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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수님 따르기와 정들기의 차이>의 줄거리:
추호의 의심 없이 베드로는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단언합니다. 그러한 확언이 맞다고 인정하셔서일까요, 아니면 하도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일까요? 예수님 그에 대해 맞다 그르다고 말씀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 따름이 세상 탈출임을 말씀하십니다. 이 사실을 몰랐던 동고동락의 의미는 따름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 따르기와 정들기의 차이
(누가복음 18장 28절~34절)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 따르기와 정들기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 따르기와 정들기의 차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이 보태어져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베드로의 확언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 따르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 따르기와 예수님과 정들기는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관리이자 부자인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을 얻는 방법을 질문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갑니다. 베드로는 그러한 부자 청년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채 떠난 부자 청년과 자신들을 비교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곁에 있던 자신들을 대견스럽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관리로서 사회적으로 엘리트였고 귀족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촌구석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과는 사회적 계층 자체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아니라면 제자들은 이 청년을 만날 일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기준으로 놓고 보니 부자 청년은 불합격한 사람이고 제자들은 합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부자 청년은 재물로 인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없었지만 자신들은 고기를 잡던 배와 그물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따름의 결과로 주어질 상급이 궁금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제자들의 대표로써 부자 청년과 자신을 비교하며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따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공생애를 사시던 예수님을 정말로 따르던 제자들이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져봅니다. 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십니다. 그리스도 연쇄 사건은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제자들이 정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었다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를 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34절을 보면 이러한 말씀에 대해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최종적으로 이루시려는 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동상이몽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을 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세상 밖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선민의 자부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셔서 자신들이 희망하는 바를 이루어 주실 것이라 생각하였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일이 실현되기 직전에 이르렀다고 믿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윗 왕국의 재현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은 곧 마음이 세상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이루시고자 했던 목적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기에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을 반복하여 말씀하셔도 아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로 다른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는 제자들은 물론이고 추종자들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따라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름도 불가능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생겨납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면 공생애 동안 동고동락한 것에는 어떠한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말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예고하시면서도 제자들이 따르지 않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삼년 동안 제자들을 곁에 두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윗 왕국의 재현을 그리며 잘 먹고 잘 살게 되기만을 바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앞세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에 두고 끝까지 사랑하셨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편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제자들이 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 고기 잡는 배와 그물을 버렸다지만 이것이 진정한 버림은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다윗 왕국을 재현하는 정치가로서의 이직을 위한 버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부에서 정치가로 이직한 것이지 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나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다음에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야고보와 요한을 좌의정 우의정에 앉혀달라는 부탁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들은 버렸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 무엇도 버린 것이 없었습니다. 금의환향하여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셈입니다. 가족과 친지들에 대해서도 대업을 위하여 잠깐 헤어졌던 것이지 결코 버렸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확언은 완전한 오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따름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를 뿌리로부터 말살시키고 고사시키는 가장 큰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는 대체 왜 이러한 오해를 하고 있는 제자들을 삼년 동안 곁에 두셨던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정을 붙이는 과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따르기를 바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따른다고 여겼을 뿐이지 예수님께서 정말로 제자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정을 붙이는 기간이었습니다.
정붙이기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하나 해봅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깨달을 수 없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을까요? 목적지가 달라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하나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다윗 왕국을 재현하는 것이 목적지였고, 예수님은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시는 것이 목적지였습니다. 이렇게 목적지가 달랐기에 따름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다만 목적지가 다름에도 따름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하늘을 목적지로 삼지 못할지라도 세상에 계신 예수님을 목적지로 삼을 때에 따름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을 좋아할 수 있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마음을 다 드리는 상태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목적지로 삼은 영역이 없더라도 좋아하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한 여인이 남편의 가는 곳으로 함께 가는 것과 같습니다. 남편은 일자리를 따라 움직이지만 이 여인은 일자리가 목적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편을 목적지로 삼고 있기에 남편을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예가 존재합니다. 별도의 자기의 목적지를 가지지 않고 예수님의 목적지도 생각함이 없는데 결국 예수님의 목적지를 따라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치유함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제자들과 같이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원대한 목적지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좋아함으로써 예수님을 목적지로 삼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드림으로써 제자들과는 다른 방식의 따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원대한 꿈을 갖게 되었던 것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자신들이 다윗 왕국의 재현을 이루는 장본인들이 되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들을 부르셨습니다. 