤페리에 씨의 둥근 테는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일 때면 애교스럽게 따라 흔들리곤 했다.
메닐몽탕 구의 조그만 신발공장에서 경리 직을 맡고 있던 그는 작업장 사이에 위치한 성냥갑만 한 막사를 혼자 쓰고 있었고, 덕분에 곤란한 질문들을 피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바깥을 나가려들지 않았다.
부엌에서 끼니 사이사이의 길고 무료한 시간이 흘러갈 때면, 뒤페리에 부인은 뜨개질은 단 한 코도 뜨지 못한 채 남편의 테를 원망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대개는 성경을 펴들고 있는 뒤페리에 씨 쪽은 천사들의 날갯짓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마냥 행복한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에 나타난 헤벌쭉한 웃음은 마누라의 속을 더욱 뒤집어놓을 뿐이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나선 뒤페리에 씨는 집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가브리엘 거리 내에서 어떤 장례행렬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가 소리쳤다. “그 테 떼어내욧! 떼어내욧. 지금 당장! 두 번 다시 꼴도 보기 싫어!”
뒤페리에 씨는 자기 마음대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
새벽 미사를 절대 빠트리는 법이 없는 뒤페리에 씨는 신의 은총을 입게 된 이후로는 몽마르트의 사크라쾨르 대성당의 미사에 참석하고 있었다. 모자는 벗을 도리밖에 없었으나, 교회는 안이 꽤 넓은데다가, 이런 이른 시간에는 신도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기둥 뒤에 숨을 수 있는 아침이 있었다. 미사가 끝나고 출구를 막 나서려는 순간, 시집 못간 웬 늙은 여자가 그의 발 앞으로 뛰어들더니. “성 요셉이시여! 성 요셉이시여!”를 외치며 그의 외투에 마구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뒤페리에 씨는 순간 우쭐했으나, 그 열렬한 숭배자가 자기 집에서 두 발짝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는 늙은이임을 알고는 ㄷ아황한 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그 테 떼어내요. 할 수 있어. 할 수 있지 않아! “ 뒤페리에 씨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차마 묻지를 못해 고개를 떨어뜨렸다. 뒤페리에 부인이 덧붙였다. “간단해, 죄를 지으면 되잖아요.”
“그놈의 둥근 테는 굳세게도 붙어 있군요. 먹는 게 그쪽으로 다 가는 게 아닌가 몰라. 이제 보니 확실히 알겠어요. 식탐은 죄가 아니에요. 딱 한 가지 흠이라면 돈이 많이 든다는 건데, 이럴 거면 야채죽이나 국수를 도로 못 갖다 먹일게 뭐야!“
“입 닥치기나 해! 나한테 도로 야채 죽이랑 국수를 먹인다고! 어디 그러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있을 줄 알고? 국수를 도로 먹이다니! 배짱도 좋지! 좌우간 제 아낙을 위해서 진창 속을 나뒹굴어봐야 알아주는 게 고작 이런 식이라니까! 시끄러 따귀를 갈겨줄까 보다!”
억압받는 식탐은 교만이 깔린 분노까지도 몰고 오고 있었다.
자신의 고함질에도 반응이 없는 하늘을 본 그는 남을 시기하기로 작정했다.
“난 그래도 하나님이 조금은 더 깐깐하신 줄 알았어요. 그렇게 처먹고, 잘난 체하고, 때리고, 용렬하게 구는데도 빛이 죽지 않는 걸 보면, 내 쪽도 천국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뒤페리에 씨가 소리쳤다. “ 입 닥쳐! 언제까지 날 걸고넘어질 게야?”
참다못한 사장이 회사에서 쫓아내던 날, 뒤페리에 씨는 모자를 벗은 채로 해고통지서를 받아들었다. 사장이 물었다. “머리에 쓴 그건 뭔가?” “둥근 테요.”
해고 소식을 알리자 뒤페리에 부인은 앞으로 어쩔 작정인지 물었다. 뒤페리에 씨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지금이야말로 인색이 죄악에 뛰어들 때인 것 같군.” 여태까지의 죄악 중에 인색의 죄악은 뒤페리에 씨에게 가장 많은 노력을 요하는 것이었다. 타고난 구두쇠가 아닌 자에게는 이것이 애초부터가 여타의 것들에 비해 훨씬 위험도가 적은 유혹이었던 데다가.
