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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의 비밀 16 강
“토라는 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지서도 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하신다. 토라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도대체 왜 중요하냐?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기 때문이다. 토라의 첫글자는 베레쉬트(ב)이다. 그리고 마지막 글자는 이스라엘의
라메드(ל)이다.
בל 레브 : 마음. 훈련(ל)하는 집(ב)
마음은 없을 수도 있다. 훈련하기를 싫어하면 마음이 없어진다. 훈련하는 집을 짓지 않겠다는 것이다. 훈련 받지 않겠다고 하면 훈련 받을 마음이 없어진다. 공부하지 않겠다고 하면 공부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훈련 받기를 싫어하면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사실은 주님이 이 마음을, 훈련을 받는 집을 완성하면, 훈련하는 집을 완성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될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 주님은 마음을 다루신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가 전혀 상관이 없으시다. 왜냐면 그런 건 아버지 집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벌어왔다고 주님이 좋아하실까?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5 학년인데 학교 안가고 돈 벌어오면 내가 좋아할까?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보태라고 하시는 줄 안다.
이게 아니다. 전혀 잘못 짚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다르지 않은 것이다. 신성이 아닌 육신에 속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인성이 신성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신성으로 변화되느냐가 하나님의 중요한 관점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그 system 이 마음이다.
마음에 따라서 신성을 변화시키는 훈련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토라를 여기에 기록한 것이다. 토라의 첫글자가 베트이고, 마지막 글자가 라메드이다.
이 토라는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한다. 마음 안에 토라가 새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마음이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토라를 마음 안에 새긴 것을, 쓴 것을 카타브 해 버렸다고 한다.
כתב 카타브 : Writing, 토라를 마음 안에 카프(כ)해버리는 것, 열어버리는 것.
정신세계에 완전히 열어서 적용하는 것이다. 토라는 써져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이
어디에 쓰시길 원하시는가? 마음이다. 쓰는 것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써져 있으면 여러분은 절대 마음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 누가 차용증서 하나 써줬다? 그러면 꿔준 것에 대해 마음을 쉽게 포기 안 한다. 법원까지 가서 보라고 빌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써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쉽게 포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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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주님이 토라를 마음에 쓰시는 것이다. Written Torah 를 줬다는 말은 그냥 책을 주었다는 게 아니라 마음에 기록한다라는 것이다. 이를 새언약이라고 한다.
렘 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날 토라를 말하면 율법으로의 회기인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이 자꾸 말씀하시는 이유가 '너희들이 토라가 기록된 것을 잊어버렸다, 너희들의 마음에 뭐가 기록되어 있느냐?' 주되게 들어
있는 것이 뭐냐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을 제일 크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하루를 돌아보자. 마음이 토라에 사로잡혀 있으면 세상이 결코 유혹할 수가 없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신성을 훈련하는데 마음이 사로잡혀 있지 않다, 새언약을 떠났다는 소리이다. 말라기서에서 너희는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한다. 왜? 마음에 토라가 없다, 토라가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히브리어를 배우는 이유가 토라는 히브리어로 써져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단순한 languege 가 아니라 새 언약이다. 다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깨우고 우리의 마음이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나와야 한다, 이를 신성이라고 한다.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다 이 이야기이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님의 판단이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봐야 한다. 문제는 결코 세상에 있지 않다. 다른 존재들에게 있지 않고, 사장한테 있지 않다. 고양이에게도, 강아지에게도 있지 않고 마음에 문제가 있다. 내 삶 속에
악함과 불의와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내 삶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고 싶어하신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님도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마음을 다루는 것을 토라라고 하고, 이를 살아내서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분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래서 토라의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 어떤 마법과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마음은 반드시 훈련되어진다.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요즘 세상이, 헬라의 자식들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은 마음과 감정을 동일시 여긴다. 그런 영화들을 만든다. 바깥에서 쑥 들어와서 생겨버리는, 마음을 훈련한다는 이미지를 다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누가 나를 못살게 굴면 어떻게 되나?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버린다. 그러면 그 자체는 내 마음이다. 주님, 이 마음을 어떻게 좀 가져가 주세요 하고 기도한다. 마법으로 기도하는데 이스라엘은 마법이 없다고 한다. 성령 받아서 마음이 바뀌어서 되는 게 아니다.
לב 마음 :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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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훈련해야 한다. 이것을 훈련하는 것을 하루에 일곱번씩 일흔번, 490 번 용서하라고 한다. 이것이 다 훈련이다. 용서도 훈련이다. 계속 훈련해야 한다. 용서가 잘 되는가? 잘 안 된다. 그런데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뭘까? 훈련하지 않으려고 하면 용서가 잘 안 된다. 뭔가를 완전히 터득할 때 처음부터 잘 되는 걸 봤나? 잘 안 된다. 그러면 신경질 나서 그만둔다.
그런데 제자는, 뭘 배우려는 사람들은 안될수록 더 열심히 한다. 안될수록 더 삶에 의욕이 생긴다. 그러면 용서가 안될수록 살 맛이 나야 한다. 용서가 안될수록 왜 이거밖에 안되냐, 오늘 390 번 남았는데 미치겠다, 하면서 뛰어 넘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주에는 380 번, 하면서 좀 되네?
1 년 후에는 200 번, 되네? 10 년 후에는 20 번, 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원리이다.
바벨론의 원리는 마음은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바벨론 신의 이름은 벨이다. 마음을 뒤집으면 벨이 된다.
בל 벨 : "훈련으로 되지 않는다."
바벨론의 거짓 원리는 마음을 훈련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반드시 훈련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토라를 배우고, 무엇을 배우든지 간에 훈련하고 연습하고 배우고 익혀서 신성에 도달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신성에 다다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훈련하는 방법들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마음을 적용하고 훈련할 때, 카프, 20, 30, 40, 50 은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1 부터 10 까지는 다 예슈아,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내 삶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이 내 삶에 나타나려면 카프가 있어야 한다.
כ 카프 : 적용
내 정신세계 속에, 내 마음에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는 나의 카프이시다. 이것을 늘 훈련해야 한다. 적용을 하려면 소스가 있어야 한다. 원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소스이시다. 나의 소스가 있어야지만 그것을 적용해서 관계를 할 수 있다. 나는 오직 카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꾸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오픈 한 것을 소스로 가진다. 세상을 소스로 가지지 않는다. 먼저 나는
정신세계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연다, 이것이 모든 relationship 의 기초이다. 그 전까지는 내 마음, 내 욕망을 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카프가 되신다.
카프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다. 관계는 내 옛 자아의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전에는 내 옛 자아 마음대로 했다. 미워하면 미운 관계가 생긴다. 보기 싫으면 보기 싫은 관계가 생겨난다. 그런데 주님은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놔주는 것이다. 모든 relationship 의 기초는 카프이다. 나는 항상 모든 것과 악수할 수 있다, 모든 존재들과 악수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카프로 가지는 자들은 모든 존재들과 악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카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 세계가 카프로 열린다. 옆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어도 악수 할 수 있다. 지금 악수한 사람이 살인자인지 어떤지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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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면 살인자이기 때문에 살인자일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생각이 오픈 되면 악수할 수 있다. 모든 관계를 할 수 있고, 악수를 할 수 있는 기초이다. 내 마음을 이렇게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의 카프이시다, 나는 그 카프 안에서 관계한다.
남편도, 부인도,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존재든 관계하려면 반드시 카프가 있어야 한다. 정신 세계에서 그리스도가 열려야 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이 열려야 한다.
