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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는 특별한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시작합니다.
창세 12장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브람의 아버지 이름이 테라입니다. 화면상의 맨 아래쪽의 우르라는 지명(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이라크)
그리고 조금 위에 바빌론이 있고 그 위에는 바빌론에 앞서서 있었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네베
또 왼쪽으로 가면은 하란
우르 ~ 하란까지 테라가 왔습니다.
테라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죽은 아들의 이름이 하란이기도 합니다.
그 하란에서 아브람이 말씀을 듣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옵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직선으로 오지? 왜 둥그런 곡선으로 돌아왔을까?
구글에서 찾아보면 그 부분의 지도색이 파랗습니다. 나머지는 노랗습니다. 왜냐면 광야이고 그곳은 사람이 쉽게 지나갈 수 없을 테니까요.
고대사회에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동하는 경로로,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반달 모양의 지형이라고 부릅니다.
하란에서 약속의 땅까지 아브람은 이동했습니다. 따라서 아브람도 이라크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마엘입니다. 그 이스마엘이 아랍인들의 조상입니다. 그 아랍인들의 이슬람의 경전이 쿠란이죠.
그 쿠란에도 구약성경의 내용이 나옵니다. 심지어 신약성경의 내용까지. 심지어 성모마리아님의 관한 이야기도
쿠란에서 예수님은 예언자로 나오세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이스라엘인들이나 아랍인들은 만나서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요즘의 세계정세에 대해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의 기도가 필요하겠어요.
저희는 우르가 어디고 하란이 어디며,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 밑그림정도로 알게 되었습니다.
텍스트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창세 12,1-9
•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 땅, 족속, 집 : 경제적 / 사회적 / 실존적 의미
- St Alphonsus : intrate toti, manete soli, exite alii
intrate toti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라.
manete soli 홀로 머물러라
exite alii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 ~ 땅으로 가거라
• ~ 복이 될것이다(복이 되어라)
- "복"? 버라카! (무릎 꿇음?)
나이가 들수록 어딘가로 떠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부님은 IT, 컴퓨터를 많이 좋아하세요. 군생활에서도 국방부 전산병이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방부 컴퓨터 신부님이 설치하셨다고 합니다. 우와!!!
그런데 요즘에는 더이상 새로운 스마트폰이 안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다고 해요. 작년에 공기 청정기를 사셨는데 매뉴얼을 보시고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리셨다는 겸손한 말씀을...
모든게 새롭고 변화가 쉽지 않습니다.^^
대치2동 식구들도 본당을 떠나게 된다고 하시면 쉽지 않으시겠죠?
신부님은 정부 쪽에 관련된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국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향후의 미래를 보면 재개발이라는 것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래된 것을 정리하고 새로운 주택 단지를 형성하는 것이 저 역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이란 단지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이루어낸 사람들의 만남과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존재하게 되는데, 재개발을 통해서 그런 공동체들이 망가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잘 적응하시고 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있습니다. 집을 갖고 있는 분들과 세를 들어사는 분들의 갈등도 생겨납니다.
정책을 담당하시는 분들이 개발과 재개발의 상황에서 일어난 갈등과 문제들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또한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신부님에게 행복한 기억도 있으셨다고 합니다.
본당 사목을 하실때 어느 신자분이 사시던 주택이 재개발에 들어가면서 이사가게 되어 인사를 오셨어요.
그런데 2~3일 후에 그분이 또다시 이사를 오시고 인사를 드리러 오셨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20여년을 살다 보니 이곳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왔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신부님도 정말 행복한 공동체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셨어요.
장애우 자녀를 두신 분이 계셨는데, 그 자녀가 성장하면서 걱정이 더 크실 것 같아서 "아이가 자라면서 더 걱정이 많이 되시죠?"
물으니, "제게는 하느님이 계시고 성당 공동체가 있어요. 그분들이 제게 말씀하셨어요. '무슨 일이 생겨 먼저 하늘나라에 가시게 돼도 아이 걱정은 말아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그래서 저는 걱정하지 않아요."
