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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삼은삼현과 태극궁궁
(강좌내용)
첫 강의를 시작하면서 느낀 것, 그리고 다음날 경주 용담(龍潭)으로 수운선생의 넋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 거듭 확인한 것은, 영남에서 동학사상의 실질적 복권은 아직도 아득하다는 사실이다.
아득함에도 그리고 어떠한 피곤함이 있더라도 동학의 실질적 복권을 위한 나의 중계자적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앞으로 동학의 실질적 복권은 종교와는 다른 독특함으로, 그럼에도 보편적인 새 문화의 대(大) 파도로 다가올 것이다.
그 과정은 여러사상들과의 조우와 융합, 그리고 젊은이들의 훌륭한 공부와 힘찬 실천을 통해 현실화 될 것이다.
이를 동학의 운세를 말한 삼은삼현(三隱三顯)을 통해 확인해보자.
삼은삼현. ‘세 번 숨고 세 번 드러난다’는 뜻의 이말은 동학역사의 운명이라고도 한다.
생각컨대 운명이 아니라 도리어 전개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세 번 숨었다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다시 드러나는 때는 완연히 환골탈태, 그 모습과 자취가 전과는 판이하게 달리 나타날 것이다.
동학 역사의 전개를 한번 살펴보자.
1864년 최수운(崔水雲)의 처형 직후 동학당은 풍비박산,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옥중에서 수운이 최해월(崔海月)에게 내린 지시가 그 시작이다.
“나는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터이니
너는 높이 날고 멀리 도망치라.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이것이 ‘첫번째 숨음’이다.
그러면 ‘첫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거의 40년에 가까운 해월의 지하조직 활동으로 전국화, 대규모화한 동학당이 포접(包接)과 육임제(六任制)로 생동하는 체제를 갖춘 후 삼례(參禮)집회, 보은(報恩)집회, 대한문복합상소(大韓門伏閤上疏)등 일련의 공개적, 합법적인 대중운동을 거친 끝에 마침내는 1894년 봄, 갑오무장혁명으로 천하를 뒤집고 집강소(執綱所)를 통해서 본격적인 대 정치변혁을 실천한 것이 그것이다.
‘두번째 숨음’은 무엇인가?
그 갑오년 겨울 공주 우금치와 태인 등지에서 치명적인 패전에 이어 전국에서 30만 내지 50만이 도륙당하고 그 뒤 세 해가 지나 해월이 체포, 처형되면서 동학은 완전히 지하로 잠복하고 만다.
그렇다면 ‘두번째 드러남’은 무엇인가?
물론 이 두 번째 숨음과 두 번째 드러남의 시기에는 수십개 동학 분파의 확산과 각개약진이 있고 해월 최시형의 장자 최동희(崔東熙)의 고려혁명당이나 강증산(姜甑山)의 정세개벽(靖世開闢)운동, 김단야(金丹冶)의 형평사(衡平社)운동 등이 있다. 그리고 의암(義菴 孫秉熙)의 법통에 대한 의혹과 친일개화 경향에 대한 비판이 복잡하게 저류에 깔려 있다.
그러나 대세(大勢)는 의연히 의암 노선에 있었으니 그것이 갑진개혁(甲辰改革), 천도교 창건, 신문화운동과 농민사(農民社) 및 부인회(婦人會) 등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변혁 운동, 그리고 저 3·1 운동과 그 이후의 천도교 청우당(靑友黨) 및 신간회(新幹會)운동, 지하 유격조직인 오심당(吾心黨) 활동에 이은 해방 직후의 삼일재현 단정반대운동(三一再現單政反對運動:단일정부에 의한 정부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두번째 드러남’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단정 반대운동의 실패로 인한 대숙청, 6.25동란 당시 남한에서의 친공 부역에 대한(누명을 덧씌었다는 사실이 많이 존재함) 국군수복대의 대학살로 동학(천도교)는 남북한 똑같이 겨우 뒷골목의 가난한 간판 하나씩만 남기고는 거의 완전에 가까울 만큼 해체되어버린다. 그러고는 스산한 적막강산이다.
이른바 ‘세번째 숨음’이다.
반세기(半世紀)동안 어둠이 지속되었다.
죽었는가?.
