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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도시> 이 달의 평 -수필
불안한 전제, 충분한 결론
권대근
문학박사, 동리목월문학대학 교수
I.
‘세상이 왜 이래’ 라며 나훈아가 세상을 원망하는 듯한 노래를 부르기 이미 오래 전에 테스 형은 ‘음미되지 않는 인생은 살 보람이 없다.’고 말했다. 음미되어야 할 인생에는 불충분한 전제가 놓여 있다. 그래도 인간이 내린 결론은 언제나 충분했다. 수많은 선각자가 살아오면서 그 인생을 해명하려고 노력해왔다. 우리 수필가들도 그 대열에 항상 서 있는 사람이다. 니체 형은 ‘인생의 목적은 끊임없는 전진이다. 앞에는 언덕이 있고, 냇물이 있고 진흙도 있다. 걷기 좋은 평탄한 길만은 아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조용히만 갈 수는 없다. 풍파는 언제나 전진하는 자의 벗이다. 차라리 고난 속에 인생의 기쁨이 있다. 풍파없는 항해, 얼마나 단조로운가. 고난이 심할수록 내 가슴은 뛴다.’고 인생을 풍파를 만나는 항해에 비유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반철학적 단장>에서, ‘인간에게 영원한 것, 중요한 것은 불투명한 베일에 싸여 있다. 베일의 저쪽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베일이 대낮의 불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고, 어느 인디언 추장이 했다는, ‘뛰려고 하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누가 따라붙고 있는지 모른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은 이미 R 페이지가 <젊음을 유지하는 법>에서 한 말이다.
21세기를 넘어가면서 수필은 인문학의 바탕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그 전에는 인문학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학의 차원에서 논의되었다. 수필과 인생, 인생철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수필이란 인생의 길을 가면서 발견한 깨달음이 문학이란 표현에 힘입어 예술이 되고, 교훈이 되고, 치유가 되고, 인생의 길이 되고, 진리의 말씀이 되고, 촛불이 되고, 횃불이 되고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수필창작은 생의 의미있는 발견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한다. 삶의 의미가 자기를 표현하는 데 있다면, 수필은 곧 삶이다, 인생이다. ‘적자 생존’이란 ‘글을 쓰라, 그러면 생존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되는 세상이다. 수필가는 각자 자기의 개성적인 언어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뜨겁게 사는 사람은 뜨겁게, 아름답게 사는 사람은 아름답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진실하게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생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붓 가는 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문학으로서의 수필이다. 문학이란 불안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삶의 성찰을 문학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다.
불안한 전제로부터 얻어내는 결론은, 비트겐슈타인의 어록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없애버리고 사는 것이다. 그는, 인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인생이라는 틀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사람은 인생을 바꿀 수밖에 없다. 바꿈으로써 틀에 맞추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였던 것이 없어지고 만다’는 그의 인생철학은 결론으로 손색이 없다. 결국 인생을 논하는 수필은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변해야 한다. 수필을 쓴다는 것은 변화를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 아닐까싶다. 김상곤의 <기억의 뒤안길에서>, 조재흥의 <이젠 3모작>은 인생을 반추하는 삶의 무늬가 추억과 기억의 언저리에 새겨져 있어 인간미가 주는 향기가 있고, 남지은의 <몽고반점>, 김연화의 <정령의 숲>은 떠남의 길 위에서 얻은 생태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유가 역사의식과 어우러져 멋과 맛을 우려낸다고 하겠다. 인생에 대한 의미있는 각자의 답이 음미를 요구하고 있다. 이 네 편의 작품은 자신의 체험적 인생론을 명쾌하게 전달하고 있어 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수필의 구성이나 표현면에서 있어서도 완성도가 높아 월평의 대상작으로 뽑혔다.
II.
