警女兒 /딸에게 주는 교훈
婦 行 無 多 只 有 四 (부행무다지유사) 여인의 행실은 많은 것 필요없고 다만 네 가지
孜 孜 不 怠 警 朝 曛 (자자불태경조훈)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게으르지 말아라
貌 存 敬 謹 宜 思 靜 (모존경근의사정) 용모는 공경하고 조심하며 고요히 생각하면서
言 欲 周 詳 更 着 溫 (언욕주상경착온) 말은 빈틈이 없으면서도 따뜻해야만 하느니라
德 以 和 柔 貞 烈 最 (덕이화유정렬최) 덕은 화목하고 부드럽고 정절지킴이 중요하며
工 因 酒 食 織 紝 勤 (공인주식직임근) 솜씨는 술과 음식과 옷 지어 다듬는 일 힘써야
若 將 此 語 銘 心 肚 (약장차어명심두) 만약 이 네 가지를 맘깊이 명심해 힘써 지키면
吉 福 綿 綿 裕 後 昆 (길복면면유후곤) 길하고 복됨이 후손에게 면면하게 이어지리라
<어 휘>
孜 孜 : 힘써 노력하다
朝 曛 : 아침과 저녁
周 詳 : 세밀하고 빈틈이 없음, 허술하지 않음
織 紝 : 옷감을 짜다. 옷을 만들다
肚 : 뱃속, 마음속
後 昆 : 후손
<지은 이>
안정복 (安鼎福 1712 - 1791), 자는 백순(百順), 호는 순암(順庵)으로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이자 실학자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처사(處士)로 지낸 아버지를 따라서
자주 이사를 하였다. 그 결과 공은 10세가 되어서야 겨우 ≪소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일정한 스승
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외가의 어른들을 통해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1737년에는 중국 삼대(三代) 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한 ≪치통도 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 ≪도통도 道統圖≫를 지었다. 이듬 해는 ≪치현보 治縣譜≫를 저술했으며, 이어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 ≪향사법 鄕社法≫을 지었다. 그 뒤 29세에는 공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하학지남 下學
持南≫ 상·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공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공이 온 정열을 기울인
저술이다.
한편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토지제도를 해설한 ≪정전설 井田說≫을 내 놓았고, 1741년에는 주자의 사상을
모방한 ≪내범 內範≫을 짓기도 하였다. 1744년에는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 磻溪隨錄≫을 구해서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아, 1775년에 <반계연보 磻溪年譜>를 찬하였다. 이듬 해, 광주 안산면 성촌리(安山面 星村里 : 현재 안산시 성포동)에 거주하던 이익(李瀷)을 찾아 문인이 되었는데, 이는 이전부터 연분이 있음을 의미한다.
1749년에 문음(門蔭)직인 만녕전 참봉(萬寧殿參奉)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이듬 해는 의영고 봉사(義盈庫奉事)
가 되고, 1752년에는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를 역임하였다. 이어 이듬 해, 사헌부 감찰에 이르렀으나 부친의
별세와 자신의 건강으로 인해 벼슬을 그만두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공은 그 동안 준비해 온 저술들을 정리하여 1756년<이리동약 二里洞約>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임관정요 臨官政要≫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공은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서 ≪동사강목 東史綱目≫을 1759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1767년에는 중국의 당 왕조의 역사인 ≪열조통기 列朝通紀≫를 저술하는 한편, 1753년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 ≪도동록 道東錄≫을 ≪이자수어 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翊贊)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서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
(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따른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
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간 그곳에서 수행한
주요 치적은 동약(洞約)·향약(鄕約)·향사례(鄕射禮)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司馬所)의 복설 등
이었다. 이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세자익위사익찬(世子
翊衛司翊贊) 등을 역임한 뒤,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정주학(程朱學) 이외의 이단사상(異端思想) 배척에 앞장섰다.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해 철저히 비판
했다. 그리하여 천주교의 도전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1785년(정조 9)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을 저술해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 부정에 대해 비판하였다. 스스로의 학문 연마 과정에서 이룩한 ≪임관정요≫와 ≪하학지남≫은 공의 초기 사상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전자(前者)는 뒷날 유형원의 ≪반계수록≫의 영향과 이익의 견해를 통해 보완되었지만, 중심 사상은 청년기의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임관정요≫는 후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 牧民心書≫의 저술
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하학지남≫은 주자의 ≪소학≫을 모방한 것으로써 저술의 기본 이념은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이라고 밝히며, 기초학문인 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즉,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통해 조선 후기 양반사회의 공리공담(空理空談)적인 이기(理氣)논쟁을 직·간접으로 반박하였다.
공이 1744년에 처음으로 접한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은 그의 학문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현실의
개혁문제에 대해 관심을 경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유형원의 ≪동사강목범례 東史綱目凡例≫를 효시로 하여, 이익의 조언으로 편찬된 역사서 ≪동사강목≫
은 유형원→이익→안정복으로의 계보를 잇는 것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공이 ≪반계수록≫을 통해
이익을 찾았고, 이익을 통해 유형원을 더욱 자세하게 배운 결과이다. 따라서, 공은 이익을 통해 학문과 사상의
깊이와 폭을 더했고, 이에 자신의 학문은 더욱 견고해져 나름의 경험적인 사상을 체계화하였다.
아울러, 공은 이단사상의 배척을 표면화하고 이론적인 무장과 정치참여를 통해 행동으로도 실천하려 하였다. 1785년의 ≪천학고≫와 ≪천학문답≫의 저술은 천주교의 배척을 위한 논리적인 무장이었다. 공은 이 시기에
참신한 개혁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하기 보다는 전통적인 질서를 고수하려는 근기 남인(近畿
南人)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공은 정치적인 업적이나 경세적 실천
보다는 학문적·사상적인 측면에서의 공헌이 더욱 컸다고 생각된다.
위에 소개한 칠언 율시는 조선왕조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로 알려진 안정복 선생의 詩이다. 따님에게 주는 교훈이 시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딸의 행복을 염원하는 아버지의 정이 듬뿍 들어있는 내용으로 오늘을 사는 이 시대의 여성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까 생각된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간 한 지성인의 혈육을 향한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이 시 한편에 흘러 넘치고 있음을 보며,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