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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16국사
제1세 조사 보조 지눌
보조국사 지눌스님은 53년(1158-1210)의 길지 않은 생애를 살고 갔지만, 그의 빛나는 삶과 뛰어난 가르침은 고려 불교는 물론 현재의 한국 불교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은 먼 미래에까지 인류의 사상으로 계승 발전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840년 전인 고려 중엽 제18대 의종 12년(1158) 황해도 서흥군에서 당시 국학(國學-지금의 대학 및 대학원과 같은 기관으로 신라 및 고려에서 쓰던 이름. 조선시대의 성균관)의 학정(學正-국학 및 성균관 안에서 종사하는 정 8품의 벼슬)인 정광우를 아버지로 부인 조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으나,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효험이 없었다. 부친은 부처님 전에 맹서 하기를 "병만 나으면 자식을 부처님께 바치겠으니, 병만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이후 아이의 병은 깨끗이 나았고, 이리하여 아이는 나이 겨우 여덟살 되던 해에 부모가 정해준 대로 조계(曹溪-六祖 혜능을 지칭)의 먼 제자인 종휘(宗暉) 선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으니, 그가 바로 후에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칭송 받고 있는 목우자(牧牛子)지눌(知訥)스님이다.
스님에게 있어서 스승은 자기가 배우지 못한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모두가 스승이었으며, 올바른 것을 교시해 주는 이는 모두가 그의 은사였다. 스님은 당시 불교사회의 종파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오직 바른 진리를 찾아 자유롭게 배웠다. 당시 불교계는 의식(儀式)의 극대화로 말미암은 국가재정의 궁핍, 승려의 타락상 등이 표면화 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불교의 진면목에서 어긋나 각 파는 명리를 선양하기에 급급하였으며, 특히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극심했다. 이에 스님은 선종과 교종의 가르침을 두루 섭렵하여 그 합일점과 조화점을 모색하였는데, 자유로웠던 배움의 자세가 이러한 작업과 신념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25세(1182)에 당시 출세의 관문이기도 한 승과(僧科)에 합격하였다. 이 때 스님은 생의 일대 전환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즉 명리를 떠나 산림에 은둔하여 정(定)과 혜(慧)를 닦는 이른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굳게 약속한 것으로, 승과합격 직후 당시 수도인 개성의 보제사 담선법회(普濟寺 談禪法會)에 참석한 후 동료 십여 명과 더불어 굳은 결의를 하게된다.
"이 모임이 파하거든 우리는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깃들어, 정혜를 균등히 닦는 것으로 업을 삼는다. 부지런히 예배하고 경전을 독송하며, 운력에 이르러서도 각각 그 소임을 따라 경영하여, 이같이 인연을 따라 심성을 수양하면서 평생을 구속 없이 지내 멀리 진인달사(眞人達士)의 높은 수행을 따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그러나 보제사 이후 각자의 득실에 이끌려 사방으로 흩어지고, 스님은 개인적인 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전라도 창평현(나주) 청원사에서 어느 날 육조단경(六祖壇經)은 보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기는 것이므로, 비록 육근(六根)이 견문각지(見聞覺知)하더라도, 그 참된 성품은 온갖 경계에 물들지 않고 항상 자재하다> 라는 구절에 이르러 일찍이 겪지 못했던 것을 체험하고 일어나 법당 안을 돌며 기뻐하였다. 이후 더욱 굳건한 마음으로 구도에 전념하였다.
그 후 스님은 28세(1185)되던 해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서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하게 된다. 선승으로서 교학의 총서인 대장경을 열람하게 된 동기는 매우 특이하다. 당시는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과, 부처님 말씀을 따르려는 교종이 서로 대립되어, 교종에서는 부처님이 말씀한 대장경이 참된 불법이라고 하고, 선종에서는 부처님이 교밖에 따로 마음을 전한 것(敎外別傳)이 선이 되었다 하여, 서로 그 우열을 다투는 것이 마치 적을 대하는 것 같이 하였다. 스님은 이에 대하여 '크게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고, 대장경을 열람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야경(般若經)과 원각경(圓覺經)과 능엄경(楞嚴經)과 기신론(起信論)등 많은 경론을 열람하게 되는데, 그 귀결 처는 한결같이 마음의 본 바탕이 어떻다는 것, 마음을 밝히라는 것, 본성을 되찾으라는 것 등이며, 그것이 바로 선종에서 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고, 화엄경을 열람하다가 화엄경 출현품에 '한 티끌이 대천세계를 머금었다'는 비유와 그 뒤의 '여래의 지혜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 마음에 갖추어져 있지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구절을 읽고 문득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이것이 바로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성불의 법임을 알게 되었다. 그 후(30세경) 당나라 이통현장자(李通玄長者)가 지은 화엄론의 십신초위(十信初位)를 해석하는 각수보살에 대한 설명, 즉 '범부가 믿음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자기가 범부임만을 인정하고,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을 읽고,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이어서 '모든 범부의 분별하는 마음이, 그대로 부동지불(不動智佛)이다.'라는 논지에서 확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서,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체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리를 실증하고 그 뒤에 선교회통(禪敎會通), 정혜쌍수(定慧雙修)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우게 됨은 물론, 나중에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의 기초가 되었으니, 이는 보조국사의 크나큰 역사적 대과업으로 인도적 교와 중국적 선을 회통하여 한국적 불교를 표방한 일대 혁명이었다.
이러한 지도이념에 의하여 스님의 나이 31세 (1188) 되던 해 봄 대구 팔공산 거조사에서 옛 동지 3,4인으로 정혜사 결성, 2년후인 33세 때에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문>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스님은 그곳 팔공산 거조사에서 만 8년을 한결같이 수행하여 수백 명의 대중이 모여들자, 잠시 홀로 휴양하기 위하여 명종 27년(1197) 스님의 나이 40세 되던 해, 시자 2,3인만 데리고 팔공산을 떠나 지리산의 상무주암에 거하시게 되는데, 이때 내관(內觀)에 힘쓰시던 중, 대혜어록(大慧語錄)의 '선이란 조용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데에도 있지 않다. 그렇다고 조용한 곳과 시끄러운 곳, 일상생활 가운데나 사색하고 따지는 것을 떠나서 참선하려 해서는 더욱 안 된다' 라는 대목을 보고 불조의 현묘한 뜻에 계합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수심결>과 <간화결의론>을 짓게 된다.
그때 팔공산 거조사는 도량이 협소한데, 대중은 많아지므로 새 도량을 찾아, 1197년 제자를 보내어 당시 신라의 고찰 송광산 길상사를 확장 중건하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3년 후 43세 되는 1200년 길상사에 오시어 낮에는 대혜어록을 강의하시고, 밤에는 대중과 함께 정진하시니, 이로부터 진정한 정혜결사가 본격화되었다. 이 때에 산 이름은 조계산, 절 이름은 정혜사로 바꾸었다가, 서기 1205년 이웃에 같은 이름의 절인 정혜사가 있는 관계로 절 이름을 다시 수선사로 바꾸게 된다. 이때 나라에서는 왕이 직접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社)>라고 하는 어필(御筆) 액자를 보내오게 된다.
스님의 나이 45세에 <진심직설(眞心直說)>, 48세에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그리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는 스님의 나이 52세 때에 공포된다. 수선사로 도량을 옮긴 후 11년간을 한결같이 부처님의 계율에 의거하여 대중과 함께 안거하고 선정을 닦으며, 두타행(頭陀行-검소한생활)을 하였던 스님은 이미 대립된 견해, 오해에 의한 편견을 극복한 성자다운 면모가 역력하였다.
스님의 비문에 의하면, 사방의 승속들이 그 명성을 듣고 모두 모여들었는데, 심지어는 명예도 벼슬도 처자까지도 버리고, 삭발염의하여 친구까지 권하여 함께 오는 이도 있었으며,왕공 사녀들로서 수선사에 들어와 이름을 적는 이가 수백인에 달하였다.
스님의 비문에 스님을 평하기를, 국사는 오직 도만을 위하고, 남의 칭찬이나 비방에는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다. 또 그의 성품은 인자하고 너그러우셔서, 후배를 지도할 때에, 성질이 패류한 사람이 있어 그 뜻을 거슬리더라도, 그를 가엾이 여겨 껴잡아 주고, 그칠 줄 모르는 정리는 사랑스런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같았다. 스님은 또 위의를 잘 거두어 항상 우행호시(牛行虎視-소걸음과 호랑이 눈빛)로 지내시면서, 힘드는 일과 운력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대중에 앞서 솔선하였다.
스님은 후학을 지도함에 항상 금강경을 독송하도록 권하였고, 뜻을 풀이할 때는 육조단경을 의지하였으며, 이치를 밝힐 때는 이통현의 <화엄론>과 <대혜어록> 으로 소의(所依)를 삼았으며, 수행의 체계로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정혜쌍수),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돈오점수),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화두참구)의 세 가지 문을 세워 가르치셨다.
그 후 스님은 희종 6년(1210) 2월에 재(齋)를 베풀어 어머니를 천도하였으며, 그 해 3월 20일에 미질 (微疾)을 보이시더니, 27일에 이르러 목욕하고 새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법고를 울려 대중을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 향을 사루고 예불한 뒤에 법상에 오르시어 평일처럼 설법하시되 '이 눈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이 코도 이 혀도 그렇다. 이제 이 山僧의 목숨을 대중에게 맡기노니, 찢든지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 이때 한 스님이 질문하기를 '옛날의 유마거사가 앓은 모습을 보인 것이, 오늘 스님께서 보이신 모습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 이에 '너는 같고 다른 것만 배웠는가?' 주장자를 세번 치시고 '천만가지가 다 여기에 있다.' 이 말씀을 끝으로 앉으신 채로 고요히 숨을 거두시니, 이때가 세수 53세, 법납 46세이었으며, 다비를 마치고 사리를 수습하니 큰 것은 30과요, 작은 것은 무수였으며,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왕은 스님이 입적했다는 소식을 듣고 못내 슬퍼하며, 시호를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라 하고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였다.
남기신 저서로는,
『상당록(上堂錄)』 1권,
『법어가송(法語歌頌)』 1권,
『선각명(禪覺銘)』 1권이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며,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 1권,
『수심결(修心訣)』 1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1권,
『간화결의론(看話訣疑論)』 1권,
『진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법집별행록절요 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 1권 등이 있다.
제2세 진각혜심(慧諶:1178∼1234).
혜심의 생애는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조계산제이세(曹溪山第二世) 고단속사주지(故斷俗寺住持) 수선사주(修禪社主) 증시진각국사비명(贈諡眞覺國師碑銘)> 및 그의 어록 등을 통해 잘 나타난다. 그의 휘는 혜심(慧諶), 자는 영을(永乙), 자호는 무의자(無衣子)로서 속성은 최씨, 이름은 식(寔), 나주 화순현 사람이다. 아버지는 향공진사(鄕貢進士) 완(琬)이며 어머니는 배씨(裵氏)로, 명종 8년(1178)에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강권에 의해 유학(儒學)을 공부하였으나 그는 항상 불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후 24세 때인 신종 4년(120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어서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병으로 인해 고향에 돌아왔다. 이듬해인 25세 때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곧 조계산 수선사의 지눌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그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희종 원년(1205) 지눌이 억보산 백운암에 있을 때 혜심은 스승을 찾아가 뵈었다. 지눌은 다 헤진 짚신을 가리키며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있는가?"하고 물었다. 이에 혜심은 "왜 그때 보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장차 법을 전할 인물을 찾고 있던 지눌은 혜심의 이런 대답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또 어느날 조주의 구자무불성화두(狗子無佛性話頭)와 대혜종고의 십종병(十種病)을 들어 대중에게 물음에, 오직 혜심이 홀로 만족하게 대답하였다. 이에 지눌은 방장에 돌아가 그를 불러 말하였다. "나는 이제 그대를 얻었으니 죽어도 한이 없네. 그대는 불법을 임무로 삼아 본래의 서원을 바꾸지 말게." 혜심은 이렇게 지누의 심인을 전해받았다. 희종 4년(1208) 지눌은 혜심에게 수선사를 물려주고 규봉산으로 돌아가 쉬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수선사 법석(法席)을 이어줄 것을 권하였으나, 혜심은 굳게 사양하고 지리산 단속사에 숨어 수년간 수선정구하였다. 그러던 중 희종 6년(1210) 지눌이 입적하자 문도들의 주달(奏達)과 강종의 칙명에 따라 마지 못해 수선사 제2세 법주가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후 그는 조정의 지원을 받아 수선사를 확장하고 선사의 선풍을 더욱 크게 진작시켜 나갔다. 이 시기에 왕을 위시하여 공경귀척, 지방수령 등을 포함한 승속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덕을 사모하여 멀리서 스승의 예로 받들거나 친히 나아가 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강종과 그의 측근관료, 그리고 진양공(晋陽公) 최우(崔瑀) 및 그의 좌주였던 최홍윤(崔弘胤) 등이 있었고, 이 외에도 수많은 도속문하들이 있다. 혜심의 문하에는 뛰어난 선납(禪衲)들도 많았지만 이처럼 속세의 문하가 자못 성했는데, 그 중에는 당시 무신집권자들의 가족과 무신정권에 참여했던 수많은 문무관료들이 포함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혜심은 당시의 중앙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자신도 최씨정권에 대하여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것 같다.
