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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4-19
히스기야의 성전 기도 / 변한규 목사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의 배경을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국가적인 위기를 만났습니다. 앗수르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완전히 포위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 성만이라도 지키기 위해서 산헤립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은과 그리고 문과 기둥에 붙여놓은 금 까지도 벗겨서 곡물로 다 바쳤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눈물 섞인 대가를 치룬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하면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군대를 철수시킬 줄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들이 마귀를 믿고 세상을 믿으면 천번 만번 배신당하기가 일수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이것을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산헤립은 랍사게라는 장군을 통해 다시 협박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이제는 항복하라'는 것입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산헤립도 무지했습니다. 어찌 말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우상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적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히스기야는 더 이상 굴욕만 당하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막혔던 길을 뚫고 있었습니다. 사방이 막혔을 때, 국가가 절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그는 하늘을 향하여 손을 높이 들고 무릎을 꿇고 부르짖기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의 성전기도입니다.
이 시간 히스기야의 성전기도를 묵상하면서 우리의 금년 한 해가 영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승리하는 해가 되기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묵상합니다. 히스기야가 어떻게 기도 했습니까?
첫째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본문14절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라고 했고 또 19:1에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국난을 눈앞에 두고 국무회의나 군지휘관의 회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왕이면서 제사장이나 할 일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전쟁의 때 전정터로 나아가지 않고 왜 성전으로 올라갔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택하였습니까?
영국의 엘리자베스의 말대로 일 사단의 병력보다 기도의 위력이 더 강한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 속았습니다. 따라서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다. 사람에게 소망을 둘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이제 하나님 앞에 빈 손 들고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무릎을 꿇고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백성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성전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막11:17에 성전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시편86:7에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고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무엇을 했습니까? 먼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라가 어려운 때 왕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일은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어려울 때 목사,장로,권사,집사,성도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종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어려운 때 하나님의 종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일 이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환난을 당한성도,시험을 만난 성도 있습니까? 주의 종들에게 기도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IMF한파,위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 히스기야가 어찌했습니까?
사람을 만나기 전에 성전에 올라가 먼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과 의논하기 전에 성전에 올라가 먼저 하나님과 의논했습니다. 비록 전쟁의 때이기는 하지만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성전에 올라가 세상 방법을 택하지 않고 기도의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히스기야에게서 이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둘째 먼저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19:1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회개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비통과 원통함을 표시할 때 옷을 찢었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그것을 마음 아파할 때 굵은 베옷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히스기야도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옷을 찢고 베옷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19:2을 보면 "궁내 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가 위기에 처해있을 때 왕을 비롯 중진들이 먼저 회개하기를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도 죄를 회개할 때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뿌리고 재위에 앉아 부르짖었습니다. 옷을 찢고 벗는 일은 자기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또 자기를 한없이 낮추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숨기지 말고 자기의 이 모습 이대로를 적나라하게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을 향하여 '너는 누구냐'고 백번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보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는 좋은 비결이기도 합니다.
지금 내 옷을 찢고 내가 베옷을 입을 때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가 깨끗하여 질까요? 아닙니다.
백번을 찢어도 백번을 베옷 입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는 상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가 말했습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만의 옷을 찢고 위선의 옷을 찢어야 합니다. 마음,심령을 찢는 일이 회개입니다. 우리 모두는 민족적으로 고발정신이 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탓,내 잘못이라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일은 잘하지를 못합니다. 도리어 그것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새해의 벽두에 섰습니다.
새해를 맞아 새출발 하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회개할 때 나부터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부족한 종이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위선자가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허물투성이 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일분동안 회개의 기도를 하십시다.
사랑의 하나님,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 지금 기도합니다.
허물진 것들이 입을 엽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심령이 깨끗하여져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여 주시옵기를 소원하옵고 기도합니다.
새 마음 가지고 새 출발하게 하여 주시고 일 년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 내리기에 정결된 심령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깨끗한 믿음을 가지고 주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놀라운 이적을 만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 멘
셋째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습니다.
본문14,15절에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라고 했습니다. 19:10-13에서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히스기야 왕에게 다시 보낸 협박편지에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네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예루살렘의 멸망은 확실하다. 너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도 너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나라는 모조리 멸망당하였다. 딴 생각은 품지 말고 속히 항복하라'는 내용입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어찌했습니까?
