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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티성지 내 산상제대로 오르는 길목에 세워진 최양업 신부의 동상. '길의 사도'이자 '땀의 증거자'로 산 최 신부의 삶을 형상화하고자 성경을 끼고 지팡이를 짚은 채 걸어가는 형태로 제작했다. |
최 신부 선종지는 아직 미궁에 빠져 있다.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푸르티에 신부 서한과 페롱 신부 서한이 최 신부가 선종한 땅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어서다.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는 1861년 10월 21일자 서한을 통해 "그가 누워있는 집이 저의 거처(배론신학교)에서 170~180리(66.8~70.7㎞) 떨어져 있었다"거나 그해 11월 2일자 서한에서 "그는 중병에 걸려 제가 살고 있는 산(배론 구학산)에서 170리(66.8㎞) 떨어진 어느 한 교우의 집에 간신히 도착했다"고만 언급한다.
또 페롱 신부도 같은 해 서한을 통해 최 신부가 선종한 것이 "배론신학교에서 약 120리(47.1㎞) 떨어진 한 작은 교우공동체"라고 언급할 뿐이다. 19.6㎞(50리)라는 거리 인식의 차이는 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푸르티에 신부와 교우촌 순방 길에 익숙했던 페롱 신부가 달려간 노선이 달랐기에 벌어진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와 함께 '최 바시리오 이력서'(1939년) 등을 비롯한 문헌과 구전 등을 통해 최 신부 선종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최 신부 선종지는 경상도 문경으로 보는 설(주재용 신부, 정양모 신부 등)이 유력하지만, 충청도 진천으로 보는 견해(류한영 신부 등)도 만만치 않다. 또 최 신부 발병지와 선종지를 구분해 발병지는 문경이 분명하지만, 선종지는 진천 배티라고 주장하는 설(정규량 신부)도 있다.
다만 '대동여지도'나 요즘 항공촬영 축적 지도를 통해 분석해본 결과, 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준 푸르티에 신부가 배론신학교에서 이동한 거리가 170~180리였다는 기록은 배론에서 문경읍까지 실측결과가 거의 일치해 문경선종설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더 힘을 얻고 있다.
▲ 원주교구 배론성지 최양업 신부 묘역. 묘소 앞에는 길이 1m51.5㎝(5자), 너비 60.6㎝(2자) 빗돌이 세워져 있으며, 앞면에는 '사제 토마스 최정구(최양업 신부의 아명)의 묘'라는 글이 새겨졌고, 뒷면에는 최 신부의 사목적 삶을 기리고 빗돌을 건립한 내역을 기록했다. |
여하튼 그의 죽음은 당시 조선교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페롱 신부는 최 신부가 선종한 지 한 달 열흘이 지난 7월 26일자 서한에서 "그의 죽음은 조선 교회 전체의 초상이다"며 "우리는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기까지 사목적 곤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기술한다. 왜냐면 최 신부는 그간 선교사들이 방문하지 못하는 남쪽 오지 교우촌 순방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문본 기도서나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도 어려움에 부딪혔다. 선교사들은 무엇보다 '친구'를 잃는 아픔으로 눈물에 젖었다.
베르뇌 주교도 1861년 9월 4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하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다"며 최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 사제로서 분별력을 칭송하고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명했다. 더불어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은 크나큰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마을이 포함돼 있어 그의 죽음은 저를 몹시 난처하게 한다"면서도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천주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
조선 복음화를 그리도 갈망하던 최 신부가 선종한 지 이제 150주년을 맞는다. 그간 한국교회 첫 사제인 김대건(1821~46) 신부에 가려있던 최 신부는 2005년 12월 시복대상자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증거자로는 유일하게 선정돼 시복재판이 개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재조명을 받고 있다. 그리고 3년 6개월이 지나 2009년 6월 교황청 시성성에 시복자료가 제출됨으로써 한국교회에는 최 신부를 비롯해 하느님의 종 125위에 대한 기도와 공경, 현양운동이라는 과제가 남게 됐다.
이처럼 빛나는 삶을 산 최 신부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 있을까. 최 신부의 사목적 삶과 선교 열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참으로 깊고도 풍부하다.
#선교열정, 순교정신 본받아야
그는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자신의 한 생애를 오롯이 봉헌한 땀의 증거자였다. 그의 순례영성은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숨을 거둔' 데서 잘 드러난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소 순방을 통해 '기다리는 사목'이 아니라 '찾아나서는 사목'을 통해 강생의 신비를 살았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해, 또 신자들의 수계생활을 위해 이 교우촌에서 저 교우촌으로 끊임없이 순례한 참 목자였다.
사제직에 대한 그의 투신은 끊임없는 박해와 체포 위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모든 간난신고를 그는 사제직에 대한 열정으로 이겨냈다. 그러면서도 가족과 친척, 친지들에게조차 외면당하며 비참하게 살아가는 교우들, 나아가 동포들에 대한 연민으로 끝없이 번민했고, 동포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 끊임없는 기도를 바친 기도의 사제였다.
그래서 교회는 오늘도 최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자비로우신 주님, 간절히 청하오니 최양업 토마스 사제를 성인 반열에 들게 하시고, 저희 모두가 그의 선교 열정과 순교정신을 본받아 이 땅의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하여 몸 바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