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과 태백산이 만나는 영월의 아늑한 산자락, 따뜻한 햇볕이 드는 양지 바른 그곳에 예사롭지 않은 묘지 한 기가 있다. 보기에도 여느 묘 같지 않다. 뭔가 한 세월을 풍미한 인물의 묘지 같다. 묘지의 비석엔 ‘詩仙蘭皐金炳淵之墓(시선난고김병연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바로 우리에게 방랑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의 묘지다.
김삿갓. 우리에게 방랑시인으로만 알려져 있지, 실제 그가 어디서 태어나 왜 영월에서 생활했으며, 어떻게 자랐고 살았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30여 년간의 방랑생활 포함 57년의 생애 중 20년 가까이 생활한 영월 생가터에서 그가 다닌 길을 통해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가보자.
- ▲ 영월 문화해설사인 ‘마대산 김삿갓’ 최상락씨가 김삿갓 생가터로 안내하기 위해 앞장 서 가는 모습이 영락없는 그 옛날 방랑시인 김삿갓의 재현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그는 1807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영월의 첩첩산중 골짜기에 생가가 있고, 묘지는 또 이곳에 있을까?
그의 삶을 얘기하기 위해선 우선, 순조 11년(1811년)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그의 나이 5세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평북 선천부사 겸 방어사 김익순이다. 선천부사와 방어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와 도경찰청장 정도 되는 자리다. 지방의 행정과 방어를 도맡았던 할아버지는 반역자 홍경래에게 선뜻 항복해 버린다. 정확한 상황이야 논외로 치고, 적에게 ‘항복’한 사실은 전후 상황을 설명할 필요도 없이 대역죄인으로 취급된다. 당연히 참수형을 당하고 가문은 멸문지화된다. 그가 방랑생활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났다. 부모와 동생, 형과 그는 따로 흩어져 피신했다. 그 뒤 멸족에서 폐족으로 가문의 죄가 한 등급 감해지자 겨우 부모와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9세 때인 1815년 아버지는 화병으로 사망했다. 폐족자라는 멸시의 눈을 피해 어머니는 가족들을 데리고 영월로 이주해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곳이 지금 생가터와 묘지가 있는 장소다.
김삿갓문학관에서 생가터가 있는 곳까지는 2km 남짓 된다. 문학관에서는 매년 10월 김삿갓길 재현 행사를 가진다. 올해는 김삿갓 탄생 203주년이었다. 영월 출신 명사 203명을 초청, 삿갓과 도포를 갖춰 입고 걷기 행사를 벌였다. 그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 문학관에서 묘지를 거쳐 생가터까지 김삿갓을 생각하며 걷기로 했다.
문학관에서 바라보이는 그의 묘지와 생가터는 영락없는 명당터였다. 왼쪽은 태백산의 끝자락이며 오른쪽은 소백산 시발점으로, 양백지간(兩百之間) 유지앵소(柳枝鶯巢)의 형국이라고 한다.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꾀꼬리 집이라는 말이다.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 중 한 곳으로 에너지가 함축된 곳이라고 풍수지리적으로 설명한다.
김삿갓은 영월 골짜기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화전민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어머니는 양반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그에게 사서삼경을 가르쳤다.
- ▲ ‘마대산 김삿갓’이 정상에서 앞에 흐르는 남한강을 보며 설명하고 있다.
그의 생가터 뒤로는 남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마대산(1,071m)이 있다. 앞으로는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곡동천이 있다. 마대산과 곡동천이 놀이터였고 주요 생활터전이었다. 영월장을 보기 위해서 마대산을 넘어야 한다.
그는 마대산 자락에 살던 어린 시절 비상한 머리로 사서삼경을 독파했던 것으로 전한다. 산골짜기에 사는 어린 소년은 어머니를 따라 영월장으로 가는 길목인 마대산 정상에 올라 남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왜 내가 이곳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과 동시에 ‘언젠가 세상에 뜻을 펼칠 기회가 올 것’이라는 포부도 충분히 가졌을 법하다.