아브람은 자신의 삶 안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실존적으로 떠나게 됩니다.
구약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하느님은 부르심으로, 인간은 그분의 부르심으로 떠납니다."
예수님도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르치시고, 그렇게 기쁘게 계시다가 떠나십니다. 신앙은 끊임없는 떠남의 연속.
우리 역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로 떠납니다.
그런 아브람의 떠남을 영신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단어는? 가난입니다.
그 아브람의 떠남을 보면서 마태오복음 5장에 나오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똑같은 내용이 루카복음 6장에서도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마태오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 나옵니다. 그 그리스말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주석학자들이 마태오 복음서에 "영으로"라는 한 마디를 집어넣는데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 한마디를 집어넣었을까? 에 대해서 이천 년 정도 토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주석학자들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람을 "영으로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부유한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마태오복음에서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이라 말합니다. 영으로 자신의 내면이 꽉 차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에 채우고 받아들입니다.
아브람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자신의 내면의 그릇에 모든 것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채웁니다.
그의 가난은? 하느님이 부르신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의 영성일 것 같습니다.
신부님도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하느님께서 "떠나라." 하시면 "하느님, 포장이사도 해야 하고....."
사제 생활을 하시면서 갖고 계셨던 꿈은 한 본당에서 다른 본당으로 이동하실 때,
석양에ㅡㅡㅡㅡ
가방 두 개를 들고 개 한 마리는 있어야 하셔서,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그런데 첫 본당에서 두 번째 본당으로 이동하실 때, 이삿짐센터와 2톤 트럭을 부르고 많은 책을 옮겨야 하셨어요(물론 책을 좋아하셨고,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셔서...)
사제 생활을 하면서 신자분들 앞에서 가난에 관한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부끄러움 가득한 마음으로 말씀하시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성의 중심에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하나가 바로 가난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가요?라는 질문은 우리의 신앙에 무거운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이렇게 끝났으면 참 좋았겠습니다. 거래하는 것처럼 떠나라고 하시니 떠났고, 그리고 멋진 것을 주셨으니까요.
사도들이 갈릴래아를 떠나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무엇 때문에 싸웁니까?
나중에 국무총리는 누가 할까? 나중에 장관은 누가 할까? 열두 명이니 어떻게 나누어서 할까? 그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아브람을 부르실 때에도 그것에서 딱 끝나셨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 하느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는 궁극적인 목적의 말씀
하느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르시는 궁극적인 목적도 또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온 세상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 세상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향해있습니다.
산과 나무와 풀과 동물들 생물들, 그 모든 것을 위한 기쁜 소식입니다.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찬미받으소서"라는 회칙에 보면 왜? 우리가 생태계를 아껴야 하는가? 왜 우리가 생태계를 아끼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에 본질인가?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진 우리의 복음은 온 세상을 향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신부로 유럽에 있으실 때, 유럽은 방학이 깁니다.
어느 본당에서 방학 동안 있게 되셨는데, 주임 신부님이 휴가를 가시고 홀로 있게 되셨는데, 할머니가 사제관 문을 두드리셨어요.
눈물을 흘리시면서 "제가 정말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고양이가 죽었어요."
그리고 신부님을 지그시 바라보시면서,
"우리 고양이를 위해서 장례 미사를 해주시면 안 될까요? 신부님????"
할머니에게는 정말 소중한 가족이니까요. 잠깐 머뭇거리시다가 신부님은 번뜩이는 생각으로 대답하셨어요.
"할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장례 미사를 드리려면 그 고양이가 세례를 받았어야 하는데 고양이는 세례를 못 받았죠? 대신에 그 고양이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방학이 끝나서 학교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큰일 났다!!'라고 생각하셨대요.
신부님은 떠나고 주임 신부님이 돌아오시면 할머니가 새끼 고양이를 데리고 와서 세례를 주라고 하시면????
