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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에브라임에게로 흐르는 장자의 축복
창 48: 8-14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창27:4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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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계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무엇인가 좀 가계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가정이고,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신 가정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하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계보에는 참으로 이상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 5대에 걸쳐 계속해서 차자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처럼 장자권을 중요시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5대나 계속해서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이런 우연치 않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떤 비밀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9.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10.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 맞추고 그들을 안고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12.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13.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 48:8-14).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삶의 기록 속에서 한 가지 참으로 이상한 것이 발견됩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계속해서 장자권이 뒤바뀌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스마엘이 장자요 이삭이 차자입니다. 그런데 그 장자권이 서로 뒤바뀌어서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두 번째로 이삭에게도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그 장자권이 서로 뒤바뀌어서 작은 아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그 야곱의 아들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맏아들 르우벤의 장자권이 뒤바뀌어져서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또 그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도 마찬가지입니다. 므낫세가 장자이지만, 장자권은 에브라임이 받았습니다. 축복의 조상, 아브라함의 가정에 이렇게 2대, 3대, 4대, 5대에 걸쳐서 축복의 상징인 장자권이 계속 뒤바뀐 놀라운 기록이 성경에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속 4대에 걸쳐서 유대인에게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장자의 축복이 연속적으로 뒤바뀌어버렸다면 이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무언가 하나님의 깊은 메시지가 담겨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요?
여기에서부터 성경 속에 감추어진 메시지를 찾기 위한 시도는 출발됩니다.
먼저 각 가정의 뒤바뀐 그 상황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속에서 뭔가 하나님의 공통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
먼저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경우입니다. 아브라함의 2세들의 경우입니다.
원래 아들이 없던 이 가정에 하나님은 앞으로 아들을 주실 것이며 그 아들로 인하여서 하나님의 축복이 그 후손들에게 대대로 이어질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믿고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10년이 다 되도록 아직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견디다 못한 이들은 약속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서 자기 부인의 몸종인 젊은 하갈을 통해서 첫 아들을 얻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이스마엘에게 장자의 복을 주시지 않고, 오히려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15년 후에 약속으로 이삭이 태어나게 해 주셔서 나중에 태어난 차자 이삭이 이제 아브라함의 장자로서의 엄청난 축복권을 이어가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은 ‘내일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현재의 인간적 방법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내일의 약속’입니다.
2. 야곱과 에서의 경우
두 번째로 이삭의 아들들의 경우를 보십시다. 아브라함의 3세들의 경우입니다. 이삭도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에서와 야곱 쌍둥이입니다. 그러나 쌍둥이도 엄연히 형과 동생이 있는 법, 에서가 형으로 야곱이 동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만 에서는 형으로서의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25장 31절에 보면 에서가 장자권을 야곱에게 파는 장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31. 야곱이 이르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32.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33. 야곱이 이르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배고픈 에서는 팥죽 한 그릇 때문에 미래의 축복인 장자권을 동생에게 넘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내일의 축복이 보장되어 있는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고 사모한 반면에, 장자였던 에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재를 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미래의 축복보다는 현재의 팥죽 한 그릇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3. 르우벤과 요셉의 경우
세 번째는 야곱의 아들들의 경우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았고, 장자는 르우벤이라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자권은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르우벤은 자기 아버지의 첩과 간통하는 죄를 저질렀기에 그 장자권이 열한 번째 요셉에게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나 왜 둘째, 셋째가 아닌 열한 번째 요셉에게 넘어갔는지는 ‘열두 지파에 야곱의 손자가?’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합니다. 여기에서도 ‘현재의 쾌락’보다는 ‘내일의 요셉의 꿈’으로 장자권이 넘어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경우
네 번째로 아브라함의 5대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경우입니다. 요셉의 두 아들입니다. 애굽에 팔려가서 갖은 고생을 다 했던 요셉이 이제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결혼을 해서 낳은 첫아들의 이름을 므낫세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창세기 41장 51절에 “51.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 속에는 ‘과거와 지금 현재까지의 고난이 물러가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즉, ‘므낫세’는 ‘과거와 현재’라는 뜻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차자를 낳았는데, 둘째 아들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했습니다. 이 이름 속에는 ‘미래의 창성, 하나님께서 앞길을 창성케 해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현재보다는 ‘내일의 창성, 내일의 복’을 앞세우셨습니다. 그러니 므낫세보다 에브라임이라는 차자를 앞세우신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육신의 눈은 늙어서 점점 더 어두워가지만 영적인 눈으로 하나님의 이 뜻을 안 야곱이 두 손주에게 축복해 주면서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장자의 축복을 해주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아브라함의 5대손에 있어서도 역시 장자와 차자가 뒤바뀐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와 현재보다는 미래를 더 중요시하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2세, 3세, 4세, 5세손들의 장자권이 계속해서 뒤바뀌는 모습들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뒤바뀌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습 니다. ‘일관된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1. ‘이스마엘’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인간적 방법, 곧 현재’를 말합니다. ‘이삭’은 ‘미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약속을 앞세우셨습니다.
