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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회 잠언서 18-24장
잠언 18장 공동체에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
18장은 공동체 내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부 구절을 제외하고는 같은 의미를 반복하는 평행 대구 형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내용 구성을 분석해 보면, 전반부(1~9절)가 미련하고 악한 자의 그릇된 삶의 태도를 묘사한 반면, 후반부(10~24절)는 지혜로운 삶의 방법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생활에 있어 대인 관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본문에서는 대인 관계를 파괴하는 요소와 그것을 돈독히 하는 요소를 골고루 제시함으로써, 지혜로운 선택을 하도록 촉구한다.
“외톨이는 제 욕심만 채우려 하고 충고하기만 하면 화를 낸다”(1). 우리는 1절이 말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 왔다. 궤변을 늘어 놓거나 논쟁에서 반대 의견만을 내놓아서 사회부적응자임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진정 그 주장하는 바를 믿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목을 자신들에게 집중시키기 원해서이다. 그들의 주된 동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생각이나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신에 그들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한 철저한 이기주의에 있다고, 잠언은 말한다. 우리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얼마나 친절한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둔한 자는 슬기를 좋아하지 않고 제 생각을 내세우기만 좋아한다”(2). 이런 종류의 사람은 이질적인 사실들과 상관없이 논쟁들로 어떠한 의미있는 논쟁도 방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나 미련해서 어떤 것이라도 해결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은 미련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생각만 앞세우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를 보여주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기에 어떤 중요한 것을 진심으로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파멸은 앞서 마음의 오만이 있고 / 영광에 앞서 겸손이 있다”(12). 12절의 주제는 오만 대 겸손이다. 겉모습은 우리를 너무나 자주 현혹시킨다. 오만한 사람은 실제로는 뛰어나지 않다. 반면, 겸손한 사람이라도 해서 열등한 것도 아니다. 이같은 교훈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평가하는 근거로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발견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그들의 겉모습을 보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발견하시겠는가? 오만인가. 겸손인가.
“다 듣기 전에 대답하는 것은 미련함이고 수치이다”(13). 13절은 상식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올바른 태도를 말해주고 있다. 만일 질문을 듣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다. 그리고 듣지도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사람은 제 입이 맺는 열매로 배를 채우고 제 입술이 내는 소출로 배부르게 된다. 혀에 죽음과 삶이 달려 있으니 혀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20-21). 20-21절은 그 자신의 말에 만족을 발견한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작가나 대중 연설가들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이것은 말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뿌린대로 거둠”이라는 주제가 여기에 있다.
21절은 두 가지 결과, 즉 우리들이 말하는 것으로 인한 삶과 죽음을 확인한다. 또한 우리들이 말하지 않음의 결과들을 받아들이기도 해야 한다. 신약성경에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부인하는 것과 같다(마태 10,32; 로마 10,9-10).
잠언 19장 의인과 악의 삶
19장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드러나는 의인과 악인 혹은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점을 뚜렷이 대조한다. 그리하여 관용과 인자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또한, 여기서는 징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인생의 성패는 그러한 잘못을 범했을 때 어떤 태도를 지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의 허물을 겸손히 시인하고 훈계와 징책을 받아들이는 자는(20절) 새로운 출발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는 징계가 불가피하며(18절), 거만하고 어리석은 자도 징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25절).
“1 그릇된 입술을 가진 우둔한 자보다 가난해도 흠 없이 걷는 이가 낫다.
2 지식이 없는 욕망은 좋지 않고 발걸음을 서두르는 자는 길을 그르친다”(1-2).
1절은 가난해도 정직한 사람들과 정직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 사이의 대조를 한다. 이 구절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게으름 혹은 우둔함을 암시하지 않는 명예로운 단어이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 모두가 정직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잠언은 단순히 비록 가난하게 살게 될지라도 정직은 최상의 덕목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2절에서 나타나는 두 단어는 중요하다. “욕망”에 해당하는 단어는 우리의 코로 들이내쉬는 “공기”,혹은 “호흡”을 뜻한다. 사람들은 그의 영혼이 떠났을 때 숨을 거두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이 단어에는 목 혹은 목구멍과 같은 추가적인 의미가 더해져 어떤 식욕(잠언 26,30)이나 열정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들은 생기에 넘친 말 혹은 활기넘치는 발표를 묘사하기 위하여 “힘찬"(spirited)이란 단어를 여전히 사용한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자기"(잠언 8,36),“생명"(잠언 7,23) 등이며,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와 비슷한 말은 헬라어 프뉴마이다(사도 2,4;7,14).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다른 단어는 “서두름"(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6번 나오고 잠언에서 4번(21,5; 28,20; 29,20)나타나는데,그 중 처음이다)이다. 이 단어는 급히 행해진 결정의 어리석음을 암시한다. 급하게 한 행동으로 ‘방향을 잃어버리게”된다. 영리한 목수는 3번 재고 1번 자른다. 그러나 바쁘게 행동하는 어리석은 목수들은 1번 재고 3번 자른다. 이 구절은 신중한 계획에 대한 필요뿐만 아니라 사려깊은 계획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준다.