카프 다음은 라메드이다.
ל 라메드 : 훈련, 배움, 가르침- 가르침이 배움이고 배움이 가르침이다.
훈련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권위, 권력이라는 뜻도 나온다. 훈련하지 않는 자는 어떤
권위도 가질 수 없다. 다윗이 권위를 가졌던 이유는,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훈련 받았기 때문이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고 13 년 동안 훈련 받는다. 훈련 받아야 왕으로써의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기름 부었다. 그런데 지금 왕관이 있는가? 훈련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훈련 받기를 싫어하고, 게을러하면 나중에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장로님은 주님의 은혜로 성공을 보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이 천국 가서 면류관이 아닌 개털모자를 쓴걸 보고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훈련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그런데 배우려고 하면 가르침에 대한 빛이 있어야 한다. 라메드는 목적을 가르치는 in order to, to 부정사이다. 목적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뭘 배울지 보여주는 빛이 있어야 한다. 그 빛이 없이는 도대체 뭘 훈련하라는 소리이냐? 끊임없이 배우다가 만다.그 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라메드의 빛이다. 그리고 나는 이 빛 안에서 뭘 배울지 보는 것이다.
להט 라하트: 두루 도는 화염검
라메드의 빛을 히브리어로 라하트라고 한다. 라메드를 숨쉬는 토브의 선이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두루 도는 화염검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화염검이다. 이 빛이 있어야지만 transformation, 뭔가를 훈련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 화염검은 다 나를 생명나무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생명나무로 인도하는 화염검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만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훈련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라메드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리스도를 라메드의 빛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리스도가 빛을 비춰주신다. 그래서 무엇을 훈련할 수 있는가, 배울 수 있는가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라메드의 빛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모든 라메드를 주관한다.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 생명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목적을 정확히 밝혀주는 것을 제자라고 한다.
מ 멤 : 진리, 물, 사역 - 주님의 진리는 내 안에 와 있다. / מעה 메아 : 깊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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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이미 와있기 때문에 내 생각은 주님의 마음, 생각과 같아질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또한 내 마음 안에 있는 멤, 물이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창세 전에,
케뎀에서 있었던 진리가 이미 내 마음 안에 와 있다. 문제는 쓰레기 같은 내 생각들이다. 이 세상에 대한 내 옛 자아, ego 의 생각들은 다 둥둥 떠다닌다. 어디서 떠내려오는지 하염없이 떠내려온다. 그러나 그것을 흘려 보내고 나면 깊은 물을 경험한다. 깊은 물을 길어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생각인지 집착을 버리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다. 그 생각이 쓰레기라고 생각되지 않고 보물이라고 여겨진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잡으려고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생각이 떠내려간다. 물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 속은 다 물로 되어 있다. 그 미움이라는 생각이 떠내려갔기 때문에 또 가서 잡아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또 떠내려가고,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고, 그것이 진짜인 줄 안다. 그래서 붙잡는다. 그렇게 쓰레기와 같이 살면 병들어 죽는 것이다.
내 깊은 속에 이미 그리스도, 하나님의 마음이 와 있음을 봐야 한다. 너의 생각을 버려라, 너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르다, 너의 불의함과 그 악함을 버려라, 나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나는 가까이 네 속에 있다.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네 속에 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다.
멤은 다 달렡에서 나왔다고 했다. 달렡의 본질이 실현된 것이다. 이것을 담이라고 한다.
דם 담 : 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소리가 이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만 보시는 것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예수의 생각만 보시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서 예수의 피를 내 부었다. 피를 부으면 주님이 사해주신다. 여러분 속에 뭐가 있냐?
예수의 피가 있다. 예수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가 모든 것들을 능력 있게 하는 이유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다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가 있는 사람들은 그 쓰레기 같은
생각에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14 번째 글자는 눈 נ 이다.
נון 눈 : 바브(ו)의 가운데에 점을 딱 찍으면 '우' 발음이 난다. 바브가 모음으로 쓰일 때가 있다. 그리고 ן는 눈의 소핏이다. 끝에 오면 길게 내려온다.
눈은 물고기라는 일반적 의미도 있지만 규정, 신실함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한다. 여호수아가 눈(eye)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눈이 아니라 이 히브리어 눈이다. 그래서 눈은 숫자값 50 을 상징한다.
50 은 희년이 오는 것이다. 희년이 왜 좋은가? 회복되니까. 잃어버렸던 것을 다 찾으니까?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잃어버렸던 것을 다 찾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또 잃어버리면 어떻게하나? 그럼 50 년을 또 기다려야 하나? 희년이라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희년에 들어가면 희년이 또 오고, 또 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희년을 지킨 적이 있을까? 없다.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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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년은 נ 눈이다. 눈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규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신실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다 규정화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겨지지가 않는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신실하게 그대로 나타난다. 이걸 눈이라고 한다. 눈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헤이(ה)가 실제화되면 눈, 규정이 된다. 내쉬는 숨이 불규칙하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 내쉬는
숨은 일정해야, 규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헤이가 규정된다. 생명이 있는 숨을 내쉬다 보면
그것이 규정이 된다. 그래서 생명을 내주는 삶을 살아야만 규정이 생긴다. 이것은 내가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규정이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 나의 규정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님의 규정을 볼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여기의 규정이 뭔지 알아야만 자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정, 그래서 그 분을 '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눈이시다. 그래서 눈의 아들이라는 것은 눈을 세우신 분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세우신 분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그리스도가 눈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눈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만날 때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다. 안전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내 삶의 모든
자유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만날 때만이 가능하다.
토라는 멤(מ),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멤(מ)을, 진리를 규정(נ)이 되게 한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מן 만, 만나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토라, 진리를 규정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진리에서 끝나지 말고 규정이 되야 하는데 이를 만나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다, 양식이다'라고 하시고 '날 먹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나를 먹어야
너희들이 산다. 산다는 건 하나님의 규정대로 산다는 것이지 맘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정말 살고 싶은가? 단두대 하나 갖다 놓으면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다는 것은 그냥 막 살고 싶다는 게 아니다. 내가 진짜 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규정대로, 희년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 규정대로 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규정대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이 되신다. 반드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눈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규정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만나를 먹고 살아간다. 일용할 양식을, 만나를 주시옵소서. 이것이 내가 살아갈 때의 안전, 행복, 자유이다.
신 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엘 네에만'이라고 한다. 신성(א)에 속한 진리(מ)를 토라라고 한다. 신성에 속한 진리를 규정화(נ)하면 이를 אמן 아멘이라고 한다. 눈의 아들 그리스도를
지닐 때 우리는 아멘의 삶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진리를 규정화하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아멘의 삶으로 들어가질 않는다. 우리는 아멘을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규정으로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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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것에 늘 아멘한다. 아멘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멘은 신성에 속한 진리가 규정화되는
것이다. 이 아멘의 삶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다.
נאמן אל 엘 네에만 : 신실하신 하나님. אמן 아멘 앞에 נ 눈을 붙이면 네에만이 된다.
그런데 눈을 앞에 붙이면 수동의 뜻이 된다.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아멘에 대해서 수동이 되면 무슨 뜻이 되나? 아멘을 수동하시는 분이시다. 수동 아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른다.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멋진 땅이라고 부른 후 남방으로 가라고 한다. 북이스라엘은 정말 기름이 흐르고 좋은데, 갑자기 그 먼 길을 왔는데 네게브로 가라고 한다. 네게브에는 사막과 광야와 모래 바람이 있고 물도 없다. 왜 네게브로 가라고 하시는가?