교만, 분노, 식탐, 시기, 나태, 인색을 두루 겸비한 뒤페리에 씨였건만, 그의 영혼은 아직 한 가닥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마에 영광의 둥근 테를 두른 채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뒤페리에 씨는 일곱 가지의 죄악을 걸머진 몸으로 수치심이라곤 도통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엉덩이를 걷어차는 것으로 마리 쟈니크 양의 꺼져가는 신앙심을 되살려 줘가며, 혹은 호텔 문 앞에서 가로챈 돈을 둥근 테의 불빛 아래서 세어보기도 해가며 어린 창녀의 노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이런 타락과 방탕의 수렁 속에서도 이따금씩은 양심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신의 무한한 자비심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연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파리를 가로질러]
토막 난 살덩어리는 군데군데 적갈색 얼룩이 묻은 두터운 헝겊에 싸여 지하실 한 결에 널브러져 있었다. 날카로운 옆모습에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반백의 머리와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장블리에씨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앞치마를 두른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콘크리트 바닥 위를 걷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마르탱 씨가 들어왔다. 장블리에 씨가 기다리던 두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양 손에 가방 한 개씩을 든 사내는 작달막하고 다부진 마흔 다섯 살 가량의 남자로, 몹시 낡은 외투를 어찌나 꽉 껴입었던지 엉덩이의 굴곡과 튼튼한 견갑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마르탱 씨에 이어 또 한 명의 낮 선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곱슬곱슬한 금발에 족제비눈을 가진 삼십대의 키 크고 건장한 사나이였다.
“오늘 저녁엔 레탱보 씨가 시간이 없다는 구려. 대신 이 그랑질이라는 친구에게 부탁했소. 정직한 친구요. 이 친구라면 믿어도 될 거요. 게다가 피곤이라곤 잘 모르는 친구지.
천을 걷어내자 백열등 불빛 아래 도살된 돼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오늘 저녁은 어디요? “ “몽마르트 쪽의 콜랑쿠르 거리요. 정육점 주인이 자정부터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요. 자자, 시작합시다.
“병원 길에서 콜랑쿠르 거리까지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돼지를 싸 짊어지고 도둑놈 발걸음으로 온 파리 시내를 헤매고 나면, 마지막엔 지름길인 몽마르트 쪽의 팔 킬로미터 짜리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지. 사방은 경찰에, 헌병에, 독일 놈들 천지고. 다 육백 프랑을 벌어보자고. 이래도 이용한단 말이오?“ “사백 프랑을 주겠소.” “동냥은 딴 데 가서 하시오. 우린 거지가 아니오.” 장블리에 씨가 아니꼬운 투로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아침에 소개받았던 자전거꾼들을 쓰는 건데. 하지만 난 당신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이게 보답이구려!”
“그런데 장블리에 씨, 여기가 45번지 맞지요?”
“그건 왜 묻소?” “그냥 안다는 말이죠. 폴리보 거리 45번지 장블리에 씨라. “ 이렇게 내뱉는 말투 속에는 그 하나만으로도 노골적인 협박과 조롱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수로 쪽에서 센 강 쪽으로 사나운 북풍이 불어 닥치는 그날 하루는 얼어 죽을 듯 한 추위였다.
어스름한 저녁햇살은 대로 쪽의 건물들을 어둠 속으로 침몰시키기는커녕, 하나하나의 형체와 윤곽을 점점 더 또렷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그랑질이 노을의 이 마지막 발버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울적한 시간대의 영향 탓인지 손님들은 모두 말이 없었다.
“인생이란 것도 저것과 비슷하지 좀 쳐다보자고 들면 고 망할 것은 찬바람이 불도록 냉랭하게 굴거든.” 마르탱 씨가 유리창 너머로 어두워져가는 풍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한 점의 노을 속에서 인생의 이미지가 아닌, 보대 구체적인 무언가를 찾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게 주인이 불을 켜고 유리창에 파란색의 차단용 커튼을 내렸다. 천천히 바쪽으로 돌아서던 두 사내의 눈길이 부딪쳤다. 서로 낯모르는 사이인데다 상대방은 별다른 관심을 내보이는 기색도 아니었지만, 마르탱 씨는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 석양을 바라보는 동안 둘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마르탱 씨가 말했다. “노인들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야. 언제나 옛 시절과 추억을 떠올리곤 하지. 포도주와 마찬가지야. 오래된 것일수록 맛이 있지. 갓 담은 것들은 대부분 한심하잖아. 안 그래?”
