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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밭예배 고세중 목사님
신15:19-16:17(To), 행18:1-23(신약)
르에 기간은 정말 중요하고, 아주 위대한 수준인데, 문제는 르에라는 영의 토라포션의 실제 영적 수준이 굉장히 높은데 있다는 것이다. 이게 쉽지가 않다. 우리가 어쩌면 항상 토라와 제자도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말로 설명하면,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실제로 성취하기는 훨씬 더 어렵다. 르에 토라포션에 나오는 복과 저주의 성취는 실제로 여호수아 8장에서나 이루어진다. 어떤 면에서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보기만 하라, 그러나 보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말이 쉽지, 실제를 보는 것은 굉장히 감을 잡기도 어렵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기 바란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그림이다. 지금 머리로 넘어가는 시점에 에케브에서 르에로, 영의 머리로 넘어가는 매우 높은 단계이다. 아래에서 버벅대는데, 위의 이야기를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저는 게부라인데, 헤세드로 칭함을 받아서 아버지가 되는 여정을 가고 있고, 바다 아버지는 헤세드의 사람이었기에, 게부라, 아들이 되시오라고 해서 이 두 사람이 열심히 합쳐서 티프에레트에서 만나는 것이다. 티프에레트가 야곱인데, 이 야곱 안에 완전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있다. 정중앙에 놓는 것이다. 이게 10 세피로트의 유명한 그림이다.
그리고 밑에는 예쏘드이다. 육의 차원에서 영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비밀의 차원인데, 영의 일들 가운데 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이 물질의 사람이 아직 이 영의 세계를 미처 충분히 다니는 법을 알지 못하기에, 육의 사람이 여기에 들어오면 이게 뭐지?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하면, 여기서 혼동이 벌어진다. 혼동은 육신과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차원에 넘어와서, 영의 차원의 여정을 따로 배우지 못하면, 여전히 그 안에서 혼동, 어둠 가운데 빠져버리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린다. 혼동 가운데서 또 막 헤메는 것이다. 어떻게든 토라포션의 빛을 따라서, 이 길을 인도해주는 것이 하오르, 빛이신 그분이 인도해주고, 혼돈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데, 이게 쉽지가 않다. 오랜 시간 토라를 훈련하면서, 이 혼동을 길들여야 한다. 혼동을 길들이는 훈련을 받아야 이 여정을 갈 수 있고, 그 삶을 살 때 표지판도 알아보고, 어디쯤인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방향을 찾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저는 저 자신이 그렇게 경험을 했고, 이 여정의 여정에서 빛을 따라간다고 했지만, 기준을 잡기 전까지는 길들여지지 않는 영과 육의 세계에서 혼동스러웠다. 길들인다는 것은 육을 알아보고 영을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육신을 입었기에, 영과 육이 섞여서 들어온다. 이것을 길들이는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원이가 딜랴랑 결혼해서 아버지도 다 아는데, 어떻게 된 것인가? 혼동스럽다. 길들여지지 않은 육신과 영이 혼동 가운데 섞여서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에케브에서 르에로 가는 것은 이 시점에 대한 현미경적인 뷰가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여정을 다 걸어온 것이다. 여러분들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이야기를 통해서, 이 혼동의 영역, 영과 육의 혼동의 영역을 다루는 이야기를 해서, 거기서 복과 저주가 뭔지 감을 잡을 수 있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기만 해도 등대와 같은 빛의 영적 감각이 있으면, 아래에서 혼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 회로의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다.
1. ראה 르에 : (머리로->영으로) 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영으로 본다는 말은 정말 어렵다. 저도 어렵다. 이 혼동이 지금도 한번씩 찾아오기 때문에, 제가 지금 선교사가 된지 몇년인데, 전임 사역자로만 25년인데, 아직도 혼동 가운데 한번씩 빠져서, 이것을 길들여서 길을 찾기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실수, 상황 가운데 빠진다는 사실을 제가 알고, 여러분의 아버지들과 주님도 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을 편히 가지고 이것을 들어보시기 바란다.
