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20. 연중 제6주일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2.20 05:31
- 구원의 길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게서 물러가라”는 주님 말씀을 직역하면
내 앞에 있지 말고 내 뒤에 있으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실 길을 앞에서 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그 앞을 막고 있으니 뒤로 빠지라는 말입니다.
축성 생활 문헌을 보면 주님의 길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번째 길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께(A Patre, ad Patrem)’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 사이에 있는 두 번째 길이 ‘타볼산으로부터 해골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이요, 반드시 가야 할 길인데 베드로는
지금 이 길을 앞에서 막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이 길을 막고 나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베드로처럼 잘못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 길을 막아섭니다.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참사랑이고 구원의 길인데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계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인간의 산 정상으로 오르는 것을 구원의 길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편 저자처럼 읊조립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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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 나 사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7)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 8,29)
당신과 나
사이
한 사람 한 사람
비우고 비워
당신과 나
사이
아무도 없어
사이마저 사라지고
당신과 나
갈림 없이 함께
당신과 나
나누임 없이 하나
당신은
나의 당신이 되고
나는
당신의 내가 되니
나의 당신과
당신의 나
사이
비로소
모든 이가
곱게 깃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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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0. 연중 제 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잘 살아야 하는 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 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 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지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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