2. ‘에서’는 ‘현재의 팥죽’입니다. ‘야곱’은 ‘미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더 높이셨습니다.
3. ‘르우벤’은 ‘현재의 쾌락’입니다. ‘요셉’은 ‘미래의 꿈’입니다. 하나님은 현재의 쾌락보다 미래의 꿈을 장자로 바꿔 주셨습니다.
4. ‘므낫세’는 ‘과거와 현재의 고난’입니다. ‘에브라임’은 ‘미래의 창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미래의 창성 에브라임을 장자로 바꿔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현재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미래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 이 장자 뒤바뀜의 사건들을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현재의 고난보다는 미래의 위로와 상급을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현재만 보지 말고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를 이겨내는 것.” 적어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현재는 고난이 있더라도 내일의 위로와 축복을 바라보며 잘 견디어 내는 야곱과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편안함’보다는 ‘내일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향하여 달려가라’는 것입니다. 미래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과 축복을 소중히 여기며 그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팥죽 한 그릇과 오늘의 잠시의 쾌락을 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육신의 만족과 정욕과 현재의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내일의 상급을 잃어버리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육신의 눈에는 오늘 현재만 보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눈에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일은 무엇으로 보입니까? 바로 ‘믿음의 눈’으로 보입니다.
이제는 육신의 눈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내일의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서 사는 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참 후손다운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찾습니다. ‘지금의 쾌락’을 중요시합니다. ‘지금 내 손에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며 삽니다.
‘내일을 염두에 두고서 내일을 더욱 소 중히 여기고서 오늘 참으며 오늘 베풀고 오늘 희생하고 오늘 씨를 뿌리는 것’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대부분 르우벤을 따르고, 에서를 따르고, 이스마엘의 경우가 되고, 므낫세에 늘 머물러 있으면서 지금 고통스러우면 짜증과 원망할 뿐 ‘내일의 위로와 내일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보지 못하고 삽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것이 지금의 이 사회요, 그러다 보니 이 사회가 현재의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는 점점 더 무서운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미래의 영광’을 믿음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롬8:18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이 장차 주시는 이러한 상을 얻기 위해서 달려간다’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상을 받도록 달음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내일을,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내일의 축복, 하늘나라의 상급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나에게 내일의 상을 받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이 다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빼앗겨 버리는 르우벤과 에서와 같은 사람이 우리 믿음의 사람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오래 전에 쓰인 구약 성경의 사건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 설정과 삶의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 깨닫고 과거의 상처를 붙들고 오늘을 힘들게 살지 말고, 현재 우리 눈앞에 보이는 팥죽 한 그릇을 위해 귀한 장자권을 팔지 말고 오직 미래의 창성함과 장래의 축복을 향해 하나님을 모시고 힘차게 전진하는 여러분들이 축복된 삶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며 기원합니다. 아멘.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