נגב 네게브 / גב 가브 : 높아지다 -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네게브라는 것은, 가브 앞에 눈이 붙어서 수동이 된다. 높아지는 게 능동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높아지는 것은 반드시 수동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이스라엘에서 광야 투어를 한 번 해보라. 광야에 들이밀어놓으면 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물이 없으면 다 죽는다.
광야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규정, 살아갈 수 있는 규정을 따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자들은 자기가 규정을 만든다. 광야에서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죽는다. 하나님의 규정을 따르면 다 산다.
광야에서는 규정만 알면 다 산다. 광야는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우리 아버지들은 다 베두인들이었다. 광야에서 살았다. 아파트 지어줘도 싫다고 한다. 광야가 좋다고 한다. 왜? 철저하게 수동적인 삶, 하나님의 규정대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가 광야에 갔는데 정말 물이 없고 너무 힘든 곳인데 갑자기 palm tree(대추야자나무 열매)가 있는 것이다. 이 소리는 물이 있다는 것이다. 조금 가 보니까 진짜 계곡에, 절벽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과학자들 말로는 2 만 년 전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물이 있기 때문에 자라는 것이다. 이런 생명도 물이 있어야 자란다. 광야는 철저히 멤에 대해서 배우는
곳이다. 단순히 멤의 중요성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규정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넌 열방의 아비가 될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너는 Great Nation 이 될 것이다' 해놓고 네게브로 데려 가신다. 여기서 어떻게 Great Nation 을 만드나? 수동적인 삶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는 소리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제 나는
수동적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수동의 삶 속에 진정한 안전이 있다.
오늘날 미국이 상당한 위기 상황에 있는 이유가 뭔가? 미국 전체의 system 을 운영하는 핵심이 안전, security 이다. 내 생명을 지키는 안전 시스템이 온 나라를 잡고 있다. 조금이라도 이 생명을 지키는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미국 사람들은 큰일난다. 이 사람들의 security 는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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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정말 믿을 만 할까? 사람은 자신의 힘을 신뢰한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신뢰한다. 자신의 힘이 security 를 주고, 성공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신뢰하면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 할 모든 이유를 가진다. 왜냐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예측할 수 있나?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있나? 미국이 security 에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많이 발달하는 게 숫자의 통계이다. Wall Street, 주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예측하고 무엇을 통제하나? 내 삶에서 내 힘으로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은근히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것 중에 정말 믿을만한 게 몇 개나 있을까? 무엇이 있나?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정말 하나님의 선한 방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나? 우리는 내 능력을 신뢰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간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대로 행할 수 있다는 능력이 과연 내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가 나의 눈이시라는 것은 더 이상 나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더 이상 나는
나에게 신뢰를 두지 않겠다, 그리스도가 나의 엘 네에만이시다, 그리스도가 눈의 아들이시다, 나는
이제 수동의 삶으로 들어간다. 나는 네게브로의 여정을 간다. 나는 이제 눈의 삶이다, 내가 눈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을 때 나에게 구원이 온다.
נון 눈의 아들 – 여호수아 (구원)
이 눈은 여호수아, 야훼의 구원을 낳는다. 야훼의 구원을 준다. 여호수아만이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여호수아만이 모든 믿을만한 결과를 가져온다.
Security 는 믿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눈의 아들만이 나를 Security 가운데로 이끄신다. 마음에 불안함이 있는가? 10 년 후, 20 년 후에는 뭐 먹고 살까? 과연 내가 이 땅에서 성공할까? 과연 사람들이 날 계속 사랑해줄까? 그러나 오직 눈의 아들, 수동적인 삶만이 우리에게 Security 를 준다.
시 112: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의 차이가 뭔가?
부 : 전체적인 System
예를 들어 자본이라는 것은 얼마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system 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부를 소유하길 축복한다.
부라는 것은 헤이(ה)가 눈(נ)이 된 것이다. הון 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도 혼이 있으니까 외우기 쉬울 것이다. 이것을 부라고 한다. 헤이와 눈의 결합이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
헤이와 눈이 결합하면 이것이 실제화되는데 그러면 부가 나온다. 생명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규정,
눈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냐? 부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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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주는 숨을 왜 반드시 배워야 하냐?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수동을 배우지 못한다. 자신이 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나는 생명을 준다고 주었는데 그게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내쉬는 숨을 쉬어야지만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을 혼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가 온다고 한다.
이 혼이 있을 때, 집에 이 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부가 계속 된다. 사람은 반드시 부유함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부유했다. 제가 옛날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 나는 아브라함의 모든 복을 받았다고 갈라디아서에 써있는데 나는 왜 부유하지 않을까? 우린 참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저는 그런 것에 의문을 가져 봤다. 아브라함 재산이 오늘날로 치면 얼마나 되었을까? 억? 조? 훨씬 부자였을 것이다. 백 억 대는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부유함이라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부유함은 나에게 Security, 안전을 주는 것이다. 안전을 주고, 신뢰를 준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유함을 혼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이 부유함은 다 수동적 삶이다. 이 수동적 삶은 반드시 나에게 부유함을 가져다 준다.
네게브의 삶은 나에게 Secyrity 를 준다. 오늘날 미국은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한다. 그래서 이 부에서 Security 가 나온다. 이라크 대사관에 가보면 몇 겹의 방어막을 치고, 그 안에는 없는 게 없다. 모든 음식들, 김치까지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의 삶은 완전이 파라다이스의 삶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부 때문이다. 미국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콩고라는 나라가 이라크 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부유하기 때문에 Secyrity 를 느낀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에서는 어떻게 Security 를 느끼냐? 하나님의 혼이 있어야 한다. 헤이와 눈이 결합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주는 것을 통해서 수동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호와가 나의 Security 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확정되어서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한다.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말은 나콘인데, 여기에도 눈이 있다. 마음은 눈이 있어야만 확정 된다. 주님에
의해서 살아지는, 나는 내가 능동적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주님으로 인해 살아진다고 할 때
마음이 확정된다. 나콘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를 의지한다기 보단 여호와 안에 Security 가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 안에 있는 Security 를 얻으려면 마음에서 나콘을 해야 한다.
נכֹון 나콘 : 눈(נ)을 적용(כ)하는 것, 눈에 대한 것들을 정신세계에서 열어버리는 것.
눈을 적용해서 그것이 규정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수동의 삶이 기초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야훼 안에 있는 Security 가 내 안에 온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Security 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여호와 안에 있는 Security 는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안전이다.
이 Security 가 있는 자는 불안해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만나이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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נמל 나말 : 개미.
잠 30 장에 보면 지혜로운 것 중에 하나로 개미가 나온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요즘에는 희한해서 베짱이가 지혜롭다고도 한다. 토라를 바꾸려는 시도가 계속 이렇게 있게 된다. 개미가 지혜롭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개미가 나말이기 때문이다.
말은 진리(מ)를 훈련(ל)하는 것이다. 진리를 훈련할 때 반드시 필요한게 눈(נ)이다. 진리를
규정이 되게 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으로 진리를 훈련해야 한다. 이 수동의 삶으로
진리를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늘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이 수동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니다. 오늘날은 수동이라는 말이 안 좋지만, 눈은 수동을 뜻한다. 사실은 수동이라고 번역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지만 다른 말이 없는 것 같다.
이게 나중에 눈이 동사 앞에 붙으면 '우리가' 라는 뜻이 된다. 무엇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게 수동이라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수동이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딴 사람이 다 하는 거, 혹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에서 נו 누라는 말은 '우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눈은 우리라는 뜻을 가져온다. 눈이 뒤에 붙어도 우리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수동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나를 파트너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스도와 나를 파트너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나를 누가 건드리냐는 것이다.