어둠골로 올라 신선골로 내려와
그의 비상한 재주와 천재성은 그를 영월의 산골짜기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가 20세 되던 해 영월관청에서 실시하는 백일장에 응시했다. 그의 집 뒤 마대산을 넘어 평소 쌓았던 실력을 발휘하기 위해 영월관가로 향했다.
시제가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이었다. ‘홍경래의 난 때 가산군수 정시의 충절을 논하고 김익순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를 한탄하라’는 내용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통렬히 비판하는 내용으로 장원급제를 했다. 이 때까지 김익순이 자기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를 통해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아 방랑생활을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과연 20세나 되는 가장이 그의 가족 내력을 몰랐을 리 없다. 과거와 그에 준하는 시험을 보기 위해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도 어느 집안 누구인지 가족관계를 반드시 기재해야 한다. 가족관계를 가명으로 작성해서 장원급제했지만 폐족인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은둔이나 방랑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허위로 작성한 가족관계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조상에 대한 원망, 폐쇄된 양반사회에 대한 선망과 경멸 등 복합적인 감정이 작용했을 것이다.
- ▲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 묘역.
그는 영월에서 신분을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양으로 향했다. 벼슬길을 모색하기 위해 가명으로 권문세가의 자제들과 교류도 시도했다. 그러나 폐족으로서 도저히 입신양명은 어렵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년 만에 낙향해 버린다. 능력은 있지만 폐족이라는 자신의 출신성분과 그로 인해 앞길이 막혀버린 좌절감과 울분 등이 영월에서 겪었던 비참한 감정에 더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처자식을 내버려두고 혈혈단신 빈털터리로 집을 떠난 김삿갓은 정해진 곳도 오라는 곳도 없이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발길 닿는 대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그게 22세 되던 해부터였다. 세상만사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그렇고 그런 세상 되는 대로 살자는, 그런 한탄하는 신세를 시로 읊었다. 좌절감을 절실히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 ‘化去竹(화거죽, 되는 대로)’이다.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 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이대로 /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붙이는 저대로 / 손님 접대는 가세대로 / 시정 매매는 세월대로 / 만사가 안 되네 내 마음대로 /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문학관에서 출발해서 묘지에 도착, 한동안 과거로 돌아간 듯 그의 인생에 대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늦가을 하늘은 더더욱 김삿갓의 삶만큼이나 을씨년스러웠다. 울긋불긋 단풍나무들은 이제 쭈글쭈글해져 가지를 앙상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길 위로는 떨어진 낙엽으로 가득했다.
길을 안내한 영월 문화해설사 최상락씨는 “묘지터는 겨울에 해가 가장 빨리 떠서 가장 늦게까지 머무는 자리”라고 명당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최씨는 항상 김삿갓 복장으로 김삿갓길을 안내하는 자칭 ‘마대산 김삿갓’이다. 이젠 누구나 부르는 별명이 된 지도 제법 오래됐다고 한다.
- ▲ 매년 김삿갓길 걷기 행사마다 조성하는 곡동천 위의 섶다리. 그 위로 마대산 김삿갓이 걷고 있다.
생가터 복원으로 탐방객 줄이어
묘지에서 마대산 생가터를 향해 걸었다. 마을 성황당이 식수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나는 탐방객들은 삼삼오오 절을 했다. 올라가는 길은 차가 한 대 지나갈 수 있을 만한 널찍한 임도다. ‘마대산 김삿갓’ 최씨의 죽장에 도포와 갓을 쓰고, 괴나리봇짐에 짚신과 호리병을 묶은 모습은 영락없는 김삿갓이었다. 늦가을의 고즈넉한 길과 딱 어울렸다.