곧 그가 최우에게 보낸 서장 중에는 꿈에 가탁하여 최충헌을 상근기라 칭하고 최씨정권의 시정을 찬양하고 있다. 또 최우를 위해 축수도장(祝壽道場)을 베풀기도 하였다. 한편 최우도 혜심을 추앙하여 수차례에 걸쳐 서울로 맞이하려 했으나 혜심은 끝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교분은 더욱 두터워져 최우는 혜심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차, 향, 약, 법복 등을 때맞추어 보냈다. 또 이런 친분 속에서 최우는 뒷날 그의 두 아들을 혜심에게 보내어 머리를 깎게 하기도 하였다. 혜심은 고종 원년(1231)에 선사(禪師)를 제수받고 다시 고종3년(1216)에는 대선사로 가자(加資)되었다. 그의 비명에는 "승과를 거치지 아니하고 승직에 오른 것은 사(師)가 처음이었다"고 적혀 있다. 혜심이 이렇게 대선사에 임명되고 있는 것도 최우의 배려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최씨정권과 두터운 교분과 적극적인 지원 아래 수선사를 중심으로 지눌의 선사상을 크게 계승 발전시킨 혜심은 고종 21년(1234) 57세로 입적하였다. 왕이 크게 슬퍼하여 진각국사라 시호하고 이듬해 5월 수선사 북쪽 광원암에 부도를 세우고 탑액(塔額)을 '원소지탑(圓炤之塔)'이라 증(贈)하였다. 그의 문하에는 청진몽여(淸眞夢如), 진훈(眞訓), 각운(覺雲), 마곡(麻谷) 등이 두각을 보였고, 청진몽여는 그의 뒤를 이어 수선사 제3대 법주가 되었다.
진각(眞覺) 국사의 속성은 최(崔)씨이며 법명은 혜심(慧諶)이다. 호는 무의자(無衣子)로 일찍 진사(進士)에 급제했으나 보조 국사(普照國師)에게 출가해 그의 법맥을 이었다.
어떤 스님이 진각 국사에게 물었다.
“지금 한 글귀로 묻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국사가 대답했다
“구름이 흩어지면 집집마다 휘영청한 달이요, 가을이 오니 곳곳이 시원하구나.”
진각 국사가 부채를 보이며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깨달은 사람도 이것을 부채라 할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이것을 부채라고 한다. 다같이 부채라 한다면 어떻게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을 분별하겠는가?”
그 스님은 대답을 못했다.
어느 날 진각 국사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다가 좌우에 있는 스님을 보고 말했다.
“물이 얼마나 깊은가?”
한 스님은 대답을 했고 한 스님을 붙잡고 왼쪽 볼때기를 때리며 말했다.
“이 손바닥은 대답한 놈이 받아라.”
다시 오른쪽 볼때기를 때리고는 말했다.
“이 손바닥은 말이 없는 놈이 받아라.”
또 정수리를 때리고는 말했다.
“이 손바닥은 내가 받겠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다시 한 손바닥이 있는데 이것은 누구에게 줄까?”
또 한번은 진각 국사가 어떤 스님에게 말했다.
“한산시(寒山詩)에
‘살살 바람이 그윽한 솔에 불어 가까이 들이니 그 소리 더욱 좋다’ 하였으니
그 좋은 것이 어디 있느냐?”
스님이 대답을 못하자 국사가 말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하루는 진각 국사가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더러운 물건은 물로 씻지만 물이 더러울 땐 무엇으로 씻는가?”
진각 국사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보조 국사를 모시고 기릉 가는 데 길바닥에 다 떨어 진 짚신 한 짝이 눈에 띄었다.보조 국사가 말했다.
“신발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갔지?”
이때 진각이 얼른 대답했다.
보조 국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진각에게 법을 전해 주었다.
제3세 청진국사(淸眞國師) 몽여(夢如)- ?∼1252(고종 39)
고려 중기의 고승(高僧). 수선사(修禪社) 16국사(國師) 중 제3세 국사다.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몇 군데 언급된 부분적 기록을 통하여 일생의 행적을 살필 수 있다. 그가 수선사 제3세로 활약한 시기는 스승 혜심(慧諶)이 입적한 1234년(고종 21)부터 그가 입적하기까지의 18년간 으로 추정된다.
이때의 고려 불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기복불교(祈福佛敎)가 크게 성행하였던 시기로서, 궁중에서는 거의 매월 복을 비는 여러가지 도량(道場)이 열렸고, 황룡사구층탑이 몽고에 의하여 불타는 등 침체일로에 있었다.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수선사를 맡아 지눌(知訥)에 의해서 선양된 선풍(禪風)을 진작하기에 노력하였고, 이러한 노력으로 인하여 수선사의 선풍은 크게 진작되었다. 그리고 당대의 법왕으로 추앙받으면서 혼원(混元)·천영(天英) 등의 제자를 배출하였다.또한, 스승 혜심의 비를 세우고, 혜심의 《선문염송 禪門拈頌》을 열람한 뒤 거기에 347칙(則)을 첨가하여 보완하는 등, 참신한 선풍을 잇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252년 수선사 사주직(社主職)을 제4세 혼원에게 물려주고 입적하였다. 그
는 또 당대의 문호인 이규보(李奎報)와도 자주 교유하였다. 언제인가 시자
(侍者) 두 사람을 이규보에게 보내어 정이안(丁而安)의 흑죽(黑竹)을 구하매 이규보가 흑죽 2간(幹)을 보내면서 찬한 글이 《동문선》 권51에 전해지고 있다. 시호는 청진국사(淸眞國師)이다.
제4세 진명혼원1191(명종 21)∼1271(원종 12).
“소자는 세속에 뜻이 없사오니 외숙(外叔)을 따라 불도를 닦고자 하오니 허락하여 주옵소서.”
스님의 부모는 아들의 커가는 모습을 보고 이미 뜻을 정해 놓은 바 있으므로 별로 놀라거나 유예함이 없이 곧 허락을 내리고 출가위승(出家爲僧)케 하여 외숙인 종헌(宗軒)선사에게로 보냈다. 그리하여 그 해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며, 다시 구족계를 받고 곧바로 삼장(三藏)을 배우도록 했다.
스님의 총명함은 이때부터 그 진가를 발휘하여 조사어록이나 경전을 막론하고 한번 눈으로 스치기만 하면 곧 암송하였고 또 오래도록 기억하는지라 스님의 공부는 일취월장하여 여러 동학(同學) 중에서 단연 독보적이었다.
이렇게 동학들의 선망을 받으면서, 내․외전을 널리 통달한 스님은 약관의 나이에 사굴산(闍崛山) 총림의 수석(首席)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년을 오로지 참선으로 세월을 잊다가 주위의 권고로 선과(禪科)에 응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상상과(上上科)에 뽑혔지만 스님은 한결같이 뜻을 산림에 두고 명리의 길을 밟지 않기를 스스로 맹서하였다. 그리하여 석장을 벗하여 남으로 심사방도(尋師訪道)의 길을 떠나 여러 선지식을 친견하더니, 드디어 쌍봉사의 청우(靑牛)선사를 배알하고는 석장을 높이 걸고 참학(參學)하기에 이른다.여기서 3년여를 안거하면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용맹정진하여 선(禪)의 깊은 이치를 얻었다.
그로부터는 온갖 것에 얽매임이 없는 탕탕무애(蕩蕩無碍)한 일개한도인(一箇閑道人)이 되어 다시 운수(雲水)의 길을 떠나 마침내 조계산의 무의자(無衣子)를 뵙게 된다.
보조국사의 대를 이어 조계산 제 2대 법주로 있던 무의자 스님은 혼원(混元) 스님을 한번 만나보고는 이내 법기(法器)임을 간파하시고 매우 애중히 여기시어 자신의 제자인 청진(淸眞)에게로 스님을 보내면서 잘 지도하기를 당부하였다. 자신은 청진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으니 그로서 족하게 여기시고 청진의 법을 잇도록 배려한 것이다. 청진도 무의자 스님 못지 않게 훌륭한 본분종사(本分宗師)이므로 스승의 명을 따라 혼원 스님을 슬하에 거두고 정진에 전념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조계선(曹溪禪)의 골수(骨髓)를 모두 얻기에 이르니, 이로부터 고인의 공안에 막힘이 없이 모두 통달하여 불법에 조금도 의심이 없어서 현관(玄關)에 노닐며 무애변재(無碍辯才)로서 여러 사람을 깨우쳐 주는 힘을 얻었다. 이때부터 정혜사와 선원사 등에서 주석하시며 법석을 펴 대중을 교화하시니 삼중대사(三中大師)라는 호와 대선사(大禪師)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특히 고종 33년 병자(丙子)년에는 진양공(晋陽公, 崔瑀)이 tm스로 소문(疎文)를 지어 청진국사의 법을 이은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며칠 뒤, 임금께서 행차하여 금난가사를 드리고 법문을 청하니 스님은 마치 장강이 흐르는 것과 같은 변재로 도를 논하고 진리를 설파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매양 구름이 허리를 휘감은 높고 깊은 청산에 뜻이 있었으므로 여러 번 산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고종 39년 임자(1252) 8월에 청진국사는 조계산의 모든 일을 스님에게 부촉하고 입적하시니 나라에서는 스님을 조계산의 第四世 법주로 임명하고 중사(中使)를 시켜 조계산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니 그 해 겨울 12월에 수선사(修禪社)에 도착하였다. 이로부터 보조국사의 선풍(禪風)은 다시 크게 떨치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병진년 가을에 스님은 선원사 법주의 소임을 단공(旦公)에게 맡기고 한가로이 운수에 묻힐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스님의 도덕을 사모하여 따르는 마음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서 무오(1258)에 단속사(斷俗寺) 주지에 임명하고 고관을 시켜 모시고 가도록 하였으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고 서쪽으로 행하여 자운사(慈雲寺)에 이르렀다. 이 때 오랫동안 가물었던 날씨가 밤에 이르자 홀연히 큰비가 내리니 조정과 백성들은 모두들 경탄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기미년(1259) 5월11일에 나라에서는 스님을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임금께서 친히 스승을 모시는 예(禮)를 행하려 했는데 임금이 갑자기 자리에 눕자마자 그대로 붕어(崩御)하고야 말았다. 고종의 대를 이어 등극한 원종은 부왕의 뜻을 이어 스님을 공경하기를 더하였다. 그리하여 자운사에 머물도록 윤허하니 스님은 번거롭다하여 재삼 사양하였다.
“짐(朕)이 스님을 만류하는 것은 항상 가까이 모시면서 친히 법음(法陰)을 입고저 함인데 스님은 짐을 버리고저 하니 끝내 스님 뜻을 어기지 않겠으나 어디를 가서 계시든 나라를 위하여 마음을 기울여 주시오.”
임금의 청은 간절하였다. 임금은 스님을 궁중에 친히 모시고 손수 조석공궤를 올리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면서 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스님은 곧 물러나와 와룡산 자운사로 돌아왔다.