“아직 희망이 있을 때 자식을 벌하여라. 그러나 죽일 생각까지는 품지 마라”(18). 18절은 자녀에 대한 적절한 징계를 권고한다. 때때로 자녀들은 교육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하느님은 여기에서 부모들에게 그의 지속적인 징계 안에 희망이 있다고 확실하게 보증한다. 18절의 후반부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죽기까지 아이들을 때리지는 말라고 해석하거나,또는 만일 아이들을 때리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교육되지 못한 사람이 되어 결국에는 그들 자신을 망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바꾸어 말하면,너무 매질을 많이 하거나 또는 역시 너무 적게 매질을 하면 둘 다 아이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본문은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네 영혼을 높이지 말라”인데,이 모호한 관용구의 의미는 이 가르침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만든다. 확실한 것은,이 구절은 강한 징계를 권고한다는 것뿐이다.
“화를 잘 내는 자는 벌을 받는다. 네가 그를 구해 주려 하면 화를 돋울 뿐이다”(19). 화를 잘내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결과가 없다. 화를 내는 근본적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
“충고를 듣고 교훈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마침내 지혜로워진다”(20). 20절은 잠언의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불릴 만한데 왜냐하면 잠언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가장 잘 요약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짧은 몇 마디의 이 말이 잠언의 정수(精體)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많은 계획이 들어 있어도 이루어지는 것은 주님의 뜻뿐이다”(21). 하느님의 주권적 통치에 관하여 처음으로 말하는 구절은 잠언 16,1.9이다. 이 21절은 다시금 놀라운 확신을 주는 이 진리를 반복한다. 하느님은 그러한 통제 있어서 심지어 우리의 악하고 어리석은 결정까지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놓으신다. 때때로 “계획”이라는 단어 대신에 “결정”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경우가 있는데,이 단어는 인간이 악한 것들을 꾸미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지 여기서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하느님의 목적이 승리할 것이다.
“아버지를 구박하고 어머니를 내쫓는 자는 수치스럽고 파렴치한 자식이다”(26). 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인간은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부모를 구박하고, 어미를 업신여기는 자는 금수만도 못한 존재이다. 우리의 자녀가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올바로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잠언 20장 경건한 삶
20장에는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떻게 경건하게 생활해 나갈 것인지를 밝히기 위한 갖가지 교훈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내용을 두 가지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절제의 미덕이 강조되었다. 포도주나 독주(1절), 성마른 다툼(3절), 지나친 수면(13절), 험담(19절) 등이 모두 절제의 대상이다. 둘째, 하느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강조되었다. 하느님은 사람의 깊은 내면세계를 일일이 보살핌으로(27절), 하느님께 자신의 걸음을 의탁하는 것이 형통의 비결이다(24절). 2절, 8절, 28절 등에 언급된바, 정의의 심판을 수행하는 임금이란 잠언 저자가 바라는 모범적인 이스라엘 임금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통치자요 주권자이신 하느님을 암시한다.
절제의 대상인 구절들이다.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1). 취하게 하는 모든 음료는 사람을 약하게 한다. 물론 적당한 술은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강해지고, 더 지혜로워지고, 행동이 더 민첩해지고 더 말을 잘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인 실험은 그들을 더욱 느리게 하고, 능률이 줄어들게 하고, 마침내 조리 있는 생각과 말을 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술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을 마비시킨다. 사람은 술을 해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취할 수도 있고 끊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술은 거의 확고한 지배력으로 희생자를 사로잡는다.
