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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강해-3 예배부터 회복합시다
(스 3:1-13)
올 한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부흥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흥을 꿈꾸고 있습니다.
부흥이란 회복입니다. 일어서는 것입니다. 죽어 있는 자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저는 부흥을 생각할 때마다 에스겔 47장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거기에 보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이끌림을 받아서 하나님의 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스며 나와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흐르는 물은 점점 많아져서 처음에는 발목에 차다가 다음에는 무릎에 차고 그 다음에는 허리에 차고 그 다음에는 헤엄쳐야 할 물로 많아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이 된 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 바닷물을 소성시킵니다. 이 물이 흐르는 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소성함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바로 부흥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강 좌우에는 각종 실과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가 자라서 잎은 늘 푸르며 달마다 새로운 실과는 맺습니다. 이것이 부흥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이 물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7장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그리고 요한은 이렇게 그 말씀을 설명합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우리는 부흥의 역사를 가져온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 나와 흐르는 물이 성령이심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감동케 하심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부흥케 되어지는 역사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한 사람도 예외일 수가 없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모두가 성령에 감동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인간의 생각이 들어갑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로 그 마음이 감동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각각 그 본성(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무엇을 먼저 시작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서 왔으므로 먼저 회의를 해서 설계도를 작성하고 어떻게 성전을 지을 것인지 계획부터 세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자들이 먼저 한 것은 예루살렘 성으로 모이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온 무리들이 거한 곳은 각각의 고향이었습니다. 2:70을 보면, 그 본성에 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연고지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본성에 거하였던 무리들이 3:1에 보면, 칠월에 이르러서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모이는 교회가 있고 흩어지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가 있고, 흩어져서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성도의 삶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모습이 모두 건강한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모이기를 힘써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교제하고 말씀을 나누고 즐겁게 지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흩어져서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모이기는 힘쓰지 않으면서 서로 교제하기를 힘쓰지 않으면서 흩어져서 각자의 삶에서는 성도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온전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지 않는 교회가 흩어져서 교회의 사명을 다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흩어져서도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고 흩어지는 교회의 우선순위를 말한다면 먼저는 모이는 교회입니다. 모이는 교회가 건강하고 바로 되어질 때에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 역시 건강하고 바로 되는 것입니다.
히10:24-25을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하자고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가면 갈수록 모이기를 폐할려고 합니다. 모이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점점 시간이 갈수록 모이기를 얼마다 힘들어합니까? 여러분의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점점 교회에 나오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큰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앙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에 자주 나가지는 못하지만, 내 신앙은 내가 지킨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서구에는 일주일에 주일 낮 예배 한 번만 드리면서도 신앙생활 잘 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외국의 많은 교회들이 일주일에 한번 예배드립니다. 주일 저녁예배도 없고 수요예배도 없고, 새벽예배, 금요철야예배도 없습니다. 한국에는 무슨 예배가 그리도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서구의 교회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이기를 힘쓰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저들이 정말 마음처럼 나가서 세상에서는 교회의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까? 모이기를 힘쓰지 않고 폐한 결과가 오늘날 서구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지금도 건강한 교회들은 여전히 모이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를 향하여 갈수록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함께 모이는 일을 힘들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너무 바빠서 믿음의 형제와 만나는 일을 자꾸 뒤로 미루게 할 것입니다.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는 일을 어렵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영적 전쟁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는 간교한 자입니다. 속이는 자입니다. 영악한 자입니다. 어떤 식으로 우리를 공격해야 할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개개인의 한평생 노하우를 가지고 싸우지만, 마귀는 아담과 하와 이후로 지금까지 쌓아온 노하우가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힘없는 그리스도인으로 비실비실 살아가게 할 방법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모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일을 바쁘게 만듭니다. 세상의 일들을 많이 만듭니다. 정신없게 만듭니다. 그리고 세상의 일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로 모일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교회에 나가서 자주 예배드리고 싶지 않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요예배에 나가서 말씀 듣고 심야기도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싶지 않은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못합니까? 너무 바쁩니다. 너무 일이 많습니다. 너무 피곤합니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의 삶이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예배시간이 정해져 있어도 어차피 나가지 못하니까, 마음만 불편하니까, 하나 하나 없애면 되겠습니까? 뭐부터 없앨까요? 먼저 금요심야기도회부터 없애고, 그 다음에 수요예배 없애고 주일 저녁 예배 없애고, 그리고 새벽예배 없애고 구역예배 없애고, 주일예배 한번 찐하게 드리면 되겠습니까? 솔직히 그런 마음이 들죠? 누가 이런 마음이 가장 간절할까요? 목사입니다. 왜 그리 예배가 많은지, 설교 준비하기도 바쁩니다.