최씨는 영월군에서 복원한 김삿갓 생가에 살고 있다. ‘현대판 김삿갓’인 셈이고, 지금 그의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김삿갓은 화전민 생활을 했으니, 제법 산 중턱으로 올라야 했다. 산이 그의 집이었고, 생활터전이었다. 어쩌면 좌절을 느끼기 전에 산 그 자체에 취해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시에도 산을 예찬한 작품이 자주 나온다. ‘看山(간산, 산구경)’이라는 시다.
‘게으른 말을 타니 산 구경하기가 더 좋아 / 느리다고 채찍 들어 때리지도 않네 / 바위 사이로 겨우 오솔길 하나 / 연기 나는 곳에는 초가 서너 채 // 꽃이 예쁘게 피었으니 봄이 왔는지 / 시냇물소리 들리니 비는 지나갔는가 / 물소리 들으며, 돌아갈 것을 까맣게 잊고 있는데 / 하인이 말하기를 해 저물어 간다고 하네’
어느 봄날 산에 올라 자연의 풍광에 흠뻑 빠진 자신의 심성을 그대로 읊은 듯하다. 아마 그의 생가터를 떠올리며 지은 시 같기도 하다. 산을 노래하면 그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조금은 달래졌을까?
그는 특히 금강산을 많이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삿갓은 고산자 김정호와 동시대에 살았고, 비슷한 연배로 추정된다. 전국을 누빈 김정호와 전국을 방랑한 김삿갓이 금강산에서 한번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삿갓은 봄·가을마다 금강산을 찾아 그 절경에 흠뻑 취했다고 한다.
- ▲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문학관.
‘松松栢栢岩岩廻(송송백백암암회) / 水水山山處處奇(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 물에 물, 산에 산, 곳곳이 절경이로다!’
그의 울분은 급기야 선비에 대한 조소와 해학으로까지 이어졌다. 대표적인 작품이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서당을 욕하다)’이다.
‘書堂來早知(서당내조지) / 房中皆尊物(방중개존물) / 生徒諸未十(생도제미십) / 先生來不謁(선생내불알)
서당에 일찍 와서 보니 / 방안에는 모두 존귀한 분들만 있고 / 생도는 모두 열 명도 못 되는데 / 훈장은 나와 보지도 않더라’
방랑생활 중 서당 훈장에게 홀대를 받자 즉석에서 걸쭉한 육담시를 지어 훈장을 조롱했다. 발음 나는 대로 읽어도 욕이고, 그 뜻도 또한 욕이다.
김삿갓 생가터 올라가는 길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생가터가 있는 왼쪽은 어둠골이고, 오른쪽은 신선골이다. 왼쪽으로 250년 이상 된 밤나무를 지나 그의 생가터에 도착했다. 이미 탐방객들이 몇 명 와 있었다. 집 주변은 고염나무, 돌배나무 등이 그대로 자라고 있다. ‘마대산 김삿갓’ 최씨는 “모두 250년 이상 된 나무들”이라고 했다. 나무들에게 ‘생전의 김삿갓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속으로 물었다. 묵묵부답이다.
- ▲ 영월군 김삿갓면에 있는 김삿갓 시공원. 그곳에 있는 김삿갓 시비와 동상. / 김삿갓 생가터를 찾은 방문객들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는 마대산 김삿갓. 생가에는 지금 마대산 김삿갓이 살고 있다.
마대산 정상에서 호연지기 키웠을 듯
김삿갓이 영월로 다녔을 마대산 옛길로 올라가보기로 했다. 생가터의 고도가 550m가량 됐다. 마대산 정상이 1,071m니, 500m 남짓 고도를 높여야 한다. 죽장에 도포 입고 삿갓 쓴 김삿갓 최씨도 흔쾌히 동의했다. 마대산 올라가는 ‘김삿갓 등산로’는 지금도 화전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늦가을 을씨년스런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좁은 공간에 다랑이로 논밭을 일궜던 자취는 한눈에 알아볼 정도였다.