김상곤의 <기억의 뒤안길에서>는 이 달의 평에 있어서 관점을 충분히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다. 수필의 대부분은 잊을 수 없는 일의 거름으로 피어난 꽃이다. 이 수필은 인간학으로서의 성찰적 의미는 물론 미적 구조로서 갖추어야 할 형상성, 인식구조로서의 교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있다고 하겠다. 사용된 말도 구체적일 뿐더러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형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모습이 우리들의 미적 인식을 자극해서 좋다. 어떤 분은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설명의 기법을 쓰지만 이 분은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표현 의도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발단부 ‘서쪽 하늘에는 아직도 새색시의 연지마냥’ ‘시 낭송 소리는 마이크를 타고 산울림처럼’ ‘달걀판을 뒤집어 놓은 듯한’ ‘이제 도심의 마천루처럼’ ‘벌집 같은 칸칸의 창문에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마냥, ~처럼, ~듯한, ~같은’ 등의 비유격 조사로 배경을 심감나게 표현함으로써 관념이나 개념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하는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수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발단부의 묘사적 문장이 주는 손맛이 일품이다. 문학 언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의 손맛을 내는 멋진 표현이 수두룩하다.
나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잔할까! 처음 오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감상에 젖을 그런 나이도 아니다. 다만 시인들의 시 낭송을 듣다가 그저 그 옛날의 그리움에 사장을 걸어 찰랑거리는 물결을 보려 했던 것뿐이다. 물결은 모래 바닥에 수많은 무늬를 남긴다. 그러나 다음 물결은 그 무늬를 지우고 다시 무늬를 만든다. 이렇게 반복되는 물결과 같이 나의 지난 마음의 무늬들도 수없이 만들어졌고 또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끝내 가슴 속에 나무의 옹이처럼 지워지지 않은 무늬 하나가 있다.
- 김상곤 <기억의 뒤안길에서> 중에서
다대포해수욕장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하려는 여인을 끌고 서리 맞은 풀잎처럼 흐느적거리며 초라한 자신의 하숙방으로 데려가서 한 생명을 구한 이야기로 짜여진 이 수필의 전개부 문장들도 질서 정연할 뿐더러 이중 층위를 활용한 변용 미학이 대단히 구조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물결은 모래바닥에 수많은 무늬’를 ‘마음의 무늬’로 치환하여 다시 가슴 속에 남아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를 ‘나무의 옹이처럼 지워지지 않는 무늬’로 의미화한 대목에서도 그의 문장력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한 줄 한 줄 절묘하게 계산된 문장을 음미하면 미소가 번져온다. 빛의 이중성에 기대듯 입자와 파동으로 수필 문장의 맛을 잘 살린 탓에 어느덧 시선은 사건에 머문다. 매우 섬세한 관찰과 서술전략에서 나온 것이라 그 맛이 솔솔하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시인들의 시 낭송소리가 간간히 바람을 타고 들린다.’ 그리고 ‘사장엔 수없는 사람들의 삶의 자국들이 사연만큼이나 많이 찍혀있다. 밀물은 무심히 그 자국을 지우며 새로운 삶의 자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수미상관화로 구도의 안정성을 꾀하였다.
