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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三浦綾子는 움직이는 종합병원이었습니다. 폐결핵으로 14년 동안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누워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직장암, 파킨슨 병, 결핵균이 뼈마디 하나하나에 침투해서 연골을 파괴시키고 고름膿을 만들어내는 결핵성척추염Spinal Caries에 시달렸습니다. 온갖 질병과 사투를 벌이는 삶은 그야말로 절망 자체였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하게 심령을 파고들었습니다. 죄 사함에 대한 은혜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었지만 감사가 넘쳤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녀는 “아프지 않으면 드리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말씀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장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 보지 못할 거룩한 얼굴이 있다...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인간일 수조차 없었다. 아팠기 때문에 기도했다. 아팠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아팠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아팠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볼 수 있었다. 아팠기 때문에 감사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질병으로...잃은 것은 건강뿐이었다. 대신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선지자Elijah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서 이방인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과부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당시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구워 아들과 함께 나눠먹고 힘겨운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상태였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하기로 한 것을 보면 과부가 얼마나 힘든 상황에 직면해 있었는지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몸부림쳐서 노력을 해봐도 도무지 해결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힘겨운 상황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시하고 넘어가기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완전히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특히, 정서적인 부분은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만 접근하면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보다 높은 차원의 정서로 대체될 때 비로소 극복할 수 있습니다. 힘겨운 상황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대체될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라고 외쳤습니다. 인생은 고해입니다. 언제든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필연적입니다. 이때,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지나치게 걱정하거나 초조해하지 말아야합니다. 불필요한 관심을 쏟아 붓지도 말아야합니다. 염려를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소중한 시간을 염려하며 허비하는 대신 차라리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해야합니다. 간구해야합니다. 하나님 한 분만 구해야합니다.
감사해야합니다. 염려를 가장 이상적인 선으로 바꿔주실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합니다. 염려하는 대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다면,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라는 약속대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인간 스스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평강입니다. 누릴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인간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하는 평강입니다. 일시적이지 않은 평강입니다. 표면적이지 않은 평강입니다.
오히려 영원하고 본질적이며 완전한 평강입니다. 그 평강이 마치 파수꾼처럼 마음과 생각을 지켜줍니다. 선지자가 힘겨운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빵을 자신에게 먼저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아들과 먹을 빵을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4)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놀라운 약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부가 당신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면 통에 밀가루를 가득 채워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병에 기름을 가득 채워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인은 통에 가득 채워져 있던 밀가루 가운데 일부를 따로 퍼낸 다음 빵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병에 가득 채워져 있던 기름 가운데 일부를 따로 따라낸 다음 빵을 굽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번 음식을 만들 때마다 번번이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밀가루를 퍼내야만 했습니다.
단 한 방울의 기름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다 짜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밀가루와 기름을 조금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먹을 음식을 만들어야했습니다. 음식을 만들 때마다 매번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섰다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넘치도록 허락해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렇다고 모자라게 주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한 끼 한 끼 꼭 필요한 만큼만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약속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필요한 만큼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 있었습니다. 감격과 감동과 놀라움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으니 교만할 수는 없었습니다. 자랑할 수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늘, 항상, 매일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기대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신앙적인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안해 보이는 삶입니다.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만 하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든 순간, 하나님과 함께 더불어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호14:5a)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1년 365일 동안 쉬지 않고 매일 이슬이 내리는 지역은 없습니다. 그런데 성민 이스라엘이 광야를 행진하는 사십년 동안,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광야 온 지면에 이슬이 내렸습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이슬이 내렸습니다.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기적입니다. 바위에서 생수가 터졌습니다. 기적입니다.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슬이 내렸습니다. 그야말로 크고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매일 쉬지 않고 내리는 이슬 덕분에 사십년이라는 긴 광야 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사막 생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쉬지 않고 내리는 이슬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티며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성민 이스라엘은 유목민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동안에도 온갖 종류의 짐승들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내리는 이슬이 없었다고 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양羊하면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주어서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쳐난다.”(시23:2)라는 고백이 떠오릅니다.
양들이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에서 목자가 불어주는 피리소리를 들으면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입니다. 광야를 행진하는 성민 이스라엘의 짐승들은 생각할 수 없는 풍경이었습니다. 실제로, 광야 어디에도 푸른 풀밭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쉴 만한 물가를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황량한 들판과 말라비틀어진 작은 관목들만 지천에 널려 있습니다. 짐승들은 관목뿌리로부터 새로 돋아나는 연한 풀을 뜯어먹기 위해서 쉬지 않고 주둥이를 틀어박았습니다. 불쌍해 보입니다. 처절해 보입니다. 간밤에 내린 이슬이 없었다면 이런 모습도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장맛비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쉬지 않고 내리는 이슬만으로도 감지덕지였습니다. 쉬지 않고 매일 내리는 이슬 덕분에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짐승들은 매일 쉬지 않고 내리는 이슬 덕분에 거칠고 황량한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이렇습니다. 매일 내리는 은혜 없이는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은혜 앞에서 계급장은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사실 선교사, 목사, 장로는 계급장이 아닙니다.
