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의 신도비와 퇴계 이황
농암의 신도비는 명종 20년(1565)2월에 세웠는데 비문(碑文)은 인재(忍齋) 홍섬(洪暹)이 지었으며 글씨는 여성위(礖城尉) 송인(宋寅)이 썼다. 뒤에 여성위는 여성군(礖城君)에 봉해졌다. 명문에 명필이다 해중석으로 호패형을 한 비는 지금까지 보존도 양호해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 비문 글씨를 받는 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
1560년(庚申)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 : 1504~1582)에게 보낸 퇴계의 편지가 있다. 하연은 농암 이현보 선생의 아들인데, 문과에 동방으로 급제한 인연이 있다. 그런 이가 선친인 농암의 신도비명 글씨를 부탁했고 퇴계는 이를 거절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64호)
저간의 사정은 편지글에 잘 드러나 있다.
“글씨 쓰는 일(寫子思)에 있어 영공(令公)께서는 왜 한 가지 생각만 고집하고 제(滉)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까? 선친의 행적을 길이 후세에 남기고자 한다면 의당 한 시대의 제일 가는 명필 글씨(一時第一手跡)를 얻어야 사람들 마음에 흡족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군(礖城君 : 宋寅)과 청송(聽松 : 成守琛)의 글씨는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앞설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청송의 글씨는 굳건하기는 하지만 짜임새에 있어서는 다소 성글어 여성군의 더욱 좋은 것보다는 못하다고들 합니다. 또 이 기회에 여성군이 쓴 인본(印本)을 얻어 이를 소중하게 잘 보관하고 더러 그것을 보아 익힌다면 어찌 매우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굳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금보(琴輔)같은 사람의 필력(筆力)이 그래도 굳세고 건실하니 이 늙은이의 떨리고 시들어 글자 모양을 이루지 못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결코 쓸 수가 없으므로 이렇게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1)譯
편지의 전문(傳聞)이다. 당시의 경향 각처의 서예가 세 사람이 등장하고 서로간의 장단점을 평하고 있어 흥미롭다. 한편 퇴계 선생의 대안을 제시해가며 문제를 해결하는 합리적인 면도 돋보인다 하겠다.
세 사람은 송인(宋寅 : 1516~1584), 성수침(成守琛 :1493~1564), 금보(琴輔 : 1521~1585)다. 비는 대리석으로 이수(螭首)가 없이 귀부(龜趺)위에 비신(碑身)만 엊혀져 있고, 비신의 머리는 반원형(半圓形)으로 다듬어져 있는 규비(圭碑) 형식이며 비신의 높이는 1.9m이고 폭은 0.84m이다.
이곳을 찾아가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 주진 나루를 건너 정산을 지나 인계, 삼계리를 거쳐 신남리(정자골)에 세워져 있다. 묘소는 신도비 뒷산(청량산 줄기)중턱에 있다. 신도비 바로 아래에는 자운재사(紫雲齋舍)가 있어 농암 선생의 묘소를 수호하고 있다.
종택은 안동시 가송리인데 17대 종손인 이성원(李性源)씨가 거주하고 있다.
현재 안동 가송(佳松)땅에 터를 잡아 강호가도(江湖歌道) 문학(文學)의 고향인 분강촌(汾江村)을
만들고 있다.
출처:안동오면 뵈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