조재흥의 <이젠 3모작>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는 ‘순명’이다. 인간의 모습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려는 몸짓이다. 그는 공무원으로서 정년을 마친 퇴임 이후 7년 기간을 2모작 기간으로 보았다. 1모작과는 전혀 다른 삶의 노래는 바로 자유분방함과 열정으로 물결친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서 야기된 조작적 행복관, 전도되고 도치된 가치관으로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 아닌가. 인생 2모작이 던진 그에게 던진 메시지는 ‘누구나 아는 만큼,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결론이다. 이제 그에게는 3모작에 대한 결의가 낙동강 물줄기처럼 도도히 흐른다. 조재흥 수필의 감상 포인트는 열정으로 열심히 사는 것이 우리 삶과 사람의 감수성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그리고 3모작 전략이 어떤 인생을 선사할 것인지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지점에서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으려나’를 생각하며, 이따금 아름다운 석양이나 붉게 타오르는 저녁노을을 볼 때마다 미지의 훗날, 그 순간의 행복한 마무리 장면을 기대하며 마음으로 가만히 떠올려 보곤 한다. 멋진 인생의 마무리가 목표인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나서야 할 철체절명의 그 길이 제3막에 놓여 있다. 그가선택할 마지막 삶의 장면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같이 고민해 보려고 하는 데에서 이 수필을 읽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 2모작은 어떤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압박감과 함께 2모작에 거는 희망과 설레는 기대감은 상상의 나래를 끊임없이 펼치게 했다. 1모작과는 전혀 다른 세상살이, 2모작을 맞이한 것이다. 자아 성취와 보람을 찾아보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이 열정을 쏟았다. 7년이다. 마무리의 결심에 앞서 3년 더 뛰어 10년을 채우는 것이 다가올 백세인생에 더 부합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머뭇거렸다. 그러나 미련을 떨치고 결단의 마침표를 찍었다. 마감된 2모작이 나에게 던진 한마디 말이다. “ ‘누구나 아는 만큼, 보고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 가끔 듣고 쉽게 흘린 말이지만 사람들에게 이토록 절실하게 잘 들어맞는 언어는 드물 것이다. 아! 삶의 정곡을 꿰뚫는 듯한 이 말, 2모작을 마감하면서 그 의미를 나름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나에게는 수확이다. 이보다 간명하게 삶의 실상을 더 나타낼 수 있을까. 마음에 두고 가끔 그 뜻을 되뇌어 볼 것이다.
- 조재흥의 <이젠 3모작> 중에서
작가는 2모작의 기간을 10년으로 잡을까 하다가 애초 정한 대로 7년으로 설정하고 하나의 결론을 얻는다. 하바드대 쿠퍼랜드 교수는 훌륭한 작가가 되려면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 수필을 읽어보면, 조재흥은 진정한 세계시민의 길을 걷는 모범적인 작가가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자신의 경력과 경륜에서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닌 웰다잉의 요체를 찾는 데 집중한다. 그 중의 하나가 마지막에 가서 자기 삶의 만족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 1막을 경유하면서 배움을 얻고, 2막은 1막과 전혀 다른 삶을 추구했고, 3막은 이제부터다. 이렇듯 인생 1,2,3막을 컨텐츠로 구성해놓고 느끼는 심회를 소망으로 의미화한 수필이 <이젠 3모작>이다. 수필이 구원의 문학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건강한 노후를 바라는 작가의 웰다잉 인식이 녹아 있어 뜨거운 감동을 자아낸다. 긴 인생을 바보처럼 살아가는 것도 필요하지만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의 향상을 목표로 삼아 새로운 컨텐츠를 가지고 멋진 노후를 보내려는 정신이 후회 없는 인생을 보내는 방법일 것이다. 조재흥 작가는 인생이란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멋진 결론을 얻어낼 것으로 믿는다.