1) ר 레쉬 : 머리 / 영/ 의식 (Consciousness) / 정신
형이하학 : 과학(의학) <-> 형이상학 : 영적
정신의 양 vs 정신의 질 (영의 수준)
머리는 의식이다. 정신이다. 너 정신이 있니, 없니? 레쉬를 이해하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육신의 차원은 형이하학적인 차원이다. 그리고 영은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거기에서 이 의식이라는 말을 형이하학적으로 말하면, 과학적, 의학적인 것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는 철학적, 영적인 관점이다. 의학적이기 때문에, 의사들이 그 사람 의식 있나? 이렇게 물어본다. Mental이 있어? Sense가 있어? 정신이 돌아왔어? 과학에서 의식이라고 한다면, 정신의 양이다. 이 사람이 정신이 있냐? 정신이 없는 것을 코마라고 한다. 의학에서는 다섯 단계로 나누는데, Coma, Semicoma, Stupor, Drowsy, alert, 다섯 가지 수준을 이야기하는데, 정신의 양적인 면을 이야기한다. 어떤 질적인 면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질은 영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수준의 영이 들어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영의 차원의 이야기들이 아니면 알 재간이 없다. 신비주의의 관점을 가지고 이 지식을 배운 사람들만이 이것을 안다. 맨날 이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자기가 질적인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당장 물어봐도 모른다.
고전 물리학 vs 양자 물리학 : 예측 불가능 / 불안정성 -> 의심, 두려움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비유하자면, 고전물리학과 양자 물리학 같은 것이다. 고전물리학은 패턴화되고 알기 쉬운데, 영의 세계는 모든 것들이 예측 불가능하다. 이것 자체가 파동이기 때문에 고정되어있지 않다. 불안정성이 있다. 특히 영의 사람이 되지 않은, 마음과 느낌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육의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두려움과 의심이 몰려오면 와르르 떨어져버린다. 예측 불가능하다는 것은, 갑자기 형제 나오라고 하더니, 내가 저 사람의 신부가 되라는거야?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레쉬, 이것이 영적 의식인지, 육신적 의식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모든 것을 육으로 보는 패턴만 있고, 영을 훈련하지 못한 사람이 영의 어떤 상황 가운데 들어가면 혼동 가운데 빠져서, 너무나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의심과 두려움이 확 몰려온다. 의심과 두려움은 나하쉬가 조종한다. 이것은 평생 훈련하는 것이다. 하루, 이틀에 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난 아기가 하루이틀만에 연습 몇번 하고 걷는가? 아닌 것이다.
2) 영적 성숙 : 사람 (영적 가능성, DNA) -> 영적 상승 vs 동물
르에라는 것은 영적 성숙의 이야기이다. 영의 수준을 이야기한다고 할 때, 물질 세계와 영의 세계와의 의식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말한다. 동물도 의식이 있다. 개도 머리를 때리면 의식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동물과 사람의 의식의 가장 큰 차이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가이다. 사람에게는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seed potential이 있다. 영적 가능성이 있다. 동물은 없다
저는 경험을 많이 했다. 얘가 3살만 되면 머리를 알아본다. 친하지도 않은데, 막 와서 부댄다. 쿠웨이트에서 설교가 끝나고나면, 중국애들 자녀들이 있는데, 와서 붙고 뽀뽀하자고 한다. 시간을 많이 안 보내는데 말이다. 그런데 동물은 안 그렇다.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어도, 목사가 아무리 폼나게 해도, 짖고 깨문다. 사람은 3-4살만 되도 알아보는데, 동물은 20살되도 못 알아본다. 딱 자기에게 밥 주는 사람만 알아본다.
사람이 영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만 유일하게 영적 DNA가 있는 것이다. 사람 안에는 이런 것이 있어서 머리를 알아보는 본능이 있고, 훈련받으면, 영적 상승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만이 영적 상승을 한다. 영적 상승을 하지 못한채, 주인만 알아보고, 밥 밖에 모른다면 동물이다.
3) 의식의 평가 : 가치관 / 의미
이 사람이 정말 의식이 있는 사람이냐? 영적 수준이 있는 사람이냐? 성숙했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가치관이다. Value system, Significance, 어디서 의미를 찾고 가치를 찾느냐이다. 돈에서 의미를 찾으면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토라에 관심이 있고, 에케브를 깨닫기 위해 애를 쓰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삶을 살아내려고 하고, 말씀을 찾고, 자기 육을 때리고, 순종하는 훈련을 하는 그런 사람, 그게 가치관이다. 여러분 인생의 의미, 그것은 어디서 찾는가? 갈렙 형제는 어디서 찾는다고 하면, 말은 카르칼팍에서 찾는다고 할텐데, 한달만 살아보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본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뭔가?