나말은 진리를 훈련하는데 눈에 대한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걸 개미라고 한다. 그래서 이 개미가 지혜롭다는 것이다. 수동의 삶을 배우려는 사람이 진리를 훈련하려는 것을 개미라고 한다. 실제 이렇게 기어 다니는 개미를 지칭하기 보다는 그냥 개미를 말한다. 실제로 개미는 아주 작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것 같고, 능력이 없는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장 Security 있다. 오늘날에도 아무리 개미를 퇴치하려고 해도 퇴치가 안 된다. 군단 중에 가장 파워풀한 군단이 개미 군단이다.
또 눈과 관련 있는 것이 나하쉬이다.
נחש 나하쉬 : 뱀
이것도 눈과 관련이 있다. 이 눈(נ)을 통해서 삶(ח)의 형상(ש)을 이루는 것이다. נ 눈을 통하지
않으면 삶의 형상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뱀이 되셔서 높이 들리 신 것이다. 이 뱀을 보면 산다. 우리는 뱀 하면 무조건 안 좋은 생각들이 있다. 이것이 부정적 의미로 가면 חש 후쉬, 감각이라는 뜻이다. 감각에 대해서 수동적 태도가 되어 감각으로, 경험으로, 내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또 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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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주는 가르침은 오늘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참된 안전, Security 를 준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다 수동의 삶 속으로 나아간다.
ס 싸메크 : 60, 평가. 지지하다, 지원하다.
60 이라는 숫자는 가장 쉬운 히브리어를 가진다. 싸메크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싸멕이시다. 그런데 싸멕의 핵심적 뜻은 뭘까? 평가가 없으면 사람은 절대 훈련 받을 수 없다. 평가가
있어야만 사람은 발전한다. 훈련이라는 것은 그냥 막 받는 게 아니다. 훈련이라는 것은 반드시 단계가 있다. 이 단계가 있고 Process 가 있는데, 이 단계를 알려면 반드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단계에 들어간다. 만약 단계를 달리 해서 들어가면 결실이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30 배, 60 배, 100 배의 결실을 맺기 원하신다.
30 배의 결실을 맺으려면 30 이라는 숫자인 라메드(ל)가 있어야 한다. 두드려 패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훈련을 시키면, 그리고 배우려고 하면 30 배의 결실을 맺는다. 훈련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고, 권위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30 배의 열매를 맺는다.
사실 우리가 어떤 영성 훈련을 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길도 일단 훈련하기 시작하면, 배우려고 하고 권위에 순종하면, 30 배의 결실이 그냥 맺혀진다. 그렇게 파워풀하다. 그런데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 훈련이 되지 않는다.
60 배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0 배에서 만족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100 배까지 가라는 소리이다. 100 배에 가야 이것이 충만해진다. 100 배는 충만한 것이다.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 완성을 가져와야 한다. fulfill 한 것이다. 30 배에 머물러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늘 훈련만 하는 것은 안 된다. 100 배까지 가려면 그 다음 단계인 60 배로 가야 한다. 평가를 해야 한다.
평가가 있으면 60 배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가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 싸멕이 없으면, 평가 받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60 배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평가 받으면 삐친다. 왜냐면 이미 자기 자신의 모든 옛 자아와 ego 는 자기 자신을
높은 데다 놓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가를 하면 그게 내려오니까 이게 심각한 것이다.
심지어는 30 년의 영적 여정을 걸어와도 평가를 한 번도 안 받아본 사람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60 배의 결실이 맺혀지지 않는 것이다. 평가를 받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다.
평가를 받는 것을 싸메크라고 한다. 안수하다라는 뜻이다. 제물을 바칠 때 우리는 안수하는데, 안수하면 죄가 사해진다. 내 죄가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안수 함부로 안받으려는 사람도 있다. 누가 안수해주려고 하면 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의 죄가 전가 될까 봐서이다.
안수하다, 죄를 전가한다는 것은 나를 평가받는 것이다. 안수했을 때 내가 죄를 전가해야 하는데,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게 내 죄라고 내가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내 평가가 있을 때 안수하고 제물을 드릴 수 있다. 그 토라를,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 지금 죄지었어” 라는 평가를 받아들일 때 양을 끌고 가서 안수한다. 이 평가를 받아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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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 평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말 향기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평가를 받아들이고 나는 죄인이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이 때부터 주님의 본격적인 싸메크가 온다. 싸메크는 또한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주님의 지원과 지지가 본격화된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분석이 시작하고, 이게 속건제가 필요한건지, 속죄제가 필요한 건지, 화목제가 필요한 건지 파악해서 제사장이 출동해서 피를 뿌리고 붉은 암소 하나 태우는 등 어마어마한 지원과 지지가 온다. 하늘 문이 열리고 지원과 지지가 온다. 이
때 바로 60 배의 결실이다. 이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죄인이다. 토라의 평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엄청난 지원과 지지가 있다.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지원과 지지를 이끌어낸다. 평가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시다. 내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평가 받으려고 해야 한다.
싸멕은 또한 의지하다라는 뜻도 가진다. 그리스도는 나의 의지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나의
싸멕이시다. 의지하다라는 것은 그 분이 안 계시면 서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분을
의지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 분이 평가하는걸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분은 한 번도 자기를 평가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 분은 늘 우리를 평가하신다.
그리스도, 예슈아, 구원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역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다.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원리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자리 잡을 때, 마음은 제대로 가동되고 훈련되고 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신성은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 악함도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히브리어의 비밀16강
“토라는 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지서도 다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라고 하신다. 토라는 주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주님에 대한 이야기가 도대체 왜 중요하냐?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바꾸기 때문이다. 토라의 첫글자는 베레쉬트(ב)이다. 그리고 마지막 글자는 이스라엘의 라메드(ל)이다.
בל 레브 : 마음. 훈련(ל)하는 집(ב)
마음은 없을 수도 있다. 훈련하기를 싫어하면 마음이 없어진다. 훈련하는 집을 짓지 않겠다는 것이다. 훈련 받지 않겠다고 하면 훈련 받을 마음이 없어진다. 공부하지 않겠다고 하면 공부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훈련 받기를 싫어하면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사실은 주님이 이 마음을, 훈련을 받는 집을 완성하면, 훈련하는 집을 완성하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될 수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이 어떠냐에 달려 있다. 주님은 마음을 다루신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졌느냐,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가 전혀 상관이 없으시다. 왜냐면 그런 건 아버지 집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 벌어왔다고 주님이 좋아하실까? 우리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인데 학교 안가고 돈 벌어오면 내가 좋아할까? 그런데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보태라고 하시는 줄 안다.
이게 아니다. 전혀 잘못 짚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다다르지 않은 것이다. 신성이 아닌 육신에 속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인성이 신성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우리에게 주실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신성으로 변화되느냐가 하나님의 중요한 관점이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유일한 그 system이 마음이다. 마음에 따라서 신성을 변화시키는 훈련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토라를 여기에 기록한 것이다. 토라의 첫글자가 베트이고, 마지막 글자가 라메드이다.
이 토라는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마음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야 한다. 마음 안에 토라가 새겨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마음이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토라를 마음 안에 새긴 것을, 쓴 것을 카타브 해 버렸다고 한다.
כתב 카타브 : Writing, 토라를 마음 안에 카프(כ)해버리는 것, 열어버리는 것.