마대산 올라가는 길에 낙엽송이 죽죽 뻗어 있다. 시원한 느낌이다. 최씨는 “낙엽송이 많은 산은 화전민이 살았던 흔적”이라며 “화전민을 내보내고 다시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장이 빠른 낙엽송을 특히 많이 심었다”고 말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마대산 정상에 섰다. 굽이져 흐르는 남한강의 강줄기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동북쪽으로는 소백산 정상도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마대산 김삿갓이 정상 바위에 걸터앉았다. 실제 김삿갓은 이곳에서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그의 시 ‘自嘆(자탄)’이다.
‘높고 높은 하늘인데 머리 들기 어렵고 / 넓고 넓은 땅이건만 다리 뻗을 곳조차 없네 / 새벽 누각에 오르는 것은 달구경을 위함이 아니고 / 사흘이나 굶는 것은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네’
정해진 곳도 없으려니와 오라는 곳도 없이 떠난 유랑길, 구름 따라 물결 따라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신세, 행장이라곤 괴나리봇짐이 전부였다. 스스로 읊은 대로 ‘빈 배처럼 가뿐한’ 삿갓 쓰고 죽장 짚고 괴나리봇짐 하나 짊어진 것이 다였다. 그렇게 큰 삿갓을 쓰고 다닌 것은 ‘하늘 아래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고, 세상 보기 부끄러워서’였다고 전한다.
- ▲ 마대산 김삿갓이 삿갓 쓰고 도포 입은 채로 생가터 뒤에 있는 마대산을 향해 오르고 있다. / 김삿갓 생가터 바로 밑에 있는 250년 이상 됐다고 하는 밤나무.
정상을 밟고 처녀봉을 거쳐 신선골로 내려왔다. 올라갈 때는 어둠골이었는데 하산길은 신선골이다. 김삿갓의 안타까운 삶 때문일까? 신선골로 내려왔는데도 별로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정처없이 떠도는 내 삿갓 빈 배와 같고 / 한번 쓰니 사십 평생 다 가는구나 / 소먹이 아이들이 들에 나서며 쉽게 걸치고 / 고기잡이 노인 갈매기 벗 삼는 것일세 // 술 취하면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어놓고 / 흥 오르면 달뜬 누각에도 걸치고 오르네 / 세상사람 의관은 겉모습 치장뿐이지만 / 내 삿갓은 비바람 가득 몰아쳐도 홀로 걱정 없어라’
삿갓을 노래한 그의 시 ‘笠(립)’이다. 신선골로 내려오던 김삿갓. 그렇다, 그는 이미 시선(詩仙)이 된 신선이었다. 세상에 꽃을 피우지 못한 시선이었고, 죽어서 영원히 꽃을 피운 시선이었다. 그는 세상에 좌절해서 울분을 터뜨렸지만 결과적으로 ‘자연으로 돌아간’ 자연주의자 혹은 도교주의자의 성향을 깊게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생명의 환희로 승화시킨 ‘深秋落葉(가을낙엽)’에서 보면 그의 이런 성향을 엿볼 수 있다.
‘깊은 가을 나뭇잎 하나 / 모진 서리에 병들어 / 미풍에 떨어지니 / 모진 서리 때문인가 / 실바람 때문인가’
좌절로 끝나지 않은 그의 삶을 느껴지는 듯하다. 지금 영월 ‘김삿갓길’에 가면 그가 시선이 돼 아직 길 위에 살아 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松松栢栢岩岩廻 水水山山處處奇 송송백백암암회, 수수산산처처기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가니, 물에 물, 산에 산, 곳곳이 절경이로다!
‘마대산 김삿갓’은 현대판 김삿갓…
“전생에 진 빚 갚으러 나를 보냈을 것”
- ▲ 마대산 김삿갓이 모처럼 삿갓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었다.
“왜 스스로 김삿갓이 되려고 하셨나요?”
