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세계사] 서독 총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공산권 녹이며 獨 통일 기여했지만 '에너지 종속' 문제도
입력 : 2023.12.20 03:30 조선일보
서독 총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 날인 1989년 11월 10일 동독과 서독 사람들이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에 모여 장벽 붕괴를 축하하고 있어요. /브리태니커
독일 집권 여당 독일사회민주당(SPD·사민당)이 지난 10일(현지 시각) 폐막한 '창당 160주년 기념 전당대회'에서 과거 사민당의 대(對)러시아 정책이 '명백한 잘못'이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사민당은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사민당이 추구한 친(親)러시아 정책이 에너지 종속과 유럽 안보 위기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았어요.
이와 함께 독일과 유럽이 러시아산(産) 에너지에 의존하게 된 원인으로 1970년대 서독의 '동방 정책'이 지목되기도 했어요. 동방 정책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사민당 출신 빌리 브란트 전(前) 총리의 외교 정책이에요. 동쪽 공산주의 국가들과 화해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소련과 경제 협력을 추진했고, 이를 위해 시베리아 천연가스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는 동방 정책을 통해 동독·폴란드·소련과 화해한 공로로 1971년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습니다. 그의 동방 정책이 유럽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봅시다.
한 사람 무릎 꿇어 독일 전체가 일어섰다
서독에서 1969년은 정치적 전환점이 되는 해였어요.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처음으로 기독교민주연합(CDU)에서 사민당으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답니다. 총리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외교 정책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어요. 당시 서독은 1950년대 '할슈타인 원칙(동독과 외교 관계를 맺는 국가와는 외교 관계를 맺지 않는다)'을 표명한 이후 동독과 외교 관계를 맺는 국가와는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런 정책은 오히려 서독이 외교적 고립에 빠지는 결과를 낳았죠. 브란트는 공산권 국가와 협력한다면 서독과 동유럽 국가 간 무역이 활성화되고 장기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빌리 브란트 정부는 1970년 8월 소련과 무력 불가침 조약(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해 동유럽 화해 정책을 시작했어요. 모스크바 조약은 국제연합 헌장에 명시된 '무력 사용 금지'를 앞세워 유럽 전역의 현재 국경선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5년 동안 지속된 양국 간 냉전(冷戰) 관계가 끝이 났어요. 이후 양국은 많은 무역 협정을 체결했고, 서독은 서방국가 중 소련 제품의 최대 수입국이 됐습니다.
1970년 12월 브란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많은 피해를 본 폴란드를 방문했어요. 당시 폴란드는 공산국가였고 전쟁 중 폴란드 인구 약 20%가 사망했기 때문에 브란트의 방문을 그리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죠. 브란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에 헌화하던 중 갑자기 무릎을 꿇었어요. 돌발 행동이었기에 폴란드 정부와 브란트의 측근, 기자 등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당황했어요. 한 나라의 원수가 무릎을 꿇는 광경은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세계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며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브란트 정부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도 맺었어요. 폴란드 인민 공화국을 공식 인정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갖게 된 옛 독일 영토 소유권을 인정했죠. 서독 야당 정치인과 극우파 인사 등은 브란트의 행보에 반대하며 그를 '반역자'라 비난하기도 했어요. 특히 미국은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분단된 베를린,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동독 영토 안에 있던 수도 베를린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공동 관리했어요. 1940년대 후반 냉전이 격화하면서 베를린도 동·서로 분열됩니다. 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넘어가는 동독 난민을 막으려고 동독 정부는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을 세웠어요.
베를린 문제도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따라 점차 해결됐습니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은 1971년 9월 서베를린의 지위를 보장하는 '베를린 4국 협정'을 맺었어요. 같은 해 겨울 '동·서독 통과 협정'이 체결되면서 민간 교통이 허용됐어요. 이전에 서독 시민은 동독 허가 없이 서베를린을 방문할 수 없었지만, 이제 비자만 있으면 차량 검사 없이 동독 국경을 통과해 서베를린에 갈 수 있게 됐죠. 덕분에 동독과 서베를린을 오가는 방문객이 늘어났습니다.
동·서독이 가까워지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동·서독 기본 조약'입니다. 평등을 바탕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고 갈등의 평화적 해결, 상호 불가침, 경제·학술·문화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 촉진과 같은 내용이 명시됐어요. 1973년 9월 동독과 서독은 함께 유엔에 가입했고, 브란트는 서독 총리 중 최초로 유엔총회에서 연설했습니다. 기본 조약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서독 간 체결된 수많은 조약과 협정의 기초가 됐어요.
동방 정책은 서독과 동독의 관계를 개선하고 냉전 시대 긴장을 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결국 1990년 독일 통일로 이어졌습니다.
'데탕트'로 이어져
동·서유럽 국가들은 점차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에 동조해 국가 간 협력을 강화했어요. 서독은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불가리아와 국교를 회복하며 동유럽 각국과 교류하기 시작했어요. 동유럽으로 수출길이 열리면서 장기적으로 서독 경제와 산업에도 긍정적 영향이 있었죠.
브란트가 실시한 동방 정책은 점차 다자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1973년 '동서상호감군회담(MBFR)'을 소집해 동·서 진영 군비를 감축했고,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선 유럽과 북미 지역 35국이 '상호 간 국경 존중' '유럽 국경의 불가침성' '상호 간 내정간섭 금지' 등에 합의했어요. 냉전에서 '데탕트(긴장 완화)' 시대로 들어선 것이죠. 브란트의 동방 정책으로 유럽 각국 관계가 정상화하고, 유럽 통합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답니다.
▲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브리태니커
▲ 1961년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 장벽의 초기 모습. /브리태니커
▲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 앞에 무릎 꿇은 빌리 브란트. /미국 국립 2차 세계 대전 박물관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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