정신세계에 완전히 열어서 적용하는 것이다. 토라는 써져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주님이 어디에 쓰시길 원하시는가? 마음이다. 쓰는 것이 전혀 상관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써져 있으면 여러분은 절대 마음을 함부로 없애지 않는다. 누가 차용증서 하나 써줬다? 그러면 꿔준 것에 대해 마음을 쉽게 포기 안 한다. 법원까지 가서 보라고 빌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써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쉽게 포기가 된다.
이게 주님이 토라를 마음에 쓰시는 것이다. Written Torah를 줬다는 말은 그냥 책을 주었다는 게 아니라 마음에 기록한다라는 것이다. 이를 새언약이라고 한다.
렘31: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오늘날 토라를 말하면 율법으로의 회기인 줄 안다. 그런데 주님이 자꾸 말씀하시는 이유가 '너희들이 토라가 기록된 것을 잊어버렸다, 너희들의 마음에 뭐가 기록되어 있느냐?' 주되게 들어 있는 것이 뭐냐는 것이다. 여러분의 마음을 제일 크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하루를 돌아보자. 마음이 토라에 사로잡혀 있으면 세상이 결코 유혹할 수가 없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신성을 훈련하는데 마음이 사로잡혀 있지 않다, 새언약을 떠났다는 소리이다. 말라기서에서 너희는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한다. 왜? 마음에 토라가 없다, 토라가 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 히브리어를 배우는 이유가 토라는 히브리어로 써져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는 단순한 languege가 아니라 새 언약이다. 다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다시 깨우고 우리의 마음이 다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마음에서 그리스도가 나와야 한다, 이를 신성이라고 한다. 마음을 훈련시켜야 한다. 다 이 이야기이다. 내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주님의 판단이다.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봐야 한다. 문제는 결코 세상에 있지 않다. 다른 존재들에게 있지 않고, 사장한테 있지 않다. 고양이에게도, 강아지에게도 있지 않고 마음에 문제가 있다. 내 삶 속에 악함과 불의와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면, 내 삶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고 싶어하신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우리의 마음이라고 주님도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마음을 다루는 것을 토라라고 하고, 이를 살아내서 마음을 변화시키시는 분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래서 토라의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지금 어떤 마법과 비법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훈련시키는 방법을 전수하는 것이다. 마음은 반드시 훈련되어진다. 한 순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요즘 세상이, 헬라의 자식들이,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은 마음과 감정을 동일시 여긴다. 그런 영화들을 만든다. 바깥에서 쑥 들어와서 생겨버리는, 마음을 훈련한다는 이미지를 다 제거해버리는 것이다.
누가 나를 못살게 굴면 어떻게 되나? 이제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버린다. 그러면 그 자체는 내 마음이다. 주님, 이 마음을 어떻게 좀 가져가 주세요 하고 기도한다. 마법으로 기도하는데 이스라엘은 마법이 없다고 한다. 성령 받아서 마음이 바뀌어서 되는 게 아니다.
לב 마음 : 끊임없이 훈련하는 것.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훈련해야 한다. 이것을 훈련하는 것을 하루에 일곱번씩 일흔번, 490번 용서하라고 한다. 이것이 다 훈련이다. 용서도 훈련이다. 계속 훈련해야 한다. 용서가 잘 되는가? 잘 안 된다. 그런데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뭘까? 훈련하지 않으려고 하면 용서가 잘 안 된다. 뭔가를 완전히 터득할 때 처음부터 잘 되는 걸 봤나? 잘 안 된다. 그러면 신경질 나서 그만둔다.
그런데 제자는, 뭘 배우려는 사람들은 안될수록 더 열심히 한다. 안될수록 더 삶에 의욕이 생긴다. 그러면 용서가 안될수록 살 맛이 나야 한다. 용서가 안될수록 왜 이거밖에 안되냐, 오늘 390번 남았는데 미치겠다, 하면서 뛰어 넘어야 한다. 그러면 다음주에는 380번, 하면서 좀 되네? 1년 후에는 200번, 되네? 10년 후에는 20번, 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원리이다.
바벨론의 원리는 마음은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바벨론 신의 이름은 벨이다. 마음을 뒤집으면 벨이 된다.
בל 벨 : "훈련으로 되지 않는다."
바벨론의 거짓 원리는 마음을 훈련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반드시 훈련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삶 속에서 토라를 배우고, 무엇을 배우든지 간에 훈련하고 연습하고 배우고 익혀서 신성에 도달 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고는 신성에 다다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훈련하는 방법들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다. 마음을 적용하고 훈련할 때, 카프, 20, 30, 40, 50은 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이다. 1부터 10까지는 다 예슈아, 구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내 삶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이 내 삶에 나타나려면 카프가 있어야 한다.
כ 카프 : 적용
내 정신세계 속에, 내 마음에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는 나의 카프이시다. 이것을 늘 훈련해야 한다. 적용을 하려면 소스가 있어야 한다. 원천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나의 소스이시다. 나의 소스가 있어야지만 그것을 적용해서 관계를 할 수 있다. 나는 오직 카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한다는 것이다. 이를 자꾸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들은 다 그리스도의 생각을 오픈 한 것을 소스로 가진다. 세상을 소스로 가지지 않는다. 먼저 나는 정신세계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연다, 이것이 모든 relationship의 기초이다. 그 전까지는 내 마음, 내 욕망을 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카프가 되신다.
카프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다. 관계는 내 옛 자아의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전에는 내 옛 자아 마음대로 했다. 미워하면 미운 관계가 생긴다. 보기 싫으면 보기 싫은 관계가 생겨난다. 그런데 주님은 보기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그것을 놔주는 것이다. 모든 relationship의 기초는 카프이다. 나는 항상 모든 것과 악수할 수 있다, 모든 존재들과 악수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카프로 가지는 자들은 모든 존재들과 악수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카프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신 세계가 카프로 열린다. 옆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어도 악수 할 수 있다. 지금 악수한 사람이 살인자인지 어떤지 어떻게 아는가? 미워하면 살인자이기 때문에 살인자일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생각이 오픈 되면 악수할 수 있다. 모든 관계를 할 수 있고, 악수를 할 수 있는 기초이다. 내 마음을 이렇게 훈련시켜야 한다. 그리스도가 나의 카프이시다, 나는 그 카프 안에서 관계한다.
남편도, 부인도, 자식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존재든 관계하려면 반드시 카프가 있어야 한다. 정신 세계에서 그리스도가 열려야 한다. 그리스도께 속한 것들이 열려야 한다.
카프 다음은 라메드이다.
ל 라메드 : 훈련, 배움, 가르침- 가르침이 배움이고 배움이 가르침이다.
훈련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권위, 권력이라는 뜻도 나온다. 훈련하지 않는 자는 어떤 권위도 가질 수 없다. 다윗이 권위를 가졌던 이유는,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훈련 받았기 때문이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고13년 동안 훈련 받는다. 훈련 받아야 왕으로써의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도 주님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 기름 부었다. 그런데 지금 왕관이 있는가? 훈련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훈련 받기를 싫어하고, 게을러하면 나중에 면류관이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장로님은 주님의 은혜로 성공을 보고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분이 천국 가서 면류관이 아닌 개털모자를 쓴걸 보고 인생을 다시 시작했다는 말이 있다. 훈련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그런데 배우려고 하면 가르침에 대한 빛이 있어야 한다. 라메드는 목적을 가르치는 in order to, to부정사이다. 목적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뭘 배울지 보여주는 빛이 있어야 한다. 그 빛이 없이는 도대체 뭘 훈련하라는 소리이냐? 끊임없이 배우다가 만다.그 빛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라메드의 빛이다. 그리고 나는 이 빛 안에서 뭘 배울지 보는 것이다.