물질 : 소유, 정체된 상태 vs 비물질 : 나눔, 흐름, 파동 = 에너지
의미를 찾는데, 이게 물질 중심이냐? 비물질 중심이냐? 정말 중요한 것은 나는 물질적인 사람이 아니야라고 한다 하더라도, 물질은 꼭 물질이라서가 아니라, 어딜 가서 소유되어서, 정체되는 것을 물질이라고 한다. 재능은 비물질이다. 이 국수 만드는 법은 아무한테도 안 가르쳐줄거야 라고 하면서, 나누지 않으면, 자기가 소유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물질이다. 그 상태가 흐르지 않고, 소유, 정체된 것이다. 비물질은 나눔이고, 흐름이고, 파동이다. 이것은 그냥 에너지만 나온다. 물질과 비물질은 사실은 보이느냐, 안 보이느냐, 측정할 수 있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소유된 것이냐, 나누어지는 것이냐?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누지 않고, 토라를 가지고 있어도 나만 가지고 아무한테도 나누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유된 것이고, 이것은 자기가 소유한 물질화 된 것이다.
우리는 오늘 물질의 비물질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아무리 소중한 것을 가져도, 내가 그것을 나누려하고, 누군가에게 주려고 하지 않으면, 다 개인 소유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 소유는 생명이 되지 못한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람의 생명은 그 사람의 소유에 있지 않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소유 상태로 있어서 흐르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으면, 이것은 다 개인에게 속해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내가 무엇을 의미있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 나의 의식의 수준을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육에, 영의 의식의 사람인가? 의식은 수준이 있는 것이다. 과학적인 차원에서는 그 사람 의식이 있어? 없어만 따지는데, 영의 세계에서는 그 사람의 의식 수준이 어디야? 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의식 수준이 어디인가? 에케브에서 르에, 지금 영으로 본다는 것은, 이 머리의 차원에 들어가있는 의식 수준을 가지고, 그 가치관과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레쉬가 있어야 야라쉬를 할 수 있다. 취할 수가 있다. 영을 모르면, 자기는 영으로 취했다고 하는데, 육으로 취한 것이다. 영과 상관이 없이, 자기가 영적인 사람이라고, 예수님 이름으로 취했다고 하지만, 이런 의식 수준을 가지고 한 것은 다 육의 것이다. 영의 의식 수준의 사람이 믿음으로 취한 것들이 여기에 속한 것이지, 다 물질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엄청나게 혼동하고 있다. 훈련 많이 해야한다. 훈련하지 않고 저절로 영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관리하고, 인도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때로는 가이드하고, 훈련하고, 도전하고, 격려하고, 때리고, 이 길을 가도록 해주는 것이 영의 아버지란 것이다.
2. נתן 노텐 <- 나탄 : 두다 / 주다
신11
26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29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
노텐은 나탄에서 왔다.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둔다고 했는데, 두다, 놓다, 주다. 선포하고, 이것은 노텐, 주다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성품 / 사역 / 완성의 규정
나탄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의 사역이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다. 뭘 주는가? 완성을 위한 규정을 주신다.
2) 나탄의 사역 -> 절대선 (@טוב)
하나님은 나탄 사역을 하시는데, 이 사역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최고 선으로 끌어드리는 것이다. 절대선인데, Receive to give의 의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탄 사역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은 이게 뭔지 알고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되는 모멘텀이 에케브에서 르에로 넘어가는 것이다. 굉장히 어렵기도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훈련을 계속 해서, 반복적으로 해야만 도달하는 것이다.
RTG 의식 -> 물질의 비물질화
나탄의 연습을 많이 하시는가? 하나님은 나탄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Receive to give의 사람으로 만드는데,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 하시는 일이, 물질의 비물질화라는 것이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물질의 영화라고 한다. Spiritualization. De-materialization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자체를 다 비물질화하는 것이다. 소유되어있는 어떤 것을 에너지로 바꿔주는 것이다.
