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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송희지
파란시선 0123
2023년 3월 2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79쪽
ISBN 979-11-91897-51-7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모든 풍경이 나의 바깥에 있었고 나는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은 송희지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멈블링」, 「여기」, 「폰(Pawn)」 등 41편의 시가 실려 있다. 송희지 시인은 2002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2019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썼다.
“송희지의 시를 읽으며 우리가 느끼게 되는 모종의 불협화음과 같은 감정, 혹은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산종하는 단어들의 결합이란 단순한 미적 쾌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을 위한 사투의 과정으로 경험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시인의 ‘멈블링’이란 사회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그렇기에 자신의 사회적 실존을 위협하는, 그러나 감출 수도 제거할 수도 없는 욕망이라는 실재를 다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표현 방식으로서의 ‘멈블링’은 정지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불완전한 것일지라도, 역설적으로 그 불완전성이 행위로서의 ‘멈블링’을 거듭 지속시킨다.
이것은 다만 자신의 욕구를 요구하는 것에 실패한 존재의 웅얼거림도,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는 것에 실패해 추락하는 존재의 파멸극도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허락되지 않은, 지속할 수 없는,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라는 한 인간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임을 증명하고 실천하는 존재의 실존을 위한 사투이다. 타협하지 않는, 그렇기에 거듭 불화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그 불화의 과정이 만들어 낸 파문이 마침내 호수에 닿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예술로서 감각한다. 다만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단지 일인칭의 서사로 읽히지 않는 까닭도 그와 동일하다. 이것은 한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모든 개인이 경험하는 상징계의 필연적인 비극이다. 자신의 삶을 고유한 목소리로 발음하기 위해 부정확한 발음과 불안에 떠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시작해 나가길 선택한 자의 모습이다. ‘멈블링’에서 시작해 ‘멈블링’으로 끝나는, 그러나 결코 단순한 중얼거림이라 폄하할 수 없는 그것이 바로 예술이 태어나는 자리이다.” (이상 임지훈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세계는 물에 잠긴 사람의 얼굴 같아.”(「수몰 푸가」) FPS(First Person Shooter, 일인칭 슈터) 시점으로. 여기는 어떤 곳인가? 여기는 움직인다. 그렇다면 여기는 누구인가? 여기는 무얼 할 수 있는가? “나는 숲의 복판에 있고 거대한 이 숲으로부터 끝없이 무관하였다.”(「여기」) “모든 풍경이 나의 바깥에 있었고 나는 그것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두려워졌다.”(「고향」)
“이따금 모국의 언어로 지직거리는 늙은 라디오 하나” ‘어둠 속을 가로지를 때 멀리서 빛나는 부표 하나’ 태어나지 않는 것을 열망하던 시절(「서브머징」), 내기하듯 누가 더 오래 잠길 수 있는지 견뎌 보아도 발 디딜 견고한 바닥은 바이 없었다. 살고 죽고 말하고 쓰고, 잠긴다는 것.
‘몰팅’ ‘몰딩’ ‘멈블링’ ‘플루이드’ ‘서브머징’, 웅얼거리고 흔들리고 부딪치며 잠긴다는 것…… 유동하는 변전하는 기화하고 다시 달라붙다가 응결하고 가라앉아서 “손을 떠올리면, 수맥처럼 뻗어 가는 이 손이/무언가 더듬고 쥘 수 있다면……//나는 가장 먼저 나의 입안을 만질 것이다.”(「플루이드」) 이 모조, 플라스틱 박물관에서.
재현의 대상이 늘비하게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는 세계 앞에서. 어떤 언어를 담은 고백도 무력하였다. 인간의 서재는 무한히 쏟아지는 빛에 잠겨 어두웠다. 그늘 한 점 없는 기억의 광휘. 휘도. 경도. 점성. 안간힘. 그러므로 끊임없이 앞길을 열어 보인다는 것은 “제자리뛰기하는 법”을 익히는 일(「뛰어드는 소년들」). 이 모조, 플라스틱 박물관에서.
