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얼굴은 인격이며 삶의 현주소이고 훈장과도 같다. 어느 누구도 주변사람들에게 비치는 현재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얼굴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과 신이 빚어낸 선물이며 은총이다. 그 얼굴에 나타나는 표정 하나하나가 그가 겪은 경험과 현재의 생각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그만큼 얼굴은 대외적인 최고수준의 홍보물인 셈이다.
예로부터 초상화 등을 통해 후대에게 전해진 수많은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의 인품과 당시 환경을 미루어 짐작한다. 각 종의 조각상, 동전과 지폐에 들어 간 생생한 모습의 위인을 기리고 추모한다. 이들 위인들은 그만큼 격동의 시대상황을 반영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 문화 유적 중에서 가장 온화한 얼굴의 미소를 표현한 작품이 바로 「반가사유상」과 「서산 마애여래삼존불」이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은 반가부좌를 틀고(半跏) 현세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위한 상념에 잠긴(思惟) 미륵보살을 표현한 모든 형태의 불상을 가리키는 유물명이다.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국보인 「반가사유상」은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장 한국적인 대표명작으로 꼽힌다. 일본 국보인 ‘광륭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과 더불어 삼국시대의 걸작으로 대략 6~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주로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된 것이라 그 출토지에 대한 이견이 다양하여 백제 혹은 신라가 서로 제작했다는 설이 대응하고 있다.
여하튼 잔잔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번민을 잊고 극락정토를 꿈꾸는 중생의 소망을 경청하는 듯하다. 한마디로 심신이 지치고 힘이 들 때 "반가사유상을 보고 있으면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 실감난다.
서산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불」(磨崖如來三尊佛)은 바위벽을 깎아 들어가면서 그 안에 세 분의 부처님을 조각했다. 세 분의 부처님은 벙글벙글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그 미소는 꾸밈이 없고, 밝고 너그러워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를 바라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 어떤 번민도 모두 떨치고 새 희망을 노래하게 만든다.
가운데 있는 부처님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얇고 넓은 코, 도톰한 입술 등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고 자비로운 모습이다. 왼쪽에 있는 부처님은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쥐고 있고, 도톰한 볼과 작은 눈에는 천진한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다. 오른쪽에 있는 부처님은 앉아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오른쪽 손가락을 볼에 대고 아이처럼 귀엽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신기한 점은 빛에 따라서 부처님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햇볕이 들지 않을 때에는 근엄한 표정이다. 하지만 햇볕이 비추면 어느새 환한 웃음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편안하게 해 주어 신비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서산마애삼존불」은 햇볕을 가장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 경주 석굴암의 부처님이 바라보는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또 「마애삼존불」 위로는 큰 바위가 처마처럼 불쑥 튀어나와 있어서 빗방울을 막아 준다. 한마디로 햇볕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주변의 자연과 매우 친화적인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다.
누구라도 타인에게 미소 짓는 젊은 시절의 모습이 기억되길 바란다. 「마르크스」의 둘째 딸인 「예니 라우라」는 프랑스출신의 의사인 「라파르그」와 결혼했는데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도입한 인물이다. 「마르크스」 사후에 「예니 라우라」는 「엥겔스」와 함께 유고를 번역하여 세상에 알렸다. 그런데 「라파르그」는 평소 건강한 마음과 정신으로 생을 마감한다고 하면서 일흔 살 이상은 살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그는 아내를 먼저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택했다. 이때 그는 일흔 살 직전이었고, 그의 아내는 갓 66살이었다. 당시 이상을 꿈꾸는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죽음마저도 한갓 유희화(遊戱化)로 창조주의 계시에 어긋난 행동을 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 국립대학의 총장을 했던 어느 인사(59세)는 의사인 그의 부인(53세)이 주사로 편히 잠들게 하고 그녀도 주사를 놓아 종말을 함께 하여 이 땅에 안락사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1960년대에 서울상대 학장을 역임했는데 가난한 시골출신의 학생을 지원하여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던 독지가였다.
비록 건강이 악화되어 떠났지만 두 부부는 평소에도 함께 생을 같이 하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부인은 간호하다가 사위의 수의를 짓는 팔순 노모에게 그녀의 수의도 짓도록 하였다. 최고의 지성인 스스로가 선택한 길에 대해 시비할 여력은 없지만 그 모든 명예와 부귀를 내려놓고 젊은 시절의 미소 띤 얼굴로 남은 모습은 세월이 가도 변함이 없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대한 책임이 있다. 한 마디로 살아온 인생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되는데 그의 얼굴이 평판의 주요한 요인이 된다. 이는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함께하길 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가능한 멀리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풍기는 인품과 수양의 정도에 따라 비례할 것이다.
요즘은 사적 통신이 잘 발달되어 있어 자신의 생각을 곧 바로 알리는 세상이 되었다. 매우 편리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반면에 악용하면 자신의 인격을 해치는 역할을 한다. 고루한 내용도 문제이거니와 전혀 상식을 초월하는 논리로 비이성적인 주장을 함으로서 오히려 혐오감을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어느 편향적인 주장은 그 사람의 모든 인격을 말살하고 기피인물로 만들게 한다. 묘하게도 그런 사람일수록 마치 사명감이 충천한 듯 기세가 등등하나 내면으로는 속 빈 강정과도 같아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자신만이 기억하는 옛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생각이 날 듯 말듯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릴 때 정다웠던 친구나 따뜻한 사랑을 주신 선생님의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그러다보니 종종 듣는 「얼굴」이란 가곡이 주는 노랫말에 흠뻑 취해 따라 부른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 때 꿈은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하지만 진정한 얼굴의 모습은 내면에 있는 ‘양심’이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평가는 바로 양심 안에 존재한다.
「위고」의 소설인 『레 미제라블』에서 주인공인 「장발장」과 그 대척점에 있는 「자베르」 경감은 결국 자신의 양심에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 그들은 양심을 지배하는 ‘신의 목소리‘에 승복한 것이다. 「자베르」는 평생을 추적한 「장발장」에게 생명을 건지고 괴로워하다가 ‘센강’에 투신하고, 「장발장」은 자신의 추악한 과거에 대한 참회를 하면서 양심의 가치를 실현한다.
인간으로서의 최고의 가치는 바로 자신의 양심을 지키는 가운데 완성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아름다운 미인의 얼굴에 수치의 낙인이 찍힌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평생 가슴에 ‘주홍 글씨’를 안고 살아가는 천형(天刑)의 고통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부모님은 ‘큰 바위 얼굴’로 남기 마련이다. 비교적 젊은 시절에 고향에 잠시 들린 나에게 어머니께서 미리 준비해두신 웬 사진틀을 보여 주셨다. 자신이 떠나면 영정사진으로 사용하라는 말씀에 애써 그런 걱정은 마시라고 위로해드렸는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 내가 그 일을 준비하게 되었다.
덤덤하게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길인데 무슨 회한이 있겠는가. 그나마 비교적 젊은 모습을 남겨두었으니 적어도 손자 대에서만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2024.11.2.작성/11.20.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