“내 운명을 내가 어찌 알겠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각본이 짜여 있는 것 같아요. 마대산에 입산 이후 김삿갓 무예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도 다 부질없는 짓이라 그만뒀어요. 전생에 내가 김삿갓에게 빚진 일이 있겠죠. 그래서 그 빚을 갚으러 나를 보낸 것 아니겠소.”
김삿갓 생가에 살고 있는 ‘마대산 김삿갓’ 최상락씨의 말이다. 최씨는 지금 영월군청 소속 문화해설사로 있으면서 항상 김삿갓 복장 그대로 다니고 있다. 동네 모든 사람이 그를 “김삿갓”이라고 부른다. 마대산 김삿갓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미 마대산 명물이 됐다.
“언제부터 김삿갓 생가터에 사시기 시작하셨나요?”
“4년쯤 됐소.”
“그 전에는 어디 사셨나요?”
“사는 데서 살았죠.”
“가족은 없으신가요? 혹시 김삿갓같이 처자식을 버리고 여기 계신 건 아닌가요?”
“하하~, 그런 질문 받을 때마다 참 난감하오. 그것도 내 운명 아니겠소.”
방랑시인같이 시적으로 답을 하려는 것인지, 개인사를 말하기 싫어서 그런지 추상적인 답변으로 일관했다. 가파른 산길을 도포에 갓 쓰고 짚신 신고도 재빠르게 오르는 솜씨로 봐서는 예사롭지 않았다. 옛날 뭔가 한 가닥 한 것 같아 보였다.
“전에 운동을 하셨나요? 몸이 날렵하십니다.”
“옛날에 좀 했죠. 떠돌아다닐 때는 호신무예로 단련이 돼 있어야 합니다. 김삿갓의 죽장도 원래는 무기 대용으로 사용했어요. 떠돌이가 낯선 동네에 갈 때 그 동네사람들이 전부 경계를 하죠. 그리고 여차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어요. 그럴 때 죽장이 무기 대용으로 제격이죠.”
죽장이 무기 대용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마대산 김삿갓’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는 김삿갓에 대한 질문은 자신의 견해를 포함해서 해박하게 설명했다.
탐방가이드
영월 ‘김삿갓길’을 가기 위해선 영월군 김삿갓면으로 찾아가야 한다. 원래 하동면에서 지난해 10월 김삿갓면으로 아예 고쳤다. 아마 면 이름을 사람이름으로 바꾼 건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다. 그 정도로 영월군에서 김삿갓길을 관광자원으로 특화시키고 있다. 지난해 김삿갓 생가터 방문객이 2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삿갓길은 김삿갓문학관에서 김삿갓 묘지를 거쳐 김삿갓 생가터까지 2.4㎞가량 된다. 매년 김삿갓을 추모하며 걷기 행사를 벌이는 코스다. 가벼운 산책코스 정도의 거리다. 여기서 조금 더 걷는다면 고도 550m의 생가터에서 마대산으로 올라가는 ‘김삿갓 등산로’가 있다.
어둠골을 거쳐 정상(1,071m)~처녀봉~목아민속박물관 조성예정지~암자~신선골~김삿갓 묘역~김삿갓문학관으로 돌아오는 코스가 있다. 원점회귀하는 거리가 총 8.4㎞ 정도 된다. 김삿갓길도 걷고 등산도 즐기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볼 수 있는 코스다. 영월군에서 13회째 갖는 김삿갓 행사에 올해 두 번째로 김삿갓 등산로에서 전국 등산대회를 가졌다. 앞으로는 김삿갓길뿐만 아니라 김삿갓 등산로도 김삿갓의 흔적을 살려 시도 걸고 안내할 예정이라고 영월군청은 밝혔다.
교통(서울 기점)
영동고속도로 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서제천IC~영월 방면 38번 국도~영월읍내~고씨동굴~김삿갓문학관의 순서로 찾아가면 된다.
고속버스 :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전 7시부터 하루 10여 차례 운행. 요금 어른 1만4,400원. 2시간 소요.