להט 라하트: 두루 도는 화염검
라메드의 빛을 히브리어로 라하트라고 한다. 라메드를 숨쉬는 토브의 선이다.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두루 도는 화염검이다. 그리스도는 나의 화염검이다. 이 빛이 있어야지만 transformation, 뭔가를 훈련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데 이 화염검은 다 나를 생명나무로 인도한다. 그리스도는 나를 생명나무로 인도하는 화염검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만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훈련할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라메드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리스도를 라메드의 빛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그리스도가 빛을 비춰주신다. 그래서 무엇을 훈련할 수 있는가, 배울 수 있는가를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라메드의 빛이시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모든 라메드를 주관한다. 무엇이 되고자 하느냐? 생명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는 목적을 정확히 밝혀주는 것을 제자라고 한다.
מ 멤 : 진리, 물, 사역 - 주님의 진리는 내 안에 와 있다. / מעה 메아 : 깊은 곳.
나는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이미 와있기 때문에 내 생각은 주님의 마음, 생각과 같아질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또한 내 마음 안에 있는 멤, 물이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진리가 창세 전에, 케뎀에서 있었던 진리가 이미 내 마음 안에 와 있다. 문제는 쓰레기 같은 내 생각들이다. 이 세상에 대한 내 옛 자아, ego의 생각들은 다 둥둥 떠다닌다. 어디서 떠내려오는지 하염없이 떠내려온다. 그러나 그것을 흘려 보내고 나면 깊은 물을 경험한다. 깊은 물을 길어낼 수 있다. 그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은 생각인지 집착을 버리는 것이 처음에는 어렵다. 그 생각이 쓰레기라고 생각되지 않고 보물이라고 여겨진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걸 잡으려고 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미워하는 생각이 떠내려간다. 물 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 속은 다 물로 되어 있다. 그 미움이라는 생각이 떠내려갔기 때문에 또 가서 잡아야 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또 떠내려가고, 그런데 그것이 없으면 내가 죽을 것 같고, 그것이 진짜인 줄 안다. 그래서 붙잡는다. 그렇게 쓰레기와 같이 살면 병들어 죽는 것이다.
내 깊은 속에 이미 그리스도, 하나님의 마음이 와 있음을 봐야 한다. 너의 생각을 버려라, 너의 생각은 나의 생각과 다르다, 너의 불의함과 그 악함을 버려라, 나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나는 가까이 네 속에 있다.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네 속에 와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다.
멤은 다 달렡에서 나왔다고 했다. 달렡의 본질이 실현된 것이다. 이것을 담이라고 한다.
דם 담 : 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피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소리가 이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리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피만 보시는 것이라는 것은 그 속에서 예수의 생각만 보시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서 예수의 피를 내 부었다. 피를 부으면 주님이 사해주신다. 여러분 속에 뭐가 있냐? 예수의 피가 있다. 예수의 진리가 있는 것이다. 예수의 피가 모든 것들을 능력 있게 하는 이유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을 다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예수의 피가 있는 사람들은 그 쓰레기 같은 생각에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14번째 글자는 눈 נ 이다.
נון 눈 : 바브(ו)의 가운데에 점을 딱 찍으면 '우' 발음이 난다. 바브가 모음으로 쓰일 때가 있다. 그리고 ן는 눈의 소핏이다. 끝에 오면 길게 내려온다.
눈은 물고기라는 일반적 의미도 있지만 규정, 신실함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라고 한다. 여호수아가 눈(eye)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눈이 아니라 이 히브리어 눈이다. 그래서 눈은 숫자값 50을 상징한다.
50은 희년이 오는 것이다. 희년이 왜 좋은가? 회복되니까. 잃어버렸던 것을 다 찾으니까?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잃어버렸던 것을 다 찾을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또 잃어버리면 어떻게하나? 그럼 50년을 또 기다려야 하나? 희년이라는 것은 주님의 나라를 상징한다. 희년에 들어가면 희년이 또 오고, 또 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희년을 지킨 적이 있을까? 없다. 한 번도 지킨 적이 없다. 왜냐하면 희년은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희년은 נ 눈이다. 눈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규정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가 신실하게 역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다 규정화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어겨지지가 않는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신실하게 그대로 나타난다. 이걸 눈이라고 한다. 눈은 굉장히 좋은 것이다.
헤이(ה)가 실제화되면 눈, 규정이 된다. 내쉬는 숨이 불규칙하면 뭔가 문제가 생긴다. 내쉬는 숨은 일정해야, 규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헤이가 규정된다. 생명이 있는 숨을 내쉬다 보면 그것이 규정이 된다. 그래서 생명을 내주는 삶을 살아야만 규정이 생긴다. 이것은 내가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규정이 내려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것이 나의 규정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자유는 내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하나님의 규정을 볼 때 진정한 자유가 온다. 여기의 규정이 뭔지 알아야만 자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규정, 그래서 그 분을 '눈'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눈이시다. 그래서 눈의 아들이라는 것은 눈을 세우신 분이라는 것이다. 아들은 세우신 분이라는 뜻인데 그래서 그리스도가 눈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눈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만날 때 그 안에서 자유 할 수 있다. 안전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내 삶의 모든 자유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만날 때만이 가능하다.
토라는 멤(מ),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멤(מ)을, 진리를 규정(נ)이 되게 한다. 이것을 히브리어로 מן 만, 만나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토라, 진리를 규정이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진리에서 끝나지 말고 규정이 되야 하는데 이를 만나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이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다, 양식이다'라고 하시고 '날 먹으라'라고 하신 것이다. 나를 먹어야 너희들이 산다. 산다는 건 하나님의 규정대로 산다는 것이지 맘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정말 살고 싶은가? 단두대 하나 갖다 놓으면 살고 싶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싶다는 것은 그냥 막 살고 싶다는 게 아니다. 내가 진짜 살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규정대로, 희년의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 규정대로 살려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규정대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눈이 되신다. 반드시 그리스도가 우리의 눈이 되어야만, 그리스도의 규정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스도의 만나를 먹고 살아간다. 일용할 양식을, 만나를 주시옵소서. 이것이 내가 살아갈 때의 안전, 행복, 자유이다.
신7: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엘 네에만'이라고 한다. 신성(א)에 속한 진리(מ)를 토라라고 한다. 신성에 속한 진리를 규정화(נ)하면 이를 אמן 아멘이라고 한다. 눈의 아들 그리스도를 지닐 때 우리는 아멘의 삶으로 들어간다. 하나님의 진리를 규정화하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고는 아멘의 삶으로 들어가질 않는다. 우리는 아멘을 오용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규정으로 만들고 싶은 것에 늘 아멘한다. 아멘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멘은 신성에 속한 진리가 규정화되는 것이다. 이 아멘의 삶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다.
אל נאמן 엘 네에만 : 신실하신 하나님. אמן 아멘 앞에 נ 눈을 붙이면 네에만이 된다. 그런데 눈을 앞에 붙이면 수동의 뜻이 된다. 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아멘에 대해서 수동이 되면 무슨 뜻이 되나? 아멘을 수동하시는 분이시다. 수동 아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약속의 땅으로 부른다. 그 다음에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주 멋진 땅이라고 부른 후 남방으로 가라고 한다. 북이스라엘은 정말 기름이 흐르고 좋은데, 갑자기 그 먼 길을 왔는데 네게브로 가라고 한다. 네게브에는 사막과 광야와 모래 바람이 있고 물도 없다. 왜 네게브로 가라고 하시는가?
