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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희 목사
오늘은 총회가 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일어나고 살아있어서 교회가 살고 우리 사회가 살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살아야 교회가 산다, 나라가 산다고 합니다. 정말 청년이 살아야 미래가 있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우리 교회도 청년이 살아야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청년’이란 말은 헬라어의 ‘네아니스코스’란 말입니다. 이 말은 ‘네오스’란 새롭다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청년은 새로워야 합니다. 청년은 날마다 새로운 것을 찾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청년이 새롭지 않으면 청년의 기백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일하고, 새로운 일을 계획하는 이것이 청년의 기백입니다.
자기가 익숙한 곳에만 맴돌면 이미 노인이라고 합니다. 안 먹어본 것을 아예 먹으려고 시도하지 않는 것도 늙었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노화의 무서움은 ‘경직’입니다. 마음이 경직되고, 정신이 경직되고, 사고가 경직되고, 행동이 경직되고, 육체가 경직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고 선입관이 항상 새로운 생각을 가로막습니다. 고장 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 편견에 사로잡히면 이미 노인입니다. 청년은 경직되지 않습니다. 반면에 물리적 연령이 높더라도 새 것을 시도하고 생각한다면 청년입니다.
현대 문화는 젊어 보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입니다. 젊음이란 불확실한 미래를 지연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비타민 보조제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나 운동기구 등, 젊음의 환상을 지켜주는 산업이 점차 번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젊음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티 에이징’(Anti Aging) 즉 노화 방지 클리닉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은 이런 안간 힘을 안 써도 젊음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젊음은 그 자체가 아름다움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덕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양극화입니다. 경제가 양극화하고, 지식과 정보가 양극화하고, 영성도 양극화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연령대의 인구도 양극화합니다. 시골에는 청년 없는 마을이 많습니다. 노인들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데 젊은이가 없습니다.
농어촌의 심각한 문제는 연령대의 균형이 안 맞다는 것입니다. 총각들이 처녀가 없어 결혼을 못하여 다른 나라에서 처녀를 데리고 와서 국제결혼을 합니다. 사기 결혼도 있고 문화 충격도 있어서 문제도 많습니다. 더 웃지 못 할 일은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시골 어느 교회는 청년이 없어서 61세 된 노인이 교회의 청년회장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환갑이 넘어도 청년이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청년이 없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중간층이 엷은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나라는 큰 나라는 아니지만 올림픽을 이미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 대구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를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인천은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평창이 동계올림픽까지 유치하게 되면 우리나라는 문자 그대로 스포츠 대국이 될 것입니다. 올림픽, 유니버시아드대회, 아시아경기대회, 월드컵경기를 다 치르고 이제 동계올림픽만 유치하면 다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스포츠는 중요한 현대의 정신이며 경제적 부가가치도 엄청납니다. 우리는 영혼의 경주에 힘쓰고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데 주력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청년들이 영혼의 경주에 힘써서 우리나라가 미래가 밝은 영성 대국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젊은이들을 신앙 없이 교육시켜라. 그리하면 틀림없이 그들은 영리한 악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영리한 천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려면 영혼의 경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첫째, 인내로서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청년들이 인내로서 끝까지 경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에게는 지난날보다 남은 날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은 날 동안 열심히 인내하며 달려야 합니다.
경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경주는 끝까지 해 봐야 압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달려야 합니다. ‘경주’(race)란 말은 헬라어 ‘agon’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고통’(agony)이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달리기는 가벼운 조깅이 아니라 녹초가 되도록 힘들며 때로는 심한 고통이 따르는 경주입니다. 경주의 95%는 인내입니다. 신앙의 경주에서도 인내는 절대적입니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주님이 오실 때 까기 쉼 없이 달리는 것이 신앙의 경주입니다.
‘천로역정’에는 순례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갈 때까지 많은 시련과 장애와 방해를 이겨내며 인내하며 나아가는 십자가의 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 인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를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만이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도 내 힘이 아니라 성령님께 맡겨버릴 때에 가능합니다.
경기에서도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야구는 9회말부터라고 합니다. 농구에서는 마지막 버저가 울릴 때 손에서 떨어져 나간 공이 링으로 들어가 그물을 출렁이며 승패가 바뀌는 ‘버저 비터’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정해진 시간이 다 끝나고 3분 정도의 경기 시간을 연장하는 ‘인저리 타임’이 있습니다. 인저리 타임에도 승패가 바뀌기도 하고 다 진 경기가 비기기도 합니다. 골프에도 선두가 두 사람일 때 한 홀에서 결판을 내는 ‘서든 데스’가 있습니다. 한 타라도 적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경기하는 선수들이 포기하지 않고 인내해야 할 이유입니다.
‘열세 살 키라’라는 책에는 “우리 마음속에는 도움꾼과 방해꾼 두 가지 존재가 함께 살고 있다. 방해꾼은 늘 ‘포기해, 의미 없는 일이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도움꾼은 언제나 포기하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하지”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말하면 방해꾼은 마귀입니다. 도움꾼은 성령님입니다. 7세기의 영성가 클리마쿠스는 “우리가 세상을 포기한 후에 우리를 공격하는 귀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터넷 동영상을 보니 아주 억울한 선수가 있습디다. 사이클 선수가 경기를 하다가 결승지점을 눈앞에 두고 승리를 예감했는지 두 손을 번쩍 들고 승리를 자축하다가 앞바퀴가 뒤뚱뒤뚱하더니 넘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그 뒤를 따라오던 선수가 앞질러 갑니다. 일어나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고 타려니 급한 마음에 또 넘어지려 합니다. 결승점 앞에서 자전거를 끌고 뛰어 겨우 이등을 하였습니다. 끝까지 가보지도 않고 너무 일찍 승리에 취하는 것도 좋은 경주자가 아닙니다.