남지은의 <몽고반점>은 인디언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연민이 공감을 자아내는 수필이다. 우리 문학인이 제국주의자들의 침탈과 이로 인한 피해로 고통받고 있는 약소국 민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수필은 엑스포 행사장 세계풍물 시장 코너에서 인디언 복장의 외국인들이 공연 중 쏟아내는 이국적이고도 구슬픈 가락을 듣고, 너무나도 애절하여 작가가 역사의식에 인문학적 사유를 보태어 쓴 글이라 하겠다. 수필가들이 타자의 삶에 주목하는 것은 작가정신의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평자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의식이 절실한 이 시기에 남지은이 타자주의를 통해 우리-되기를 시도했다는 데 주목하고자 한다. 최근에도 강대국이 약소국과 전쟁을 일으켜 삶의 문제, 식량문제 등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전 지구적 차원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실없는 전쟁이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와 민간인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강대국의 탐욕이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근시안적 시장원리에 의존한 결과이다. 이러한 반문명적 상황이 뒤늦게 지구 곳곳에서 평화주의에 균열을 만들어가고 있어 걱정스럽다. 인류 사회는 궁극적으로 평화와 생태를 지향해야 한다는 작가의 주장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남지은이 관심을 보태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심연의 밑바닥을 울리는 인디언의 슬픈 노래를 듣고 있자니 새삼 나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고, 주변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오늘날까지 나라를 지켜주신 조상들께 고마움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도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나라를 물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국책사업을 시작하면서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자신들의 변방 역사로 만들려고 한다. 고구려 역사를 빼앗기 위해 고조선 역사까지 왜곡하려 드니 반만년의 우리 역사를 도둑맞을 지경에 있다. 역사 침탈에 강하게 맞서지 못하는 비애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잉카제국이나 아즈데카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대포와 총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 남지은 <몽골반점> 중에서
연륜이 더 할수록 남지은의 글에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은 삶의 폭넓은 사유와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수필을 자주 접할 수 있다면 월평을 쓰는 재미가 한 맛 더 있을 것 같다.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세상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교감은 평소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생활의 성찰에서 온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장호병의 말은 수필가가 가져야 할 자세로서, 적절한 것이다. 남지은이 근대적 성찰을 기반으로 역사의 재인식을 통해 식민지시대의 야만적 영토침탈을 호시탐탐 노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정조준하는 글을 써서 역사의 교훈을 말해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폭넓은 관점으로 우리 민족의 뿌리와 그 근원을 조명함으로써 문명 비판적인 시각을 역사인문학적 접근으로 풀어낸 데서 이 작품은 가치를 더해주고, 나아가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새롭게 해준다고 하겠다.
김연화의 <정령의 숲>이란 생태수필은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영혼의 떨림을 느끼는 작가의 노마드 정신 위에 핀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짐연화라는 닉네임이 붙은 김연화 작가의 삶에서 여행은 아침 밥을 먹고 커피 한 잔 하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일과의 하나다. 그 떠남이 자신을 위한 행보이거나 가족 모두를 위한 출발이었지만, 이번 여행은 번아웃으로 가라앉은 딸을 위한 응급조치 차원의 전략적인 목적의 떠남이다. 그녀에게 떠남은 ‘낮선 곳으로의 공간이동’이다. ‘눈에 익은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떠남은 단절이고, 쉼이고 고행’이라고 해놓고,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해결이고 되살아남이고 각성이고 명상’이라는 진술에 주목해보자. 두 개를 연결하면, 단절은 해결을, 쉼은 회복을, 고행은 각성의 결과로 귀착된다는 변증법적 성숙한 의식을 유추해볼 수 있다. 한 가지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경험 속에서 삶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사상이 글에 녹아 있어 감동을 준다. 낯선 곳이야말로 정령의 숲이란 이런 자연관을 보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연륜과 인생을 바라보는 깊이와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언제나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느다랗게 영혼이 떨린다.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은 행복을 배가시킨다. 혹자는 왜 사서 고생이냐고 말들 하지만, 익숙한 땅에서는 편안함이 삶을 잠식시킨다. 번아웃으로 가라앉은 딸에게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살아 펄떡임과 새로움이 주는 생기를 얻기 위해 낯선 곳으로의 공간이동이라는 방법에 고리를 꿰었다. 눈에 익은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떠남은 단절이고 쉼이고 고행이다. 해결이고 되살아남이고 각성이고 명상이다.
