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백성아,
그 크고 놀라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거룩하시다!
[시편 99:3]
시편 99편의 시인은 "주님은 거룩하시다!"라는 고백을 세 번 반복(3,5,9)한다.
'거룩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도쉬'를 번역한 말인데 '구별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들과 자신들을 구별하여 거룩성을 담보하려했다.
물론, 죽은 문자에 머물러 있었기에 그들의 거룩함은 오히려 참된 의미의 거룩함과 구별되었지만,
그들에게서 배울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각인된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이요, 거짓 선지자들이지만 다 그렇지는 않았다는 점은 기억해야할 것이다.
필자는 문자에 충실하면서도 정도를 따라가면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영'이 된다고 본다.
문자의 표피만 보았기에 죽은 문자가 된 것일뿐, 문자의 심층을 보면 살아있는 문자가 된다. 바리새인들 중에는 분명 그런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되는 분이라는 점에서 시인은 '거룩하시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함은 '정의를 사랑하심(4)'에 있다.
정의를 사랑하셔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려면 '정의를 사랑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거룩성을 담보하는 일은 그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시인은 모세, 아론, 사무엘을 거룩한 사람의 예로 든다. 거룩한 자들이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기꺼이 응답해주셨다(6).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삶을 살고 싶다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정의를 사랑하고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사람, 그 사람이 응답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거룩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오직 너희를 부르신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이렇게 살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살 수 있는가?
생각해 보자.
시인은 모세와 아론과 사무엘이
'그분에서 받은 계명과 율례를 모두 지켰다(7)'고 했지만, 정말 100% 완벽하게 지켰을까?
그러면, 8절에 나오는 '그들이 한 대로 갚기는 하셨지만...그들을 용서해 주신'이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다 지키고자 했지만, 다 지키지 못했고, 하나님이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위를 본받아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행위를 본받아 살다보면 그를 닮아가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행위(공의, 정의)를 따라 살다보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므로 시편사색에서 오경웅은 이렇게 풀이한다.
'삼가 조심히고 또 삼가 조심히며 마음에 경외를 품고 어둔 세상에서 지향이 되시는 주님만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