경신년(1260) 10월에 상당법문(註 : 본문의 머리글)을 하시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운집하여 방사(房舍)가 비좁았다. 여기에서 12년을 한결같이 머물면서 납자를 기르고 사부대중을 깨우쳐 주었으며 낡은 가람을 중수하였다.이에 사람들은 이 절의 개산조(開山祖)인 경공(景空)대사가 다시 온 것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원종 12년(1271) 12월 초하루에 스님은 방장실에서 한 게송을 읊되,
今朝臘月一 看看
三十日到來
正念無忘失
오늘 아침은 섣달 초하루라 살펴보고 살펴보라
마지막 날이 이르러도
정념은 망실함이 없나니.
초이렛날이 되자 미질(微疾)을 보이더니 초열흘 새벽에 시자가 문안을 드리니 불안(佛眼)선사가 읊은 게송을 들어 이르시기를,
鳥從空裏飛 入向心中住
새가 허공 속에서 날아와
맘속을 향해 들어와 머문다.
이렇게 평상시와 다름없이 얘기를 나누다가 임금께 올리는 글을 쓰고, 아울러 법을 부촉하는 인신(印信)을 봉하여 시자에게 맡기었다. 신시(申時)에 옷을 갈아입고 가사를 수한 뒤 선상(禪床)에 단정히 앉아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조용히 대열반에 들었다.
7일 동안을 그대로 모셔 두었는데 안색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고 팔 다리를 폈다 오므리는 것도 여전하였으며 이향(異香)이 방안에 가득하였다.
16일에 절 뒤편 동구에서 다비를 모신 뒤 문인들은 유서와 아울러 인신(印信)을 임금에게 올렸다.
임금은 크게 애통하여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였으며 국사로 봉하여 시호를 진명(眞明)이라 하고 탑호는 보광(寶光)이라 하였다.
스님의 세수(世壽)는 80이요 법랍은 68하(夏)였다.
이듬해인 임신년(1272) 2월17일에 절의 서쪽 양지 바른 곳에 부도를 세우고 비를 세웠으나 현존하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스님의 대를 이어 조계산 第五世 법주가 된 자진 원오 국사(慈眞圓悟國師)와 자정 일인(慈靜 一印), 자각 도연(慈覺 道然), 탁영(卓英), 경지(鏡智) 스님 등이 있다.
庚申年(1260) 10월에 스님은 법상에 올라 이르시길,
“문에 드는 전각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눈을 들어 바라보니 계곡과 산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도다. 사람들이 이르기를 ‘신선의 새(仙鳥)가 돌아올 줄 안다’ 하거늘 하늘이 보내신 늙은 용은 비스듬이 누웠으니 여러 어진 이여, 이미 누웠거니와 慈雲은 어느 곳에 있는고?”
한동안 良久하고 이르기를,
“물길이 다한 곳에 가서 이르면 앉아서 구름 이는 때를 보리라.” 하시니 사방에서 스님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제5세 원호천영
스님의 휘는 천영(天英)이고 속성은 양(梁)씨이며, 고종 2년(1215) 을해(乙亥) 6월 13일에 전북 남원군에 태어났다. 스님의 아명(兒名)은 안기(安其) 또는 안차(安且)이며 자호(自號)는 회당노인(晦堂老人) 또는 자인실주인(慈忍室主人)이고, 자(字)는 내로(乃老)인데 만년에는 자(字)로써 이름을 삼았다.
아버지는 택춘(宅椿)이고 어머니는 김씨이니 황해도 단흥군 사람이다. 아버지는 그 뜻하는 바가 높고 예의 범절에 품위가 있어, 벼슬을 굳이 구하려 하지 않아 향리에 머물며 스스로 만족하게 여겼는데, 스님이 뒷날 선원사주(禪源社主)가 되자 나라에서 스님의 도덕을 기려 아버지를 임금이 계시는 개경으로 불러 여러 직위를 두루 거치게 한 뒤 예빈경(禮賓卿) 치사(致仕)에 이르게 하는 은총을 베풀었다.
스님은 타고난 소질이 영특하고 재기가 발랄하고 뛰어나서, 여덟 살 때 시운(詩韻)을 공부하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각각 어려운 운(韻)을 불러 시험하였지만 그 운이 백 가지에 이르도록 조금도 생각이 멈추지 않고, 붓을 들어 쓰는 품이 마치 미리 지어둔 것 같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동 16년 곧 열다섯 살 때에 조계 진각국사께 나아가 출가하기를 간청하니 국사께서는 어린 신동의 그릇됨을 짐작하시고 곧 슬하에 거두어 머리를 깎아 주셨다. 이로부터 삼장(三藏)을 배우는데 문리에 밝아 한번 눈에 거친 경론(經論)은 모두 외우는 것이어서 가르치는 스승이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동 20년(19세)에 담선법회(談禪法會)에 나아갔는데 동료들이 스님을 추거(推擧)하여 상수(上首)로 삼았다. 동 23년에 선선(禪選)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한 스님은 곧 명진(名塵)을 버리고 석장(錫杖)을 벗삼아 남방으로 향하시니, 마침 조계산에서는 청진국사가 스승인 진각국사의 대를 이어 크게 법석을 펴 대중을 제도하시므로, 이 소식을 들은 스님은 삭발본사로 행장을 돌리시었다. 청진국사를 뵙고 법요(法要)를 물으니 국사는 스님의 그릇이 될 만함을 이내 알아보고 상승법문(上乘法門)으로써 제접 하시니 이로 인하여 스님은 혜해(慧解)가 더욱 밝아졌다. 스님은 또 진명국사를 스승으로 섬기며 그 법을 이어받으니, 이를 계기로 도의 심지(心地)가 더욱 깊어져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까지 그 이름을 날리었다.
동 33년(32세)에 주국(柱國) 진양공(晋陽公-최우)이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여 선회(禪會)를 크게 베풀고 주상께 여쭈오니 이에 중사(中使) 김거경(金巨卿)에 명하여 수선사의 진명국사를 맞아 청하여 법주를 삼고 아울러 나라안의 이름 높은 스님 3천명을 소집시켰다. 그 가운데 스님도 또한 초청을 받아 참석하였는데, 이에 조정의 공경대신과 사대부들이 스님을 높이 받들었으며 진양공도 스님을 존경해 마지않더니 주상께 천거(薦擧)하여 스님에게 삼중대사(三重大師)를 제수 하였다. 동 35년에는 다시 선사(禪師)를 천거(薦擧)하여 단속사 주지에 임명케 하였다. 이듬해 진양공은 창복사(昌福寺)를 창건하여 낙경회(落慶會)를 크게 베풀고 스님을 주맹(主盟)으로 삼았으며, 동 37년에는 주상이 스님에게 명하여 선원사주(禪源社主)를 삼았다. 이듬해 주국(柱國) 최항(崔沆-진양공의 아들)이 보제사(普濟寺)에 별원(別院)을 창건하여 구산선려(九山禪侶)를 초대하여 모이게 하고 스님을 주맹(主盟)으로 삼았으며, 동 39년에는 청진국사가 입멸하셨으므로 주상이 진명국사에게 명하여 조계산주(曹溪山主)가 되게 하고 스님을 선원사 법주로 삼았다.
동 43년(42세) 가을에는 진명국사가 물러나 쉬기를 청하면서 스님을 추거(推擧)하여 대신하도록 했는데, 주상이 스님에게 명하여 조계산을 맡게 하고, 대선사(大禪師)를 제가(制加)하였으며 특별히 궁궐로 맞아들여, 손수 음식을 베풀어 공양 올리고 중사 한영(韓瑛)에게 호행(護行)을 명하였다. 6월 28일 배편으로 남하하여 9월 19일 조계에 도착. 종강(宗綱)을 크게 떨치니 이에 사방에서 운수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불일(佛日)이 다시 빛나게 하였다.
동 46년에는 고종이 승하하시고 원종이 대를 이어 보위에 올랐는데 스님에게 베푸는 은총(恩寵)이 더욱 두터웠다. 또한 충렬왕의 왕후 원성궁주는 불법을 깊이 숭신(崇信)하여 스님에게 특히 예문(禮問)을 두터이 하셨다. 주상이 일찍이 시 2수를 짓고 친히 써서 보족(寶簇)을 이루어서 스님에게 기증한 바 있는데 그 시는 이러하다.
千里曹溪月 依然照九重
천리 밖 조계의 달이 의연히 구중궁궐에 비추도다
天傳眞面目 何更接音容
하늘은 참면목 전하는데 어찌 다시 음성과 용모를 접하리?
師是南陽後 朕曾唐帝孫
스님께선 남양의 후손이고 짐은 일찍이 당제의 손자로세
願將調御問 稽首欲重論
원하노니 부처님의 물음을 가져 머리 숙여 거듭 논하고자 하네
黃雲章寶札 照映林壑實
누런 구름은 보찰의 글장이라 숲 우거진 골짜기를 비추나니
이 시는 주상께서 스님을 존경하고 아낀 나머지 전례(前例)에 보기 드문 남다른 은총을 내린 것이라 하겠다. 그로부터 얼마 후 경사(京師)로 맞아 주상께서 몸소 스승에게 올리는 예(禮)를 드리고자 하여 중사(中使)를 보냈으나, 스님은 늙고 병든 것을 빙자하여 굳이 사양하실 뿐 아니라 마침 국가에도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이뤄지지 못했다.
스님은 내전(內典)․외전(外典)에 두루 정통하여 저술한 바가 호방(豪放)하고 담대(膽大)하며 그 뜻이 깊고 넓은지라, 고대의 작자에도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었다. 또 필법(筆法)에도 정통하셨는데, 초서를 특히 잘 쓰므로 원근의 사대부들이 다투어 구하여서 익히기에 힘썼다.
스님은 타고난 기품이 연심(淵深)하고 노니심에 관유(寬裕)하여, 항상 상대방의 장점을 칭찬하고 상 줄지언정 평생을 두고 폭언을 하는 일이 없으셨으며, 또 관후(寬厚)와 자애(慈愛)로써 그 도제(徒弟)들을 순순히 달래고 이끌었으므로 그 문도의 몸가짐이 공손하고 삼가하여 모두 당대의 영준(英俊)이 되었고, 총림의 표준이 된 이가 적지 않았다. 또 종실(宗室)․귀척(貴戚)․경사(卿士)․대부(大父)․이종석덕(異宗碩德)까지도 다투어 달려와서 참례(參禮)함이 뭇 새들이 봉황에 귀의하는 것과 같아서 도제의 성(盛)함이 그 당세에 비교할 바가 드물었다.
스님은 흥복(興福)에도 부지런하여 중창(重創)한 가람이 매우 많았는데 그 가운데 특수한 것만을 들어보면 보성의 대원사(大原寺)와 고흥의 불대사(佛臺寺) 중창 등이 있다.
충렬왕 12년(1286) 2월 12일에 청을 받아 불대사에 이르러 장로(長老)를 불러 이르기를
“이 늙은이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그대들은 잘 살아라”
이어 지필(紙筆)을 청하여 ‘국왕에게 올리는 글’ 및 ‘염승익(廉承益)․홍자번(洪子藩) 두 재상에게 보내는 글’을 쓰신 후, 삭발하고 법의를 갈아입으시고 소선상(小禪床)에 걸터앉았다.
有僧出問 牧牛子道 不昧一着子 還不昧也無
이에 어떤 스님이 나와 묻기를
“목우자(牧牛子)는 不昧一着子라 이르셨는데 화상은 도리어 不昧합니까, 昧합니까?”
師云 昧與不昧 總不干他事
스님이 이르되
“昧하고 不昧함은 모두 저 일을 간여하지 않느니라.”
又有僧問 脫却殼漏子 向什 處相見
또 어떤 스님이 묻되
“환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어느 곳을 향하여야 서로 보게 되리잇고? ”
師云 問求道吾去
스님이 이르되
“나에게 도를 물어 구하거라. ”
復云 時將至矣 不須多語 生也如着袴 死也如脫裙 那個是着脫底人
하시고 다시 이르되
“때가 장차 이르렀으니 모름지기 많은 말을 하지 말라. 태어남이란 마치 바지를 입음이요 죽음이란 마치 치마를 벗음이니 어떤 것이 입고 벗는 사람인고?”
良久云 不見牧牛子道 千種萬般 總在這裡
한동안 침묵하시다가 다시 이르되
“보지 못했는가? 목우자께서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느니’ 하고 이르신 것을….”