“인간 그것을 줍는다.//묻거나 먹는다.”(「가정」) 인간은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발생하고 소멸하는 경우의 수를 곱해 본다. 양자택일에 비하자면 오지선다는 얼마나 관대한가! “입이라는 걸 만들어 보세요.” “나는 나 외에 무엇도 믿지 않았다.”(「가족회의」) “시는 말하지 않으며 말할 수 없고 말할 리 없다.” “빠작─하는 파열음뿐”(「델리케이트」) “남은 건 미장센뿐”(「다음과 같습니다」). “인간과 기계가 줄지어 소란히 오가고 있었지. 흰빛을 받은 목덜미 찬란하였다.”(「플루이드」)
―신동옥(시인)
•― 시인의 말
일 교시.
나는 나에 대해 발표해야 했다.
앞, 둥글고 무수한 불꽃들.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빛의 태도는
나를 쉽게 악한으로 만들고.
펄떡펄떡
생동하는 양의 뿔처럼
투명하고 거대한
나의 발.
없다거나
너무 많이 가졌다는
진술은 위험하다.
말하면,
돌아오지 않는다.
•― 저자 소개
송희지
200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9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을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멈블링 – 11
몰딩 – 12
애쉬 폴 – 14
몰팅 – 15
가족회의 – 16
플루이드 – 18
서브머징 – 20
드라이에이징 – 23
가정 – 27
뛰어드는 소년들 – 29
싱크로나이즈드 스위밍 – 42
제2부
멈블링 – 47
어느 누구의 모든 철수 – 49
영원한 가오리 – 52
여기 – 57
거미인간(Humano Araña) – 68
하얀 신랑 – 72
● – 76
○ – 78
▩ – 80
철수와 나 – 82
제3부
폰(Pawn) – 87
트로이 – 90
생활의 발견 – 93
네스트 – 95
델리케이트 – 97
고향 – 102
해변과 고아 – 104
데이(They) – 106
다음과 같습니다 – 109
제4부
수몰 푸가 – 151
서스펜스 – 155
나의 오랜 부기맨 친구 – 157
핸드헬드 – 160
멈블링 – 164
해설 임지훈 Show must go on – 166
•― 시집 속의 시 세 편
멈블링
노수부는 검은 물속으로 그물을 던졌다. 건져 올릴 때 세차게 펄떡이는 비늘들이 딸려 오지 않음에도 그 일을 반복했다.
널따란 호수였다.
눈먼 벌레들이 제 뼈를 깎아 내고 있었다.
배후에서 무언가 침잠하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검은 물 위로 겹겹 원을 그리며 빠르게 호수의 끝과 끝에 도달하였다.
노수부는 젖은 손으로 빈 그물을 끌어올렸다.
멈추지 않았다. ■
여기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했고 호모섹슈얼 남성이다.
다음의 텍스트는 이 전제로부터 시작되었다.
Ⅰ
여기를 만난 것은 눈이 우수수 쏟아져 내리던 어느 겨울이었다. 편의점으로 걸어가던 중이었고 바깥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최소한의 옷을 걸친 채였다. 까아암바아악 까아암바아악 고장 난 가로등 아래에서 나 웅크린 여기를 보았다. 그의 비늘은 눈발로부터 물려받은 빛을 뚝뚝 떨어뜨렸고 그 빛들이 웅덩이처럼 나의 낯을 희뿌옇게 비추고 있었다.
「나의 집에 갈래?
물과 불이 있고 공간도 제법 넉넉해.」
그를 데려가지 않을 이유는 없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굽은 손을 건넸고
여기는 게걸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나는 그것이 여기가 「좋아」라고 말하는 방식임을 알았다.
낡은 살점들이 후드득 발밑으로 떨어졌고
붉은 물이 붉은 물을 밀어내며 하염없이 운동하던 자정이었다.