נגב 네게브 / גב 가브 : 높아지다 -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네게브라는 것은, 가브 앞에 눈이 붙어서 수동이 된다. 높아지는 게 능동으로 안 된다는 것이다. 높아지는 것은 반드시 수동적인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이스라엘에서 광야 투어를 한 번 해보라. 광야에 들이밀어놓으면 제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물이 없으면 다 죽는다.
광야에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규정, 살아갈 수 있는 규정을 따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서는 높은 자들은 자기가 규정을 만든다. 광야에서는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상관없이 하나님의 규정을 따르지 않으면 다 죽는다. 하나님의 규정을 따르면 다 산다.
광야에서는 규정만 알면 다 산다. 광야는 살기 좋은 곳이다. 그래서 아브라함, 우리 아버지들은 다 베두인들이었다. 광야에서 살았다. 아파트 지어줘도 싫다고 한다. 광야가 좋다고 한다. 왜? 철저하게 수동적인 삶, 하나님의 규정대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제가 광야에 갔는데 정말 물이 없고 너무 힘든 곳인데 갑자기 palm tree(대추야자나무 열매)가 있는 것이다. 이 소리는 물이 있다는 것이다. 조금 가 보니까 진짜 계곡에, 절벽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데 과학자들 말로는 2만 년 전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 물이 있기 때문에 자라는 것이다. 이런 생명도 물이 있어야 자란다. 광야는 철저히 멤에 대해서 배우는 곳이다. 단순히 멤의 중요성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규정대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배운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님이 '넌 열방의 아비가 될 것이다, 모든 민족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너는 Great Nation이 될 것이다' 해놓고 네게브로 데려 가신다. 여기서 어떻게 Great Nation을 만드나? 수동적인 삶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는 소리는, 그리스도를 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제 나는 수동적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수동의 삶 속에 진정한 안전이 있다.
오늘날 미국이 상당한 위기 상황에 있는 이유가 뭔가? 미국 전체의 system을 운영하는 핵심이 안전, security이다. 내 생명을 지키는 안전 시스템이 온 나라를 잡고 있다. 조금이라도 이 생명을 지키는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미국 사람들은 큰일난다. 이 사람들의 security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이게 정말 믿을 만 할까? 사람은 자신의 힘을 신뢰한다. 미국은 자신의 힘을 신뢰한다. 자신의 힘이 security를 주고, 성공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신뢰하면 우리는 염려하고 걱정하고 두려워 할 모든 이유를 가진다. 왜냐면 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예측할 수 있나?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있나? 미국이 security에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는, 그들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많이 발달하는 게 숫자의 통계이다. Wall Street, 주가,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예측하고 무엇을 통제하나? 내 삶에서 내 힘으로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은근히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것 중에 정말 믿을만한 게 몇 개나 있을까? 무엇이 있나?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정말 하나님의 선한 방향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있나? 우리는 내 능력을 신뢰한다.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간다? 하나님의 모든 능력대로 행할 수 있다는 능력이 과연 내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가 나의 눈이시라는 것은 더 이상 나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더 이상 나는 나에게 신뢰를 두지 않겠다, 그리스도가 나의 엘 네에만이시다, 그리스도가 눈의 아들이시다, 나는 이제 수동의 삶으로 들어간다. 나는 네게브로의 여정을 간다. 나는 이제 눈의 삶이다, 내가 눈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였을 때 나에게 구원이 온다.
נון 눈의 아들 – 여호수아 (구원)
이 눈은 여호수아, 야훼의 구원을 낳는다. 야훼의 구원을 준다. 여호수아만이 나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여호수아만이 모든 믿을만한 결과를 가져온다.
Security 는 믿을 만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눈의 아들만이 나를 Security 가운데로 이끄신다. 마음에 불안함이 있는가? 10년 후, 20년 후에는 뭐 먹고 살까? 과연 내가 이 땅에서 성공할까? 과연 사람들이 날 계속 사랑해줄까? 그러나 오직 눈의 아들, 수동적인 삶만이 우리에게 Security를 준다.
시112: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의 차이가 뭔가?
부 : 전체적인 System
예를 들어 자본이라는 것은 얼마냐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 system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 여러분이 부를 소유하길 축복한다.
부라는 것은 헤이(ה)가 눈(נ)이 된 것이다. הון 혼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도 혼이 있으니까 외우기 쉬울 것이다. 이것을 부라고 한다. 헤이와 눈의 결합이다. 남자와 여자의 결혼, 헤이와 눈이 결합하면 이것이 실제화되는데 그러면 부가 나온다. 생명을 주는 것을 통해서 규정, 눈의 아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냐? 부유하게 된다.
생명을 주는 숨을 왜 반드시 배워야 하냐?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수동을 배우지 못한다. 자신이 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 나는 생명을 준다고 주었는데 그게 다 허상이었던 것이다.
내쉬는 숨을 쉬어야지만 그것을 배울 수 있다. 그것을 혼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가 온다고 한다. 이 혼이 있을 때, 집에 이 혼이 있을 때 하나님의 부가 계속 된다. 사람은 반드시 부유함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부유했다. 제가 옛날에 의문을 가졌던 것이 나는 아브라함의 모든 복을 받았다고 갈라디아서에 써있는데 나는 왜 부유하지 않을까? 우린 참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때가 많다. 저는 그런 것에 의문을 가져 봤다. 아브라함 재산이 오늘날로 치면 얼마나 되었을까? 억? 조? 훨씬 부자였을 것이다. 백 억 대는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부유함이라는 것은 굉장한 능력이다. 부유함은 나에게 Security, 안전을 주는 것이다. 안전을 주고, 신뢰를 준다. 하나님의 부유함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유함을 혼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이 부유함은 다 수동적 삶이다. 이 수동적 삶은 반드시 나에게 부유함을 가져다 준다. 네게브의 삶은 나에게 Secyrity를 준다. 오늘날 미국은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한다. 그래서 이 부에서 Security가 나온다. 이라크 대사관에 가보면 몇 겹의 방어막을 치고, 그 안에는 없는 게 없다. 모든 음식들, 김치까지 있다고 한다. 그 안에서의 삶은 완전이 파라다이스의 삶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부 때문이다. 미국이 부유하기 때문이다. 콩고라는 나라가 이라크 오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못한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부유하기 때문에 Secyrity를 느낀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삶에서는 어떻게 Security를 느끼냐? 하나님의 혼이 있어야 한다. 헤이와 눈이 결합해야 한다. 자기의 생명을 주는 것을 통해서 수동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호와가 나의 Security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7 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두려움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의 마음이 확정되어서 여호와를 의지한다고 한다.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말은 나콘인데, 여기에도 눈이 있다. 마음은 눈이 있어야만 확정 된다. 주님에 의해서 살아지는, 나는 내가 능동적으로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주님으로 인해 살아진다고 할 때 마음이 확정된다. 나콘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를 의지한다기 보단 여호와 안에 Security가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 안에 있는 Security를 얻으려면 마음에서 나콘을 해야 한다.
נכוֹן 나콘 : 눈(נ)을 적용(כ)하는 것, 눈에 대한 것들을 정신세계에서 열어버리는 것.
