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09
‘해피데스데이(Happy Death Day)’라는 영화가 있다. 2편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나름 인기를 끌었다.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인 여대생이 자신의 생일날 살해당한다. 이후 다시 살아나 자신의 생일날에 또다시 살해되는 상황을 6번 반복한 끝에 살인범을 잡게 된다는 스토리다. 요새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일을 보면 이 영화가 생각난다.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하루는 결국 주인공에게 학습효과를 준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우병우 사태로 떠들썩했던 일을 우리는 잘 기억한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대해 적용된 죄목은 공직 인사 개입, 민간인 불법 사찰 혐의 등이었다. 우 전 수석이 언론의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이석수 청와대 특별감찰관에 의한 감찰이었다. 2016년 7월 이석수 특별감찰관은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에 대한 특별감찰을 실시하겠다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후 이 특별감찰관과 우병우 수석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전 국민적으로 관심이 뜨거워졌다. 돌이켜보면, 당시 우병우 전 수석에 대한 의혹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면 아마 그 파장이 현재와 같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의혹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박근혜 정권 와해 이후 더 큰 문제로 비화됐다. 이에 대한 교훈 혹은 학습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현 정권의 청와대 민정수석실 역시 다시금 언론의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가족과 관련된 각종 의혹이 제기되더니,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감찰 무마 의혹과 김기현 전 울산시장 주변 인물들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까지 불거졌다. 급기야 ‘하명수사’ 의혹의 참고인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명을 달리한 전 청와대 특감반원은 남다른 성실함과 수사에 대한 탁월한 감각으로 많은 이의 신망을 얻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극단적 선택의 배경에 김기현 전 울산시장 주변 인물들에 대한 ‘하명수사’ 의혹이 자리 잡고 있다. 김기현 전 울산시장 주변 인물에 대한 수사는 지난 지방선거 전에 시작됐다. 울산지방경찰청은 지난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재선을 노리던 김기현 당시 울산시장의 비서실장 등 측근이 연루된 비리를 인지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박기성 당시 비서실장과 울산시청 A국장, 그리고 김기현 전 시장 동생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들 모두를 무혐의 처분했다.
이에 자유한국당은 경찰 수사가 ‘야당 탄압’이라면서 황운하 대전지방경찰청장(전 울산지방경찰청장)을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이 고발 사건에 대해 수사하던 울산지검 공안부는 김기현 전 울산시장 주변 인물에 대한 첩보가 청와대 민정수석실로부터 경찰청으로 내려갔다는 점을 인지하게 됐다고 한다. 해당 첩보를 청와대가 경찰에 넘겼음은 청와대도 인정한다. 백원우 당시 민정비서관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는 각종 첩보와, 우편 등으로 접수되는 수많은 제보가 집중된다. 김 전 시장 관련 제보를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에게 전달했다는 보도에 대해 특별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내용의 첩보가 집중되고 외부로 이첩된다. 반부패비서관실로 넘겼다면 이는 울산 사건만을 특정해 전달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즉,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은 해당 사건에 전혀 주목하지 않았고, 절차에 따라 박형철 반부패비서관에게 해당 첩보를 이첩했으며, 반부패비서관실은 이 첩보를 경찰에 넘겼다는 것이다.
문제는 해당 첩보가 어디서, 누구로부터 청와대에 전달됐는지다.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주장처럼 외부로부터의 제보였고, 그런 제보를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경찰에 넘겼다면 하명수사로 볼 수 없다. 하지만 첩보 생산 과정에 권력이 개입했다면 달라진다. 하명수사일 뿐 아니라 선거 과정의 부당 개입, 즉 권력에 의한 부정선거 문제로 진화한다. 때문에 첩보를 누가 생성했는가 하는 부분은 이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 백원우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이 지난 12월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특별감찰반 수사관의 빈소 조문을 마친 후 장례식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제보자 신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제보자는 송철호 울산시장 측근이면서 지방선거 당시 송 시장 캠프에서 정책팀장으로 활동했다는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으로 밝혀졌다. 청와대 주장에 따르면, 송병기 부시장과 제보를 ‘일부 편집과 요약정리’한 청와대 행정관은 캠프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송병기 부시장이 ‘아는 사이’인 청와대 행정관에게 김기현 전 시장 측근 비리 관련 의혹을 제보하고, 청와대가 해당 첩보를 다시 경찰에 내려보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냥 넘기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송 부시장은 울산시장 선거 캠프에서 팀장을 할 정도로 송철호 시장의 측근이고 해당 첩보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은 ‘청부수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하명수사’든 아니든 이 부분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있어야 하는 이유다.
문제는 또 있다. 송병기 부시장은 12월 5일 오전, “스스로 제보를 한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여러 가지 동향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동향에 대해 파악해 알려줬을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또 “2017년 하반기나 연말쯤 청와대 행정관이 아닌 지역에 있는 여론을 수집하는 쪽에서 연락이 왔다. 언론에 나왔던 내용이라 알려줬다”고 했다. 그런데 송 부시장은 같은 날 오후, “총리실 행정관(제보를 편집·요약한 행정관의 현직)과 김기현 전 시장 측근 비리와 관련해 일반적인 얘기를 나눴다”고 말했다고 연합뉴스가 보도했다. 5일 오전에는 “청와대 행정관이 아닌”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오후에는 바로 그 ‘아는 사람’과 김기현 전 시장 측근 비리 의혹에 대해 ‘말’을 나눈 적은 있다고 한 것이다. 송 부시장 주장을 요약하면, 자신은 SNS를 통해서든 문서를 통해서든, ‘먼저’ 제보를 한 일은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 ‘먼저’ 물었는가 혹은 제보했는가에 따라 수사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누구의 말이 참말인지는 수사기관이 밝혀낼 것”이라고 했다. 동의한다. 해당 의혹은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민정수석실 관련 또 다른 사건은, 이른바 유재수 전 부시장 관련 감찰 무마 의혹이다. 이 부분의 핵심은 누가 감찰을 무마했는가다. 이런 일련의 의혹을 볼 때, 과연 박근혜 정권과 비교해 현 정권에서 민정수석실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이런 의혹이 제기된다는 것 자체가 민정수석실이 별로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비뚤어진 ‘우리’ 의식의 결과다.
비뚤어진 ‘우리’ 의식이란 ‘우리 편은 선하기에 절대 잘못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 ‘적과 동지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왜곡된 이분법적 사고’를 의미한다. 이런 ‘우리’ 의식이 나타난 이유는 청와대가 권력 핵심으로만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는 동질적 집단이기 때문에, 설사 문제가 발생해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고 아니면 내부에서 어떻게든 수습하고 지나가려 할 수도 있다. 그러다 문제가 터질 수도 있다. 사전에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있다. 현 정권 출범 이후 계속 공석으로 있는 특별감찰관이 그런 존재다. 이런 제도를 잘 살렸다면 지금처럼 민정수석실을 둘러싼 의혹이 줄을 잇지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유재수 전 부시장 관련 의혹 같은 일은 미연에 막을 수 있었으리라.
이뿐 아니라 이런 일련의 의혹을 보면 현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야심 차게 추진한 적폐 청산이 본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준다. 현 정권 들어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공직자가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구속되고, 재판받고 감옥에 갔다. 그래서 나온 말이 “인적 청산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 정권은 사람만 내쫓고 시스템은 그대로 뒀으니 안타깝다. 지금이라도 과거 정권을 반면교사 삼아, 바꿔야 하는 시스템은 과감히 바꿔야 한다. 그것만이 적폐 청산의 마침표다.
신율 /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37호 (2019.12.11~2019.12.17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