“분쟁을 멀리하는 것은 사람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미련한 자는 모두 싸움에 뛰어든다”(3). 3절은 자기 통제에 관하여 가르친다. 앞선 구절들에서 다툼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경고를 했는데(17,14.19), 3절도 마찬가지로 지혜로운 자는 쓸모없는 논쟁을 피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는 자라고 가르쳐준다. 성공적인 인간관계도 이와 같다. 타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방법도 많이 있지만 타인을 세우는 방법은 한 가지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논쟁을 일으킬지라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며, 불화를 피하여 적을 친구로 만든다.
“서로 다른 저울추와 서로 다른 됫박 주님께서는 이 둘을 역겨워하신다”(10). 잠언서에서 자주 언급한 구절(11,1;16,11;20,23)로써 정직함을 잃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상인들은 국가 표준에 따른 돌무게를 갖고 있었지만 또한 대부분이 겉보기에는 똑같지만 무게는 다른 돌무게 측정기구도 갖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고대 이스라엘의 돌무게가 달랐던 것만큼 부정직한 사람들, 예를 들면 손가락으로 저울을 누른다든지, 정교한 포장기술로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가 있다.
“잠을 좋아하지 마라. 가난해진다. 눈을 뜨고 있어라. 양식이 풍부해진다”(13). 게으름과 보상이라는 주제가 혼합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게으름은 가난을 낳고 열심히 일하는 것은 부를 낳는다. 잠언은 일반적인 것들을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부해지는 것에는 열심히 일하는 것 혹은 게으름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며, 상속, 교육, 출세의 기회, 그가 살고 있는 정부의 형태 등이 있다.
“처음부터 빨리 얻은 재산은 나중에 복이 되지 않는다”(21). 상속받은 것은 열심히 일해 얻은 것처럼 소중한 가치를 갖지 못한다. 일부 자녀들이 실제로 상속된 부로 인해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처음부터 빨리 얻은 재산”은 개인의 자주성이 파괴되고 성장을 가로 막는다. 결국 그러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은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게 된다.
“‘내가 악을 되갚겠다.’ 하지 말고 주님께 바라라. 그분께서 너를 도와주신다”(22). 22절은 처음으로 구약성경이라기보다 신약성경처럼 들리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처벌에 대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정의의 원칙이 깔려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1-44)고 가르쳤다. 로마 12,19은 또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신명 32,35을 인용한 것이다.
“인간의 영은 주님의 등불 그것은 배 속 온갖 깊은 곳까지 살핀다”(27). 주님의 등불은 사람의 영혼 혹은 양심과 같다.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작은 빛을 주시어 그들이 악한 짓을 할 때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신다. 고대 사람들은 이러한 양심이 바로 등불이라고 불렀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이러한 등불은 너무 어둡게 되지 않도록 그를 지키고 보호한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은 전인(全人), 곧 그의 정신, 그의 마음, 그의 영혼을 살피고 그에게 그 자신의 상태를 보여 주고 칭찬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책망도 한다.
“젊은 자의 영화는 그의 힘이요 늙은 자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29-30).
나이가 들어 머리가 백발이 된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또한 때로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드는 매는 악을 없애는 귀중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 젊은 사람들은 어르신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기 싫어하고, 사람을 깨우치게 하는 사랑의 매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각 시도마다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되면서 선생님들은 적극적으로 가르치려들지 않고 몸만 보호하려고 한다. 아이들의 신고 하나면 선생님들은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조사를 받는다. 그 수치심에 생명을 끊는 선생님들이 있다. 예전에 무자비한 체벌도 문제지만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귀한 매를 아예 들지도 못하게 된 것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것은 영적인 생활에도 큰 영향을 준다. 하느님은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시기 위해 매를 드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 흐름대로 휩쓸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느님의 견책도 감사하며 지혜롭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잠언 21장 임금의 마음
21장 전체 주제는 1절에 있는 ‘임금의 마음’입니다. 1절부터 5절에서 임금의 마음에 대해서 말씀한다. 그리고 임금의 마음에 있지 않는 것이 6절부터 19절에 있다. 그리고 16절부터 29절은 죽음의 회중의 모습이다. 30절 31절은 임금의 마음이 ‘주님’에 있다는 주제 말씀이다. 여기서는 의인과 악인의 특징이 다시금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본 장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정의와 공정(3절) 혹은 의로움과 신의(21절)이다. 저자는 먼저, 마음을 살피시는 주님 앞에서 정의를 행해야 할 것을 언급한다(1-3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임금은 세상의 임금과는 다르게 주님 앞에 복종하는 자,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을 다스리는 청지기이다. 하느님 앞에서의 임금은 하느님께 복종하는 자이고 청지기이다.
