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20분 성당 출발
추석 연휴 기간이라 도로가 밀릴 것을 예상했으나 버스는 수월하게 달린다.
1시간 여를 달려 이인 휴게소 휴식
목적지인 충남 당진군 합덕읍 '신리성지 ' 까지는 2시간 30여분이 소요된다.
신리성지는 중심으로 한 주변의 넓은 평야지를 '내포'라고 한다.
바다가 육지 안으로 깊숙이 휘어 들어간 지역을 뜻하는 말로, 처음에는 바닷물이 수로를 타고 내륙으로 들어와 육지와 만나는 지역을 가리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조선 시대에 천주교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내포 지역은 몇 가지 특징이 있어,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들어오기에 용이한 곳이다.
첫째, 서해와 연결되는 평평한 습지로 구성되어 간척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 수로와 바닷길, 그리고 육로가 발달되어 있어 외부와 교류하기에 좋은 여건을 갖췄다.
셋째, 행정적으로 월경지라는 특수한 체계를 갖고 있다.
1865년 위앵 신부가 신리에 들어왔을 때 400명의 주민 모두가 신자였다. 신자가 아닌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1986년 병인박해 때 위앵 신부는 물론 신자 42명이 순교했다. 단일 마을로는 희생이 가장 컸다.
내포의 너른 들녘에 자리한 신리성지는 어느 한 곳 막힘이 없이 툭 트인 벌판에 자리하고 있다.
넓은 잔디 밭에 여기저기 몇개의 건축물들이 자리잡은 모습은 매우 이국적인 풍경이다.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우리는 팁승 차량에 따라 3개의 조로 나뉘어 '십자가의 길'을 정성과 경건함을 더한 기도를 바치며 걷는다.
실외 잔디 밭에는 십자가의 길이 이어지고 가는 길 따라 신리의 '다섯 성인'의 경당이 있다.
1)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요(한국명: 안돈이)
"예수님을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2) 성 오메트로 베드로 신부
"저는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 시안이 골수에 새겨겼습니다."
3) 성 위엥 루카 신부
"좋으신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거룩한 복음의 증인이 되어 제 피를 쏟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조선입니다."
4) 성 황석두 루카
"나는 이미 천당 가는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이 세상이 과거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5) 성 손자선 토마스
"나는 솔직히 죽는 것을 몹시 무서워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죽는 것보다 몇 천배 무서워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나의 주님이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이제는 손자손 생가로 이동
내포의 사도 '이존창'이 세례를 받은 1784년 이후 신리에 천주교가 전해지게 된다. 이 시기 신리에 정착해 살고 있던 '밀양 손씨' 집안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1866년 무렵에는 마을 사람 400 여명 전체가 신자로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성장한다.
신리는 바닷길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내포의 교우촌 들과 쉽게 연결된다는 이점이 있었기에 조선 천주교의 중요한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1865년부터 신리에는 제5대 조선 교구장 다블뤼 즈료가 거주했으며, 손자선 토마스의 생가의 마루 지하에서 생활하면서 조선천주교사를 집필한 곳이다.
성당 앞 야외 경당과 종탑의 풍경이 참 이국적인 멋이 있다.
11시에 시작 되는 미사에 참여.
김동겸 베드로 신부님의 강론은 '신앙인들의 삶에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 주제였다.
미사를 마치고 야외 경당에서 단체 인증 샷 남기기
점심 식사를 먹으로 식당으로 이동.
마침 하늘이 우리가 이동하는데 불편 없이 흐려서 좋다.
풍경도 더 멋진 듯
'신비로운 그릇' 모여라~~ ㅋ
제5대 조선 교구 역할을 하며 조선천주교회 초기 박해시절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성지인 이곳에는 순교 미술관 외에도 순례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강당, 순례자 센터 등의 시설이 함께 조성돼 있으며, 인근에 무명순교자의 묘 46기도 위치해 있다.
신리성지 관계자는 “성지를 순례하고 방문하는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순교 미술관의 작품들을 통해 신리의 다섯 성인과 순교자들, 그리고 신앙인들의 삶을 본받아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미술과 옥상으로 오른다.
흥선대원군의 명령으로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그가 실각하는 1873년까지 게속된 박해를 일컫는다. 신리에는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고 있엇기에 관련 인물들이 먼저 체포 되었다.
다블뤼 주교, 위엥 신부, 황석두 복사는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다음날 손자선 회잘은 공주에서 순교하였으며, 같은 해 네 명의 신자가 이듬해, 6명이 순교록에 그 이름을 올리게 된다. 1868년 더 큰 박해가 일어나면서 신리의 신자 19명이 순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상황이나 특정한 상황에 연루되어 신리의 신자들은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에 따라 순교의 길을 걸음으로써 신리성지 인근 1.8km 지점에는 무명순교자의 묘 46기도 위치해 있다.
가까운 곳에 많은 성지들이 있어, 이곳에는 '베그내 순례길'이 있다.
돌아오는 길
신리 성지 순교 미술관의 뒷모습
오늘 하루 주님의 은총 충만한 하루를 보낸 듯하여 기분 좋다.
https://youtu.be/ephocRP12Bc?si=mPKa_kcGLvRDvdmh
https://youtu.be/P2B3asB5BBI?si=3OKI-pVbZC83Afz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