절망하지 않고 용기백배했습니다.
협박편지를 받아들고 다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앞에 사정을 속속들이 다 털어놓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정직하게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를 무론하고 인생을 철저하게 살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도 생활의 신조가 있다면 저 나름대로 정직을 신조로 삼습니다.
'일생을 정직하게 살다 가게 하옵소서'기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또 신학교에서 정직을 강의하 기도 합니다. 후배들에게 선한 목자 되라고 권면도 합니다.
오늘 날짜 개혁공부에도 '정직한 삶을 주옵소서'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것이 보였다면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천번 만번 부정한 인생,허물투성이 인생,부끄럽기가 그지없는 마른 막대기 같은 인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 앞에 펴놓을 나의 편지는 없는지요?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편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기가 막히고 울고싶고 가슴을 쥐어뜯고 싶고 하나님께만 통사정하고 부르짖고 싶은 그러한 사연들의 편지말입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 그 편지를 펴놓고 하십시다.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펴놓고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구체적으로 기도했습니다.
①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했습니다.
본문16절에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무슨 뜻입니까? 산헤립의 저 기고만장한 협박공갈의 소리, 앗수르 군대의 함성소리, 그들의 말발굽소리를 여호와여 들으소서 뜻입니다. 그리고 애타게 부르짖는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의미입니다.
다윗도 기도할 때 시86:1에 "여호와여 나는 곤고하고 궁핍하오니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했습니다.
②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했습니다.
본문16절에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여! 산헤립이 보낸 편지가 여기 있습니다. 이 편지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 보시옵소서. 하나님을 훼방한 내용을 한 번 눈을 떠서 살펴보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다니엘도 기도할 때 다니엘9:18절에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했습니다. 계1:14에 "그의 눈은 불꽃 같고"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숨길 것,드러나지 않을 것 아예없습니다.
③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했습니다.
본문19절에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히스기야의 믿음입니다.
히스기야가 왜 성전으로 올라가고 왜 기도했습니까?
힘이 막강한 산헤립의 대군을 쳐부수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구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히스기야가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을까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숨길 재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에 보면 '너의 모든 것을 내게 털어 놓으라'고 자주자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시다. 어찌 나의 때 묻은 것을 알지 못하신 것이 있으리요. 나의 사정,언어,행위를 아십니다. 어떻게 아실까요?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속담과 같습니다. 나의 말을 몽땅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과 같이 계3: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시편94:9절에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저는 많은 편지를 받는 셈입니다. 국내외적으로 편지 많이 받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익명으로 보내는 편지도 있습니다. 어제도 주소 성명 없는 편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예의바르고 조심 있게 기록한 점에 대해서 지금도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익명으로 편지를 쓰는 일은 최선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첫째 상대방을 알수 없으니 주안에서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교제를 단절하고 있기 때문이요, 둘째 더러는 오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을 풀어줄 길이 없기 때문이요, 셋째 진실이란 작을지라도 드러나야 되는데 그것이 감추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 편지를 받는 사람은 시109:4절에서 노래한 다윗처럼 "나는 기도할 뿐이라"할 수밖에 없을 것 아닙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히스기야의 성전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응답,구원입니다.
19:20절을 보면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의 응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히스기야가 편지를 펴놓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편지의 깨알같은 편지를 다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참새한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는데 이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가 다 주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부자가 된 것, 내가 가난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의 건강도 저절로가 아닙니다. 나의 생명도 순간적일 수 있습니다.
오늘밤에라도 하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시면 '아니요'라고 할 인생이 아예없습니다.
19:35절 이하를 보면 히스기야의 성전 기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을 휩쓸어 버린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명이 시체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후퇴의 나팔을 불지 않을 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산헤립 왕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예언대로 산헤립은 암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시편1:6을 암송케 합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만일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지 않고 산헤립의 비위나 맞추고 있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이적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승리가 왔습니다.
이 승리,기적이 무엇으로부터 왔습니까?
기도로부터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기도하므로 금년한 해에 이적을 만들고 기도하므로 금년한 해를 승리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