이 말씀을 끝으로 박연(泊然)히 입멸하시니 향수(享壽)는 72세이고 법랍은 57夏이며 조계산에 주석(住錫)하심이 무릇 30년에 이르셨다.
동월 29일 문도들이 색신(色身)을 받들고 동군 관내 두원현(豆原縣)의 동쪽 봉우리에서 다비한 후 그 유골을 수습하여 3월 6일에 조계로 모셔왔다. 주상이 부보(訃報)를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며, 통예문통사사인(通禮問通事舍人) 강취(姜就)를 이익배(李益培)에게 보내어 뇌서(誄書)를 갖추게 하고, 자진원오국사(慈眞圓悟國師)라는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어필(御筆)로 시축(諡𨋀)을 쓰신 후, 일관(日官) 정문(正文)․춘관(春官) 서영(瑞英)을 보내어 문도(門徒)에게 내리시고 두 관원으로 하여금 상사(喪事)를 감호(監護)하게 하셨다.
6월 9일 대원사의 서쪽 등성이에 탑을 세웠는데, 무지개가 홀연히 조계의 남쪽 봉우리로부터 뻗어 탑에 이르고 다른 하나는 탑의 앞산 봉우리에서 뻗어 탑에까지 이르러 두 무지개가 한데 어울리는 것이었다.
문인(門人)들이 취봉대선(鷲峰大禪), 몽암명우(蒙庵明友)의 지은 행록(行錄)을 갖추어 조정에 나아가 비 세우기를 청하니, 주상이 재가하시고 이익배(李益培)에게 명하여 비명(碑銘)을 짓게 하셨다. 이에 사법제자(嗣法弟子) 충지(冲止)는 교(敎)를 받들어 석재(石材)를 준비하고, 문인(門人) 만연사주(萬淵寺主) 대선사(大禪師) 굉묵(宏黙)은 교(敎)를 받들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쓰고, 청만(淸滿)과 진적(眞寂)등은 새긴 후, 고흥군 팔영산(八影山) 불대사(佛臺寺)에 건립(建立)하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병화로 인하여 모두 불타 버렸다.
제6세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
스님의 휘는 충지(冲止)이니 본래는 법환(法桓)이었고, 속명은 원개(元凱) 자호는 복암노인(宓庵老人) 속성은 위(魏)씨이며, 전남 장흥군 정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위소(魏紹)인데 벼슬이 호부 원외랑(戶部 員外郞)에 이르렀고 어머니는 원방 대부인 송씨(原邦 大夫人 宋氏)니 사부 원외랑(史部 員外郞) 자옥(子沃)의 따님이시다.
고종(高宗) 13년(1226) 병술(丙戌) 11월 17일에 태어났고 9세 때 비로소 글을 배웠는데 총민함이 무리에서 가장 뛰어나 모든 경(經)과 사서(史書)를 눈에 지나는 대로 외웠으며 또 글과 시(詩)를 잘 지어 17세에 사원시(司院試)를 마쳤고 19세에 과거에 나아가 장원급제하였다. 그리하여 영가서기(永嘉書記)의 관직을 제수 받아 복무하던 중 일본에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잘 이행하여 국위를 널리 다른 나라에 까지 떨쳤다. 그 뒤 귀국하여 관위가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올랐는데 그 일의 매무새가 원숙하고 말과 행동이 사려 깊어서 당대의 유가(儒家)의 석학(碩學)과 학자들도 모두 마땅히 존경함에 이르렀다.
스님은 소년시절부터 선교(禪敎)에 의지하여 깊이 불승(佛乘)을 간절히 생각하여 오더니 자주 부모님에게 출가(出家)의 뜻을 여쭈었으나 그때마다 허락을 얻지 못하여 좌절당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 뜻을 저버리지 않고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더니 29세 되던 해 선원사(禪源寺)의 법주이신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 나아가서 출가의 뜻을 아뢰고 허락을 받아 득도(得度)․수계(受戒)하였다.
이어 행로(行路)를 남쪽으로 돌려 여러 법석(法席)에 참례하며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이수하였는데 워낙 총명이 뛰어나서 머무는 강석(講席)마다 항상 뛰어나 대중의 모범이 되었다. 삼장의 가르침을 이수한 스님은 이어 제방선원(諸方禪院)에 다니면서 참선에 뜻을 모았는데, 이 때의 스님 행색은 마치 나무로 깎아 만든 허수아비인 양, 산꼭대기에 우뚝 선 우람한 바위인 양하였다. 그러면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인연따라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주지(住持) 직에는 아예 뜻조차 없었으니 이는 대개 원오국사의 고풍을 생각한 것이었으리라.
元宗 7년 스님의 나이 41세 때의 여름에 스승이신 원오국사의 권유와 조정의 칙령이 내려 경남 김해군의 신어산(神魚山) 감로사(甘露寺) 주지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때에 한 선덕(禪德)의 요청으로 모처럼 붓을 들어 한 수 읊으니
春日花開桂苑中 暗室浮動小林風
봄날 계원 중에 꽃이 피니 그윽한 향기 소림풍에 둥실 떠가네
今朝果熟霑甘露 無限人天一味同
오늘 아침 과일 익어 감로 맛이라. 무한한 인천(人天)에 한 맛으로 같구나
이 시가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사대부들이 스님을 한번 친견하기를 원하여 줄을 이어 찾아오는 지라 감로사의 이름도 자연히 그 주가가 올라갔다. 또한 스님은 중창불사를 연속적으로 시행하여 사원의 면목을 일신하니 감로사 아래의 동리(洞里)마저 빛을 발하게 되어 스님에 대한 주민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스님은 도제양성(徒弟養成)에도 힘을 기울여서 산내의 학승(學僧)에게 경론을 가르치는 한편 교학(敎學)을 이수한 학승은 실참실구(實參實究)하도록 하니, 총림의 융성함이 유사이래 으뜸이었다. 원종(元宗) 10년 5월 나라에서 스님에게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예를 올리며, 원종(元宗) 13년 3월 스님이 47세 되던 해에 나라에서는 전남 승주군 서면 정혜사(定慧社)로 이주케 하였다. 이때 동범에게 보이기를,
鷄足峯前古道場 今來山翠別生光
계족봉 앞 옛 도량에 이제 오니 산은 푸르러 빛이 나네
廣長自有淸溪舌 何必喃喃更擧揚
부처님 설법은 시냇물이 설파하거니 어찌 중얼 중얼 다시 드날리리
스님이 정혜사에 첫발을 내딛을 적에 스승이신 원오국사께서 동행이 되어 주었으므로 스님으로서는 큰 기쁨과 영광이 넘쳐흘렀다. 이에 스승에게 시로써 감사를 표하여 올렸으니,
樓閣重重古梵宮 溪山形勝甲寶中
누각이 겹겹인 옛 범궁은 시내와 산 모습 나라에서 으뜸이라
我來繼席誠非分 恐添當年國老風
제가 와서 법석 이음은 분에 넘치나니 당년의 스승님께 누가 될까 두렵네
元宗 14년(1274)에 고려의 장수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흔도(忻都)가 군사를 이끌고 탐라를 평정하였는데, 원나라 조정에서 탐라(제주도)에 달노화적(達魯花赤)과 관구병량사좌(管句兵糧使佐)를 설치하고 병량을 준비하면서 조계산 수선사에 속해 있는 토지를 빼앗아 갔다. 이에 스님이 원나라의 세조에게 상소를 올려 몰수해 간 토지를 환수해 주기를 청하니 상소의 일절을 소개하면,
惟此修禪精舍는 創從普照聖師하니 是小邦選佛之場이라 禪流不減於數千指라…
(오직 이 수선정사는 보조성사께서 창건하셨으니 이는 우리나라의 선불장이라 참선하는 무리가 수천 명에서 덜하지 않습니다…)
스님의 상소를 본 원나라 조정에서는 스님의 도덕과 문장을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사모하는 마음으로 스님을 원나라에 초청하니 원종왕의 대를 이은 충렬왕(忠烈王)은 이를 승락하고 스님에게 칙서(勅書)를 내렸다. 스님은 처음 출가할 적에 다시는 개경(開京)의 땅을 밟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한 바 있었으므로 여러모로 극구 사양하였지만 어명이 지엄한지라 할 수 없이 길을 재촉하였다. 그러던 중 스님이 충청도 웅천에 이르러 가벼운 병을 얻으니 스님은 이를 빌미로 주상에게 상소를 올리고 행선지를 바꾸어 청주로 향하였다.
청주에는 옛날 벗인 청주목백(淸州牧伯) 상서 농서공(尙書 隴西公) 이오(李敖)가 있어 스님을 반갑게 영접하여 청주 관내의 화정사(華井寺)를 깨끗이 치우고 스님이 주석(主席)하기를 강권하는 것이었다. 스님과 농서공은 원래 세속 시절부터 평생을 두고 사귄 지기지우(知己知友)였다. 그래서 그의 청을 사양하지 않고 화정사에서 한 철을 지낸 것이었다.
스님이 청주 화정사에서 여름을 난 것은 50세 때의 일로서 해제 후 곧 바로 나라의 부름이 있었다. 이를 사양할 수 없었던 스님은 내키지 않는 여행길에 기어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달포를 신고(辛苦)한 끝에 원나라 서울에 다다르니 원의 세조(世祖)가 친히 마중을 나와 궁중으로 영접하여 극진한 손님의 예로 대하고 스승에 대한 예(禮)로서 존경을 다하매 온 나라가 스님의 덕을 우러르고 만민이 그 어지심에 귀의하였다.
스님이 귀국함에 즈음하여 세조는 금난가사(金襴袈裟)․벽수장삼(碧繡長衫)․불자(拂子)등을 내려 스님의 덕을 기렸다. 이에 주상께서는 관기(官記) 강용(康用)을 시켜 스님을 모시고 산에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였으며, 이듬해 정혜사 주지직을 사퇴하고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겨가서 조용히 선정을 닦았다. 정혜사의 社主로 재직한 13년 동안은 절 일에 주력하느라 자신의 공부에 등한히 했음을 절감한 스님은 상무주암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참선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상무주암의 생활은 그리 길지 못하였다. 충렬왕 12년 2월에 스승 원오국사께서 입적(入寂)하신 것이다. 수선사 대중은 스님을 社主로 추거(推擧)하고 주상에게 천거(薦擧)하니 주상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으로 하여금 스님을 청하여 수선사에 입원(入院)하게 되니, 스님은 4월 16일에 조계산에 입원하여 개당(開堂)하니 이로부터 수선사의 제6조(第六世) 법주(法主)가 되었다.
충렬왕(忠烈王) 17년 초여름에는 난을 피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로 옮겨 앉는 고통도 감수해야 했다. 충렬왕(忠烈王) 18년 8월 초순에 수선사에서 가벼운 병의 조짐을 보이시더니, 이듬해 정월 7일에 더욱 위중하더니 초열흘 새벽에 삭발하시고 목욕을 마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이었다. 이에 문도들이 깜짝 놀라 방장실에 모이니 스님은 오히려 태연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충렬왕(忠烈王) 4년 11월, 마침 스승이신 원오국사께서 강화도(江華島) 선원사(禪源寺)에서 수선(修繕)을 마친 거란본 장경(契丹本 藏經)을 조계산 수선사로 이운(移運)한 것을 대중을 거느리고 멀리 도중에까지 마중을 가서 함께 나누어지고 수선사로 돌아왔는데 이를 기념하여 스님은 시게(詩偈)를 읊기도 하였다.
“생사가 있는 것은 인간세상의 예사 일이라, 내 마땅히 갈 것이니 너희들은 잘 머물러라.”
미시(未時)에 이르러 시자 심선(心璇)에게 명하여 분향(焚香)하고 축원(祝願)을 마치고 가사를 수하신 후 소선상에 걸터앉아서 불자를 들어 대중에 이르시되,
“설함에 본래 설함이 없느니라.”
이 짧은 한 말씀을 하시고는 입을 다무시는지라 여러 스님들이 굳이 임종게(臨終偈)를 청하니 스님은 무겁게 입을 열어.
閱過行年六十八 及到金朝萬事畢
지나온 세상에 먹은 나이 육십팔이라 오늘 아침에 이르러 모든 일 마쳤네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會失
고향에 돌아가는 길 평탄하여서 그 길이 분명하여 잃지 않았네
手中纔有一枝筑 且喜途中脚不倦
수중엔 겨우 지팡이 하나지만 기쁘구나 가는 중에 다리는 안아프리.