영월읍~김삿갓문학관 : 시내버스가 오전 6시25분, 8시30분, 11시, 오후 2시20분, 6시40분 하루 5차례 있다. 약 40분 소요되며, 들어온 버스가 10분 내외 정차했다가 바로 나간다. 요금은 2,700원.
영월시내에서 김삿갓문학관까지 가는 택시요금은 2만원 내외. 개인택시 문의 033-374-4189 또는 019-599-4189.
맛집(지역번호 033)
영월의 먹을거리는 송어회, 골뱅이전골, 칡국수, 곤드레밥, 꺼먹돼지 등으로 추천한다. 김삿갓문학관 주변은 식당으로 가득하다. 주차장 바로 옆 김삿갓해선식당(016-683-9209 또는374-9209)에서 닭요리부터 버섯요리까지 다양하게 낸다. 다슬기촌(372-8888)에서는 다슬기를 요리해 준다.
방랑시인 김삿갓유적지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 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또한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 흐르고 가을에는 형언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곳이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하동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김삿갓의 시대 정신과 "문화예술 魂"을 추모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 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김삿갓 계곡을 자연문화의 중심지, 문예인의 순례지, 김삿갓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시선(時仙)으로 승화시켜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8년도부터 매년 10월초에는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개최된다.
또한 강원도 시책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추진되어 유적지내 조경 및 도로포장 등 기반시설이 조성되어 쾌적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였으며 특히, 2003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개관되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한 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해 관광객들에게 교육 효과를 거양하고 있다.
[ 난고김삿갓]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覆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후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이곳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여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철종 14년 계해(1863) 3월 29일 전라도 동복에서 작고한 것을 3년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1982년 10월 17일 세상에서 잊혀졌던 선생의 묘소를 박영국은 김영배, 이상기등의 증언으로 이곳에서 찾아 내었다. ※ 자료 『김삿갓의 유산』중 시선 난고선생사적 기문
[ 난고 김삿갓 문학관 ]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 산행안내 ★
1. 산행일자 : 2011년 4월 14일(목)
2. 교 통 편 : 자가용
3. 등산코스 : <약 8.4km, 약 4~5시간>
<김삿갓문학관 주차장 - 노루목교 - 시비동산 - 어둠골 - 쉼터(벤치) -
김삿갓 생가터 - 철쭉군락 - 삼거리 - 마대산 - 삼거리 - 전망대 -
처녀봉 - 민가 - 암자 옆길 - 신선골 - 시비동산 <옆쪽 김삿갓 묘역>
- 시비동산 - 노루목교 - 주차장>
4. 준 비 물 : 간식, 식수, 보온 옷 등
5. 기 타 : 등산 후 김삿갓문학관 탐방<입장료 : 1,000원>
<김삿갓 문학관 입구에 설치된 시비들>
* 산행 후 자료를 정리하려고 하다가 실수로 촬영된 사진 자료를 모두 날려 버렸음. *
* '마대산 김삿갓 최상락씨'와 함께 찍은 사진도 있는데, 너무나 아쉽다. *
***************************** 산행후기 ***********************************
망설임 끝에 찾게 된 김삿갓길.
영월여행을 준비하면서 1박2일이나 2박3일 여행을 할려고 마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감기기운이 돌았다.
도저히 이런 상태로 여행을 준비한다는 것은 무리라 생각되었다.
할 수 없이 이비인후과에 다녀와서 하루종일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콧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모처럼 준비한 여행스케줄인데, 갈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몸부림 끝에 결정을 내렸다. 하루 코스로 가보자고...
그렇지만 새벽 5시에 기상을 하였는데도 망설임은 계속되었다. 갈까 말까 생각을 정리하던중 갑자기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카메라와 베낭을 준비하고 마냥 출발했다.
오전 7시. 지금 출발하면 올림픽도로가 대단히 많이 막힐 것이다. 그래서 늦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올림픽도로에 올라탔다. 그런데 도로상은 대단히 많이 막혔다.