“저건 스무 살 시절에 남은 추억이라곤 중국 전투밖에 없는 노인이야. 1914년도의 전쟁을 치른 나로선 아직 그립다고 생각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걸.”
부녀가 떠나자 가게의 단골손님들은 뱃사람 노인의 삶과 그의 중국전투에 대해 몇 마디 의견들을 주고받았다. 그 중 두 명은 중국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눈알을 빼먹는 것이 관습이다. 아니다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고 있었다.
“알겠어! 셰퍼드들은 항상 둘씩 붙어 다닌다 이거지! 알겠다구!”
곱슬머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은지,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러고는 벽을 따라 차곡차곡 쌓인 물품들을 시찰하기라도 하듯 간간히 서서 만 저보기도 하며 천천히 지하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포도주를 포함하여 주로 어마어마한 양의 쇠고기와 햄과 소시지, 말린 야채와 설탕 등이었다. 그랑질은 나무궤짝 하나를 열었다가 요란하게 뚜껑을 덮은 다음, 그 안에서 집어낸 밀가루 한 줌을 포도주 바구니에다 획 뿌렸다. 조금 더 가 불룩한 종이 포대를 발견하게 되었을 무렵에는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구멍이 뚫린 곳에서 붉은 콩이 좌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놀란 장블리에 씨가 후다닥 달려왔다. “폴리브 거리 45번지 장블리에 씨, 이젠 천 프랑이오.”
“좋소, 끝냅시다. “ 일이 더 커질세라 지레 체념한 장블리에 씨가 호주머니에서 두툼한 지갑을 꺼낸 다음, 곱슬머리에게 이천 프랑을 내밀었다. 곱슬머리는 돈을 받아 챙김과 동시에 장블리에 씨가 엉겁결에 흘린 또 한 장의 지폐까지 홱 가로채 갔다. 그러고는 다른 두 장의 지폐와 함께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다음, 지하실 시찰을 계속했다.
밤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하늘을 가린 뭉게구름은 바람을 따라 ㄹ흐르고 있었다. 영하 사 도의 추위지만 틀림없이 차차 풀릴 거다. 하고 마르탱 씨가 말했다. 폴리보 거리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가방을 쥔 손은 이미 돌이 되어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포효하며 썩은 가지들을 부러뜨리고 있었다. 말을 하기조차 피곤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정직한 사람이라 자부하는 마르탱 씨로서는 암시장으로 떼부자가 될 수만 있다면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는 일개 인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소소한 품팔이꾼이다 뒷문 배달부며, 쪼들리는 서민들에게 고기 한두 근을 파느라 이 계단 저 계단을 오르내리는 보따리장수일 뿐이다. 죄라면 지나치게 생각이 많다는 것과 웬만큼 설치고 욕심내기엔 너무도 성품이 곧다는 것이다.
생 루이 섬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두 짐꾼은 약속이나 한 듯 바람의 습격을 피해 나란히 샛길로 접어들었다. 골목 안을 지나다니는 찬바람은 조금 전까지 얻어맞던 모진 강풍에 비하면 산들바람이나 마찬가지였다. 후미진 이곳의 상대적인 적막감이 묘하고도 어색하게 귓가에 전해져 왔다. 몇 발자국을 서성인 두 사람은 어느 돌문 한 귀퉁이로 몸을 피한 뒤 가방을 내려놓았다. 마치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데운 포도주를 주시오. “ 그랑질이 말을 뚝 잘랐다. “다 떨어졌소.” “주시오.”
오래전부터 마르탱 씨에게는 지극히 건강한 이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몇 개를 뽑아내어 입 안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이 꿈이었다.