눈을 적용해서 그것이 규정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수동의 삶이 기초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야훼 안에 있는 Security가 내 안에 온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걱정한다. Security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여호와 안에 있는 Security는 아무도 해할 수 없는 안전이다. 이 Security가 있는 자는 불안해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고, 우울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만나이시다는 것이다.
נמל 나말 : 개미.
잠 30장에 보면 지혜로운 것 중에 하나로 개미가 나온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온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요즘에는 희한해서 베짱이가 지혜롭다고도 한다. 토라를 바꾸려는 시도가 계속 이렇게 있게 된다. 개미가 지혜롭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개미가 나말이기 때문이다.
말은 진리(מ)를 훈련(ל)하는 것이다. 진리를 훈련할 때 반드시 필요한게 눈(נ)이다. 진리를 규정이 되게 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의 규정으로 진리를 훈련해야 한다. 이 수동의 삶으로 진리를 훈련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늘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이 수동이라는 말이 나쁜 말이 아니다. 오늘날은 수동이라는 말이 안 좋지만, 눈은 수동을 뜻한다. 사실은 수동이라고 번역하는 자체가 문제가 있지만 다른 말이 없는 것 같다.
이게 나중에 눈이 동사 앞에 붙으면 '우리가' 라는 뜻이 된다. 무엇을 우리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게 수동이라는 것이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는 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수동이라고 하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딴 사람이 다 하는 거, 혹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을 생각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한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에서 נו 누라는 말은 '우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눈은 우리라는 뜻을 가져온다. 눈이 뒤에 붙어도 우리라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수동이라는 뜻은 하나님과 나를 파트너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스도와 나를 파트너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나를 누가 건드리냐는 것이다.
나말은 진리를 훈련하는데 눈에 대한 진리가 있는 것이다. 이걸 개미라고 한다. 그래서 이 개미가 지혜롭다는 것이다. 수동의 삶을 배우려는 사람이 진리를 훈련하려는 것을 개미라고 한다. 실제 이렇게 기어 다니는 개미를 지칭하기 보다는 그냥 개미를 말한다. 실제로 개미는 아주 작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것 같고, 능력이 없는 것 같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장 Security 있다. 오늘날에도 아무리 개미를 퇴치하려고 해도 퇴치가 안 된다. 군단 중에 가장 파워풀한 군단이 개미 군단이다.
또 눈과 관련 있는 것이 나하쉬이다.
נחש 나하쉬 : 뱀
이것도 눈과 관련이 있다. 이 눈(נ)을 통해서 삶(ח)의 형상(ש)을 이루는 것이다. נ 눈을 통하지 않으면 삶의 형상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이 뱀이 되셔서 높이 들리 신 것이다. 이 뱀을 보면 산다. 우리는 뱀 하면 무조건 안 좋은 생각들이 있다. 이것이 부정적 의미로 가면 חש 후쉬, 감각이라는 뜻이다. 감각에 대해서 수동적 태도가 되어 감각으로, 경험으로, 내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또 뱀이라고 한다.
눈이 주는 가르침은 오늘날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참된 안전, Security를 준다. 그리스도는 나의 눈이시다.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다 수동의 삶 속으로 나아간다.
ס 싸메크 : 60, 평가. 지지하다, 지원하다.
60이라는 숫자는 가장 쉬운 히브리어를 가진다. 싸메크이다. 그리스도는 또한 싸멕이시다. 그런데 싸멕의 핵심적 뜻은 뭘까? 평가가 없으면 사람은 절대 훈련 받을 수 없다. 평가가 있어야만 사람은 발전한다. 훈련이라는 것은 그냥 막 받는 게 아니다. 훈련이라는 것은 반드시 단계가 있다. 이 단계가 있고 Process가 있는데, 이 단계를 알려면 반드시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단계에 들어간다. 만약 단계를 달리 해서 들어가면 결실이 없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기 원하신다.
30배의 결실을 맺으려면 30이라는 숫자인 라메드(ל)가 있어야 한다. 두드려 패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훈련을 시키면, 그리고 배우려고 하면 30배의 결실을 맺는다. 훈련하려고 하고, 배우려고 하고, 권위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30배의 열매를 맺는다.
사실 우리가 어떤 영성 훈련을 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길도 일단 훈련하기 시작하면, 배우려고 하고 권위에 순종하면, 30배의 결실이 그냥 맺혀진다. 그렇게 파워풀하다. 그런데 배우려고 하지 않을 때 훈련이 되지 않는다.
60배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0배에서 만족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100배까지 가라는 소리이다. 100배에 가야 이것이 충만해진다. 100배는 충만한 것이다. 땅에 충만 하라는 것이 완성을 가져와야 한다. fulfill한 것이다. 30배에 머물러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늘 훈련만 하는 것은 안 된다. 100배까지 가려면 그 다음 단계인 60배로 가야 한다. 평가를 해야 한다.
평가가 있으면 60배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가 받으려고 하는 마음이다. 내 마음에 싸멕이 없으면, 평가 받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60배의 결실을 맺지 못한다. 오늘날에는 평가 받으면 삐친다. 왜냐면 이미 자기 자신의 모든 옛 자아와 ego는 자기 자신을 높은 데다 놓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평가를 하면 그게 내려오니까 이게 심각한 것이다.
심지어는 30년의 영적 여정을 걸어와도 평가를 한 번도 안 받아본 사람도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60배의 결실이 맺혀지지 않는 것이다. 평가를 받는 것은 정말 행복한 것이다.
평가를 받는 것을 싸메크라고 한다. 안수하다라는 뜻이다. 제물을 바칠 때 우리는 안수하는데, 안수하면 죄가 사해진다. 내 죄가 전가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안수 함부로 안받으려는 사람도 있다. 누가 안수해주려고 하면 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의 죄가 전가 될까 봐서이다.
안수하다, 죄를 전가한다는 것은 나를 평가받는 것이다. 안수했을 때 내가 죄를 전가해야 하는데,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게 내 죄라고 내가 정확하게 평가하는 것이다. 내 평가가 있을 때 안수하고 제물을 드릴 수 있다. 그 토라를,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 지금 죄지었어” 라는 평가를 받아들일 때 양을 끌고 가서 안수한다. 이 평가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 평가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정말 향기가 좋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평가를 받아들이고 나는 죄인이다..!하면 그것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이 때부터 주님의 본격적인 싸메크가 온다. 싸메크는 또한 지원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주님의 지원과 지지가 본격화된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 분석이 시작하고, 이게 속건제가 필요한건지, 속죄제가 필요한 건지, 화목제가 필요한 건지 파악해서 제사장이 출동해서 피를 뿌리고 붉은 암소 하나 태우는 등 어마어마한 지원과 지지가 온다. 하늘 문이 열리고 지원과 지지가 온다. 이 때 바로 60배의 결실이다. 이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죄인이다. 토라의 평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엄청난 지원과 지지가 있다.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 이것은 주님의 놀라운 지원과 지지를 이끌어낸다. 평가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시다. 내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에 의해서 끊임없이 평가 받으려고 해야 한다.
싸멕은 또한 의지하다라는 뜻도 가진다. 그리스도는 나의 의지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나의 싸멕이시다. 의지하다라는 것은 그 분이 안 계시면 서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분을 의지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그 분이 평가하는걸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분은 한 번도 자기를 평가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 그 분은 늘 우리를 평가하신다.
그리스도, 예슈아, 구원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역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다.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원리가 들어오기 시작할 때,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자리 잡을 때, 마음은 제대로 가동되고 훈련되고 변화되기 시작할 것이다. 모든 신성은 마음에서 나온다. 모든 악함도 마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들이 굉장히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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