천주교에서는 성사를 통한 구원이 있습니다. 세례, 견진, 혼인, 병자,..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들 앞서서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겠다. 그래서 내가 너희가 있을 자리를 하늘나라에서 마련해 둘께."
요한복음서에서 구원은 우리가 하늘나라로 떠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개별적인 것입니다.(공동체에서 살지만 하늘나라는 각자로)
반대로 마태오, 마르코, 루카 공간 복음서에는 "때가 차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가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서의 구원관이 방향이 다릅니다.
굳이 물리학으로 표현하면 상대성이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웃으셔야 하는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공동체적인 구원, 그리고 땅에서 그 하느님의 뜻을 쫓아서 잘 살아가는 이들이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
그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하늘나라가 우리 안에 있을 때, 복음은 단지 세례 받은 사람만, 단지 인간,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대상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한 이 생태계 더 나아가 모든 우주는 구원의 대상이고 완성되어야 할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 때 하신 말 중에서 "번성하여라."하고 말씀하셨는데 더욱더 생명이 퍼져나가라! 하는 의미입니다.
신부님은 이 구절을 가지고 "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공간을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라는, 그 모든 곳이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갈 수 있도록 부탁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화성이나 목성에 지혜를 모아서 생명의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라는 말씀이시구나.
미국의 일론 머스크의 꿈은 화성에 가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프 베조스는 달에 가서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꿈이고,
그들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시어, 온 우주를 생명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음을 창세기 12장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다른 곳에 가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상한 의미로 곡해하시는 듯하셔서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조금 다른 스케일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에 대한 하느님의 부르심도 단지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민족,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의 세계다.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람 - 아브라함
| 12,1 - 부르심 12,10 - 이집트 13,1 - 롯의 분가 14,1 - 아브람이 롯을 구함 15,1 - 야훼와의 계약 16,1 - 하가르와 이스마엘 17,1 - 계약과 할례(17,5) 18,1 - 야훼가 아브라함에게 나타남 19,1- 소돔의 멸망과 롯의 구원 19,10 - 모압과 암몬의 기원 20,1 - 아비멜렉 21,1 - 이사악의 탄생 21,8 - 하가르와 이스마엘 | 21,22 -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계약 22,1 - 야훼 이레 22,20 - 나호르의 자손 23,1 - 사라의 죽음과 막펠라의 무덤 24,1 - 이사악과 레베카의 혼인 25,1 - 크투라에게서 얻은 아브라함의 자손 25,7 - 아브라함의 죽음 25,12- 이스라엘의 족보 |
아브람의 이야기를 정리해 주셨습니다(제목 위주로 12,1~ 25,12)
그 내용은 어떤 때는 아브라함과 롯이 등장하고 또는 사라와 하가르와 아브람이 등장하고, 이사악과 혼인 이야기.
아브람의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롯은 조카입니다. 테라가 롯을 데리고 아브람과 함께 하란까지 왔었습니다. 하란에서 테라는 죽고 아브람과 롯이 약속의 땅으로 내려옵니다. 그 약속의 땅에 내려와서 그들은 함께 지냈는데 아브람의 양 떼와 롯의 양 떼가 불어나서 함께 있을 수 없게 됩니다.(땅주인들이 양떼가 불어나는 것을 싫어하니까)
아브람의 하인들과 롯의 하인들이 싸우게 되는 갈등, 창세기 12장~50장까지 갈등을 보면
아브람 vs 롯
사라 vs 하가르
이스마엘 vs 이사악
야곱 vs 에사우
라헬 vs 레아
요셉 vs 다른 형제들
갈등의 연속입니다.
그 갈등이 12장~50장을 이끄는 동력을 담당합니다.