동학은 이제 완전히 자기의 역사적 생명을 종결하고 말았는가?.
그래서 한낱 민족사의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인가?.
그러나 수운 자신이 ‘우리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앞으로 백여 년이 지난 뒤에야 온다’고 했고 ‘삼은삼현’의 비밀은 도리어 해월 자신의 말씀이라는 설까지도 있다.
수운 이후 140여 년이 흘렀다. ‘삼은’ 이후 55년 여가 지났다.
(현재는 160여년, 세 번째 숨음후 70여년이 지났다)
동학 (천도교)에 대한 완전한 이해, 즉 ‘만사지(萬事知)’에 터한 ‘삼현’이 실현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있고 없음을 가리기 전에 동학이 지닌 진리의 새 원형(原形,archetype)에 대한 요구가 동아시아보다 오히려 유럽과 아메리카의 지식계에서 ‘이스트 터닝(東風)’이라 부르는, 일종의 예감과 갈증의 토네이도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현실에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얘기다.
국내에서는 목하 담론부재의 황량한 현실에서 지식인의 방황과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의 갈증에 대한 아주 조그마한, 극소수 청장년층의 대안 모색의 한 담론으로 동학이 토론되고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저한 ‘삼은’에 이은 결정적 ‘삼현’이 되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다. 만약 참으로 ‘삼현’이 온다면 그것은 왜, 어떻게, 어떤 형태로, 누구에 의해서 올 것인가?
그 특징적 사안들을 열한 개 정도의 예감 영역의 항목으로 약술해볼까 한다.
하나.
동학 진리의 특징은 넓으나 간략한 곳에 있다(吾道博而約). 동학사상은 앞뒤 두 개의 주문(呪文)과 하나의 부적에 요약된다. 앞 주문인 강령주문(降靈呪文)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에 이르러 나에게 크게 내리시기를 바라옵니다(至氣今至願爲大降)’이다.
수운은 이때의 ‘지극한 기운(至氣)’을 ‘극(極)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混元之一氣)’이라 해설했다.
‘극에 이르름’이란 우주 진화의 극치, 곧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로서 동학 용어로는 ‘지화점(至化點)’이겠다. 그리고 ‘한 기운(一氣)’이란 주역(周易)에서 우주의 체계적 질서를 상징하는 ‘태극(太極)’의 다른 말이다.
그러매 ‘혼돈한 근원의 한 기운’이란 ‘혼돈의 질서’를 말하니 바로 형용모순(形容矛盾)과 반대일치(反對一致)의 역설로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른바 ‘카오스모스(chaosmos)'이다. 더욱이 ‘극에 이르름’이라 했으니 동아시아 성리학의 최고 난제인 이(理)와 기(氣)의 회통이라는 커다란 차원변화를 뜻하기도 한다.
유럽과 아메리카 지성계가 보는 인간과 지구와 주변 우주의 현실은 한마디로 ‘대혼돈(big chaos)'이다. 이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은 탁월한 통합적 과학뿐인데 이 과학을 촉발할 수 있는 ‘혼돈 나름의 질서’의 인문학적 원형과 기준과 담론이 유럽과 아메리카에는 없다.
그들이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있는 현상, 즉 ‘이스트 터닝’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중국에 있는 것도 아니다. 유럽도 중국도 그것이 있는 듯하지만 없다. 중국의 경우, 그것의 가능성들을 산 채로 죽였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그것이 없는 듯하지만 살아 있다.
‘지극한 기운’, 즉 ‘지기(至氣)’, ‘극에 도달한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混元之一氣)’. 이것이다. 바로 ‘혼돈의 질서’다.
그것이 살아 있음을 어찌 아는가?. 2002년 붉은 악마의 ‘대~한민국’이라는 ‘엇박’, ‘혼돈박’을 보고서 안다. 그것은 곧 지금 오고 있는 ‘쓰나미 시대’, ‘온난화’와 ‘생태계 오염’과 ‘이산화탄소’의 시대를 관통하게 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새 지구문화의 기준, ‘패러다임’인 것이다. 당연히 드러나지 않겠는가!
둘.