Ⅱ
나의 첫 애인은 김현권(金賢綣) 씨로 증권회사에 재직 중인 바이섹슈얼 남성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스물아홉이었고 나는 스무 살이었다. 그는 남자와 여자를 각각 두 번씩 사귄 전력이 있었고 때때로 그것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FPS 마니아인 그를 따라 도시의 오락실을 전전하는 동안 나는 얼굴이 반쯤 녹은 크리처의 대가리 조준하는 법을, 발포하는 법을 배웠다. 부서지는 크리처의 몸뚱이로부터, 일그러지는 표정으로부터, 튀기는 붉은・검은・푸른 핏물로부터 무관해지는 법을 익혔다.
최초의 이별을 기억해. 때는 한여름이었고 나는 애인의 원룸에서 드로즈 한 장만을 입은 채 이별사를 들었다. 터덜터덜 신음하며 돌아가던 선풍기를 기억해. 돌아오는 길에 잡화점에 들러 유리로 된 물그릇을 두 개 샀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동굴 같은 여기의 아가리가 놓여 있었고 그 속으로 걸어가자 모든 사물이 검은 죽처럼 되었다.
여기는 모든 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상자도 어항도 소용없었다. 사육장을 무너뜨렸고 버드케이지의 견골들을 구부러뜨렸다.
「차라리 나를 죽여」 내가 외칠 때까지 온 공간에 분뇨를 싸질렀다.
배(拜)를 올리듯 주저앉으면 그제야 내 앞에 내려앉아 깔깔깔 비웃었다.
바쳐라, 혼을, 얼룩덜룩 더럽고 우아한 몸들을 내 긴 목 속에 넣어 다오.
바닥에 엎질러진 채로 나 종종 여기의 노래를 듣곤 했다.
그 후 사귄 애인 전인재(籛仁宰) 씨는 서울 변두리에 조그마한 일식집을 차린 요리사로 타마고야끼처럼 부풀어 오른 뺨과 배를 가지고 있었다. 종로에서 가볍게 술을 마신 뒤 벌건 얼굴로 청계천 산책로를 거니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지. 물고기를, 교량 밑 비둘기 떼를, 지나가는 인간들을 보며, 모두 처음 보았다는 듯, 뻗으면 닿는다는 듯 휘적휘적 허공에 손을 쥐었다 펴곤 했다.
춤이었어. 춤이었지. 이불 속에 파묻혀 나 창가에 앉은 그의 배 위로 빛이 곡선 그리며 떨어지는 것 보았다. 모래 둔덕을 걷는 그의 얼굴이 붉게 검게 물드는 것 보았다. 숨이었어. 숨이었지. 불규칙한 간격으로 흔들리는, 커졌다가 작아지는, 헐떡헐떡, 거칠어졌다가 이내 정적의 매끈한 면을 닮아 가는, 불꽃이었지. 그의 생일,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초에 의지해 손뼉 치고 가창했던 걸 기억해. 순간 우리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종족 같았고, 수백 겹 주술로 쌓인 고성(古城) 같았고,
「나의 집에 갈래?
네게 다 보여 주고 싶어.」
나는 문득 말해 버리고 말았네.
그날을 기억해. 애인의 두꺼운 손을 맞잡고 나의 현관으로 들어설 때.
웅웅 작동하던 기계들. 물비늘 그리며 고여 드는 정적과
「조금 춥네」 외투를 여미던 애인이 나를 돌아본 순간,
달려들던 여기를, 무수한 이빨들이 애인의 머리를 뜯어 버리는 장면을,
멈춰, 외치기 전에 내 얼굴에 쏟아지던 애인의 핏물을 기억해.
바쳐라, 혼을, 얼룩덜룩 더럽고 우아한 몸들을 내 긴 목 속에 넣어 다오.
여기는 뜯고 헤쳤지. 여기는 풀풀 흩날렸지. 여기의 게걸스러운 노래가 벽지 속 파고들어 물결무늬 파문을 그려 내는 동안
엉엉엉, 나는 불타는 집처럼 울었네. 조각난 애인의 장들 쓸어 모으며. 흥건한 핏물 위에서 양손 휘적이며.
부서진 내 영혼, 부서진 내 영혼.
밤새도록 자장가만 흥얼거렸다.