우리들도 살아오면서 경쟁합니다. 어느 정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때론 우리 사회 안에서는 경쟁은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건전한 경쟁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이 학생 신분으로 그리스 말을 배우실 때, 그 말을 지도해 주시던 교수 신부님이 참 지독하게 가르치셨는데, 매일 시험을 보고, 매일 점수를 주시고, 벽면에 그 점수를 공개하셨습니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점수별로 90점대 몇 명, 80점대 몇명 이런 방법으로 공지하셨는데 표를 보면 그 점수를 맞은 사람은 자신의 수준을 알 수 있었습니다. 대단히 훌륭하신 교수 신부님이라고 기억하신다고 하셨어요.
성경 안에서도 그런 갈등의 구조 안에서 그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롯이 갈등하였지만, 롯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브람은 도와주었습니다. 롯을 구해주고 전쟁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람이 그때의 전리품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해서 고대 사회에서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때 살렘의 임금이면 사제인 멜키체덱이 등장하는데, 그에게 아브람은 십 분의 일을 주고, 그것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가 전쟁해요. A라는 나라가 이기면 B라는 곳에서 약탈을 합니다. 그리고 그 약탈한 것의 십분의 일을 자신이 섬기는 신전에 바칩니다.(자신들의 신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으로)
신전에는 전리품이나 수확한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곤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전에 있는 그 재화나 재물을 사제나 수도자들은 잘 관리하고 절약했던 것 같아요. 고대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제일 높은 곳은 신전이었습니다.
창세 14,22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여 지극히 높으신( El - Elyon)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
직역
[나는 나의 손을 높이 한다
야훼를 향하여 / El- Elyon / 하늘과 땅을 지은이 ]
창세 21,33
아브라함은 브에르 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그곳에서 영원한 하느님이신( El-olam )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직역
[ (그리고) 그는 심었다 / 에셀 / 브에르 세바에
(그리고) 그는 이름불렀다. / 야훼 El- olam의 이름으로 ]
El- Elyon; 지극히 높으신( 공간적인 개념)
El- olam ; 영원하신 (시간적인 개념)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초월하신 하느님이다.(창세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야곱에게서도 등장합니다.
창세 49,24-25
이는 야곱의 장사(abir)의 손
이스라엘의 목자요 바위이신 분의 이름 덕분이고
네 아버지의 하느님 덕분이다.
야곱의 abir의 손, 이것이 하느님의 호칭입니다.
장사= abir ; 힘센 용사를 의미
따라서 이는 야곱을 힘센 용사가 지켜주신다는 뜻으로 야훼 하느님의 특징입니다.
야곱은 운동 중에서 씨름을 잘했습니다.(성경 안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가설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 야곱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라는 수직적인 혈연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로 활동지역이 아브라함은 남유다 지역으로(헤브론을 중심으로), 야곱은 스켐을 중심으로 한 북이스라엘의 지역입니다.
따라서 남유다에 있던 몇몇 지파들과 북이스라엘에 있던 몇몇 지파들이 함께 합쳐지면서 창세기에 성조사 쓰였는데, 그중에 가장 강력했던 헤브론 중심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창세기의 앞쪽에 자리 잡고 있고 야곱의 장사; abir 뒤쪽에 있었을 거라고 많은 주석가들이 추측합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여쭈어 보기로 합니다.
abir의 호칭은 야곱과 묶여서, El-olam과 El- Elyon은 아브라함과 묶여서 주로 사용된다고 알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아브라함 - 남유다(헤브론) : El - olam, El- Elyon
야곱 - 스켐(북이스라엘) : abir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야곱의 장사(abir)는
이사 49,26
나는 너의 압제자들에게 제 살을 먹게
하고
제 피를 새 포도주처럼 마셔 취하게
하리라.
그러면 모든 인간이 나 주님이 너를 구해
주는 이요
너의 구원자가 야곱의 장사임을 알게
되리라.
이사 60,16
너는 민족들의 젖을 빨고
뭇 임금들의 젖을 빨리라.
그래서 너는 나 주님이 너를 구해 주는
이요
너의 구원자가 야곱의 장사임을 알게
되리라.
시편 132,2
그가 어떻게 주님께 맹세하고
야곱의 장사께 서원하였는지를.