두 번째 주문인 본주문(本呪文)의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는 세계 지성과 과학계가 갈구하고 있는 새로운 인문학적 담론의 뼈대다. 즉, ‘디스커스(discourse)’다. 이 주문이 바로 ‘모심’과 ‘살림’과 ‘생명학·우주생명학’의 연찬 및 창조와 실천의 전 과정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주문 열석 자는 그 의미체계로서는 ‘시천주 조화정 만사지’의 삼단계이지만 위상구조로서는 ‘영세불망’까지 더해서 사위체(四位體)다.
이것은 ‘천부경(天符經)’의 ‘셋과 넷이 고리를 이룬다(三四成環)’의 비밀에 이어지는 오묘한 생명의 이치요 위상과 활동 사이의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으로서, 유불선 및 그리스도교, 모슬렘과 자기조직화의 진화론,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 불확정성의 원리와 관찰자 참여 우주론, 심리물리학과 동아시아의 역학(易學)등을 통합한다.
만약 ‘삼은삼현’이 단순한 불행이나 운명 정도가 아니라 동학사상의 역사적 전개의 필연이요 법칙이라고 할 경우, 주문의 의미체계 및 위상구조와 그 논리적 연관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첫번째 드러남’이 최해월류의 ‘모심(侍天主)사상 시대’라 보고 ‘두번째 드러남’이 손의암류의 ‘살림(造化定)사상 시대’라 한다면, 이제부터 오고 있는 ‘세번째 드러남’은 당연히 ‘생명학·우주생명학(萬事知)사상 시대’가 될 것이다.
앞의 글을 이어 세번째 드러남의 예견을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셋.
혼돈적 질서의 과학은 생명학·우주생명학의 담론에 의해 촉발되고 그 담론은 ‘극에 이른 혼돈한 근원의 우주질서’, 즉 ‘혼돈의 질서’라는 기준에 의해 이끌린다면, 그 기준은 결국 인류문명사 전체의 대전환점인 오늘에서 인류 전체와 생명·비생명, 인격·비인격을 모두 포함한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을 동반하는 기준일 것이다.
동학에 바로 그 원형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그것도 살아 있다. 1860년 경주 용담에서 최수운이 받은 계시의 첫 번째가 바로 그 원형에 해당하는 한울님의 부적(靈符)이다. 그 모양은 태극(太極)이고 또 그 모양은 궁궁(弓弓)이니 ‘태극궁궁’이 곧 후천개벽 시대 새 삶과 새 세계의 새 원형인 것이다. ‘태극궁궁’은 무엇인가? 태극은 선천시대의 생명학·우주생명학인 주역의 질서 정연한 코스몰로지의 상징이고 궁궁은 후천시대의 혼돈한 삶의 비결인 ‘정감록’의 암호다. 후천개벽은 후천에 의한 선천의 섬멸적 파괴가 아니라 후천을 중심으로 해체·재구성되는 선천과 후천 사이의 공존과 균형, 후천 쪽으로 약간 더 중심이 기우는(時中원리) 역철학, 음양원리의 핵심이다. ‘기우뚱한 균형’인 것이다.
따라서 ‘태극궁궁’은 이미 19세기에 세계화한 후천개벽 시대를 살아갈 민중의 새 삶과 새 세계의 새로운 원형이 되는 것이다.
넷.
20년 전 강원도 원주에서 시작된 생명운동, 유기농생협, 반공해 환경운동, 생태생명문화운동 등이 모두 동학사상, 특히 그 중에서도 최해월 사상의 현대적 해석과 조직적 실천을 토대로 했다. 원주에서 비롯된 생명운동은 이후 계속적으로 확충되면서 종교, 과학, 시민, 빈민, 예술, 그 중에서도 유독 시문학에서 뚜렷한 성장을 보이며 오늘에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 생명과 평화의 새 문명을 건설하는 큰 문화 운동으로까지 비약하고 있다. 이것은 ‘세번째 드러남’과 연관이 없는 것인가?
다섯.
오늘날 전 인류와 함께 동아시아, 특히 한민족에게 요구되는 것은 새롭고 평화적인 문화대혁명이고 동아시아 대문예 부흥운동으로서 정치와 경제에 앞서 문화적인 대전환이다. 동학은 바로 이 대전환의 기점(起點)이다. 우리에게 동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문화혁명으로, 후천개벽은 신화가 아니라 문화과학으로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즉 ‘상상력’과 ‘미학’ 방면의 대규모 사건이 된 것이다.