Ⅲ
전나무 숲
굴러라, 나는 숲의 복판에 있다. 눈이 쌓여 가고 있었고 나는 알몸인 채로 눈의 서늘한 음성을 견디고 있었다. 굴러라, 손에는 한 개의 굴렁쇠와 한 개의 채 쥐어져 있다. 굴렁쇠는 비틀비틀 제자리에서 돌고 있고 나 채 쥔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굴러라 제발 굴러, 나는 숲으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 저 무성한 칼날들 속으로 뛰어들어 그곳의 주민이 되고 싶다. 굴러 씨발 구르라니까, 빨개진 내가 고래고래 비명 지를 때, 멀리서 들리는 총성. 날아오르는 갈까마귀 떼. 가늘어지지 않는 눈발. 나로부터 자전하는 굴렁쇠.
눈을 뜨자 나는 돌고 있었다. 빙글빙글. 나의 몸은 철사처럼 얇고 한가운데 구멍이 뻥 뚫려 빛과 바람이 드나들기에 용이하였다. 검은 피가 눈밭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숲의 복판에 있고 거대한 이 숲으로부터 끝없이 무관하였다.
슈가크래프트 예식장
나는 건강한 하객이다. 채도가 낮은 옷을 입고 환호 뱉을 수 있는 입을 가져 이 식의 주역들을 반겨 주기에 알맞다. 설탕으로 반죽된 신랑 신부 반들반들 손 흔들고 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묻는 부모 떠올리면서. 엄마 내가 두 번 죽었다 태어나도 이 나라에선 못해, 중얼거리며
나는 돌고 있었다. 굴러라, 이것은 나의 목소리가 아니다. 과장되게 환한 조명의 빛이 나를 꿰뚫고 있다. 굴러라, 나는 이 목소리를 들은 적 있다. 나는 이 총성을 들은 적 있다. 오락실에서. 볕 잘 드는 청계천에서. 늦은 밤 홀로 식은 국을 퍼먹던 방 안에서. 귀에 번지던 이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여기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긴긴 총부리 겨누는 사냥꾼의 눈으로. 동정도 이해도 아니하겠다는 얼굴로. 굴러라 제발 굴러, 예식장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캐러멜의 풍미. 나는 토박이처럼 앉아 있었지. 여기의 어깨에 기대어. 쥔 손처럼 따뜻하고 축축한 그곳에 겹치어
불, 돌, 불, 돌, 불
다음으로 재판장에 오를 이 누구인가. 나는 선고하고 있었다. 포승줄에 줄줄이 묶여 오는 인간들 앞에서. 이중 누군가는 요술사고 부정하고 불에 돌에 휩싸여 회개하게 될 것이다. 화르륵, 나는 줄에 꿰인 백이십 번째 인간으로, 선고하는 나의 아가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쿵쿵, 나는 지난밤 끌려간 나의 애인으로, 돌아오지 않을 나를 위해 맑은 죽을 졸이고 있었다. 화르륵, 나는 화전민이 질러 놓은 산불이었고, 성벽 가장자리에 배치된 벽돌이었고, 쿵쿵, 나는 나의 무덤을 이루는 반석 중 하나로, 천년만년 희고 단단한 나의 유해를 붙들고 있었다. 화르륵, 나는 신이 훔쳐다 건넨 태초의 불씨로, 신의 품속에서 인류의 전경을 내려다보며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홍앵앵 울었다.
쿵쿵, 나는 돌고 있었다. 나는 바다 깊이 침잠하는 한 줌의 티끌이었다.
정중한 별똥별로서; 지면에 충돌하고 행성의 축을 뒤튼 후 떨어져 나간 손발이었다.
가라앉다 보면……
불을 돌을 벗으며 잠겨 들어가다 보면.
차고 어둡다……
말이라는 걸 한 번쯤 해 보고 싶어지고.
그러자 나는 깜박깜박 상 흔들리는 골목의 구석에 있었다. 눈이 쌓이고 있었고 나는 맨몸인 채로 밤의 질척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손에는 무엇도 쥐어져 있지 않고 나는 거대한 이 골목으로부터 한없이 무용하였다. 나를 향해 뻗어 오는 하나의 손 있었다.