이사악의 경우에도 나옵니다.
창세 31,42
[만약 나의 아버지의 엘로힘 /
아브라함의 엘로힘 / 그리고 이사악의 pahad /
나에게 있지 않았다면
지금 빈손으로 / 너는 나를 보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라반의 집에서 나와 도망치다 붙잡힌 야곱이 라반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사악이 섬기던 야훼 하느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pahad의 의미는? 누군가를 두렵게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이사악에게는 정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그들을 지켜주시는 신적인 보호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 31,51
라반이 야곱에게 다시 말하였다.
"이 돌무더기를 보게.
그리고 내가 나와 자네 사이에 세워 놓은 이 기념 기둥을 보게.
52 내가 이 돌무더기를 넘어 자네 쪽으로 건너가지 않고,
자네가 나쁜 뜻을 품고
이 돌무더기와 이 기념 기둥을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이 돌무더기가 증인이고 이 기념 기둥이 증인일세.
53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나호르의 하느님께서
우리 사이의 심판자가 되어 주시기를 바라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아버지 이사악의 두려우신(pahad) 분을 두고 맹세하였다.
라반과 야곱이 계약을 맺으면서 야곱이 자기 이사악의 두려우신(pahad)분을 두고 맹세하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악도 야곱도 창세기에서는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성조들로 나왔지만, 당시에 그들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은 몰랐고
El -Elyon, El- olam, abir, pahad으로 불렀는데 각각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차이가 났는데,
왜? 그런 호칭의 차이가 났을까?
사실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았고, 그들의 이야기가 합쳐지는 과정에서 창세기가 쓰였을 거라고 주석가들은 추측합니다.
하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하느님께 직접 물어보고 답변을 들어야 알 수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전형적인 장사꾼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일종의 거래처럼,
"그곳에 몇 명의 의인이 있다면? 그곳을 놔두시겠습니까?"
그 의인의 수는 열 명까지 내려갑니다.
사실은 이 모든 질문을 하면서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이유가 바로 세상을 구하는 열 명의 의인이 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열 명의 의인이 있지 않았고 벌을 내리십니다.
하느님은 그곳의 모든 사람을 다 죽게 하시진 않았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은 구해주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이 타락과 폭력으로 가득 차 후회하시던 노아 사건에서도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구원하셨듯이, 소돔과 고모라에 열 명의 의인도 없어서 벌하시지만 의롭게 살았던 롯과 그의 가족은 구하십니다. 한 명 빼고,
그곳을 떠나면서 뒤돌아보지 말 것을 명령했는데, 롯의 아내가 뒤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화게 됩니다.
성지 순례를 가다 보면은 사해를 가보셨을 겁니다.
롯의 아내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사해에 소금 기둥들은 왜 생겼나? 에 대한 원인담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의 자취가 아닌가?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전설의 고향과 같은 원인담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뒤돌아 보지 말라는 말씀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그 많은 것들에서, 부르심을 받고 떠날 때 그것들에게로 뒤돌아 보아서는 안된다는 신앙의 교훈을 담겨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충실한 성조의 모습으로 살아가다가 사라의 종인 하가르로부터 아들을 얻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갖고 있는 윤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 아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아브라함을 찾아오시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잘 맞아들이자 하느님께서는 99세인 그에게 아들을 낳게 해 주십니다. 이사악의 탄생!
이사악 : 이쯔악(히브리어 "웃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사악의 탄생을 계기로 웃는다는 동사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지 않았던 "웃는다"는 동사)
"이제 내년 이 맘때면 아들을 낳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니 사라가 웃습니다. 두 번이나 웃는 사라.
이사악이 태어나고, 최종적으로 하느님이 웃으시는 모습을 이사악 탄생의 내용과 함께 만나게 됩니다.
그 이사악과 이스마엘이 어떤 갈등을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가르와 사라의 갈등을 통해서 하가르가 이스마엘과 함께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랍 민족의 조상이 됩니다.(쿠란의 내용)
쿠란과 구약 성경은 어디에서 갈라질까요?