이때 명망 높은 한 장로가 나와 여쭙기를,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 평탄하다 하시니 그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님이 답하시되,
“착안(着眼) 하여 보아라.”
장로가 다시 여쭙기를,
“착안하여 보란 말씀은 무엇을 이르신 것이기에 오고 가지 아니하여 갈 때에도 가지 않는 것입니까?”
“알면 되었느니라, 알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을 끝으로 입멸(入滅)하시니 세수(世壽)는 68이요, 법랍은 39하(夏)였다. 그 달 20일에 다비(茶毘)를 모셨는데 오색영롱한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치기를 여러 날을 하였다. 주상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슬퍼하시며 문도들에게 위로의 글을 내리시고 아울러 칙서를 내리시어 시호를 원감국사(圓鑑國師), 탑액을 보명(寶明)이라 내리셨으며 수선사의 북쪽 기슭에 탑을 세웠다.
스님은 금문(金文) 보장(寶藏)을 모두 가슴에 간직해 두시고 자유자재로 구사하였으며 유가(儒家)의 시(詩)와 문(文)과 사(詞)에 남달리 조예가 깊으셔서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붓을 들면 시게(詩偈)와 문장이 저절로 이뤄지셨다. 또 스님은 평생동안 상주물(常住物)을 아끼시어 함부로 쓰시지 않으셨으며 또 사람을 대하심에 있어 조금도 꾸밈이 없고 물리치시는 일이 없었다.
문인 등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갖추어 비(碑)를 세우기를 청하니, 주상은 곤 문한학사(文翰學士) 승지(承旨) 김훈(金矄)을 시켜 비명을 짓게 하셨고, 멸후 21년 곧 충숙왕 원년 8월에 수선사의 감로암 앞에 비를 세웠다.
스님의 고향인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에는 외(魏)씨가 대를 이어 많이 사는데 이 고을의 주봉을 장원봉(壯元峯)이라 하는데 이는 스님과 스님의 아우 문개가 장원급제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또 구룡리(九龍里)에 있는 병풍바위는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되는데 그 벼랑에 스님의 초상이 부조(浮彫)되어 전해 오는데 근래에는 풍우에 많이 마멸되어 희미해져서 알아보기 어려운 형상이라 하니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헌비고에 의하면 원감집 1권과 원감국사 어록 1권이 유통되었으나 현재는 자취를 감추어 나타난 바가 없고, 다만 1920년 봄 송광사 주지 설월노의 간행본에 첨간된 원감국사집이 있다. 이는 동문선 가운데서 원감국사의 문(文)․소(䟽)․표(表) 등을 모은 것이다.
제7세 자정국사 일인(慈靜國師 一印, ? ~1301)
비문이 이미 인멸이 되어 자세한 일생을 알기는 어렵다. 다만 유추할 수 있는것은 자정국사의 영정탱화와 탑의 제목에 의거하여 시호(諡號)는 慈靜(자정)국사며 탑의 머리에 쓰여져 있는 妙光(묘광)이다.
정조(正祖) 16년 (1792년) 임자(壬子)봄에 송광사사적(松廣寺事跡)중 여러국사들의 약력의 나열에 의하면 국사의 휘(諱)를 일인(一印)이라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 一印의 전거의 확실 여하는 아직 알 수 없는데 확실한 것으로 가정 한다면 곧 원감국사 가운데 규봉선백(圭峰禪伯),난송선사(蘭松禪師)라 쓰여진 분이 일인스님이 아닌가 한다.
제8세 자각국사 도영(慈覺國師 道英, ? ~ 1312)
자각국사의 자료와 비문도 인멸이 되어 그 일생의 사력을 완전히 적기는 어렵다. 오직 영정과 탑액과 탑의 제목으로 유추할 뿐이다.
탑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로 원오국사와 친권으로서 법형제간 아니면 법자간이었음이 나타난다. 원오국사의 사제임이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입멸시기는 1312년 충숙왕 말기로 추정된다.
제9세 담당국사(湛堂國師, ? ~ ?)
담당 국사의 비문도 인멸이 되어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다. 전설에 의하면 담당국사는 금(金)나라의 태자로서 여조의 사문이 된 사적에 두가지의 설화가 있다.
일설에는 질병에 걸린 태자를 보조국사가 삼매에 들어 금나라 태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신통을 베풀어 공중으로 날아서 금나라에 다다르사 약과 법을 동시에 보시하시여 태자의 병을 낫게 하였다 한다. 이에 온나라가 보조국사를 찬탄하였고 보조국사가 귀국할 즈음 황제의 3번째 아들을 딸려보내 출가 시켰다 한다.
일설에는 금나라 황제가 부처님법을 시험하고자 만일 효험이 없을 때에는 불승(佛僧)을 모두 감옥에 넣으려 하므로 중국의 승가에서는 효험이 없을까 걱정할 즈음에 보조국사께서 신통력으로써 이것을 관파하시어, 신력(神力)으로써 허공을 걸어서 불사장(佛事場)에 내리시니, 제천이 꽃비를 내리어서 화불(化佛)의 내의(來儀)를 보였다. 이에 황제의 아들이 칭찬을 마니아니하여 사부의 예를 올리고 보조국사와 같이 출가하였다 한다. 그가 바로 담당국사 이다.
제10세 혜감국사 만항
스님의 휘는 만항(萬恒)이고 속성은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경승(景升)이니 진사(進士) 벼슬을 했고, 어머니는 정씨(鄭氏)니 고종 36년 (1249) 기유(己酉) 8월 6일에 웅진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정씨가 한 꿈을 얻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취막(翠幕)속의 옥동자가 문득 품안으로 뛰어드는 기이한 조짐을 감득(感得)하고 그로 인하여 임신을 하게 되었으므로 아명을 막아幕兒라고 하였던 것이다.
스님의 가문은 유가(儒家)의 집안이어서 본시 영특한 스님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힘쓰더니 차츰 세속을 버릴 마음을 굳히다가 원종 3년 열네살의 나이에 원오국사에게 득도하였다.
출가하여서도 내전(內典)에 마음을 쏟아 일대시교(一大詩敎)를 두루 이수한 후 구산선(九山選)에 나아가 괴과(魁科)를 마치시고는 석장을 떨쳐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하안거를 마쳤다. 스님은 다시 남방 지리산으로 내려와서 용맹정진 하는데 배가 고파도 거듭 먹지 않고 겨울 추위가 매섭되 솜옷을 입지 않았으며 몸이 피곤하여도 자리에 눕지 않고 장좌불와(長坐不臥)로서 여러 해를 지내며 이름과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히려 스님과 이름은 널리 나타났다.
나라에서도 스님의 도풍을 들으시고 보양(普陽)땅의 삼장사(三藏寺)에 주지하기를 명하시고 스승 원오국사께서도 은근히 권유하시므로 마지못하여 입원(入院)하여 개당(開堂) 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로 랑월(郞月)·운흥(雲興)·선원(禪源)·등사 법주(法主)를 역임하였는데 매양 7백여 납자를 대상으로 내전을 가르치면서 제자들의 훤잡한 잡담에는 귀먹은 척 하고 매사에 어두운 척 하되 마음은 늘 맑은 하늘과 같았다.
이에 스님의 도예는 날로 널리 퍼져서 사대부로서 구의의 예로써 사내에 들어온 이를 가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스님이 주석한 절의 산문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중국의 오리(吳異) 몽산(夢山)이 스님의 시문을 보고 탄상(歎賞)을 마지 않으시며 시 10수를 화답하고 스님에게 고담(古潭)이라는 호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충선왕 5년(스님의 나이 65세) 12월 11일에 영안궁(永安宮)에서 이틀동안 2천명의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2천 등을 켜고 선교의 고승을 쁩아 강론토록 했는데 이에 스님에게 특강을 청하니 스님은 법회장에 이르러 사자후를 하니 봉갈(棒喝)에 선풍(旋風)이 일고 변설(辯舌)에 선음9仙音)이 떨치는 것이었다. 이에 왕이 심히 기뻐하여 스님의 절로 돌아갈 적에 어교(御轎)를 보내셨으며 이튿날에도 영안궁에서 반승점등(飯僧點燈)을 계속하였는데 왕은 스님과 함께 연을 타고 연복사(演福寺)에 행행, 8일 동안 점등하였다.
이 법회에 스님이 성연을 베푸시니 왕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스스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다. 이 성대한 법회에 왕래하는 동안 왕은 스님과 함께 연에 오르시고 공양함에 있어 찬을 친히 올리셨다.
법회가 끝나자 왕은 스님에게 법호를 더하여 별전종주중속조등(別傳宗主重續祖燈) 묘명존자(妙明尊者)라 하시고 가사·의군·모·말 및 은폐 50일(鎰)로써 전별하셨는데 스님은 산사로 돌아온 후에 모두 사중의 상주에 부치도록 분부를 내리셨다.
충숙왕 원년 정월 2일에는 왕께서 은자원(銀字院)으로 스님을 방문하셨으며 초이렛날에는 상왕 충선왕(忠宣王)이 원나라로 행차하시는 길에 연경궁(延慶宮)의 만승회(萬僧會)에 들리셔서 백금 백삼십근을 스님에게 하사하시었다.
충숙왕 6년 7월에 삼장사에 주석하고 계시던 스님은 처음으로 미질을 보이시니 대중들은 모두 근심에 차는 것이었다. 8월 18일에 이르러 스님은 머리를 깎으시고 목욕하신 후 새 옷으로 갈아 입으시더니 나라에 유서를 쓰시고 밤이 깊자 시자를 불러 법고를 울리게 하신 후 가사를 입으시고 선상(禪床)에 앉으사 게송을 읊어 고별하시니,
확청오온(廓淸五蘊) 진조무궁(盡照無窮)
오온을 확연히 맑히니 참으로 비춤이 무궁하도다
생사출몰(生死出沒) 월전공중(月轉空中)
죽고 태어나며 출몰함은 달이 공중에 굴름이로다.
오금하각(吾今下脚) 수변현종(誰辨玄宗)
내 이제 떠나가면 그 뉘가 진리를 분별 하겠는가?
고이제자(告爾弟子) 막만문공(莫謾捫空)
너희 등 제자에게 고하노니 부질없이 공을 더듬지 말라.
스님의 이같은 고별의 장면을 지켜보던 경호(景浩)라는 선객이 큰소리로 여쭙기를
“큰스님께서 이제 고별하시니 장차 어디로 가시렵니까?”
스님은 다시 게송으로써 답하였다.
하처불상봉(何處不相逢) 도하불용벌(渡河不用筏)
어느 곳에서 상봉하지 않으랴? 강을 건넘에는 뗏목을 쓰지 앉노라.
이 게송을 낭랑한 음성으로 길게 읊으시며 무릎을 쳐 박자를 맞추시더니 두손을 마주 잡고 빙그레 웃음을 띠신 채 엄연히 대적삼매(大寂三昧)에 드시는 것이었다. 스님의 세속 수명은 71세셨고 법랍은 58세 였으며 문도들이 다비를 모신 뒤 삼장사의 양방언덕에 탑을 세웠다.
왕께서 부보(訃報)를 들으시고 매우 슬퍼하시고 시호(諡號)를 혜감국사(慧鑑國師)라 하시고 탑액(塔額)을 광조(廣照)라 내리셨다.
스님의 비문은 삼장사의 법도들이 주관하여 삼장사 경내에 세웠는데 스님께서 조계산 수선사의 주지로 부임하신 사실을 싣지 않아 매우 유감스럽다. 그러나 그 비제(碑題)에는 ‘조계산(祖溪山) 수선사(修禪寺) 제십세(第十世)’라고 분명히 기록하였으며 또 그 명에 ‘조계기임(祖溪其任)’이라 하여 조계산으로 그 소임을 삼았음을 밝혔으므로 스님이 조계산 수선사의 제십세 법주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리고 고려사에도 “충선왕 오년 계축 십이월 경오 내지 소송광사(召松廣寺) 승 만항부회(萬恒赴會)
충선왕 5년 계축 12월 경오에 내지 송광사 스님 만항을 불러 법회에 다다르게 하였다. “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스님께서 충선왕·충숙왕의 시기에 수선사의 주지로 계셨음을 입증하고 있는것이다.