여섯.
동학은 기초예술과 문화산업 사이에, 문화사업의 ‘경제력(상품가치)과 질(미학적 품질)’사이의 ‘긴장’에 대한 웅숭깊은 대답으로서 검토되기 시작한다. 동학은 붉은 악마, 촛불에서 한류(韓流)열풍에 이르는 눈부신 비약을 설명하고 다시금 그 개벽적 에너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
김용옥의 ‘도올심득동경대전’역시 신세대 속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데에 기여했다고 한다. ‘세번째 드러남’이 붉은 악마, 촛불과 한류에 연계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전 인구의 79%를 차지하는 10대, 20대, 30대 초반 신세대 남녀의 이른바 붉은 악마 현상, 즉 ‘엇박’, ‘치우’, ‘태극기’ 문화의 새로운 비약, 새로운 차원 변화의 근거이자 동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다. 여기엔 필연코 ‘자재연원(自在淵源)’, 즉 ‘가르침의 샘물이 내 안에 있다’, 또는 ‘자기 가르침을 자기가 배운다’는 동학의 진리대로 붉은 악마 세대 자신이 자신들이 내세우고 약동했던 ‘엇박’, ‘치우’, ‘태극기’의 문화적 원형, 역사적 기준, 철학적 담론을 토론하고 공부해야만 한다.
‘세번째 드러남’의 주체 문제는 바로 교육혁명에 있는 것이다. 이것 없이 우리나라의 교육, 우리나라의 미래는 없다.
여덟.
‘혼돈의 질서’, ‘지극한 기운’, ‘궁궁태극’, ‘모심과 살림’, ‘생명학·우주생명학’ 등 모든 사상 안에는 세 가지 원리가 숨어 있다. 민중성, 여성성, 영성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는 ‘세번째 드러남’의 필수조건이다. 그 가운데서도 여성성, 모성, 살림의 능력, 모심의 능력은 으뜸가는 원칙이요, 그 중심이다. 새 삶과 새 세계, 새 문화와 새 문명 창조의 주체 중의 주체는 바로 여성이요, 어머니요, 할머니인 것이니, ‘세번째 드러남은’은 어쩌면 원시와 고대를 관통했던 전통 신화의 창조적 회복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다름아닌 ‘궁궁(弓弓)’인 것이다. 그래서 ‘궁궁태극’이라고 말한다.
아홉.
19세기에 식별되지 않았던 지구와 주변 우주의 후천개벽적 사태들이 이제는 거의 일상화되고 있다. 인간의 내면적 황폐와 불안,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에 따른 빈·부국 사이의 격차 심화와 시장 불안, 전 지구 생태계의 오염, 테러와 전쟁 이외에 온난화, 기상이변, 지각의 대변동, 북극 해체, 빙산과 그린랜드의 해빙, 이산화탄소의 과잉배출, 황사, 남반구 해수면 상승과 장기적 폭염, 저지대 곡창의 침수와 식량난의 도래, 지구 자전축 및 대륙·해양 지각판들의 충돌, ‘쓰나미’에 이은 폭설, 혹한, 먹이사슬 파괴 등은 문자 그대로 후천개벽이다. 개벽의 인식과 대응으로서 ‘세번째 드러남’은 단순한 희망사항이 아닌 필연적 대세인듯 하다.
열.
집단과 종(種)선행론으로 기울었던 다윈 이후 자연선택의 진화론이 타파되고 자기 선택과 자유의 진화론,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이 상승하면서 집단주의, 공산주위, 파시즘, 공동체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개체, 개별의 정체성,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는 분권(分權)적 융합, 퓨전’의 ‘내부공생(內部共生)론’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적 사상 및 역사인 ‘풍류’와 ‘화백’과 ‘신시’ 등에서 관철 되었던 ‘호혜(互惠)’와 기존의 ‘교환’시장이 이중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차원의 ‘재분배(再分配)’를 실현하는 ‘품앗이’와 ‘계(契)’의 전통, 그 ‘개체적 융합’의 전통을 새롭게 실현해야 할 것이다.