“임금의 마음은 주님 손안에 있는 물줄기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끄신다”(1).
마음이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채워지는 것인데 물줄기는 그냥 내리는 비가 아니라 모인 물이기 때문에 필요할 때 마다 공급해줄 수 있는 물이다. 그리고 식물을 자라나게 하고 또 필요할 때 적절하게 채워질 수 있는 물이 곧 봇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서 자유와 기쁨과 담대함을 갖게 한다.
하느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사람이 똑같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불의를 보고 참는다면 그 사람은 온유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싸워야 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착한 병에 걸린다. 화를 내지 않고 사람들의 비유를 잘 맞추고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 마치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 때 그 때 마다 희, 노, 애, 락을 드러내고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이 주신 우리들의 마음이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2).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고 계신다. 그래서 동기가 중요하다. 과정은 하느님의 방법대로 하고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동기는 하느님 앞에서 선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한 것인지 아닌지를 늘 물어야 한다. 우리를 살펴보시는 것은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3).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과정이 구약에서는 제사였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나와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정의와 공정을 지키는 것이 제물 즉 제사라는 절차로 만들어진 것 보다 훨씬 더 기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제사를 드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제사는 정의와 공정라고 하는 그 안에서 제사를 드려야지 진정 하나 됨이 될 수 있다. 임금의 마음이 무엇으로 지어져야 되느냐 하면 봇물 같아야 되고, 주님이 보살펴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되고, 정의와 공정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속임수 혀로 보화를 장만함은 죽음을 찾는 자들의 덧없는 환상일 뿐이다”(6).
속이는 말 자체가 관계를 비틀어버린다. 관계를 왜곡시킨다.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돈을 떼어먹었다. 그래서 주인이 화가 나서 가서 한 번 셈을 해야 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 종이 사람들이 주인에게 빚진 것을 다 탕감해주었다. 빚을 탕감해 준 것이 주인의 눈으로 볼 때는 좋게 보였다. 그것은 관계 때문이다. 망해도 관계로 살아남을 수 있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가 죽겠다고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긁어모아서 주인에게 주었다면 자기는 살 수 있지만 결국 나중에는 관계가 다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라는 것이 도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관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돈이 쉽게 악의 뿌리가 되는 이유는 그 돈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파괴하는 것이 성경에서 보면 다 죄이다. 또한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어떻게 끊는지도 중요하다. 기준을 세워주지 않으면 관계가 흐트러져버린다.
부부유별이라는 말처럼 부부간에 지킬 도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 안에서도 ‘유별’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잘못할 경우 선을 뛰어 넘어가서 하느님 앞에서 관계가 다 흐트러져버리는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느님과 똑같이 대우해 주신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은 하느님이고 나는 피조물이다. 하느님 안에서 아주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 중에 하나가 재물인데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관계가 구별이 안 되고 흐트러져 있는 것이고 그것이 죽음이라고 말한다.
“다투기 좋아하는 아내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옥상 한구석에서 사는 것이 낫다”(9).
다투는 여인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데 특별히 부부관계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하나의 상징으로 보여준다. 아버지와 아들, 신랑과 신부, 주인과 종 이 세 가지가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의 상징이다. 주인과 종에서 아버지와 아들로 아버지와 아들에서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가는 것이다. 점점 더 친밀해지는 관계의 세 단계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로 살다가 하느님이 나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또 아버지가 내 신랑이시라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점점 친밀감으로 가서 하느님과 단일을 이루는 관계이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성경에서 보면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이다. 교회냐 가정이냐? 묻기도 하고 가정교회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초의 공동체가 가족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가족의 관계가 하느님 안에서의 진정한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같이 이루어진다. 그런 관계에서 만약 관계가 무너졌다면 이 자체가 큰 집이라고 하는 아무리 좋은 환경과 아무리 좋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사실은 문제가 있다.
“어떤 지혜도 어떤 슬기도 어떤 조언도 주님 앞에서는 가치가 없다. 전시에 대비해서 병마를 준비하더라도 승리는 주님께 달려 있다”(30-31).