스님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혜감만항(慧鑑萬恒)
●●소지(●●小止)
경호(景浩) 등 칠백여명
제11세 자원국사(慈圓國師, ? ) 묘엄妙嚴
자원국사의 비문도 인멸이 되어 정확한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그의 사력을 유추하자면 제 11세(世) 묘엄존자 증시자원국사라(妙儼尊子 贈諡慈國師) 하였을 뿐이다.혜감 국사의 비문에 씌여진 내용으로 보면 자원국사위에 묘엄존자라 한것은 충숙왕조로 부터 받은 왕사 법호임을 증명한다.
제12세 혜각국사 묘구(慧覺國師 妙軀, ? ~ ?)
고려 후기의 스님으로 조계산 수선사(송광사)의 제 12대 조사이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안진이 글을 지어 세운 그의 비가 경북 선산군 미륵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자세한행적은 알 수 없다.
국사의 비문도 인멸이 되어 자세한 기록은 알수가 없다.
제13세 각진국사(覺眞 國師) 복구(復丘, 1270~1355)
각진국사(覺眞 國師) 복구(復丘, 1270~1355)는 고려 후기 공민왕의 신임을 받은 인물로 수선사(修禪社, 오늘날의 전남 순천 송광사)의 16국사(國師) 가운데 제13세 국사가 되었던 분이다. 그는 고성에서 이씨의 자손으로 태어나 10살 어린나이에 조계산 수선사의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원오국사가 입적하자 수선사의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충열왕 16년(1290) 21세 때에는 승과의 하나인 선선상상과(禪選上上科)에 합격하였으나, 그대로 조계산 산 중에 머물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후 백암사(白巖寺)에서 10여년 주석하였으며, 월남사(月南寺)와 송광사(松廣寺)에서 전후 40여년을 보냈다. 공민왕 원년(1352)에는 왕사로 책봉되어 불갑사에 머물렀다. 당시 왕은 스님의 건강을 염려하여 직접 궁궐로 초빙하지 않고 스님의 진영만을 그려서 예를 거행할 정도로 극진한 정성과 존경으로 섬겼다고 전한다.
공민왕 4년(1355)에는 불갑사에서 백암사로 거처를 옮겨 법문을 펼치다 그해 7월에 임종게를 남기면서 홀연히 입적하니 세수 86세, 법랍 76년이었다. 스님의 법문을 이은 제자로는 선원(禪源), 백화(白華), 가지(迦智), 마곡(麻谷) 스님 등을 비롯해 1000명에 달한다. 스님이 입적하자 공민왕은 생전의 덕을 흠모하며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각진(覺眞) 탑호를 자운(慈雲)이라 내렸다. 1359년(공민왕 8) 스님의 행장을 모아 이달충(李達衷)이 비문을 짓고, 이제현(李齊賢)이 글씨를 써 불갑사에 비가 세워졌다. 각진 국사가 주도한 불갑사 중창은 그가 불갑사에 주석하였던 공민왕 원년에서 공민왕 4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는 불갑사에서 원나라로부터 가져온 대장경을 가지고 국가의 위기를 불공덕으로 소멸시키고자 3차례에 걸쳐 전장법회(轉藏法會)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백양사 중창
각진국사(覺眞國師)는 법명이 복구(復丘)이며, 고려시대 명문 고성(固城) 이씨 집안으로 여덟 살 때인 1277년 조계산 수선사에서 불가에 입문하여 열 살 때 머리를 깎고 계율을 받으셨습니다. 이어 천영(天英)스님과 도영(道英)스님께 배우며 10년 만에 불학에 통달하셨답니다.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였으나 오로지 수도에만 정진하여 정토사(지금의 백양사)에서 밤낮으로 참선하기를 십여 년 동안 하시며, 백양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후 스님은 월남사와 송광사에서 40년간 주석하시다가 다시 백양사로 돌아와 대대적인 중창을 하셨는데 많은 문도들과 힘을 합쳐 불전을 다시 세우고 범종과 법고, 승방과 객사를 갖추었으며 특히 제자이자 당시 백양사 주지였던 심백(心白)스님과 지부(智孚)스님을 바다건너 송(宋)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했답니다. 스님은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왕사가 되셨고, 공민왕 원년(1352)에 다시 왕사가 되셨습니다. 81세가 되시던 해에 다시 백양사로 돌아오셨는데 왕명에 따라 불갑사에 주석하시다가 백양사로 돌아온 다음해인 1356년 병을 얻어 임금에게 하직 편지를 올리고 문도들에게 “곧 마음이고 곧 부처인 강서(江西)의 늙은이며,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물외(物外)의 할아비로다. 날다람쥐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구나”라고 말하신 후 열반게를읊고는 입적하셨습니다.
제14세 복암국사 정혜(復庵國師 淨慧, ? ~ ? )
복암국사 또한 비문이 인멸되어 사력을 완철하지 못한다. 오직 공민왕 2년(1353년)에 월출산인 연온 찬 백암산 정토사 전장 제3 회방에 의하면 [각엄존자께서 재차의 왕사를 배수(排手:물리치다. 거절하다)하시고 이 망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가지가지의 공구를 갖추시어 조계산 제 14대 대화상을 주맹(主盟) 으로 청하여 자리를 잡으시고 제산(諸山) 장로 100여명을 모아 같은해 3월 11일 부터 약 10일동안의 대법회를 거행하되 낮으로는 3장(三藏)을 읽고 밤으로는 조교(祖敎)를 말씀하시며, 또는 참선으로 또는 강경으로써 마치셨다] 하였다.
그런즉 국사는 각진국사가 충정왕 2년에 백암산으로 은퇴하신 직후부터 제 14세 부임하여 당시까지 이르렀음은 말할나위도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월 상판된 기록에는 [ 주법 (主法) 조계 14대 화상 복암정혜(復庵淨慧)라 하였으니 이 복암정혜는 곧 화상이 살아있을 당시의 기록인즉 복암(復庵)은 그의 자호(自號:스스로 지은 호)임이 의심 없고, 정혜(淨慧)는 그 법명으로 서 시호(諡號) 아님이 요연하다. 그러나 그 탱액을 보면 복암화상 정혜국사라 한것은 국사의 사력(事歷)이 없어져 후인들이 후록에 의하여 탱액을 기입한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법계는 국사가 제 13대의 다음에 부임한 것과 전장법회의 주법에 강좌된것과 졸암 복암의 동향인것에 비추어보아 각진국사의 법사일 가능성이 있다. 그 입멸연대는 곧 공민왕조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제15세 홍진국사 혜영(弘眞國師 惠永 - 1228~1294)
홍진국사는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으로 받들어 모셔졌던 유가종(瑜伽宗)의 고승이자 동화사를 크게 중창했던 중창주 이다. 속가의 성은 강씨고 휘(諱)는 혜영으로, 문경출신이며 아버지는 내원승 겸 직한림원(直翰林院)을 지낸 자원(子元)이고, 어머니는 홍씨로 호부시랑 충사관(充史館)을 지낸 인연(仁衍)의 딸이다.
1228년에 태어난 홍진국사는 11세에 충연(沖淵)의 제자로 출가하여, 17세에 왕륜사 선불장(選佛場)에서 승과에 합격하고, 흥덕사에 머물렀다고 전한다. 1259년에는 삼중대사의 법계를 받았으며, 1265년에는 좌주(座主)에 선출되었고, 1267년에는 보은 속리사(俗離寺)로 갔다. 이어 1269년에는 승통(僧統)직에 오름으로써 교종 최고의 승직을 제수 받게 되었다.
이후 1274년에는 불국사로 거처를 옮겼으며, 1276년에는 통도사에서 진신사리 여러 과를 얻어 항상 좌우에 두었더니 많은 분신사리가 생겨나 이를 구하는 사람에게 주었다는 기행도 전한다. 이후 왕의 요청으로 개성에서 9년간이나 주석하던 스님은 산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걸퇴시(乞退詩)를 지어 왕에게 올렸다. 1285년에는 유가사에서 거주하다가, 1290년 원나라에 들어가 만안사(萬安寺) 당두(堂頭)의 청으로 『인왕경(仁王經)』을 강의하여 많은 사람의 종경을 받았다.
제16세 고봉화상高峰和尙 법장法藏
스님의 휘는 법장法藏이고(일명 지숭志崇) 법호는 고봉高峰이며. 속성은 김씨金氏, 황해도 신천愼川(지금의 신천信川) 이 고향이요 어머니는 임씨林氏니 고려 충정왕忠定王 2년(1350) 신묘세辛卯歲에 태어났다. 어려서 출가하여 삼장을 이수한 후 선석選席을 마치자 제방에 다니면서 참선으로 일관하더니 나옹화상懶翁和尙을 배알하고 법을 받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일단 법을 얻은 뒤 천하를 주유하며, 성태聖胎를 장양長養하기30여년. 스님은 머리가 길어도 깎을 줄 몰랐고 표주박 하나를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걸식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항상 피리를 즐겨 불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스님이 그냥 걸뱅이인지 숨은 도인인지 판별을 못하는 것이었다. 이러구러 30여년을 다니는 동안 안동부安東府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손수 암자를 짓고 은거하기도 했으니 그 절이 바로 청량암이다. 스님이 이름과 자취를 숨기고 걸인 행색으로 살은 데에는 정진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고려가 망하고 새로이 이씨조선이 건국되는 어수선한 세태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해서 스님이 정변政變의 시류時流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은 아니고 어수선한 세상 모습에서 무상無常을 절감하고 오로지 도를 닦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태조李太朝 4년에 남방의 여러 산을 유력하던 선사는 락안군樂安郡 금전산金錢山 금둔사金芚寺에 이르러 유숙하더니 꿈속에서 매우 특수한 한 범찰梵刹을 보았다. 이튿날 선사는 다시 행각하여 마침내 조계산 송광사에서 다다랐는데 경내를 두루 살펴보니 바로 간밤 꿈에 보았던 그 절이었다. 그래서 숙생의 인연이 있음을 깨닫고 문인 등과 함께 서원을 세워 송광사를 중신重新하여 옛 모습을 복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윽고 복원불사에 착수한 선사는 일은 크고 힘은 작은지라 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나라의 힘을 빌려야겠다는 것을 절감하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때는 정종定宗 원년, 선사는 궐하에 나아가 주상主上에게 상주上奏하니 주상께서 윤허하셨으며 이듬해 7월에 선사는 왕지王旨와 서운관書雲觀 비보안裨補案을 받들고 본사로 돌아왔다. 선사는 곧 모든 치소緇素에게 화주化主와 시주를 권하는 한편 대목大木인 운자雲疵, 상제尙濟 등 30여명을 청하여 재목의 길고 짧음과 터의 넓고 좁음을 구제舊制에 준하여 불법승 중 전당 서너채를 건축하고는 늙음을 빙자하여 주지직을 사퇴하였다. 선사는 다시 행각에 나서 경상도 각 사찰을 순력巡歷 하였는데 정종定宗 4년에는 김해부金海府 신어산神魚山 각암覺庵에 주석하였으며 정종定宗 13년 여름에는 경주慶州 봉양산鳳樣山 원원사遠源寺에 안거하였으며 또 그 이듬해 봄에는 울산蔚山 불광산佛光山 태원암太元庵에 머물다가 4월 하안거 때에 본사인 송광사로 돌아왔다. 세종世宗 2년 조계종曹溪宗 대선사大禪師 중인中印이 송광사 주지로 부임하자 선사는 중인 스님과 함께 힘을 합하여 증축 불사를 시작하였다. 이 불사에는 선사의 문인 10여명과 증인스님의 문도 십여명이 모두 적극 참여하여 9월에 이르러 거의 준공을 보게 되었는데 중인주지가 개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래서 선사는 주지직을 다시 맡아서 공사를 모두 마치고 겨울에 낙경회落慶會를 베풀고 좌선과 상축上祝을 겸행하고 두 문도들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세종世宗 3년 7월 11일. 선사는 처음으로 미병微病을 보였는데 병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평상시와 같이 큰 방에 나아가 발우를 펴고 좌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몸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21일이 되자 아침 일찍 고당각웅古堂覺雄 스님을 불러 림종게臨終偈를 구술한 터이니 받아쓰라고 한다.