케쎄프, 돈이다. 돈이 영적인 것인가, 물질적인 것인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가 이것이다. 돈을 가지고 비물질화해서, 관계를 만들어내서, 선대함의 도구로 흘려보내고, 그것을 Receive to give로 끊임없이 사용하는 지혜를 말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를 토브, RTG의 의식의 사람으로 바꿔주는 것인데, 그것을 De-materialization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물질로 갖고 있던 모든 물질에 속한 것들을 De-materialization 과정을 통해서, 돈 있는 사람은 주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그런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으면, 물질일 뿐이다. 그러면 그 의식은 육에 속한 의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탄의 사역을 통해서 물질을 비물질화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이 뭐냐면, As above, So below. 예수님 말씀으로 환원하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이야기이다. 땅의 모든 물질을 비물질화하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전형적 사건들이 돈의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 결혼 같은 것이다. 물질의 비물질화,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서 내가 몸뚱이라고 했던 것들, 내가 어떻게 물질적인 차원에서, 동물 차원에서, 육신의 차원에서 이야기했던 어떤 것들을 영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언약 결혼이다. 어느날 갑자기 정원이, 딜랴 나와보라고 하는 것이다. 언약 결혼 하신 분들 축복한다.
이것이 바로 RTG 훈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토브,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은, 원래 선하신데, 그것을 인지하는 의식을 가지게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식한적 있으신가? 내가 내 중심으로 살 때는 아무리 하나님이 선하다고 이야기해도, 와닿지 않는다. 다빈이를 보니 하나님의 선하심이 느껴지는가? 다빈이도 비물질화 과정을 통해야 한다. 이게 다 영화하는 과정이다.
나탄의 개념까지 이야기하고, 복과 저주를 이야기하고, 그 뒤에 하나님이 택하신 곳, 하마콤, 쉠쉠쉠 까지 이야기해야 하는데, 이 르에와 나탄을 이해한 상태로 복과 저주를 이해하면, 이 복과 저주를 금방 받아들일 수 있다. 나탄의 사역을 하시게되면, 가장 중요한 것이 보편과와 일반화이다.
@ אחד
a. 보편과 / 일반화
토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영의 세계의 진리를 알게된다는 것이다. 잘못 전달되면 진리는 보편적이라고 하는데, 토라의 진리는 모든 만물에게 작동되게 되어있는데, 사람들은 거꾸로 자기가 이해한 것을 보편화라고 한다. 그러나 자기는 이해하지 못한다. 영어로는 Universalization이다. 토라는 모든 원리에 적용할 수 있는 자연의 원리를 가르쳐준다. 의학, 예술에도, 뭔가 전문화된 사람들은 이게 그거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b. 전문화 / 특수화
나탄의 사역을 받은 사람들은 보편과 일반화의 과정과 전문화, 특수화의 과정을 같이 거친다. 모든 것이 토라의 원리라고 하면서, 각자 자기가 실제로 땅에서 뭘 한 그 사람들도, 이것이 다 토라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더 깊이 알게된다. 저는 의학을 공부할수록, 어쩌면 이것이 토라인가?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자기 전문 영역이 더 심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일반화, 보편과는 낮은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 다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라가 엔지니어링 하는 건축학에 적용될 수 있다. 법의 세계에, 예술 영역에 적용되는 것이다. 무슨 영역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보편화와 전문화의 과정을 다 거치게 되면서, 다양화, 입체화가 이루어진다
c. 다양화 / 입체화
르에 주간에 사람들이 이렇게 그 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을 다 풀어갈 수 있다. 그리고 입체화라는 것은 많은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입체적인 상황들을 다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게 나탄의 사역을 잘 받으면, RTG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양하고 입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여기에 있으면서, 우즈벡, 한국, 쿠웨이트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상황 파악을 하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다. 굉장히 하나님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d. 조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되는 과정이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이 여러가지를 다 포함해서 조화롭게 될 때, 이것을 통해서 완전한 에하드가 성취되어서, 사람들이 완전한 하나에 도달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로 통한다. 그 엔지니어는 굉장히 탁월한 영역인데, 점점 더 탁월할 수록, 토라를 잘 알게 되면, 자기의 전문 영역이 확 발전한다. 저도 의학적으로 더 전공을 한다면, 더 깊이 들어가서, 토라 포션 자체가 그 전문 과정을 통해서 더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가 의사 일은 그만둬서 그렇지, 한다면 할 사람이다.