시작도 끝도 주님 앞에 있다. 그래서 어떤 지혜도 어떤 슬기도 조언도 주님을 당하지 못한다. 아무리 전시에 병마를 준비해도 싸움의 주체는 주님이다. 그래서 임금의 마음은 주님 앞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지고 주님 앞에 있어야 승리하고 이길 수 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태도이다. 손해가 있다 할지라도 100%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실재는 듣고 보고 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영으로 오셔서 물으라고 하신다. 질문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하느님이 나를 신뢰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말씀을 내 생각과 마음에 두셨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의 마음인지 하느님의 마음인지 헷갈린다. 그래서 보고 들은 자가 말에 힘이 있다. 그런데 모세도 그렇고 기드온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다 하느님이 보여주시고 듣게 하셨는대도 계속 진짜냐? 맞냐? 확실한 것이냐고 물었다. 안 될 때는 그렇게 묻기라도 해야 한다. 가끔 하느님을 시험해 보시기 바란다. 영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무조건 믿는 것보다 낫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시는데 영원한 생명을 갖는다는 것이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을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셔서 하느님도 사람과 의논하고 하느님도 사람과 사랑하기를 원한다. 사람을 어떤 힘으로 조종하면 그 조종하는 힘을 빼버리면 저 사람과 내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진짜 자유의지를 통해서 사랑할 것인지 말 것인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하느님도 그런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랑 진짜 사랑을 하시기 위해서 하느님 스스로 힘을 쫙 빼신다.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되었을 때 진짜 사랑하는지 안하는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이 군림하는 신으로 우리에게 오셨으면, 뭘 할 때 마다 제재를 받고 징계를 받고 그 때 그 때 마다 벼락을 맞는다면 진정한 관계로 갈 수가 없다.
진정한 관계는 조금은 버릇 없이 대하는 것이다. 너무 버릇이 없으면 콩가루지만 조금은 버릇이 없는 관계가 진정한 관계이다. 인격과 인격으로서의 관계를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한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 자유의지는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이다. 하느님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조차 없으면 움직이는 로봇과 똑같다. 하느님은 영원한 존재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것이고 하느님과 동등한 사랑을 나누기를 원한다. 그래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인격적인 관계인 것이다. 서로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로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잠언 22장 올바른 삶의 선택
먼저 1-16절에서 저자는, 올바른 삶의 선택을 유도하고 있다. 재물과 이름(명예), 은금과 명성(은총), 겸손과 거만, 게으름과 성실 등이 그 선택 대상에 속한다. 이러한 선택은 사람의 인생관에 따라 좌우되며 그 인생관은 주님을 경외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 17-21절은 지혜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지혜를 경청하는 자는 여호와를 의뢰하며 진리를 깨닫기 마련이다. 끝으로 22-29절에서는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감당해야 할 것을 주지시키면서 특별히 금해야 할 네 가지 일들을 언급한다.
“이름은 큰 재산보다 값지고 명성은 은보다 금보다 낫다”(1). 이름이란 명예를 말한다. 이름을 지키고 사는 자의 삶이 어떤 삶이냐 하는 것이 1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리고 17절부터 21절까지는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다.
보이는 것 보다 이름이나 명성을 택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명예를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잘 죽었다고 말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이름값을 못하고 죽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재물이나 은이나 금이라고 하는 물질세계를 선택하면 가치 또는 영, 또는 말씀으로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이다. 그런데 성경의 논리는 물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보이는 세계로 가는 것이지 보이는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간 적이 없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데 보이는 하느님, 예수그리스도로 오셨다. 그리고 다시 그 분이 보이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순서가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다. 이 관계로 가야 되는 것이다. 가치가 있어야지 그 가치를 통해서 물질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을 가지고 가치를 다스릴 수는 없다. 거꾸로 가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재산과 이름, 은이나 금, 명성(은총) 이것이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순서의 문제, 가치의 우선의 문제라는 것이다.