“청정본연극령롱淸淨本然極玲瓏 산하대지절점공山河大地絶點空
청청 본연하여 지극히 영롱하나니 산하대지가 점이 끊겨 공하도다.
곤노일체종하기昆盧一體從何起 해인능인삼미통海印能仁三味通
비로 부처님은 어디에서 이는가? 해인은 능인께서 삼매로 통달했네.
칠십팔년귀고향七十八年歸故鄕 대지산하진십방大地山河盡十方
78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노니 대지 산하가 온 시방이로다
찰찰진진개아작刹刹塵塵皆我作 두두물물본진향頭頭物物本眞鄕
티끌 같은 온 누리 모두 내가 지었나니 낱낱 물건들이 본래의 참고향일세. ”
임종게 옳기를 마친 선사는 제자에게 유언하기를, “나의 유해는 3년을 지낸 뒤에 안처에 갊으라. ” 하고는 엄연히 서거하였다. 문인들은 도유闍維하여 그 유해를 함에 넣은 뒤 스승님의 유언대로 침실에 모셔 두었다. 세수는 78, 법랍은 68하夏. 이듬해 3월 28일에 문인 신준信俊 등 다섯 사람이 이향異香이 방안에 가득함을 감지하고 함을 열어보니 정영精瑩한 사리舍利 두 알이 맨 위에 나와 있었다. 다시 이듬해 3월 24 일에는 산중대중이 정근하여 사리 12과顆를 얻었으며 그믐달에도 정근을 모시고 15과를 얻고 12월 8일에도 정근을 모셔 8과를 얻어 모두 합하여 37과의 사리를 얻었다. 그 가운데 사리 30과는 문인과 대증들이 받들고 다니면서 인연 따라 공양하고 큰 사리 4과와 뼈는 수정 통에 담아서 흰 구리 합에 넣은 후 푸른 명주로 싸서 문인 신찬信贊·혜성慧性·상제尙濟·홍인洪仁·홍연洪延 등 10여명 이 송광사의 북쪽 산등성 이 (현재의 청진암淸眞庵 터의 안산案山) 에 탑을 세웠다. 선사가 정종대왕定宗大王의 우악優渥하신 도움을 받아 송광사를 증홍하게 된 데에는 선사의 사형이신 무학왕사無學王師의 소개와 내조의 힘이 컸을 것으로 사료된다. 선사의 법계法系는 다음과 같다.
나옹혜근懶翁慧勤 -고봉법장高峰法藏 운비雲庇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고승 20선
<경허 성우 1840~1912>
경허 성우(鏡虛 惺牛)스님은 한국 근대 선의 중흥조로 일컬어질만큼 승풍 진작과 깨달음을 만행으로 회향한 근세 최고 고승이다. 선의 진면목과 선풍를 드날림으로써 한국선종이 새롭게 부흥하는데 기여했다. 이는 수선결사(修禪結社)에서 나타난다.
1899년 해인사 결사를 필두로 화엄사 범어사등 수선사(修禪社)를 창건하며 수선 붐을 일으켰다. 수선결사의 성격은 동수정혜(同修定慧, 보조지눌이 선풍을 진작한 후 서산대사 청허휴정을 거쳐오면서 면면히 이어진 정법안장), 동생도솔(염불을 통한 정토왕생을 추구), 동성불과(同成佛果,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비원)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선문촬요〉를 저술, 수행자들에게 선의 지침을 제공해 주었다. 말년에는 중생속으로 들어가 깨달음을 회향하기도 했다. 산중불교를 대중속으로 끌어와 중생교화에 앞장선 것은 가장 주목될 대목이다.
<용성 진종 1864~1940>
용성 진종(龍城 震鐘)스님은 선수행에 진력한 선사이자 계행에 철저한 율사,
3.1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불교경전의 한글 번역에 주력한 역경가로서
한국 근세불교사의 거목으로 추앙받는다.무엇보다 일제 암흑기에 대각교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현대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스님은 선종교당(禪宗敎堂), 대각사란 도심 포교당을 세워 현대식 포교방법을 최초로 도입하는가 하면, 불교의식 간소화 및 찬불가 제정, 경전 한글화를 통한 불교 현대화, 사회화, 대중화를 선도했다.
또한 북청탄광 경영, 화과원(華果院) 운영등 승단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선농일치를 주창한 것은 근대 한국 불교사의 가히 혁명적인 실천이념으로 한국승단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만공 월면 1870~1946>
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은 경허의 혜명(慧命)을 이어 근·현대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 청허와 사명이 조선중기 선의 중흥조이라면 경허·만공스님은 한국불교 근대 선의 중흥조라 불린다.
스님은 우주와 만물의 본체로서, 마음을 가장 중요시했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데 있고 인간의 가치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3년간 금강산 마하연에서의 선지도와 1937년을 전후한 마곡사 주지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켰다. 스님은 또한 1920년대 초 선학원 설립운동을 했으며, 선승들의 결사인 동시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모임 성격의 선우공제회운동에 참여했다.
<석전 정호 1870~1948>
근대 불교교육의 선구자로 교학발전에 공헌한 석전 정호스님(石顚 鼎鎬)은 금봉 진응스님과 함께 근대불교 3대 강백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불교를 살리는 길은 곧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소신아래 조선불교 교정, 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으며 교육 일선에 투신했다. 삼장강설(三藏講設)은 물론 시문(詩文)과 경사자집(經史子集), 노장학(老莊學), 심지어 서법(書法)까지 겸통해 당대 석학과의 교유가 많았다. 최남선은 “스님의 해박하심은 내외전(內外典)을 꿰뚫어 감히 내가 미칠바가 못된다”며 흠모했다.아호인 석전도 추사 김정희가 크게 될 후손에게 남기라 전한 것을 받아 생긴 것.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정인보등 당대 석학과 교유속에 속명인 박한영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하다. 청담 운허 미당등 제자를 배출했다.
불교인의 시대적 자각을 교육을 통해 독려했던 스님은 불교 유신의 방법으로 참다운 계·정·혜, 이타행, 학교설립과 인재양성, 포교의 현대화, 생산불교로의 전환, 인민에 대한 자선사업 6가지를 주창했다.
<만암 종헌 1876~1946>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만암 종헌(曼庵 宗憲)스님. 교육과 수행, 전법등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키는데 평생 한치의 흐트러짐 없었던 근대 한국불교의 큰 봉우리다.
스님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에 대한 열정. 1917년 백양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전통 현대를 겸비한 승려교육을 위해 광성의숙을 설립했고, 일반인을 위한 심상학교를 세웠다. 그뒤 1928년 박한영 스님과 함께 주도한 불교전수학교(동국대 전신) 설립,1947년 전남 광산군의 정광중학교 설립등이 이어졌다.
1925년 임제종 설립을 주도했던 스님은 50년엔 한암스님에 이어 제 2대 교정에 추대되면서 종단명칭을 조계종으로, 교정을 종정으로 바꿔 한국불교의 법통을 세웠다.
<한암 중원 1876~1951>
한암 중원(漢岩 重遠)스님.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에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선교를 아우른 근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다.
1899년 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선사를 만나 설법을 듣는 인연을 맺고 전법제자가 되어 수년간 문하에서 참선 공부를 한다. 그 명성이 이미 자자해 스님이 30세 되던 1905년에는 통도사의 조실로 추대됐고, 5년후엔 홀연 평안도 맹산 우두암으로 은거했다가 50세 되던해(1925년) 봉은사의 조실로 추대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도 한암스님 하면 오대산 상원사를 떠올린다. 1925년 봉은사 조실 자리를 내놓고 상원사로 들어간 스님이 입적할때인 1951년까지 산문 밖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데다,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이 상원사를 소각하려는 것을 몸을 던져 막았던 일화 때문이다.
스님은 1941년부터 45년까지 조계종 초대종정을 역임했다.
<용운 봉완 1879~1944>
일제 암흑기에 민족독립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최고의 시인. 법호 만해로 더 알려진 용운 봉완(龍雲 奉玩)스님은 이렇듯 한국 현대 불교사 뿐 아니라 현대 한국사와 문단사에도 기리 남을 기라성 같은 분이다. 스님은 민족대표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는등 민족 독립이라는 당대 현실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또한 불교혁신운동을 일으켜 한국 현대불교의 이정표를 세운 일도 큰 공적이다.
불교중흥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시론인 〈조선불교유신론〉저술, 불법홍포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월간‘유심’과 ‘불교’운영,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하려 했던 이회광 일파의 원종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펼친 일, 비밀결사 만당을 결성했던 일등이 바로 그것이다.
<효봉 원명 1888~1966>
버림과 하심, 그리고 끝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궁극의 깨달음을 구가하는 불가(佛家)의 가르침을 실천한 상징적 인물로 효봉 원명(曉峰 元明)스님을 꼽는다. ‘한국인 최초의 법관’이라는 사회적 명망과 권위를 하루 아침에 송두리채 벗어던지고 중생제도와 불교 정화에 투신한 대표적 스님 가운데 한 분이기 때문이다.
석두화상을 은사로 37세란 늦깍이에 출가한 스님은 1년6개월간의 토굴고행등 철저한 수행과계행으로 한국불교의 손꼽히는 선지식으로 남아있다.이같은 철저한 계행과 수행력은 곧 한국불교의 숙원이었던 정화운동에도 참여케 했다. 1954년 동산 금오 금봉 청담스님과 함께 정화운동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앞장선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1957년), 초대 종정(1962년)등을 역임했다.
<동산 혜일 1890~1966>
당대 석학 오세창옹의 생질이자 주시경 선생에게서 신학문을 배운 동산 혜일스님(東山 慧日)은의학전문학교를 졸업, 범어사 용성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스님의 일생은 칼날같은 수행정신과 철저한 지계정신으로 일관한 삶이었다. 선·교·율을 겸비한 스승으로 임종 직전까지 선방에서만 산 본분납자다. 참선정진은 물론 지계 교학 전법 불사 도제양성등 어느 한곳에도 기움이 없었다. 해인사·금어선원·범어사 조실,범어사 금강계단의 전계아사리를 겸하며 사부대중의 사표가 되었다.
스승 용성선사가 역경불사로 불교 현대화와 포교도생(布敎度生)에 역점을 둔 반면, 동산선사는 순수한 수도승으로서 산사에서 일생을 마친 점이 다르다.
특히 스님은 여느스님보다 평등무차의 자비행과 이타행을 실천해 성철 자운 지효 화엄 능가 광덕스님등 1백30여명에 달하는 많은 상좌를 두었다.
<경봉 정석 1892~1982>
1907년 6월 성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경봉 정석(鏡峰 靖錫)스님은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경전연구에 몰두했다. 어느 날 스님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 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구절에 충격 받고, 마음 속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참선에 몰두하게 된다.
해인사 퇴설당 안거를 시작으로 금강산 마하연·석왕사 등 이름난 선방을 찾아다니던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장좌불와 등 정진을 계속했다. 마침내 1927년 11월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50년을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사장, 1949년 통도사 주지 등을 역임한 뒤, 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납자·불자들을 지도했다.
<운허 용하 1892-1980>
근대 역경사에서 큰 획을 그은 운허 용하(耘虛 龍夏)스님. 대장경 한글화의 선구자인 스님은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맹렬히 전개하다 출가인연을 맺었다.
스님은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성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지낸다. 이해 항일단체인 대동청년단에 가입한 스님은 그 뒤 흥동학교, 배달학교 등을 설립하며 아동들을 중심으로 한 교포교육에 전념했다. 1919년 ‘서로군정서’ 기관지 〈한족신보〉의 사장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21년 강원도 유점사에 들어가 경송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다.
그 뒤 스님은 학인동맹을 조직하는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교육과 역경사업에 심혈을 쏟는다. 불교대중화를 위한 스님의 원력은 61년 국내 최초 〈불교사전〉 발간으로 나타났고, 64년 동국역경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하면서 〈한글대장경〉 간행에 전념하며 근대 역경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수능엄경〉 〈사분비계니계본〉 〈범망경〉 〈묘법연화경〉등 스님이 역술한 주옥같은 경전들은 지금도 애송되는 것들이다.