여러분! 늘 하는 설교니까, 그냥 자리에 앉으면 설교가 만들어지는 것 같죠? 참고서적 많으니까, 몇 권 뒤져서 짜 맞추면 될 것 같죠? 그것도 한 두번이죠? 한번 해 보십시오. 설교가 즐겁고 전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야 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설교가 고통스럽습니다. 엄마들이 아침 밥 해먹이고 치우고 나면 또 점심 걱정해야 하는 것처럼 한국교회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주일설교 끝나면 수요설교 준비해야 합니다. 수요설교 끝나면 또 심야기도회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주일설교 준비해야 합니다. 간간히 성경 공부해야 합니다. 매일 같이 새벽설교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왜 그렇게 심방도 자주 가야 하는지 모릅니다. 거의 매일 저녁에 모임이 있고 또 새벽마다 새벽예배가 있습니다. 철인이 아니면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할 시간이 제대로 없습니다.
예배를 줄이자고 하면 가장 좋아할 사람은 바로 목사입니다. 그런데 왜 못 줄입니까?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이 사단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가까울수록 자꾸 모이기를 폐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리하시기 바랍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냥 모여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모이라고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힘써야 합니다. 싸워서 이겨야 모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모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대안교회는 참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목사가 예배에 나오라고 강요도 하지 않고 헌금하라고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봉사 안한다고 뭐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안수집사 권사가 되어서 기도하지 않아도 기도하라고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 편합니다. 그래서 박상필 목사는 좋은 목사라고 신사적인 목사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알고보면 그러는 저는 참으로 나쁜 목사입니다. 욕먹기 싫은 것입니다. 싫은 소리 하기도 듣기도 싫은 것입니다. 교회 나가지 않고 붙어만 있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악한 것입니다.
용서하시고 들으십시오. 어떻게 제직이 주일 예배 한번으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안수집사가 권사가 집사가 기도하지 않고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까? 물론 집에서 하겠지요, 틈틈이 시간 나는대로 하겠지요. 마음은 늘 주님을 향해 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이지 못하도록 하는 그 일들과 싸워야 합니다. 시간을 쪼개야 합니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쓰고 모여야 합니다. 모이지 않고 우리의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부흥은 말뿐인 부흥이 될 것입니다.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까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할 것입니까? 힘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가면 갈수록 더욱 모이기가 힘들 것입니다.
이제 다시 에스라 본문 말씀으로 돌아오십시오. 저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무엇을 했습니까?
2-6절까지를 보십시오. “......................”
뭡니까? 단을 만들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드렸습니다.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상번제를 드렸습니다. 월삯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모든 절기의 제사를 다 드렸습니다. 모든 예배를 회복하였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분명히 밝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치 못한지라’ 아직 전 지대가 놓이기 전입니다. 일이 시작되기 전에 준비도 되기 전에 저들이 먼저 한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받아 성전 재건을 위해서 일어선 무리들이 먼저 회복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예배였습니다.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서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비전이 있습니까? 뭔가 교회를 위해서 크게 한 건 올릴 계획이 있습니까? 지금은 내가 제대로 못하지만, 이제 조금만 있으면 뭔가 멋지게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러한 계획과 비전 다 좋습니다. 그러한 삶의 목표, 다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러한 일들이 계획이나 비전, 꿈이 아니라, 나의 현실로 만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예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에서 아벨은 예배에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셋의 아들 에노스 역시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였습니다. 에노스 때부터 공식적인 예배가 생긴 것입니다. 믿음의 계보는 계속해서 예배드리는 자의 계보로 이어집니다. 노아도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는 예배 드리는 자입니다.
(사43:21)에 보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하나님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다시 말하면,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멋진 예배당에서 웅장하고 장엄하게 수백명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가 동원되고 수억짜리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맞추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할지라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이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영적예배 삶의 예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흩어져서도 교회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성도가 흩어져서도 성도의 본분을 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통뼈가 아닙니다. 먹지도 않고 공급받지도 않고 강건하고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 양식을 공급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찬송을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찬송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영의 양식-말씀을 공급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모여서 기도할 때에 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우리는 위로받으며,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특권입니다.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전 지대를 놓으면서 예배하는 저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즐거이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 감격에 대성통곡하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이러한 예배로 회복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뻐하여 즐거이 드리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즐기시기 바랍니다. 예배 드림을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수많은 주의 백성들이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그토록 드리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예배부터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성공하지 않고서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는 없습니다. 예배의 회복 없이 우리 심령의 회복은 없습니다. 예배가 살아나지 않는 교회의 부흥이란 없습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예배로부터입니다. 우리는 늘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구원하신 최종적인 목적이 우리를 예배자로 세우시기 위함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모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모든 예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참으로 치열한 영적 전쟁이 될 것입니다. 싸워보기도 전에 물러서지 마십시오.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전15:57)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5:4) 예배 드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흥은 예배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싸움도 이 싸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승리도 예배에의 승리로부터 시작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