“우리 집에 숨을 수 있을 거야. 난 요 근방에 살거든. “ 작업실은 널찍하고 아늑했다. 그랑질은 유리창에 파란색 커튼을 드리우고 실내복을 걸친 다음, 미지근하게 식은 석탄 난로 안을 살폈다. 난로 안에는 뜨뜻한 재밖엔 남아 있지 않았다. 마르탱 씨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문 옆에 선 채 불쾌하고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랑질이 정중한 말투로 앉을 것을 권했다. 마르탱 씨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창 곁에 탁자에 놓인, 그랑질이란 서명이 붙은 파스텔화를 턱으로 가리켰다. 가슴을 드러냈거나 치마를 걷어 올린 반라의 여인들이었다. 그 중 하나, 완전히 발가벗은 여인은 하이힐을 신은 채 빨강머리 위에 오페라 망원경을 걸쳐주고 있었다. “자네가 그린 건가?”마르탱 씨가 물었다. 그랑질이 대답했다. “그래, 나야. 화가광장이랑 그 밖의 다른 가게로 넘기지. 이런 그림들은 항상 찾는 사람들이 있거든.”
“이건?” 마르탱 씨가 도시풍경을 그린 이젤 위의 유화 한 점을 가리켰다. 그날 오후 늦게 바스티유 근방의 카페에서 둘이 함께 바라본 유리창 너머의 전경을 옮긴 듯한 그림이었다.
그러고는 호주머니를 뒤적여 쟝블리에 씨의 오천 프랑을 끄집어내더니, 마르탱 씨에게 내밀며 말했다. “생각난 김에 말인데, 이거 이걸 뱉어낸 그 머저리한테 돌려주라고. 좋아할 거야.” 마르탱 씨는 돈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게에 도착하게 되면 쟝블리에 씨와의 약속대로 자네에게 사백오십 프랑을 주겠네. “혹시 잊게 되면 내가 이야기하지. 이제는 좀 앉으라구. 해제경보를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끓여 올 테니.”
거실로 되돌아온 그랑질은 잠시 서서 잠자는 동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르탱 씨는 입을 약간 벌리고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머리와 몸을 꽃꽂이 세우고 검정 모자를 뒤로 살짝 젖힌 상태로 코를 골고 있었다. 그랑질은 소리 없이 다가가 크로키 북을 펼쳐들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더러운 자식. 이제 알겠어. 날 갖고 놀았군! 난 널 불쌍한 놈으로 알고 도와주려고 했는데.
“화내지 마, 마르탱. 설명해줄게…….”
“네놈의 설명 따윈 필요 없어! 그리고 설명할 것도 없어! 앞뒤 생각할 줄 모르는 계집애들처럼 재미있어했겠지……. 계집애들처럼! 남은 빵 한 조각도 힘들게 버는데, 네놈은 남의 일터에 비집고 들어와선 날 망하게 하려고 별짓을 다했어!”
마르탱 씨는 빙글 뒤돌아섰다. 탁자에 펼쳐져 있는 발가벗은 여자들의 그림 위에서 일단 멎은 시선이 이젤에 놓인 여인의 초상화로 옮겨갔다. 실수는 없었다. 마르탱 씨는 예의 그 주머니칼을 손에 단단히 거머쥔 채 이젤 쪽으로 달려들었다. 허공으로 번쩍 치켜 올라간 칼이 그림을 북 찢어놓는가 싶더니, 이어 또 한 번의 칼질이 십자가를 그어놓고 말았다. “나도 남의 일거리로 장난칠 줄 알지…….” 마르탱 씨가 이젤의 발치에 놓인 풍경화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랑질이 먼저였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에 공습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르탱 씨는 칼날이 상대방의 뱃속을 찌르고 들어갔을 무렵, 그랑질이 내지르는 비명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다.
마르탱 씨는 살인자가 된 자신에 대한 생각에 그랑질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질루앵이란 화가를 아나? “ 형사가 물었다. “모르오.” 마르탱 씨가 대답했다. 형사가 신문지 포장에서 회색 헝겊표지의 크로키 북을 꺼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신문지 조각으로 표시를 해둔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마르탱 씨는 그림과 날짜를 보았다. “왜 죽였나?” 마르탱 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침묵이 이어졌다.
마르탱 씨는 차분한 어조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세상이 어디 내 뜻대로만 되겠소. 갑시다!”