에하드와 토브와 그대로 통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탄의 사역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주기 원하신다. 보라, 내가 그것을 두었다. 놨다. 이런 감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복도 놓고, 저주를 놓는다고 해서, 저주가 싫고, 복이 좋고, 이런 것이 아니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3. 복과 저주 : 나탄 사역의 최고 수준
이것은 나탄 사역의 최고봉이다. 영의 여정 이야기를 했는데, 나탄의 과정을 통해서 완성에 도달하는 규정을 신실하게 보여주신 과정이 에케브에서 르에로 넘어가는 아주 높은 최고의 수준이기에, 특별히 복과 저주를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이것을 가지고 복과 저주의 사역을 이해하려면, 아브라함 스탠다드이다.
1) 복과 저주 : 아브라함 표준, 아브라함과 연결
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의 표준에서 왔다. 나탄 사역을 통해서 복과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연결되는 것이다. 굉장한 것이다.
창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것을 어떻게 직역하겠는가? 아브라카, 내가 복을 주는데, 메브라케카, 너에게 준 나의 복을 통해서 너를 축복한다는 것이다.
ברכיך 브라케카 : 내가 너에게 준 나의 복 -> 축복 -> 긍정적 관계
너에게 준 이 복으로 축복한다는 뜻이다. 저주는 너를 저주한 사람이라고 되어있지만, 저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
קללה 클랄라 : 저주 -> ארר 아라르 : 저주 -> 부정적 관계
너에게 있는 클랄라카를 가지고 아아르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한다.
내가 너에게 준 축복,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긍정적인 관계의 교류,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다 에너지이다. 그러면 저주는 하나님과의 부정적 관계인 것이다. 하나님이 노텐 사역, 주시는데, 이것이 잘 되면 ברך 브라카, 영의 집이 적용되는 것이다. 영의 집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축복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축복만 받았는가? 아브라함의 표준이기에, 아브라함의 저주를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저주 : 멸시 / 무시 / 경시 <- 인간 : 느낌, 자이 중심, Self, 육
이 두 개는 다 하나님이 주셨다. 다 이유가 있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קללה 클랄라는 멸시란 뜻도 있다. 이것이 저주이다. 아브라함이 저지른 이 일이 인간의 레벨로 떨어졌을 때, 아브라함이 같이 저주받고 멸시받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부정적 관계의 산물이다. 아버지와 긍정적 관계, 무엇이 흐르는 관계, 나의 정체 상태, 나의 소유가 아니라, 흐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멸시로 나타난다.
ארר 아루르는 제한이다. 인생이 제한되버리는 것이다. 아주 심하게 제한되면 묶임을 받는다. 딱 제한된 것을 못 벗어난다. 공부를 해도 그 상태를 못 벗어난다. 아브라함의 멸시, 클랄라가 그 자녀들에게 그대로 작동된다. 이스마엘이 어떻게 멸시받았는지 그 스토리를 다 안다. 반대로 이삭이 어떻게 축복을 받았는지도 다 안다. 아브라함의 표준이다. 복과 저주는 아브라함의 표준으로 생각하면 다 알게 된다. 하나님과 긍정적인 관계인가, 부정적 관계인가? 그러면 사람들과도 그대로 연결된다. 모든 사람의 삶에 다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 그분과 긍정적인 순종, 사랑, 소통의 관계로 가게 되면, 모든 것들이 복으로 간다. 딱 하나만 넘어가면 되는데, 내 소유, 인간, 내 생각이다. 나라고 하는 Self, 육, 자기 중심, 내 느낌, 이것을 따라가면 무시되고, 멸시되고, 클랄라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이 두셨다. 내가 네 앞에 나탄, 두었다. 이것이 노텐 사역이다.
삶에서 복된 삶을 누리느냐, 저주의 삶을 누리느냐? 이것의 제일 키는 관계가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이다. 관계가 항상 꼬이는 사람이 있다. 형통하지 못하고, 발전되지 못하고, 꼬이고, 끊어지고, 상처주는 부정적 관계는 다 저주이다. 아브라함의 복의 사람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아브라함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연결되어서 긍정적으로 소통하고, 딱 자기 느낌, Self, 육신만 빼면 된다. 복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고, 아브라함 표준이지만 이것은 다 예수 표준으로 성취된다. 이것이 다 예수님 표준이라는 것을 다 안다. 이 표준의 클라이막스가 모리아 산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을 다 알고 있다.