- 김연화 <정령의 숲> 중에서
김연화가 간 곳은 가까운 일본, 한 달에 삼십오 일, 일 년에 삼백육십육 일 비가 온다는 물과 이끼의 고향, 야쿠시마다. 그녀의 딸이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무대이며, 초록에 지쳐 눈이 부신 이끼의 숲에서 툭 하니 정령이 튀어나온다는 그 숲이 보고 싶다고 해서 간택한 곳이라고 하니, 모정의 향기도 글 속에 가득하다. 작가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자연 환경의 관점이 아닌 모든 생명체와 인간이 동일한 가치선 상에 있다는 생태 자연의 관점으로 ‘삶의 터전’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수필가의 의식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령의 숲’ 탐방을 계기로 해서 생태문학의 카테고리 속에서 김연화 수필가의 관심이 숲으로 향하는 것은 작가적 사명을 다하는 일이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의 수필을 읽으면, 원시적 생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정령의 숲이 주는 청신한 맛이 그대로 느껴져서 좋다. 이 수필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생태’를 지향하면서 ‘비문명적인 모습’에 관심을 놓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의 위대함에 경배를 올리며 산신이 내린 맑은 물에 목을 축임’으로써 딸도 생기를 찾아 환하게 되살아난 것 또한 정령의 도움으로 간주하는 그녀다. 어디에고 순수한 자연은 남아 있지 않고 눈 돌리는 곳마다 모두가 파괴된 자연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령의 숲을 노래하는 수필은 자연히 현실을 비판하는 문명 비판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Ⅲ.
김상곤 조재흥 남지은 김연화 네 분 수필가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는 까닭으로 다른 두 분의 작품을 선해 놓고도 충분히 조명해보지 못했기에 이 달의 평을 마무리하기 전에 잠시 추가로 언급하고자 한다. 박명중의 <뿔>은 의령에서 뿔난 소들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쓴 수필로, ‘잦은 왜구들의 약탈과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범, 거란과 몽고의 침입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백성들의 저항을 뿔로 의미화한 멋진 작품이다. ‘착한 백성들이 한 번 뿔이 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뿔뿐이다. 숨겨진 뿔이 아니다. 성난 뿔이다. 순한 사람이 한 번 성이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두고 건드리지 않으면 뿔은 보기보다 착하다. 그 누구도 공격하지 않는다.’는 진술로, ‘뿔이 오직 생명을 지키기 위한 방어수단일 뿐’이라는 대목이 문학적 성취를 크게 가져왔다. 강천형의 <달 뜨는 해운대>는 30년 전 해운대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문명의 발자국이 아름다움을 앗아갔고, 상업주의가 낭만을 휩쓸어버려 예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해운대에 안타까운 심정을 놓고 있는 회고적 수필이다. 그 체험을 성찰로 이끌어 문명비판으로 승화시켜낸 점이 좋았다. 이 두 작품에 대해 깊이 있게 음미하지 못한 점, 이 수필을 쓴 작가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위에서 다룬 작품들이 인생에 대한 훌륭한 답을 내리고 있더라도 철학이 아니라 수필이기에 문학적 방식으로 쓰여졌다. 그것이 문학적 방식인가 아닌가는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처럼 추상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인생은 육교와 같다’처럼 구체적 형상을 통해 자기 고유의 의미와 가치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하는 점에 따라 구분된다. 옛날의 선인들은 자기 성찰적인 글쓰기를 중시하였으며, 수필적인 방식을 통해 선비 정신을 길렀다. 수필에서는 시나 소설에서처럼 특별한 기교를 요하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수필도 문학의 한 장르인 이상, 창작상 표현을 위한 무기교의 기교가 필요하다. 음식을 만드는 경우에도 요리사의 솜씨가 없이는 요리가 제대로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창작에도 기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이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불안한 전제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결론을 내고 있다. ‘꽃은 아름답다’와 ‘꽃이 아름답다’는 진술은 조사의 차이로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듯이, 문학에서 표현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전자가 전달성에 목적을 둔 설명이라면, 후자는 표현에 목적을 둔 묘사다. 묘사는 이미지를 통해 구체적인 정황을 드러내기 때문에 문학성과 예술성을 더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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