“겸손과 주님을 경외함에 따른 보상은 부와 명예와 생명이다”(4). 겸손과 주님을 경외하는 이 두 가지의 결과는 보상이다. 영광이 있고 생명이 있다. 마치고 주님을 경외하면 반드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 우선순위가 바뀌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울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물을 받아야 되기 때문이다. 선물이 목적이다. 울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내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살면 선물로 찾아오는 것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게으름뱅이는 ‘밖에 사자가 있어! 길거리에 나가면 난 찢겨 죽어!’ 하고 말한다”(13). 사자는 거리에 있지 않다. 게으른 자는 말하고 말하는 것의 실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말만 하고 사는 것이다. 실재가 있어야 된다. 그 실재는 내 마음의 가치로부터 시작한다. 말은 마음의 밀고자이다. 말을 들어보면 마음을 아는 것이고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삶을 알 수 있다. 마음과 말과 삶이 일치가 안 되면 이중인격자가 되거나 거짓말 하는 자가 되거나 궤변자가 되거나 망상에 빠진 자가 된다. 망상은 자기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17절 이하에서는 개개의 잠언들이 아무렇게나 수집, 배열된 것이 아니라 체계를 갖추어 30개의 짧은 교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잠언들은 기원전 7-6세기경 이집트의 토지 대장 관리였던 아멘 엠 오페가 장차 관리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쓴 교훈(ANET 421-425)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다. 어떤 대목은 이집트의 교훈을 그대로 번역하기도 하고 어떤 대목은 조금 바꾸거나 완전히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아멘 엠 오페의 교훈에 비해 잠언의 교훈은 익명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익명의 이스라엘 스승이 관리직을 준비하고 있는 제자에게 들려주는 교훈이다.
“귀를 기울여 현인들의 말씀을 듣고 나의 지식에 마음을 쏟아라”(17).
지금까지 원칙적으로 각 절이 독립된 잠언을 이루었지만, 22장 17절부터는 한 내용이 몇 개의 절에 걸쳐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라는 부르심 때문에 17절을 이 책의 새로운 시작점이라고 생각했다. 17-21절은 그 전후의 짧고 분리된 잠언들과는 대조적으로 계속적인 문장의 단락을 형성한다. 칠십인역은 17절에서 “현인들의 말씀”을 맨 앞에 놓음으로써, 이를 일종의 제목으로 인식했음을 암시한다. 우리는 현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말씀을 듣고, 마음에 쏟아 두라고 충고한다.
22장 19절은 이 잠언의 목적이 하느님에 대한 신뢰심을 불어넣고자 하는 데 있음을 밝힌다. “네가 주님을 신뢰하도록 내가 오늘 너에게, 바로 너에게(너의 길을) 가르쳐 주리라.” 칠십인역에는 이 구절 후반부에 “너의 길”이 첨가되어 있다. 지혜문학의 언어에서 길은 인간의 행위와 행위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행위와 결과는 하나인 것이다. 주님을 무시하는 관리는 힘없는 사람을 착취할 것이다(22,22).
“내가 너에게 충고와 지식이 담긴 서른 가지 잠언을 써 주지 않았느냐? 그것은 너에게 진리의 말씀을 참되게 가르쳐 너를 보낸 이들에게 네가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20-21). 20절에서 “서른 가지”라는 말이 나온다. 이 단어 철자가 모음에 따라 “아름다운” 혹은 “이전에”라는 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의미보다 “30”이란 한 달 정도의 날짜의 숫자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잠언은 각 장이 하루에 한 장씩, 한달이면 읽을 수 있도록 31장을 갖고 있다.
21절은 “진리의 말씀을 참되게 가르쳐”라는 배우는 자를 설명하는 흥미로운 구절을 포함하고 있다. 이 사람은 아주 잘 배워서 “너를 보낸 이들에게 네가 진실한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때가 되면 그 학생은 스승이 주었던 것과 같은 대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귀가 열리고 마음이 정해지고 입술로 확신의 말을 하면 진리가 함께 있다. 진리가 내 몸으로 오는 것이다. 죄는 거꾸로 간다. 죄는 몸으로부터 말하고 자신이 그 몸에 속한 것들을 확신 있게 얘기하고 그것을 마음으로 정한다. 그것을 다시 또 듣는다. 하늘의 소리는 위로부터 온다. 그런데 죄의 소리는 몸에서부터 온다. 몸에서 내가 확신이 생기고 그래서 입으로 말하고 다시 듣는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딱 죄의 통로를 말한다. 죄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죄는 몸으로부터 온다. 내 몸에 익숙한 것으로부터 온다.
