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수녀들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년의 집안으로 식품과 연료들을 계속 들여왔다. 처음에는 소년의 집 뒤로 흐르는 파시그 강을 통해 작은 배로 물품을 들여왔다. 그러자 파업 교사들과 불량배들이 배에 돌을 던져 선장이 더 이상 운행하기를 거부했다.
배를 통한 식료품 공급이 힘들게 되자 수녀들은 소년의 집 뒤 편 에 또 다른 물품 반 입구를 만들었다. 필요한 물건들을 자동차로 담장까지 운반해 오면 담 안쪽에서 수녀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넘겨받는 식이었다. 파업 교사들은 이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지만 감시해야 할 구역이 또 하나 생긴 셈이니 인원을 분산해야 했다.
방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런 대로 정상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학이 끝나고 학생들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소년의 집 차량 대부분이 학교 안에 묶여 있는 것도 문제였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당시 모든 차량을 활동 본부로 사용하고 있던 퀘존대학교 결핵 병원으로 옮기고 싶었다. 교사들이 파업을 하는 동안 새로운 일할 교사 지원자 들의 면접을 그곳에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결핵 병원 환자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결핵 병원 사회관에서 집전하던 주일 미사를 소년의 집에서 하기로 하고, 건강한 외래 환자 1천여 명을 미사에 초대했다. 당시 결핵환자들은 파업 교사들 때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소년의 집에서 날마다 결핵 병원으로 가지고 가는 음식과 약품, 세탁물 운반을 파업 교사들이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 1천여 명의 결핵 환자들이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소년의 집으로 왔다. 파업 교사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정문에 철조망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하지만 결핵 환자들 가운데는 건장한 사람들이 많았고 다소 거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단번에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소년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미사는 아주 잘 진행 되었고, 미사가 끝난 뒤 수녀들은 약을 나누어 주었다. 분위기는 밝았고 마치 축제 같았다.
수녀들은 그들에게 차가 나갈 수 있도록 정문 쪽의 장애물을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자들은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1천여 명의 건장한 환자들이 정문 쪽으로 몰려가 모든 장애물을 치웠다. 파업 교사들은 겁에 질려 이리저리 도망 쳤고, 그 사이 차량들은 모두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주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떠나고 몇몇 젊은 환자들이 소년의 집안에 남아 농구를 하고 있었다. 농구를 끝내고 오후 늦게 소년의 집을 나가는데 파업 교사들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숨어 있다가 그들을 공격한 것이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그 모습을 보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환자 두 사람은 얼굴을 심하게 맞아 피가 많이 흘렀다. 병원으로 옮겨 엑스레이를 찍자 뇌진탕 증세가 보였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어 며칠 입원한 뒤 퇴원할 수 있었다.
그 일로 알로이시오 신부는 결핵 환자들을 동원해 파업 교사들과 맞붙게 한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절감했다.
이런 일이 있는 직후 또 다른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파업 교사들은 인도에 설치한 간이침대에서 잠을 잤는데, 경사진 길을 내려오던 자동차 한 대가 그만 중심을 잃고 잠자고 있던 교사들을 덮치고 말았다. 운전자는 면허증도 없었는데,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고로 4~5명의 교사들이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급히 옮겨야했다. 그 사건이 있고 나서 몇 몇 교사들은 파업 대열에서 나가기도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파업 교사들은 일로이시오 신부가 사람들을 사주해 일부러 그런 사고를 일으켰다고 주장하며 언론을 통해 비난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거짓말은 파업 교사들이 자연스럽게 쓰는 무기 가운데 일부임을 드러났지만 그들은 결코 멈추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알로이시오 신부는 신 추기경을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추기경은 평화주의자였고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알로이시오 신부는 오직 아이들만 생각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런 교사들과 함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