영적 경주에도 이등한 사람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영적 경주에서 완전히 몰락한 대표적 인물은 가룟유다입니다. 그는 화려한 출발에 비하여 너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에도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나타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이 사람들이 영적 경주에서 낙오된 사람들입니다.
‘참을성’(patience)이란 말은 수동적으로 기다린다는 뜻이지만 ‘인내’(endurance)란 말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내는 고통을 동반합니다. 고린도전서 9:27에는 바울이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제어가 인내입니다. 인내는 자기를 쳐야 가능합니다.
야구에서의 3루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느 선수는 생애 첫 홈런을 쳤습니다. 그런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3루를 안 밟고 뛰어 그 홈런이 무효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수의 발이 3루에 달라붙어 있는 동안에는 홈으로 달릴 수 없습니다. 안전지대에 머물려고 하기 때문에 기회를 잃는 수도 있습니다. 경기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디모데전서 4:15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그리고 자신은 빌립보서 3:12에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합니다. 힘차게 끝까지 달리는 것이 경주인 것을 그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NATO’라는 말이 있습니다. ‘No Action Talk Only’라는 말의 약자입니다. 행동은 하지 않고 말만 그럴 듯하게 늘어놓는 것을 말합니다. 행동이 없이 말만 가지고는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또 ‘갤러리족’이란 말도 합니다. 골프장에서 선수들의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경기는 하지 않고 구경만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경주자입니다. 선수입니다. 구경만 하는 것은 신앙인의 참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 청년들이 열심히 경기하고 열심히 신앙의 경주를 하는 행동하는 청년들이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합니다. 경주는 목표가 있습니다. 경주의 목표를 벗어나면 경주가 아닙니다. 경주는 골인 지점을 벗어나면 아무리 달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3:14에서 바울은 목표를 말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목표가 확실하면 늦어도 승리자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없거나 목표를 맞추지 못하면 빨라도 실패자입니다. 목표를 뜻하는 ‘goal’은 그 어원이 분명치 않지만 지금은 사라진 어떤 운동경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그것은 원래 넘어야 할 선 즉 일종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나라 실버원정대인 60대의 두 산악인이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였습니다. 8,848 미터의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였는데 원정대의 평균 연령이 66세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노익장입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열정이 있으니 그 일이 가능했으리라고 봅니다.
산을 오를 때는 목표가 있어 올라갈 때보다 목표가 없이 내려올 때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경주가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6에서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달음질이 방향이 없고, 싸움이 허공을 치면 결과는 뻔한 것입니다. 이미 경기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싸움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돈을 따라가는 일이 향방이 없는 일입니다. 허공을 치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쾌락을 따라가는 일이 향방이 없는 일입니다. 허공을 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을 따라가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인생의 실패자로 주저앉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선교선 한나호를 섬겨보니 배에 대하여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한 번은 말레이시아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한국까지 왔습니다. 높은 파도가 열흘 내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그 배의 선장도 멀미를 하였답니다. 이럴 때는 절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파도를 향해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합니다. 파도를 겁내거나 멈추면 배는 뒤집힙니다. 윈스턴 처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파도는 수없이 많고 배는 단 하나밖에 없는데 배가 파도를 이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배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서 9:11에는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라고 합니다. 빨리만 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표가 없이 빨리 가는 것보다 목표가 있으면서 천천히 가는 것이 낫습니다.
사막의 교부 압바 안토니는 영성훈련의 목적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달군 쇠를 해머로 내려칠 때는 먼저 무엇을 만들 것인지, 즉 낫을 만들 것인지 칼이나 도끼를 만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떤 덕성을 함양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목표가 분명해야 무엇이든 만들 수가 있고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클로비스 채플 목사님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척의 외륜선 이야기입니다. 두 배가 멤피스를 출발하여 미시시피 강을 따라 뉴 올리안즈로 향하고 있습니다. 느린 배를 보며 서로 비웃습니다. 결국 두 배는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배가 뒤로 처졌는데 연료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항구까지 가기엔 충분하지만 경주엔 부족하였습니다. 결국 선장은 배의 화물을 연로로 써서 결국 경주에는 승리했지만 수송해야 할 화물을 다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경주에서 일등을 하기 위하여 화물을 태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경주에서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정확하고 바르게 가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4:7에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선한 싸움은 규칙대로 하는 싸움입니다. 규칙대로 하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반칙왕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반칙왕이 잘 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입니다. 선한 경주자가 잘 되어야 선한 사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은 경주의 목표, 방법, 경기 규칙이 확실하고 분명한 방법입니다. 져도 이기는 경기를 하세요.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를 찬송하며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경주하는 청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어느 동생이 형에게 “내일부터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고 다짐 했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형은 “인간이 먼저 되어라”고 하더랍니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참 인간이 문제입니다. 경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본입니다. 기술보다 기본입니다. 자세와 인격이 중요합니다. 목표와 규칙이 소중합니다.
목표 없이 열심만 가지고 달릴 수 있습니까?
기본이 없이 기술만 가지고 살 수 있습니까?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술이나 재주가 아니라 목표입니다. 분명한 초점입니다. 든든한 기본입니다.
세상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청년입니다. 세상사에 어떤 일도 잘 모르겠고 확신도 없다면 중년입니다.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알고 있지만 아무도 묻지 않는다면 노년에 접어 든 것입니다.
우리 청년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기백을 가지세요. 그러나 배울 것이 끝없이 많다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인내로 열심히 달리세요. 그리고 무작정 달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선한 경기를 하세요.
인내로 열심히 달리고 예수님이 확실하고 분명한 목표가 되는 이런 청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