동학의 ‘포(包)’와 ‘접(接)’, ‘육임제(六壬制)’등은 모두 이 같은 고대 전통의 부활이며 실천이었다. 사회경제사적으로, 경제인류학적으로 신시는 곧 호혜요, 계이며 그 정치적 관철양식이 화백의 직접민주주의, 전원일치제이고 거기에 따르는 생명과 평화의 문화, 생명학·우주생명학이 곧 풍류였다. 그 풍류의 근대적 부흥이 동학이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할 동아시아에서 이것이야말로 동학의 참다운 ‘세번째 드러남’이 아니겠는가!
열하나.
자기조직화의 진화론인 동학은 한발 더 나아가 창조적 진화론을 관철했다. 왜 그러한가?
창조론과 진화론 결합의 조건은 ‘신(神)의 규정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론을 모색하는 과학철학 및 과학신학자들은 신의 존재 규정과 신의 본질 설정으로 가득 찬 기독교(모슬렘 역시 마찬가지)신학 텍스트로부터 유럽신학과 철학, 과학이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바깥으로 추방했던 ‘무(無)’, ‘공(空)’, ‘허(虛)’, ‘비존재’, ‘혼돈’, ‘정열’, ‘무의미’ 등을 다시 끌어들여 타협하고 있다. 신이 공허이든가, 배고픈 영혼이나 굶주린 비움이 아니라면, 혼돈이면서 탈혼돈인 모순이 아니라면 창조와 진화는 서로 만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복수하는 자’, ‘저주하는 자’, ‘사랑하는 자’ 등등 무수한 명함을 가진, 그야말로 존재 그 자체인 신은 결코 생성도 창조도 혼돈적 질서에도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라! 최수운은 두 번째의 본주문 해설에서 가장 중요한 ‘하늘’, 즉‘천(天)’을 한마디 해석도 없이 ‘모심’에서 ‘님’으로 그냥 넘어가고 만다. ‘신’과 ‘하늘’은 그야말로 무요, 공이요, 허이며 자유요, 빈터요, 가능성이요, 혼돈이며, 비존재이니 그러므로 도리어 생성이요, 변화요, 과정인 것이다. 바로 ‘없음’이니 곧 ‘살아 있음’이다.
이 모든 ‘세번째 드러남’의 특징들을 미학 쪽에서 정리해보자. 그것은 곧 ‘흥비(興比)의 미학’이니 흥의 창조력을 중심으로 교술과 비유를 배합해 ‘비판적 감동(탈춤, 판소리, 진경산수, 속화, 민화, 민요의 산조, 시나위, 허튼소리, 허튼 춤 등 한류의 전통적 원리)’에로 이끄는 미학 원리다. ‘세번째 드러남’은 다분히 미학의 얼굴을 하고 올 것이다. 한(恨)을 동반한 흥(興)의 미학, 한을 흰 그늘로 극복하고 흥이 중심이 된, 즉 흥비(興比)의 미학. 왜냐하면 문화, 감성, 상상력, 새 세대가 거대한 차원변화, 후천개벽의 특징적 주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한류다. ‘한류’의 저 앞날에 드디어 ‘세번째 드러남’인 ‘삼은삼현’의 대문예부흥, 문화대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때 아마도 남한의 ‘한(恨)을 밑에 거느린 흥’의 미학과 북한의 ‘흥취(興趣)론’이 만나는 민족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만사지’요, 그것이 생명의 차원변화 즉, ‘지화(至化)’, ‘만 년의 진화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는’ 대개벽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 또 하나의 고구려를, 새 세계를 잉태하고 출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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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올려드리는 김지하 선생의 글은 몇번을 읽고 깊게 헤아려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의 삶의 개벽을 통하여 그 기운이 한울님의 운행하시는 운에 합하여 보다 더 큰 조화로운 한울세상, 다시 개벽의 세상이 열려 나갈 것입니다.
국민을 위하여 봉사하고자 하는 선량한 일꾼들이 선출되었습니다. 이제 차분히 결과를 받아들이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을 더욱 더 멋진 삶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정성을 다하시는 행복한 날 되소서~!
포덕167년 6월 4일 부암 심고 010.2664.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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