2) 완성의 시점 : 요단을 건넌 후
신27
12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 산에 서고
13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 산에 서고
요단을 건넌 후에 성취된다. 아직은 성취를 볼 순 없다. 제가 확실하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것은 건너왔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의를 많이 기울인다.
ג+כ / 축복 -> גרזים 그리심산 : 동서 지파, עבר 아바르
시므온에서 시작해서, 레위, 유다, 잇사갈, 요셉, 베냐민 지파를 보면 동서 지파이다. 아바르의 사람들이다. 시므온 지파는 남쪽이지만, 여기에 끼었다. 이게 신비이다. 여러분 교회의 유명한 시므온은 동서였다는 희소식을 전한다. 김멜과 카프의 이야기이다.
그리짐은 아들의 적용의 핵심인데, 자기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적용을 통해서 건너간다. 의지가 열심인 사람들은, 이 동서 지파가 그리심산에서 축복한다는 것은, 의지, 김멜에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 카프를 통해서, 이것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이다. 쉽다.
קללה + ארר / 저주 : עיבל 에발산 : 남북 지파, עלה 올라
이것은 좀 어렵다. 남과 북이다. 르우벤, 갓, 아셀, 스불론, 단, 납달리이다. קלל 클랄라 + ארר 아라르, 칼라는 배우려는 소망만 가지고 가장 중요한 베트가 빠져있다. 이 사람들에게 오르, 빛이 임해야 한다. 높은 차원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빛을 받는 것을 말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만해서, 빛이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형이상학적으로 보이고, 형이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다 필요하다.
부정적인 관계가 아주 없을 수 없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안다. 금송아지, 가데스 바네아 사건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저주받을 일들인가? 그래서 하나님이 다 멸한다고 했다. 그런데 모세를 통해서 그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고, 이 교훈을 가지고, 그 교훈이 우리에게 빛이 되어서, 그 저주가 다 필요해서, 에밠 ㅏㄴ과 그리심산의 모든 것들이 마침내 여호수아 8장에서 성취된다
수8:33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관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 산 앞에, 절반은 에발 산 앞에 섰으니 이는 전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령한 대로 함이라
העי 하아이 : 자기가 봤던 비전이 능력으로 작동하는 것
성취는 요단을 건넌 후 아이성을 진멸한 후이다. 마지막까지 내 말이 맞잖아. 완전히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끝까지 남겨놓은 것들이 완전히 진멸되었을 때 에발산에 올라가는 것이다. 모든 관점에 빛이 임해서, 드디어 아이성은 진멸되어서 더 이상 어떤 저주도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30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에발 산에 한 제단을 쌓았으니
반은 에발산으로, 반은 그리심산으로 향하여, 여기서 지파 이야기는 빠진다. 그래서 사실 이 모든 지파들에 대한 많은 지식들이 축복과 저주로 작동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으로 다 성취된 것이 에베소서 4장이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온전한 사람이 된다. 장성한 분량이 된다. 충만함에 이른다. 이렇게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다 일반화되지만, 전문화된다. 하나님이 나탄 사역을 다 받으면, 굉장히 전문화되기 되어있다. 모든 것들을 입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기는 것이다.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복과 저주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안다. 피하기보다, 복과 저주가 작동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저주를 피할 방법은 없다. 그런데 처음에 저주 가운데 100% 살았다면, 이후 혼동의 길들을 통해서, 마침내 10%까지 떨어뜨리면, 저주가 100%에서 10%로 빠지고, 나머지가 순종, 소통의 삶, 하나님의 영의 집을 세우는 것으로 90%를 살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100% 저저주의 삶이었으나, 많이 빠졌다. 아직도 10%가 남아있다. 이것도 굉장히 잘 빠진 것이다. 여러분의 삶에는 긍정적인 복과 저주가 몇%씩 작동하는지 살펴보기 바란다. 복과 저주를 둔다. 나탄 사역이다.
신12
5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3) שׁמח 싸마흐 : 즐거워하다 = שׁם 쉠 + ח 헤이
복 주심으로. 복으로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하라. 싸마흐. 쉠, 놓다, 이름. 이 쉰과 멤의 사역이다. 형상의 진리가 생명이 된다. 이것이 기쁨으로 나타난다. 저는 예루살렘의 결혼식에서 이때처럼 기뻤던적이 없었다. 저는 싸마흐하면 이것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춤이 나오는데, 그 자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복과 저주 가운데서 하나님이 원하는 복의 열매는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성취이다.