하느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십니다. "너의 아들을 제물로 바쳐라."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데리고 모리야산으로 올라갑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그 데리고 올라간 아들이 이사악으로
쿠란에서는 앞 뒤의 문맥상 그 데리고 올가라간 아들이 이스마엘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아들 대신 양을 바치게 하셨습니다.
그 산의 이름이 모리야입니다. 그 모리야산이 어딜까요? 모릅니다.^^
하지만 그 전체적인 이야기 마지막에 중요한 힌트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고 하였다. 정확한 히브리어 발음은 "야훼 이르에"입니다.
그 야훼 이르에라는 곳에 도시가 생기는데, 그곳이 바로 예루 샬라임
모리야산 지명 자체가 확인되지는 않지만
오늘날 유다인들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그곳이 예루살랴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야훼 이르에라는 말에서 "이르에"는 하느님께서 보아두셨다. 마련해 두셨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예루 샬라임" "샬롬??" 평화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야훼 이르에 ㅡ 예루 샬라임, 야훼 하느님께서 평화를 마련해 두셨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로 느껴집니다. 앞으로 역사가 계속 진전하면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인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야훼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중요한지 창세기 15장과 17장에서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15장에서는 그 계약이 축복과 함께 제사로 맺어집니다.
17장에서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표징을 가져야 한다.
그 표징이 할례입니다.
과거에 신과 인간이 인연을 맺게 되면, "나는 너의 하느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는 것에 있어서 꼭 필요한 하나의 요소가 "피"입니다.
구약의 일반적인 제사에서는 피는 사용되지 않고 하느님의 몫으로 따로 떼어놓고 버립니다.
반면에 시나이 계약에서 모세가 제물을 바칠 때 그 제물의 피를 백성에게 뿌립니다. 특이한 경우였습니다. 보통은 피를 접촉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원시적인 형태인 창세기 17장, 하느님과 아브라함의 계약에서는 인간의 살을 잘라내서 피를 뿌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집트의 벽화를 보시면 할례 하는 모습입니다.
따라서 할례는 유다의 전통적인 전례일 뿐만 아니라 고대의 다른 지역에서도 역사적인 전통이었는데 창세기 17장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을 맺는 표징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집트의 할례나 고대 근동의 할례는 성인이 되었다는 일종의 통과 의례였을 것이라고 종교학자들은 추측합니다. 우리식의 표현으로 "이제 당신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시민권을 갖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남성으로서, 전쟁에도 나가야 하고 세금도 내야하는.
그리고 다른 가부장을 가질 수 있는 권한도 얻게 되는 고대 세계의 하나의 질서.
왜 하필 그곳을 그렇게 하여야 했을까요? 고민하신 당시의 신부님의 교수 신부님께서 "고민했던 결과, 딱히 그곳뿐이어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하시니 수업 끝나고 수녀님들이 항의를 하셨다는 일화.
당시의 위생학적인 문제와 관련해 할례의 풍습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고 또한 고대 근동에서는 여성들의 할례에 대한 기록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창세기를 읽었을 때 계약은?
노아 사건에 홍수가 끝나고 나서 하느님께서 세상과 계약을 맺으시며 보여주신 무지개
아브라함에서 15장과 17장의 계약
후반부에 가서는 야곱과 계약을 맺으시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시나이 계약이 처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계약이 있었네요? 하고 물으신다면!!
하지만 이것은 시나이 계약을 준비하는 계약으로,
노아의 계약, 아브라함의 계약, 이사악의 계약, 야곱의 계약이 하나의 계단식으로 최종적인 시나이 계약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이스라엘과의 계약이 "시나이 계약"이라고 주석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이 야곱과 에사우를 낳습니다.
에사우는 큰아들, 야곱은 작은 아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의 경우에 산부인과 측면에서 쌍둥이 출산 때, 나중에 태어난 야곱이 큰아들이고 먼저 태어난 에사우가 작은 아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에사우가 먼저 태어나고 그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잡고 야곱이 태어났습니다.