“화를 잘 내는 자와 사귀지 말고 성을 잘 내는 사람과 다니지 마라. 네가 그의 길에 익숙해져 너 스스로 올가미를 써서는 안 된다.”(24-25). 화를 잘 내는 사람,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죄를 범할 기회를 자주 갖기에 어울리지 않도록 충고한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화를 잘 내고, 큰 소리를 지느는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우리도 그것에 익숙해져 죄에 빠질 위험이 있다.
“너는 담보 서는 이들 가운데에, 빚보증 서는 이들 가운데에 끼지 마라. 네가 갚을 길이 없을 때 네 밑의 잠자리까지 빼앗기려 하느냐?”(26-27).
우리는 가족이나 주변의 빚을 보증서서 크게 아픔을 갖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이는 오늘날만이 아니라 옛날부터 있었던 사건이다. 보증을 잘 못 서면 침상도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에게 침상 빼앗기는 것을 절대 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는 마태오 복음 말씀이 있는데 유대인들의 문화 속에서는 겉옷이 굉장히 중요하다. 사막이기 때문에 낮에는 무지 덥고 밤에는 무지 춥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서 가져간 이유가 그 옷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겉옷을 빼앗는다는 것은 생명을 빼앗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똑같이 유대인들에게 침상을 빼앗길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일인 것이다. 빚쟁이들은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비를 구할 것이 아니라 아예 보증을 서지 말라는 것이다.
잠언 23장 올바로 살아가는 모습
관리직을 수행하려는 이에게는 궁중 예절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 중요하고(1), 직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할 것, 곧 치부를 경계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배가 몹시 고프면 네 목구멍에 칼을 세워 두어라. 그의 진수성찬을 탐내지 마라. 그것은 사람을 속이는 음식이다”(2-3). 연회나 멋진 저녁식사에서 취하는 행동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저녁을 대접하는 관원은 그의 손님들에 대해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멋진 주변 경관과 풍부한 음식의 진열에 너무 경외감을 가져서 아마고 그 저녁의 진정한 목적을 망각할 것이다. 과식하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의 탐욕과 방종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들은 중요과 절제 가운데 식사하며 그 대접이 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닞를 끊임없이 생각할 것이다.
“목구멍에 칼을 세워 두어라”는 의미는 분명하다. 사람은 상관의 면전에서 조심하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매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내는 일이다”(13-14). 저승 즉 스올, 어둠에서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징계라는 것이다. 아이들한테 훈계하고 분명하게 징계를 해야 되는 것인데 징계가 없는 공동체는 문제가 야기된다. 자연주의,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교육이 옳다고보지 않는다. 엄한 부모 밑에 효자 나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잠언서에서는 자녀를 교육하는 데 때에 따라서 매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늦도록 술자리를 뜰 줄 모르는 자들 혼합주를 맛보러 온 자들이다.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30-31).
또한 폭음을 하는 자와 폭식을 하는 자를 멀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난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면서 23장 29-35절에서 주정꾼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술에 취함으로써 빚어질 나쁜 결과들을 열거하는데, 아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미루어 저자가 술에 취한 경험이 많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술에 취한 사람의 눈에는 이상한 것이 보이고 입에는 허튼소리를 담게 된다. 술은 독사가 무는 것처럼 사람을 병들게 한다. 땅바닥에 누워 있어도 돛대 꼭대기에 누운 것처럼 느낀다. 주정꾼은 술을 깬 다음에 또다시 술을 마시게 된다. 이스라엘의 스승은 이 교훈으로써 제자들에게 술의 위험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술은 빈정꾼, 독주는 소란꾼/ 그것에 취하는 자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20,1).
잠언 24장 현인들의 다른 말씀
“악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마라. 그들 마음은 폭력을 꾀하고 그들 입술은 재앙을 말한다”(1-2).
1,2절은 부러움에 대한 경고이다. 하느님에게 순종하면 언젠가 보상을 받을 것이므로 악인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한다. 부러워하지 말라는 이유는 더 직접적이고 사실적이다. 아무리 돈을 쉽게 벌 수 있다한들 왜 굳이 악을 행해야 하는가? 폭력을 낳는 그런 행동은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적절치 않다. 가장 좋은 것은 그러한 사람들과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위해 타인을 망하게 할 그러한 수단과 방법들을 간구한다.