[무관심]
출감한 다음 말인 7월의 어느 날 오후, 나는 로슈슈아르 대로에 면한 허름한 술집 ‘나침반을 찾아갔다. 감옥에서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친해진 동료의 소개로 ’애꾸눈 메데‘라 불리는 메데릭이란 자를 만나러 온 길이었다. ■ [Review] 최고의 포도밭에서 최고의 포도주를 만드는 한 사내는 타고난 체질 때문에 한 모금의 포도주도 마실 수 없다는 것이 늘 아쉬웠다. “포도 공장 주인이 포도주를 못 마신다!” 수치스러운 사실을 차마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고 그는 별별 짓을 해가며 사람들의 눈을 속였다. 급기야는 젊은 나이에 손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작가는 여기에서 포도주에 빠져버린 한 사내의 이야기로 이야기를 급반전시킨다. 또 다른 사내는 하급관리로 변변치 못한 자신의 월급만으로 비싼 포도주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분수대에서 포도주가 콸콸 쏟아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아내가 건넨 바구니 안에는 함께 사는 장인이 두 발을 집어넣은 채 우뚝 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해괴한 꿈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던 그는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대머리 장인이 꿈속의 바구니 안에 서 있던 모습과 연결되면서 포도주 병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날부터 사내는 병따개를 들고 장인 주변을 서성거리며 기회만을 노리게 되었다. 딸의 집에 얹혀살면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위의 눈치를 보는 장인이 불안을 느끼며 물었다.
“헌데 자네, 그 빌어먹을 병따개는 뭣 하러 만날 들고 있는 겐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본문>”
사내는 장인의 말을 인정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병따개로는 장인의 머리통이 너무 컸다.
그 후 사내는 옛 군대 시절 한 친구가 부지깽이로 포도주병의 주둥이를 날려버렸던 사실을 떠올렸다. 사내의 눈은 초롱초롱 빛났다.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부지깽이를 들고 장인의 앞으로 다가갔다. 장인의 턱을 한 손으로 받치고는 “움직이지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장인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그 길로 밖으로 뛰쳐나간 사내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통을 부지깽이로 갈겼다. 그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친다. (파리의 포도주) 작가는 글의 내용을 황당하게 전개하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상상력을 그대로 글로 만들어내는 재주, 그리고 현실과 교묘하게 접목시킨다. 저자는 1940년대 유럽 전쟁의 암울한 시기에 서민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위로를 주었던 그의 수많은 이야기 속에는 반전의 논리성이 들어있다. 이 책은 그가 쓴 몇 편의 단편들을 함께 모아놓은 책이다.
그림을 그리는 무명화가와 그림을 떼다가 파는 화상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눈치싸움이 있다. 그러나 싸움에서의 승리는 번번이 화상 쪽이었다. 여기서 작가는 화가의 그림이 “바라보기만 하여도 배고픔이 사라진다.”는 기상천외한 착상을 통해 상황을 반전시킨다. (좋은 그림)
가짜형사 노릇으로 밀매꾼들의 등을 쳐서 궁핍한 삶을 지탱하는 사내는 늘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자신의 부정을 오직 전쟁 때문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막상 전쟁이 끝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아내는 은근히 그를 다시 압박했다. 이제는 사회정의라는 명분으로 사람까지 해치는 흉악범으로 전락하다가 결국엔 철장 신세를 진다. (가짜형사)
현실의 삶과 경건한 종교적 삶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풍자적으로 엮은이야기. (은총)
무지해서 저지른 죄과에 대한 처벌에서, 그 무지를 갓난아기에 비유해서 소설 속에서 현실의 갓난아기로 만들어 버리고 사법적인 처벌을 고심하게 만드는 황당한 이야기. (당통)
지하실에서 밀도살 돼지를 몇 푼의 돈을 받고 정육점까지 운반해주는 사내는 자신의 수고보다 더 많은 이득을 취하는 공급자에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반박할 용기도 없었다. 어느 날 운반책을 가장한 친구가 그 일에 가담하면서 갈취 자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 친구는 생활에 여유를 부리는 화가로 한낮 재미로 그 일을 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내의 감정은 크게 상처를 받고 그를 살해한다. (파리를 가로질러)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서 새로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미셸 투르니에”는 그의 산문[포도주와 혼]에서 “마르셀 에메”의 [파리의 포도주] 이야기를 하면서 작가의 탁월한 솜씨, 반전을 꼬집었다. 작가는 그 반전을 서민들의 실제적 삶 속에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독자들은 가슴속의 응어리를 푼다. 전쟁의 암울한 시대에 많은 사람이 부정을 저지르고 또, 용기가 없어서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까지도 함께 아우르는 글 속에서 그가 얻은 국민작가로서의 명성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