<금오 태전 1896~1968>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스님은 법주사의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나아가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기까지 스님이 이룩한 업적은 참으로 크다고 하겠다. 스님은 1896년 7월 23일 전라남도 강진에서 동래 정씨로 태어났다.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 그리고 이름이 태전이다.
어려서 서당 교육을 받았지만 뜻이 다른 데 있어 공부에는 열성이 없었다. 스님이 태어났던 시기는 한국근대사에 있어 격동의 연속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과 갑오경장의 개혁으로 온 나라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민초들의 함성으로 들끓었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 억압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반봉건체제 하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 야욕은 조선의 주체성을 말살시키고 있었다. 스님은 이러한 때 유년 시절을 보내며 일찍부터 불도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12년 3월 마침내 스님은 15세로 금강산 마하연사에 출가하여 도암 긍현(道庵亘玄) 선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안변 석왕사 등지에서 불교의 기초교육을 습득하고 1921년에는 오대산 월정사에서 화두를 들고 참선 수행하였다. 이해 8월에는 통도사에서 일봉(一峰) 율사를 계사(戒師)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남달리 참선수행에 정진하였다.
그 뒤 수 년 간 통도사 보광선원과 천성사 미타암 등지에서 수행하다가 충청남도 예산 보덕사의 보월(寶月) 선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 갔다. 그러나 보월 선사는 스님의 그릇됨을 보기 위해 쉽게 제자로 거두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금오 스님은, “시방세계를 투철히 오르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하나하나가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 보아도 역시 없고 없을 뿐이네.” 라는 오도송을 올리자 그제야 제자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치루지 못한 채 보월 선사가 1924년에 입적하고 말았다. 이듬해 보월 선사의 스승인 만공(滿空) 선사에게서 건당식을 받고 전법계까지 수지하였다.
스님의 수행은 계속되었다. 10여 년 간 각지의 선방을 유력하였고, 심지어는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해 2년씩이나 거지생활도 하였다. 1935년에는 경상북도 김천 직지사의 조실을 지냈고, 이후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 지리산 칠불사, 서울 선학원 등에서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스님은 항상 제자들에게, “불법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깝지 않는 정신으로 임해야 한다.”며 투철한 수행자세를 강조하였고, 스스로 그런 자세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출가자의 모범적 자세가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1954년에는 불교정화를 위한 전국비구승대회의 추진위원장이 되었다.
당시 스님은, “정화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속의 불량한 때를 씻어 버리는 것이 정화요, 몸의 일체비행을 고치는 것이 정화이다.” 라고 하여 대처승을 축출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5년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 이듬해 서울 봉은사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그리고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다.
스님이 법주사에 주석하기 시작한 것은 1967년으로서 당시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젊은 수좌들에게 열정적으로 불도를 가르쳤다. 이듬해 1968년 10월 8일 ‘무념으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1975년 법주사에 스님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
세수 73세, 법랍 57년을 살다간 스님의 생애는 한국불교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스님은 “참선을 하지 않는 납자는 승려 자격이 없다.”고 할 정도로 선수행에 몰입하였다.
스님의 선풍(禪風)은 한국 정통선을 계승하였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해져 오늘날 조계종을 이끌어 가는 주역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제자로는 불국선원의 조실인 월산(月山) 스님을 비롯해서 월주(月珠) 스님, 월탄(月誕) 스님 등 수십 명에 달한다. 이 분들에게서 다시 법을 이은 손상좌까지 포함하면 무려 6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스님이 일군 한국불교의 튼튼한 뿌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꽃을 피워나갈 것이다.
<전강 영신 1898~1975>
경허 만공으로 불붙기 시작한 선맥은 전강 영신(田岡 永信)스님으로 이어지며 근대선맥의 일가를 형성한다. 스님은 특히 일생동안 권위나 지위에 걸림없이 절차탁마한 수행자의 표본으로 유명하다.
김천 직지사 곡성 태안사등서 정진하던 스님은 혜봉스님, 혜월스님을 만나 선담을 나누고,1923년 금강산 지장암에 있던 한암스님을 찾아 선지를 담론한데 이어 만공선사를 만나 전법게를 받는다.
그후 육도만행의 운수행각을 벌이던 스님은 33세 젊은 나이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 된 것을 비롯 법주사 복천선원, 김천 수도선원, 광주 자운사등 전국의 제방에서 후학들을 제접한다. 특히 6.25때 제자 송담스님을 보호하고 뒷바라지 하기 위해 시정에서 장사를 했던 유명한 일화는 두고두고 스님을 사표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고암 상언 1899~1988>
고암 상언(古庵 祥彦)스님은 제산 혜월 만공 용성 한암스님등 대선객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성만한 후 38년 용성스님에게 전법계를 받았다.
1967년 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됐으며 1970년 해인총림 2대 방장, 72년 4대 종정, 78년 6대종정, 80년 용성문장에 취임했다. 88년 10월 25일 가야산 해인사 용탑선원에서 세수90, 법랍71세로 입적했다. 자비보살의 무소유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스님은 소박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였다. 재물이나 명예가 수행자에게 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스님은 자신에게 올려진 공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는 등 평생을 무욕청정으로 살았다.
<청담 순호 1902~1971>
청담 순호(靑潭 淳浩)스님은 불교정화운동등을 통해 일평생 교단 재건에 앞장선 분이다.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효시인 50명의 승려를 규합해 개운사서 전국학인대회를 결성한 것이나,
54년 선학원서 동산 효봉 금오스님등과 전국비구승대회를 개최 왜색불교 타파를 위한 정화의 기치를 내건 것등은 스님의 불교중흥의 결연한 의지와 실천을 알게 한다. 이어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1955년)과, 통합종단 2대 종정(1966년)에 이어 청정 승가 구현을 위해 종단 탈퇴선언(1969년)까지 감행할 만큼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종단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계종 3대 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가 바로 스님을 통해 제시됐으며, 율법제일주의 확립과 승가대 건립, 대중불교와 청정 승가의 토대를 구축했다.
<구산 수련 1909~1983>
구산 수련(九山秀蓮)스님은 송광사 백양사 운문암 해인사 동화사 금당선원등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한 선사다. 53년 통영미래사 창건, 56년 조계종 감찰원장, 62년 동화사 주지, 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한 후 초대방장을 맡았다. 73년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한 이래 79년 미국 L.A 고려사, 82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 미국카멜 대각사를 개원하는등 해외포교에 진력해 큰 성과를 남겼다. 이와함께 69년 불일회를 창립 총재에 취임한 후 국내 대중포교 현대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효봉스님의 법맥을 이은 구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 동화사 금당선원 청암사 수도암등지에서 참구한 선사로 한국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했다. 구산스님은 또한 선사로서는 드물게 해외포교와 대중포교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송광사 중창불사를 이뤄냈다.
<자운 성우 1911~1992>
자운 성우(慈雲 盛祐)스님은 범어사 해인사 선암사 대승사 도리사 불영사 금강산 마하연 등 전국 선원에서 서래밀지(西來密旨)를 탐구했으며 1934년 4월부터 해인사에서 경·율장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율풍진작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오대산 동대 문수보살상 앞에서 백일간 기도 끝에 서상(瑞祥)을 받은 스님은 1953년 한문본 비구·비구니계본과 사미·사미니율의 3만부를 간행·홍포했다.
규정원장(1975)과 총무원장(1976)을 역임한 스님은 82년부터 단일계단 전계사로 1천76명의 수계자를 배출했으며, 스님이 배출한 보살계 수계자만도 1만7천82명에 이른다. 동국역경원장 등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한평생 청정율풍 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퇴옹 성철 1912~1993>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법어로 현대인에게 올바른 삶과 깨달음을 일깨운 퇴옹 성철(退翁 性徹)스님. 스님은 철저한 계행과 쉬운 법어로 한국불교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데 공헌했다.
청담 자운 월산스님등과 함께 일으킨 봉암사 결사나, 성전암에서 8년간의 장좌불와 수행, 그리고 종정 추대 때도 산문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수행으로 일관한 선사다.
스님은 선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상적 모색을 끊임없이 펼친 불교사상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대표저서 〈선문정로〉를 통해 돈오점수론의 한계를 지적, 돈오돈수에 입각한 간화선의 사상적 기원과 실천론을 천명했다.
이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둘러싼 선논쟁의 계기를 부여했으며, 조계종 종조를 보조 지눌이 아닌, 태고 보우스님으로 다시 강조하는 등 한국불교의 선 부흥에 크게 기여했다.
<탄허 택성 1913~1983>
“유·불·선 삼교와 동양학의 대도를 관통한 당대의 석학” 탄허 택성(呑虛 宅成)스님은 소년기에 이미 부친에게 유학을 수학, 한학 전반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21살 때까지 유교의 진수를 터득하고, 노자와 장자의 도교까지 섭렵한 스님은 “좀 더 훌륭한 스승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오대산 한암스님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친 편지 왕래 끝에 1934년 마침내 출가하게 된다.
출가 후 3년간 묵언하면서 오직 참선에만 정진했던 스님은 17년간 상원사에서 두문불출한 채 〈화엄경〉을 비롯한 내·외전 일체를 공부했다. 55년부터 본격적인 후학양성에 나서 오대산 연수원장, 동국대 대학선원장, 초대 중앙역경원장 등을 역임했다.물론 스님이 전력을 기울인 부분은 〈화엄경〉 역경. 청량징관의 〈화엄경소초〉와 이통현장자의 〈화엄론〉을 참조해 〈신화엄경합론〉 1백20권을 번역한 것은 “스님만이 할 수 있는 일”로 평가된다.
<금하 광덕 1927~1999>
금하 광덕(金河 光德)스님은 195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이후 범어사 금어선원 마산 장춘사등 제방선원과 무인도인 죽도등지서 참선정진해 계·정·혜 삼학을 원만히 닦아 동산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56년 대각회 창립 초대회장, 58년 조계종 중앙감찰위원, 63년 대학생불교연합회 초대 지도법사, 봉은사 주지, 학교법인 대동학원 및 학교법인 원효학원 이사, 74년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장, 순수불교 운동지 월간 ‘불광’ 발행인, 75년 불광법회 창립법주, 79년 불광출판부 개설 발행인 등을 역임했으며 99년 2월 27일 열반에 들었다.광덕스님은 한국불교의 대중화와 현대화에 큰 획을 그은 선각자로 평가된다.
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 월간 ‘불광’창간, 불광법회 창립등 문서포교와 도심포교등 현대적 포교의 신기원을 이뤄냈다. 또한 〈메아리 없는 골짜기〉등 20여권의 역저서와 ‘마하반야의 노래’ 등 다수의 찬불가도 작사했다.
■어떻게 선정했나
이번 선정은 △20C에 입적한 스님 △20C 한국불교사에 끼친 영향력(선, 교학, 종단재건, 포교, 현대화)등을 기준으로, 본지가 뽑은 50여명을 총30명의 선정위원들(한 위원은 1명의 스님만 추천해 집계에는 탈락시킴, 총29표)에게 의뢰했다. 선정방법은 위원들의 최다 추천수 순으로 했다.
이 가운데 경허 만해 효봉 성철스님은 위원들의 만장일치(29)로 선정됐으며, 1표가 적은 만공 용성 탄허스님(28), 그 다음이 동산 청담(27), 경봉(26) 한암(25) 석전(23) 전강(22)순으로 최다수를 확보, 이 분들이 끼친 영향력을 실감케 했다.수월 묵담스님을 비롯 구하 춘성 향곡 혜월 석암 월산 소천 지월 벽안 고봉 학명 석우 진응 대륜 혜암 기종 종수 경산 기산 지효 지암스님도 비록 선정에는 빠졌으나 한국불교사를 빛낸 고승으로 거론됐다.
선정위원(무순)은 법등(종회의장) 청화 명진 지명 여연 학담 현응(종회의원),
원택(총무부장), 도법(실상사주지), 종림(대장경연구소 소장), 현성(중앙승가대 총장) 정인 본각(중앙승가대) 성본 해주(동국대), 무비(범어사) 무관(해인사) 지오(해인사 강주) 지운(송광사 강주), 영담(불교신문사 사장), 임혜봉 정병조 권기종 김상현 목정배 김광식(불교관련 사학교수 및 연구가), 홍사성 김인수 윤창화 윤청광씨(언론 출판 및 작가)다. 고승20선 게재순서는 출생연도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