“집은 지혜로 지어지고 슬기로 튼튼해진다.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보화가 가득 찬다”(3-4). 집을 세우는 건축자는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집을 짓고 지식이라고 하는 보화를 통해서 방을 만드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집이 있다면 집 안에 거실과 부엌과 방과 화장실이 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거실에 거하시는데 내 방 안에 내 부엌 안에 화장실 안에, 온 마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한다. 방이라고 하는 쉼의 문제, 부엌이라고 하는 먹고 사는 문제, 화장실이라고 하는 상처나 아픔이나 고통의 문제 속에서 주님이 주인 되시기를 원하신다.
요한묵시록에 보면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두드리시면 문을 열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거실에 들어오실 때는 인격적으로 들어오시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냥 들어오신다. 주님이 내 집에 들어오셨지만 이것은 안 믿는 사람이 믿어지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미 들어오신 주님이 각각의 내 공간에 들어오셔서 그 방에서 함께 먹고 마실 수 있는 친밀한 관계까지 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내 방이 지저분하고 부엌이 지저분하고 화장실이 지저분하면 절대로 이곳은 문을 열어보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똑같은 것이다.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주님께 절대로 참견하지 마시라고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을 열고 싶지 않은 방을 채우는 지식의 보배가 필요하다. 우리 삶의 교육, 가정, 종교, 정치 등 영역들 안에서의 주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해야 한다.
주님은 내 집 전체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 집이라는 것은 외형을 말하고 외형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방은 내면을 말하고 내면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권위를 가지고 살아가야 되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악인처럼 의인의 보금자리를 노리지 말고 그의 안식처를 망쳐 놓지 마라. 의인은 일곱 번 쓰러져도 일어나지만 악인은 불행 속으로 넘어지기 때문이다”(15-16).
의인의 집의 역할은 보금자리 쉼터이다. 집은 쉼을 주는 곳인데 그 쉼이라는 것이 마음뿐만 아니라 육체, 모든 영혼의 쉼을 말한다. 히브리서의 표현으로 얘기하면 모든 구약의 역사는 쉼을 향해서 가는 과정이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홍해는 주님이 열어주셔서 건넌 것이고 요르단강은 내가 발을 디뎌야지만 물이 그치는 것이다. 내 믿음으로 가야되는 것이다.
일곱은 완전수이다. 일곱 번 넘어졌다는 것은 쫄딱 망했다는 뜻이다. 완전히 망했는데 다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쫄딱 망하는 것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소망이 없다고 하는 때에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환난과 고난을 만나서 죽으면 악인이다. 의인은 소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난다. 소망이 여기에서 있다면 죽을 수밖에 없지만 소망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해도 망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덤이다. 덤인 인생으로 살아야지 자꾸 늪의 인생을 살면 가져도 늪이다. 덤은 없어도 덤인 것이다.
“내가 게으른 사람의 밭과 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갔는데 보아라, 온통 엉겅퀴가 우거지고 전부 쐐기풀이 뒤덮었으며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보며 교훈을 얻었다. ‘조금만 더 자자. 조금만 더 눈을 붙이자. 손을 놓고 조금만 더 누워 있자!’ 하면 가난이 부랑자처럼,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너에게 들이닥친다”(30-34).
30-34절은 윤리를 수반한 삶 또는 서민적인 이야기로부터 온 일종의 교훈이다. 이것은 팔레스타인 농부의 땅으로부터 온 이야기이다. 30절에서 우리는 정확히 어떤 성품의 농부가 그 땅을 소유한지 알 수 있다. 즉 그는 게으르고 어리석다. 그의 땅은 가시덤불, 거친 풀, 무너진 돌담뿐이다.
이 부분의 첫 교훈은 깨닫기가 쉽다. 다른 이들이 우리의 소유물, 즉 쓰레기장 같은 창고, 벗겨진 페인트, 누가봐도 수리가 필요한 물품들을 보고 어떠한 생각을 갖겠는가. 우리의 어설프고 게으름이 가져온 부주의로 인해 방치된 것들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지 않겠는가! 이런 모습을 보고 단호한 마음 갖어야 한다. 게으르지 말라는 것이다. 지혜와 지식과 슬기를 가지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중단없이 계속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따라서 33절에서 단지 조금 졸기 시작한 것이 결국 생활 습관이 되어 “빈곤이 무장한 군사처럼” 덤벼든다는 의인화적 표현을 함으로써 늘 게으름을 경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