야곱이라는 히브리 말에는 "무언가에 딴지를 건다"는 어감이 숨어있습니다.
그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에서 에사우가 맏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장자권과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전체의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당 사목을 하실 때 어떤 분이 사제관에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나누시게 된 대화
"신부님, 제가 요즘 성서를 공부하면서 창세기를 읽는데 이 부분에서 화가 나 더 이상 못 읽겠습니다." 그분과 차를 드시면서 이야기를 듣는데 "야곱이 사기를 친게 아닙니까? 왜 장자권이 야곱에게 가고 하느님의 축복도 야곱에게 갑니까? 정의롭지 못합니다."
그분께서는 형제간엔 소송이 있으셨고 마음에 상처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저희는 그것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에사우가 이사악과 레베카를 실망시키는 내용이 나옵니다. 에사우가 자신들의 친족들의 여인들 중 하나와 결혼하기를 바랬는데 이방 여인과 에사우가 혼인을 하면서,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에사우가 어느 날 일을 난 뒤 배가 고픈데 야곱이 끓여 놓은 불콩죽을 보고서,
"내가 그 불콩죽을 먹으면 안되겠니?"
"안돼요."
"좀 줘, 내가 먹자."
"형님, 장자권을 나에게 팔면 줄게요."
"어?! 그래 가져가."
아마도 불콩죽은 오늘날로 표현하면(2025년 불닭볶음면? 신라면? 너구리?)
물론 창세기를 읽다 보면, 장자권과 축복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한 묶음으로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축복이 에사우에게는 불닭볶음면의 가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야곱에게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욕심낼만한 가치였던 겁니다.“
신부님 어린 시절에 친구들끼리 수표 수집이 유행했대요.
어느 날 신부님의 아버지께서 해외여행을 다녀오시고 "너 우표 모으지? 이 우표가 굉장히 좋은 거래." 하시면서 두 장을 주셨어요.
그래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그 친구 중에 한 명이 보더니, "우와~~~!! 내 우표 다 줄게, 이거랑 바꾸자!!"
친구가 모은 우표가 천 장정도였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속으로 '두 장 vs 천 장??' 생각하시고 "어, 바꿔."
나중에 아버지가 가져다 주신 그 우표의 가치를 알고 땅을 치면서 후회하셨다는 일화도 들려주셨어요.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진주를 찾아다니던 상인이 있었는데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집으로 돌아가 전재산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그 밭의 주인은 그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이란 그런 것이라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런 것이라고!!!
그리고 그 형제님께 신부님은 질문을 하셨어요.
"나중에 이사악의 재산 중에서 야곱이 동전 한 푼 가져갔습니까?"
형제님은 "아니죠..."
야곱은 에사우가 무서워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라반 밑에서 일을 하다가 라반의 양 떼를 치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야곱과 에사우가 화해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사악의 재산은 결국 에사우가 상속받았습니다. 나중에 에사우가 야곱과 헤어져 아래쪽으로 내려와 정착합니다. 에사우의 후손들이 에돔.
이후 에돔족의 한 귀족 집안이 유다 전체의 통치권을 갖게 되는데 바로 헤로데입니다.
에사우는 에돔이라는 민족의 선조가 되고 그 에돔에서부터 헤로데가 나오고,
아빠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유다에 있는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한 그 헤로데가 아빠 헤로데입니다.
또 예수님이 재판받으실 때 루카 복음에서 빌라도가 헤로데에게 예수님을 보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헤로데가 아들 헤로데입니다.
그들의 성조가 바로 에사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중심으로 요르단 강 동쪽부터 남쪽으로 이르기까지 세 민족이 있습니다.
암몬, 모압, 에돔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롯의 딸들이 롯과 동침해서 나온 약간 이상한 민족
에사우의 후예인 에돔
이렇게 주변의 민족들을 족보처럼 설명해 주는 창세기를 만나게 됩니다.