행2
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얼마나 사람들이 기뻐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런 기쁨 가운데 사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8주년이다. 드디어 복의 열매를 볼 때가 왔다. 우리는 이 복이 흐름으로, 긍정적 관계들로, 하나님과, 형제들과 긍정적 관계가 충만하기 위해서, 생명으로 흘러넘쳐서, 그것으로 매일 춤추고 기뻐하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기쁨이 있는가? 복 주시려고 택하신 그곳, 이 기쁨이라는 것이 쉐키나,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증거이다. 그곳, 하마콤에는 하나님의 거하심이 있다. 하나님이 같이 임재하시는 증거로 우리에게 기쁨이 넘치고, 하나 더 하자면, 15절에서 나오는 것이, 그렇다면 슈미타의 규정이 15:1에 이어서 나온다.
4) שׁמת 슈미타 : 면제년
다 나누어주어라. 관대하게 하라. 아무도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말아라. 이것은 헤트에서 테트로 넘어가는 것이다. Receive to give의 의식 가운데서 사는 것이 면제년의 삶이다
행4: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게 슈미타의 모습이다. Devine communism이다. 사실 공산주의는 신적인 것인데, 인간들이 하니까 망하는 것이다. 신적 사람들이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다 나누는 것이다. 이게 쭉 나가는 것이다. 복의 채널을 통해서 이것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르에 주간인데, 얼마나 우리가 어떤 영의 의식 가운데 사느냐가 가장 기본 핵심이란 것이다. 하나님이 나탄 사역을 하시고, 그 규정을 받아서, 복과 저주, 그 중에서 복의 라인, 긍정적 라인, 어쩔 수 없이 부정적 라인으로 빠질 수 있으나, 얼른 복의 라인으로 돌이킨다. 슈브이다. 그러면 아까 보여준 영의 여정을 거쳐 에케브에서 르에로 넘어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 기도
우리가 영의 의식의 사람들, 높은 영의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부정적인 의식에 빠져있다면, 속히 긍정적인 영역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게 하소서. 우리는 실패할 수 있으나, 그 실패는 우리를 멸망 가운데로 가져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돌이킬 것입니다. 르에 주간에 그것을 Practice하 수 있게 하소서.
* 바다 목사님
르에 말씀을 듣다보니, 정말 여러가지 구원이 되는 말씀들도 많이 주셨다. 자기 중심과 자기 느낌이 무시와 경시받게되는 것의 원인임을 배웠다. 하영이가 고 목사님과 다니면 안될 것도 다 잘 되고, 고 목사님은 날씨의 요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진짜 되는 일이 없었는데, 그게 다 되게 되어있으니까, 저한테 그러는 것이다. 이게 다 고 목사님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새 하영이가 공부하러 다니는데, 그런 소리를 한다. 학원에 갔는데 왜 치대를 가려고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가라고 해서요라고 했더니, 요즘 애들 중에 이런 애들이 있냐고 하더라. 정말로 하영이는 공부하는 것을 싫어했고, 죽어도 치대 안 간다고 했고, 지금 공부해야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고, 고3때 잠깐 공부해서 심리학과 간다고 절대로 그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자기 느낌, 자기 중심, 자기 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에 하영이가 그 말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하영이의 삶은 무시받고, 경시받고, 멸시받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어느날 이 녀석이 아버지와 긍정적 관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자기가 치대에 가기로 하고, 그렇게 원하던 핸드폰도, 20살이 되기 전에는 안 사준댔는데, 고 아버지께 물어보라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뻔하다, 절대로 안된다고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물어봤더니, 내가 사줄게 하시는 것이다. 제가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우리 하영이가 이게 축복이구나. 정말 영적이구나. 아버지와의 긍정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의 느낌, 자기 중심을 가졌을 때는 무시받고, 멸시받는 삶으로 나갔는데, 아버지의 삶으로 나갔을 때, 아브라함 표준으로 나갔을 때 이 아이의 삶이 얼마나 놀랍게 축복의 삶이 되는지를 제가 보고 있다. 정말 이상해졌다. 공부를 하니까,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다고 이상한 소리를 한다. 이 르에 주간에 정말 아버지와 긍정적인 관계로 들어가시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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