꿈을 가질 수 없었던 미력한 존재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목적지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부름받은 자들로써 예수님을 좋아했고 고마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 중에도 예외가 있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다윗 왕국의 재현에 꿈을 가지고 있었고 그 꿈을 위한 수단을 찾던 중에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본질적으로는 자신의 꿈을 위해 예수님을 고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제자들은 가룟 유다와 같이 스스로 꿈을 가질 만큼 야심찬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비천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었기에 다윗 왕국의 재현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한없이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자기 같은 사람들을 다윗 왕국의 재현이라는 대업에 참여시켜 주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던 중에 이들의 마음에서도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순수함은 아니었을지라도 50%라도 예수님에 대한 정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제자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을 좋아하여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이 땅에서 대업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50%의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과 정드는 마음을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몰이해하고 무지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오해하였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곁에 두시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러한 정붙임이 꼭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예수 따름으로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곧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붙임이 50%라도 있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에 대해 어떤 인간도 스스로 그리움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지렁이 같은 인간들을 부르셨습니다. 비록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착각에 빠져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여기고 으쓱거리던 어리석기 짝이 없었던 자들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과 삼년 동안 함께 하시며 정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100%의 좋아함으로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어 보겠다는 기대와 포부에 차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동안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은 커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루고 싶은 것들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예수님을 좋아하는 마음과 예수님에 대한 정이 깊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은 제자들이었습니다. 또 누가 뭐라 하더라도 세상에서 예수님을 제일 좋아한 사람 또한 바로 그 무지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모으시고 이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게 된 제자들은 더는 예수님을 통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마음으로 세상에서 얻고 싶었던 목적지에 대한 기대가 물거품처럼 사라지자 비로소 보이게 된 것이 있었고 마음에 남는 앙금이 있었습니다. 눈으로 보던 예수님이 이제 보이지 않습니다. 손을 뻗으면 만져지던 예수님이 이제 만져지지 않습니다. 길을 갈 때도 잠을 잘 때도 항상 함께하던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졌던 세상에 대한 기대란 예수님의 능력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 더는 꿈과 소원을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끌려가신 후에 재판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통곡을 합니다. 다윗 왕국의 재현을 이루고 장관 자리를 얻겠다는 꿈이 다 사라지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서 울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과 그리움이 마음에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좋아하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등진 자신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상 것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착각하는 동안에는 이것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마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좋아함이 생기고 정이 들고 예수님이 안 계시면 그리움에 사무칠 정도로 관계가 깊어지고 있음을 보고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렸다고 확신하였으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이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 때에 다 도망쳤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에 다 불러 모으십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 이루려 했던 세상의 꿈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도망하고 나서야 예수님에 대해 사무치는 그리움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불러 모으신 모든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에게 이제까지 하늘은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하는 예수님이 올라가신 하늘은 이제 그리워할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 때문에, 예수님이 좋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하늘에 눈을 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베드로가 기록한 베드로전후서의 핵심 주제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며 본향인 천국을 그리워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의도하신 정들기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정이 들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예수님이 가실 하늘에 대해 마음을 둘 수 있는 자들이 되게 하시고자 공생애 동안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앞서 이러한 제자들과 달랐던 가룟 유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가룟 유다가 똑같이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와 달랐던 것은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과 그리움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세상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고용할 기회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수단으로 여겼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도 세상을 포기하지 못한 채 자신의 꿈에 좌절하게 됩니다.
비교해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이 예수님의 생사와 관계없었던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세상에 대한 꿈이 있었으나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도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사건 앞에서 좌절하여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하게 되었으나, 이를 통해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과 그리움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가룟 유다는 세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꿈을 도울 수 없다고 여겨진 예수님을 팔아버리게 되었고 스스로의 꿈에 좌절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고용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정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도구로 여기기에 필요 없으면 헤어짐에 미련이 남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세상 것을 원했지만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께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과 고마움이 이들의 시작점이었던 것입니다. 똑같이 세상을 원하는 중에도 예수님과 정들 수 있는 관계로 시작하느냐 예수님과 정들 수 없는 관계로 시작하느냐는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현재 기독교는 가룟 유다와 같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기독교 종교인으로 평생을 살고 있는 우리가 이 생애를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과 정드는 기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예수님을 따름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 것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예수님을 믿어 오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으며 살 수 없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온전한 예수님을 따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세상 밖으로 나가셨고 하늘로 가신 예수님께 마음을 보냄으로써 예수님 따름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신 하늘을 그리워하며 예수님을 따라가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그 마음을 당신을 좋아하는 똑같은 값으로 인정해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하늘에 대해 그리움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좋아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좋아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십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허구의 하나님이고 망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실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길로 삼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마음에서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무지한 제자들을 삼년 동안 곁에 두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좋아함과 그리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꿈이 다 깨진 뒤에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하늘을 땅보다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고 교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제자들처럼 막달라 마리아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그리워함이 생기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 그리움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이제부터 정식으로 예수님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