야곱은 스켐 지역에서 주로 활동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헤브론 지역에서 활동을 하는데,
헤브론에서 걸어서 오분 거리 정도에 있는 막펠라의 땅을 사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내인 사라가 죽자, 그 시신을 묻습니다.
야곱은 스켐의 땅을 삽니다.
나중에 재밌는 것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갈라졌을 때,
남유다는 새로운 임금이 되면, 임금이 통치하는 장소는 예루살렘이지만, 왕위를 계승하는 즉위식은 헤브론에 가서 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지만 왕관을 쓰는 즉위식은 스켐에서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중심인 스켐과 남유다의 종교적인 중심이 본래는 헤브론이었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의 수도는 사마리아, 남유다의 수도는 예루살렘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성서의 지리적인 틀을 가지고 있으면 합니다.
야곱이 아들을 낳습니다. 12명과 딸 포함해서 13명
야곱
• 새로운 이름 : 이스라엘
• 12 아들과 1 딸
ㅡ 레아 : 르우벤, 시메온, 레위, 유다
ㅡ 빌하 : 단, 납탈리
ㅡ 질파 : 가드, 아세르
ㅡ 레아 : 이사카르, 즈불룬, 디나
ㅡ 라헬 : 요셉, 벤야민
두 여인과 두 여인의 종들이 경쟁적으로 아이를 낳는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고대 구약의 사회에서 "그 정도면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는 아들의 숫자는 일곱 명이라고 합니다.
레아가 딸 포함해서 일곱을 출산했습니다.
야곱은 라헬에게 특별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라헬이 낳은 아들인 요셉에게 특별한 일을 시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을 만한 일이 두 가지입니다.
1. 야곱의 편애
2. 요셉이 형제들과 함께 일하지 않고 형제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형제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는지를 보고하는 일)
"주교"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에피스코퍼스"에서 에피라는 말은 "위"라는 의미이고, 스코퍼스는 "본다"는 의미로 주교는 감독한다는 뜻으로 사제들을 감독하는 일을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주교로서 조금은 엄격하셨다고 합니다.
요셉도 형제들을 감독하는 일을 한 것 같습니다. 그 요셉을 형제들이 구덩이 빠뜨리고 팔아버립니다.
이집트에 가서 요셉은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그의 지혜로움이 돋보이고 이집트의 재상까지 되는 이야기.
구약 성경에서는 요셉과 같은 활약을 한 인물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다니엘 예언서 다니엘이 바빌론 임금의 꿈을 해몽해 주면서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었지만 하느님의 위대함을 계속해서 지켜내는 예언자? 신비가? 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꿈에 대해서 현대인들의 대부분은 프로이들 생각합니다. "꿈은 나의 내면의 반영이다." 하면서,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꿈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계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꿈을 꾸고 그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들이 꿈을 해몽해 주는 이들을 찾았고 그들을 사람들은 지혜롭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제일 지혜로운 사람은 꿈을 해몽할 줄 알고, 천체를 읽을 줄 알고, 사람들이 아팠을 때 사람들의 고통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세 가지를 갖춘 이를 현인이라고 불렀습니다.(마태오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동박박사들이 현인들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주고 그 과정에서 경제를 살립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형제들이 이집트로 오게 되고 화해하면서 야곱도 또한 구원될 수 있었습니다.(굶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요셉의 일은 한없이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는 구원으로 삼았다는 지혜문학적인 서사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대한민국에서 유행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 폭삭 속았수다” 그 드라마의 영어 제목이 “만약 인생이 너희에게 귤을 준다면(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
인생이 나에게 오렌지(레몬)를 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잼(레몬에이드)을 만들겠습니다. 인생이 주는 것으로, 나는 무언가 내 삶의 길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요셉은 인생에서 커다란 불행을 겪었지만, 자신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하느님의 지혜로움으로 도움을 받아 자신의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건네며 창세기 50장의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