유교 사상에 절어 있는 사람들이 그렇다고 여기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대우받고 싶은 몰지각한 사역자들이 그렇다고 강조하며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은혜가 부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하루하루 내려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극히 인위적인 세상 논리와는 완전히 배치背馳됩니다. 세상은 자리와 실적에 따라 전혀 다른 대우가 주어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라고 더 많은 은혜가 부어지고, 성도라고 상대적으로 적은 은혜가 부어지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똑같은 은혜가 부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을 향해서 “나는 이제 너희라면 지긋지긋하다! 너희 종교 학자들아, 바리새인들아,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구나! 너희 삶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너희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구나.”(마23:13)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보다 의롭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떼 놓은 당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예수, 당신이 뭔데 감히 우리가 이제까지 고군분투하며 쌓아 올린 공로를 헌신짝처럼 취급하느냐? 그렇게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고도 당신이 무사할 줄 아느냐?”라고 외쳤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습니다.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할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온갖 선을 다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공의로운 삶을 살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다른 구제를 베풀었어도 그렇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칭찬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양심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았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떠나서는 그 누구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14:6)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성인聖人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거룩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어도 그렇고,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인생이라면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리는 이슬을 매일 먹어야합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었던 모세와 여호수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슬 없이는 광야를 통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슬은 밤에만 내립니다. 낮에 내리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어두운 밤을 지나는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이슬 같은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이슬은 비같이 요란하게 내리지 않습니다. 언제 내렸는지 모를 정도로 소리 없이 조용히 내립니다. 그렇지만 새벽길을 걷다보면 바짓단을 축축이 적실 정도로 충분히 내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습니다. 언제나, 항상 쉬지 않고 부어집니다. 조용히 부어집니다. 충분히 부어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미처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부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호14:5b)라는 증거대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그것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이슬을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마치 백합화같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를 견고하게 내릴 수 있습니다. 제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호14:6)라는 증거대로, 돋아난 가지는 하루가 다르게 퍼집니다.
마치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처럼 계절에 맞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는 모든 일들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하게 풀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 같이 하나님은 물론 사람들이 수시로 찾고 또 가장 요긴하고 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이미 부어주셨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했었던 놀라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영적인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레바논 백향목 같이 자기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아름다운 향기를 널리 발산發散할 수 있습니다. 영향력까지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14:7)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의 그늘 아래 안전하게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시는 참된 평안은 물론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치 곡식 같이, 포도나무 같이,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자신의 주변에 머물러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부어주시는 이슬을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슬은 메마른 광야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수입니다. 또 이슬은 일 년에 딱 한 번만 내리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절기에만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일주일 또는 한 달 분량이 한꺼번에 내리지도 않았습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내렸습니다. 그날 필요한 만큼만 내렸습니다. 메마른 수목들이 타들어갈 정도로 가물 때에도 쉬지 않고 내렸습니다. 하루하루 한 결 같이 내렸습니다.
또 이슬은 소리 없이 내렸습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게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렸습니다. 은혜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은혜를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내려주십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는 것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내려주고 계십니다. 그Joseph는 채색 옷이 벗겨졌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미디안 상인에게 팔렸습니다. 왕의 시위대장 집에 팔렸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그의 삶 어디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모든 일에 형통하였다고 증거 합니다. 그의 삶이 가장 이상적으로 펼쳐졌다고 증거 합니다. 특히 그는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한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친히 이끌어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이집트 여러 도시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지저분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내도 그다지 청결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로 지은 건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이 워낙 귀한 사막 지역이다 보니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로 건너갔습니다. 내부는 이집트와 비슷했습니다. 건물들은 깨끗했습니다. 두 나라는 서로 인접해 있습니다. 강수량도 비슷했습니다. 같은 사막 지역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가이드에게 이유를 물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내리는 이슬이 건물을 청소해주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삶 역시 친히 이끌어주고 계십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날에 꼭 필요한 은혜를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오히려 풍성하게 부어주고 계십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 이슬 같은 은혜를 부어주고 계십니다. “그들은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으며, 무더위나 햇볕도 그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며, 샘이 솟는 곳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사49:10)라는 선포에 따르면,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리지 않습니다. 목마르지 않습니다.
햇살조차 하나님 백성들을 상하게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무려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행진한 성민 이스라엘 가운데 굶어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목말라 기진해서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에 그을려 죽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샘의 근원으로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모진 고난 속에서도 오직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믿고 의지했던 그Joseph에게는 놀라운 축복이 선포되었습니다.
하늘의 보물인 이슬입니다. 땅 아래에 저장한 물입니다. 농경생활을 함에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할 물을 가리킵니다. 태양이 결실하게 하는 선물입니다. 태음太陰이 자라게 하는 선물입니다. 태양열과 달빛에 의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는 땅의 각종 소산물所産物을 가리킵니다. 옛 산의 좋은 산물입니다. 영원한 작은 언덕의 선물입니다. 산에서 나는 각종 소산물을 가리킵니다. 땅의 선물입니다. 땅에 충만한 것입니다.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도 당신을 놓지 않은 그를 마음껏 축복해 주셨습니다.
호흡이 주어지는 모든 순간 특히 견디기 힘든 고난이 걷잡을 수 없이 엄습해 오는 두렵고 떨리는 순간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부어지는 이슬 같은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복된 삶, 영적으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는 복된 삶, 아름답게 꽃피우고 열매 맺는 복된 삶, 무엇보다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땅의 온갖 축복까지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