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응모작품
꾹꾹 누른다 외 4편
김길중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풍덩한 몸빼 바지를 입은 할머니가 쪽 마늘을 심는다
밭고랑
간격을 맞춰 뚫어 놓은 작은 구멍에
쪽 마늘을 하나씩 넣고 손가락으로 꾹꾹 누른다
누가 먹는다고 그렇게 많이 심냐 물으니 큰 딸년은 삼겹살 먹을 때 싸하게 매운 마늘이 최고라고 지랄하고 작은 딸년은 반찬으로 마늘쫑만 한 게 없다고 지랄이니 하는 수 없이 해마다 이 지랄하고 있다며 나를 힐끗 쳐다본다
애들 학비 때문에 밭 담보 잡히며 꾹 누르던 그 손으로
집안 돌보지 않던 바깥양반 때문에 본인 가슴 꾹 누르던 그 손으로
꾹꾹 눌러 심으며
젊어서는 그 양반이 나를 꾹꾹 눌러주었는데 늙어서는 내가 딸년들을 위해 꾹꾹 누르고 있다고 씩 웃으신다
참 맑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이로운 몸짓이다
김길중
봄날이 화창해서 산책을 나섰다가
산동네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만나 오르기 시작하였다
골목에는 햇살과 그늘이 뒤섞여 나뒹굴고 오가는 이들의 꽁무니를 쫄래쫄래 뒤따르던 흰 개와 검둥이가 허물어진 벽 속을 들락거린다
한 할머니가
웅크린 고양이처럼 앉아
검푸른 핏줄이 불거진 손으로 간밤의 비에 젖은 꽃잔디를 매만지고 있고
비목碑木같은 담벼락에 휘갈겨진 ‘달동네’라는 낙서 위로
정오의 햇살이 직각으로 내리꽂다 돌담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도
봄날은 화창해서 자꾸만 데구루루 구른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경이로운 몸짓이라는 글귀를 동네 어귀에다 적어 두고 돌아와
늦은 점심을 희망이와 먹었다
컵라면
김길중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노인이
생의 마지막 자존심처럼 접혀진 박스를 차곡차곡 펴
리어카에 싣고 언덕을 오른다
숨을 몰아쉬는 리어카의 굵고 진한 바퀴자국이
노인의 이마에 패인 주름살만큼 깊다
도심 뒷골목의 분주함이
가난한 슬픔으로 조각조각 부서져
그 조각난 가난을 주우려 두 바퀴에 온종일 매달려 있는 노인
리어카가 무거워지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리어카가 가벼워지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저녁밥 때가 한참 지난 시간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웅크리고 앉아
컵라면에 물을 붓는다
리어카 위에는
호된 오늘이 접혀진 채 실려 있고
노인은 컵라면의 마지막 국물을 들이켜고 있다
그레이스 켈리*
김길중
강아지를 분양받았다
그레이스 켈리
모나코 왕비의 자태를 닮으라고 이름을 켈리라고 지었다
켈리는
집에 오자마자 두고 온 동생이라도 찾듯
종종걸음으로 방방 돌아다녔다
소파 위에서 방방
이불 위에서 방방
온 집안을 헤저으며 방방
우리 가족의 품을 비집고 들어와 방방
신나게 뛰어다녔다
그레이스 켈리는 모나코 왕비로 26년을 살다 모나코 국민들의 가슴속에 묻혔고 우리 집 켈리는 우리 가족으로 16년을 살다 우리 가슴속에 묻혔다
발랄하게 지내다
세월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사라졌지만
켈리는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우아하게 있다
그레이스grace 켈리로
* 모나코 왕비가 된 미국 영화배우
촌수寸數
김길중
술 한 잔 걸치면
걸걸한 입담으로 좌중을 압도하던 친구가
협심증으로 가슴에 스탠트 2개를 박고는
정기검진에 갔다가
심장병은 가족력을 아는 게 중요하다는 의사의 말에
조부모는 100세를 다 넘기시고 돌아가셨고
아버지 어머니는 94세인데 아직 살아계신다고 하니
의사가 웃으며 유전자는 좋으시네요 라고 하자
친구는 빠르고 간결하게
유전자는 좋은데 주전자를 많이 들어서요 라며 씩 웃었다고 한다
주전자가 유전자보다 촌수가 더 가깝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도 씩 웃었다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김길중 시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