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양윤영(梁允永) - 천국은 놀라운 음악의 세계 7. 이대 퇴학 사건, 나도 교직을……
1 1954년 10월 18일부터 흥인동(興仁洞)으로 이사 갈 때까지 만 3개월 동안은 글자 그대로 천국의 생활이었다. 별세한 남편은 여름에 겨울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 버릇이 있어, 장작 두 트럭, 연탄 천장, 그리고 양곡 등을 마련해 놓았기 때문에 다행히 아무 불편 없이 천국의 잔치들을 치러낼 수가 있었다. 훗날 선생님께서는 그때가 황금시절이었다고 말씀하셨다.
2 교회가 흥인동으로 이주를 한 후에도 가끔씩 오시어 잠깐 들렀다가 장충공원에 오르시곤 했다. 그때 닭 10마리와 5마리의 오리를 길러 알을 많이 받아 뒀다가 선생님만 오시면 모두 삶아서 과자와 과일을 함께 싸 가지고 장충공원에 올라, 말씀 도중이나 노래 부르는 시간에 꺼내놓고 함께 맛있게 먹곤 했다.
3 그해 11월 말경이었다. 이대 음악과장이 나를 불러, 내가 학생들을 전도하는 것을 트집 잡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 다시 불러 내가 계속 고집부린다면 김활란(金活蘭) 선생이 나를 그만두게 하라 했다면서 내게 교직과 신앙 중 하나를 택하도록 했다. 나는 당장 그만두겠다는 나의 의사를 밝히고 봄 학기 초에 학년말 고사를 끝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4 다음 해 3월 하순 다른 교수 네 분과 함께 교직을 물러 나고 말았다. 그 후에 학생들의 퇴학 문제가 생기자, 선생님께서는 이대에 큰 기대를 걸으셨던 모양인지 항복하고서라도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하셨지만 모두 나와 함께 행동을 통일하겠다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5 우리에게 급속도로 많은 수난이 부딪쳐 왔다. 우리의 퇴직 및 퇴학 사건이 있은 후 사흘 동안은 신앙의 자유를 들어 김활란 총장을 규탄까지 하며 우리 측을 옹호하던 언론이 돌변해서 우리 측을 중상모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선생님께서 수감되는 일까지 일어나고 말았다.
6 후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 해 김활란 씨와 박마리아 씨가 우리 교회를 말살하기 위해 금력과 권력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없었다. 끝내 선생님도 무죄 석방되었고, 우리는 다시 우리를 핍박하는 사회와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수난의 시대를 극복하고 밑바닥에서부터 새 출발했다.
7 경제적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왔던 나에게 가장 큰 수난이 부딪쳐오고 있었다. 그나마 남편이 남기고 갔던 양식이며 뗄감들이 천국 잔치로 다 없어져 빈손이 된 데다, 직장까지 잃고 보니 우선 아이들 먹여살릴 길이 막막했다.
8 그제야, 피아노 개인교수 간판을 붙이려고 효민 씨에게 남은 돈을 다 털어 주었는데 간판도 못해준 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예전에 세놓았던 집을 팔려고 복덕방에 말해 두었더니 시동생이 어떻게 그걸 알고 집에 불을 놓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어쩌지도 못하고 말았다.
9 그리고 애들의 사촌이 집 문서를 빼앗아가고 대신 60만 원을 주어 당장 굶주린 식구를 위해 하루에 10만 원을 다 써버렸다. 겨우 피아노 개인교수 간판을 붙이고,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해서 생활이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다. 반 이상 잡곡을 섞고, 그나마 저녁은 밀가루 수제비를 끓여 먹었다.
10 그런 중에도 집에 일하는 사람까지 해서 식구가 8~9명이 되고, 교회 식구들도 끊임없이 드나들어 식생활은 더더욱 어려웠지만 그래도 용케 버티어 나갔다. 선생님이 형무소에 계시는 동안 우리 교회는 말할 수 없이 핍박과 조롱을 받았다.
11 주일 예배는 안창성(安昌成) 씨가 주로 설교를 했는데, 예배 도중에 돌멩이가 날아오고, 흙모래를 집어 던지기도 했다. 안 선생님은 울면서 목 메인 설교를 했고 쓰러질 듯하면서도 견뎌내는 그의 설교 모습은 처량하고 가슴 아프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12 황환채(黃煥菜) 씨는 유 선생님을 대신해서 쉬지 않고 원리 강의를 했다. 부인 식구들은 밤마다 교회에 모여 철야 기도하여, 모든 시련을 정성으로 이겨 나갔다. 그때 정석천(鄭錫天) 씨는 모친의 유언에 따라 끝날에 핍박받는 집단이 진짜 진리의 집단이라는 것을 알고 3만 원의 헌금까지 하고 들어와 우리는 큰 힘을 얻기도 했다.
13 이처럼 우리 교회가 핍박받기도 했지만 사회문제화되자 사람들은 그곳에 무슨 내용이 있어 대학교수와 대학 졸업반 학생들이 퇴직과 퇴학을 불사하면서 교회에 나가게 되느냐 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14 선생님 수감 이후 몇몇 식구들이 치안국에 불려가 심문을 받았는데 나는 세 차례나 불려 갔다. 치안국장의 말이 “왜 같은 기독교인들끼리 싸우느냐” 면서 “목사들은 물론 김활란 씨까지 투서를 보내온다”라는 것이었다.
15 나는 김활란 씨의 제자였지만 어쩔 수 없이 담담하게 김활란 씨로부터 환멸을 느낀 세 가지 비행을 말했더니, 치안국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또 어느 날은 수사 주임을 만나, 실화 잡지에 난 내용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를 양심적으로 대답하라는 말에, 30년의 수사 주임을 지낸 사람이 사람의 눈길을 보고도 거짓을 말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냐고 되물으면서, 실화 잡지의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내가 퇴직까지 감수하면서 그곳에 남아 있겠느냐, 내 눈을 한 번 들여다보라고 말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16 10월 4일 선생님이 출옥하자, 우리는 다시 생기를 얻었고 청파동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창고 같은 헌 집이었지만 우리는 정성껏 청소를 하고 수리를 해서 새 집으로 만들었다. 주일이면 더욱 힘 있는 선생님 말씀에 은혜가 소낙비처럼 충만히 쏟아져 내렸고, 유 선생의 원리 강의도 더욱 알차갔다. 우리는 새롭게 부활되고 있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