중간에 포기할까 망설이다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감행을 했다.
차량은 힘들게 올림픽도로를 빠져나간 후, 동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영동에 올라탄 후, 문막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다시 달려 영월군 하동면의 김삿갓 문학관 주차장에 도착하니 오전 10시40분경이 되었다. 마침 이곳에 도착하는 동안 시비동산 근방에 증평의 새마을금고 산악회가 산행에 참여하고 있었다.
일단 넓은 공간의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에 주차를 시킨 후, 노루목교를 지나 우측으로 약 30여미터를 지나서 좌측으로 올라갔다.
바로 그곳 좌측으로 김삿갓 시비동산이 주변에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었으며, 우측 계곡 넘어로 위쪽 지점에 김삿갓 묘역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은 그곳에 김삿갓 묘역이 있는줄도 모른 채, 시비동산을 둘러본 후, 바로 좌측의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포장길로 된 산길 좌측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었고, 약 100여미터를 올라서니 갈림길 섬거리가 나왔다. 바로 좌측방향의 다리를 건너가면 어둠골이 이어지면서 김삿갓 생가터로 올라가는 길이고, 우측길은 신선골로 나중에 하산할 지점이었다.
포장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계곡을 건너게 되는데, 포장길 위쪽으로 물길이 지나고 있는 곳을 여러군데 지나야만 흙길이 나오게 된다.
아주 완만하게 산길을 따라 천천히 지나가면서 시선은 우측으로 산길이 열렸다.
흙길을 따라 천천히 지나가다 보니 우측으로 자그마한 초가집 한채가 나왔다. 바로 김삿갓 생가터였으며, 현재 '마대산 김삿갓' 최상락씨가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김삿갓 생가터는 산속 550m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너무나 한적한 곳이었다.
생가터를 둘러본 후, 다시 길을 나서 본격적인 산행에 접어들었다. 좁은 오솔길을 따라 숲속길을 찾아 들어갔다. 길가에는 흙길도 있었지만 너덜지대도 통과하면서 서서히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약간 오르막을 오르는가 싶더니 다시 완만해지고 다시 오르막을 오르면 완만하기를 반복하면서 지나다 보니 한곳에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숨쉬고 있었다.
화전민들이 살았던 곳을 지나자 가파른 깔닦고개가 시작되었다. 약 25분여를 가파르게 올라서야만 능선에 닥아서는데 그곳으로 올라서다 보면 철쭉군락 지대를 통과하면서 차츰 능선에 닥아섬을 느끼게 된다.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바위 지대가 나오면 바로 능선에 닥아섰음을 느끼게 된다.
다시 약간 완만한 오르막 구간을 올라서면서 좌측으로 살짝 방향을 바꾸어 지나다 보니 삼거리 갈림길이 나왔다. 좌측으로 100m를 지나가면 마대산 정상이고, 우측으로 향하면 전망대가 나오게 된다. 일단 좌측 방향의 마대산을 둘러본 후, 다시 돌아와서 우측의 전망대를 향하여 통과할 작정이다. 증평에서 왔다는 산악회 멤버들과 어울려 천천히 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 구간이 펼쳐졌지만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올라설 수가 있었다. 마대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더불어 자그마한 공간의 정상을 이루고 있었다.
정상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확 트인 느낌은 들지 않지만, 멀리 주변의 봉우리들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지금은 푸르른 나무잎들이 성장하지 않은 단계라 앙상한 가지들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지만, 차츰 계절이 바뀌고 있기 때문에 금방 온 산이 푸르름을 다하게 되리라.
정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아쉽게도 자료를 남기지 못했다.
정상을 둘러본 후, 다시 왔던길을 돌아 전망대 방향으로 길을 나섰다.
삼거리를 지나고 몇개의 봉우리를 지나가는데, 봉우리 정상으로 향하지 않고 8부 능선 줄기를 따라 지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두어개의 봉우리를 지나니 바위 봉우리가 나왔는데, 그곳이 전망대인 듯 했다. 하지만 전망대란 것은 없고, 한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큰 바위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서 전망대라 칭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하튼 바위 봉우리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삼거리가 나오면서 이정표가 좌측으로 처녀봉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녀봉으로 가는 길은 약간의 내리막길을 지나 완만하게 흐르다가 다시 오르막 고개를 올라서면 약간 넓은 공간의 봉우리에 닿는다.
바로 그곳이 처녀봉이 되는 것이고, 처녀봉에 올라 다시 우측으로 가파르게 내리막 고개를 내려가게 되는데, 내려가는 길목이 대단히 가파른 내리막 고개였다.
내리막 고개를 두어번 내려섰더니 이정표가 김삿갓 묘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처음에 출발할 때 김삿갓 묘지가 어디 있는지 분명히 몰랐기 때문에 묘지를 확인하면서 내려가려고 다짐을 하고 있었다.
이정표가 있는 곳을 지나 다시 내리막길을 내려서다 보니 낡고 허름한 민가가 한채 나왔다.
지금 그곳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지만, 그곳을 지나면서 길을 포장길이 되었고, 우측으로 계곡을 타고 천천히 하산길에 접어든 것이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다 보니 우측으로 암자같은 건물이 있었는데, 들어가는 길목에는 개조심이란 푯말이 붙어 있었다.
포장길을 따라 천천히 지나면서 우측의 계곡과 마주하여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계곡을 타고 지나다 보니 한곳에 눈이 지금도 녹지 않고 얼어 있었으며, 그곳을 지나 포장길을 타고 내려왔다.
계곡과 포장길로 이루어진 구간이 바로 신선골이라 칭하는데, 어떠한 이유에서 신선골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선골을 거의 내려서니 처음에 올랐던 삼거리 지점에 닥아섰고, 이어서 이어지는 포장길을 따라 내려서니 시비동산에 닥아선 것이다.
시비동산에 닥아선 후, 그동안 찾지 못했던 김삿갓 묘역이 혹시 정면으로 보이는 앞쪽 오르막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닌가 확인하는 순간 바로 그곳에 김삿갓 묘지가 있었던 것이다.
시비동산에서 좌측의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들어서다 보니 좌측으로 조그마한 가옥이 한개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 마대산 김삿갓 최상락씨가 흰 한복에 수염을 기르고 자리를 틀고 앉아 서예를 하고 있었다. 마침 내가 그곳에 닥아서니 아주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다.
그분의 안내로 그 가옥으로 들어가서 그분이 타주는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진도 함께 찍고 그랬는데, 아쉽게도 모든것이 허탕이 되고 말았다.
나의 실수로 촬영했던 모든 자료는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김삿갓문학관의 자료 뿐.
그동안 사진을 촬영하면서 만장이 넘어섰기 때문에 현재 이곳에 올린 자료는 1부터 다시 시작되는 자료들이고, 9000단위 이상의 사진들은 내가 실수로 지워 버렸던 것이다.
여하튼 최상락씨와 사진 촬영도 하고, 대화도 나눈 후, 김삿갓 묘지를 둘러 보았다.
묘지를 둘러본 후, 최상락씨에게 인사를 남긴 후, 나는 자리를 떴다.
김삿갓 문학관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차에 베낭을 집어 넣은 후, 김삿갓 문학관<입장료 1,000원>을 둘러 본 후, 그곳을 떠나 고씨 동굴로 향했다.
마대산 산행과 김삿갓 생가터 그리고 여러 시비들을 둘러보면서 김삿갓 방랑시인에 대한 이해를 조금이나마 하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첫댓글 방랑 시인 ,,,김병연(김삿갓) 생가터, 문학관, 탐방로등,,,,,영월의 또하나의 볼거릴 세,,,풍경 잘보았고,,,,삭제된 사진이 어쩌나,,,인생 살이가 삭막할 수록 ,,,유유자적하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