Ⅳ
만남을 거듭했다. 박준웅 씨나 임원곤 씨나 권현우 씨 따위와. 몇 번은 그들의 집에 갔다 살아서 나왔고 몇 번은 그들을 집으로 들여 여기의 배를 불렸다.
군대를 다녀왔다. 검은 총을. 뱀장어처럼 꾸물거리는 그것을 날마다 안고 있었다. 바쳐라 바쳐라 관물대 속에서 여기는 자꾸만 짖었고. 바짝 민 머리가 따가워 보초처럼 자주 울었다. 내 방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느 날엔가
여기에 이끌려 산책을 나간 적 있다. 관상초가 듬성듬성 심어진 근린공원이었고 거닐고 마시고 노래하는 온가지 이웃들이 가닥가닥 흰 볕에 꿰이고 있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 여기는 나의 부숭부숭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 무릎에 편히 드러눕도록 했다. 내 몸을 지나치게 조이지 않도록 하네스를 조정했다. 충분히 젖은 혀로 구석구석 핥아 주었다.
몸에 몸을 맞대고, 나는
치열하다, 빛의 단면은 생물의 것과 같아 보여.
모든 풍경에 입이 있다는 믿음은
그 너머의 통로를 떠올린 것일까,
그런 생각과
「너는 언제나 나를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 내가 말했고
여기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것이 여기가 「사랑해」라고 말하는 방식임을 알았다.
뚱뚱한 꽃나무 가지가 흰 잎을 흩날리고 있었고 그중 하나 잡아채 보면 손안에 있는 건 향뿐이기도, 찬물이기도 했다. 아작아작, 이따금 바람이 우리의 발끝을 깎아내리면 「자연하다」 중얼거렸지. 구부러진 자세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기대하는 손님처럼 정숙히.
*FPS: First Person Shooter. 일인칭 슈팅 게임.
*부서진 내 영혼: 송창식, 「사랑이야」. ■
폰(Pawn)
우리는 수영을 하기로 했다.
거인의 연못 둘레는 희고 달고 찬 잎이 열리는 낙엽 교목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둑방의 굴 깊숙한 곳에 티피를 설치했다. 베키가 연못 둘레 배회하던 푸른 양 떼 중 두 마리를 골라잡아 왔다. 해체와 손질은 나와 앙헬의 몫이었다. 유마가 보우드릴만으로 불을 피웠다. 그는 축축한 불길 속에 사프란 흑겨자 잘 말린 정향을 던져 넣은 후 손질된 양과 함께 훌륭히 볶아 내었다.
우리는 한 입씩 살점을 뜯고 우물거렸다. 오우옥 뿌리를 달인 물을 나누어 마셨다. 그림자만 한 티피 속에 원을 그리며 누웠다. 천사의 얼굴을 베낀 어둠도 우리의 곁에 있었다. 그는 몹시도 느긋하고 찬란한 손길로 우리의 낯짝을 뜯고는 달아나 버렸다.
우리는 넷이서 잤다.
우리는 여럿이서 했다.
이튿날 우리는 낚시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베키는 팔딱거리는 민물고기를 양동이 가득 잡았는데 내 바늘엔 자꾸 누군가의 뼈만 걸렸다. 갈대로 만든 카약을 타고 앙헬과 유마는 연못을 한 바퀴 돌았다. 「푸른 양과 자줏빛 장지뱀과 도도 새와 발광하는 눈을 가진 원인(猿人)들을 보았어」 「그중 몇몇은 훌륭한 조립식 인형이더군」 우리는 다 함께 낚시한 생선들을 구워 먹었다. 귀 나간 냄비에 라면을 끓였다. 갑자기 어느 스포츠 매거진에서 본 아주 슬프고 무서운 이야기가 생각났다고, 베키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밤중에 듣기로 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밤중에 모두 들었다.
그 이야기는 베키의 말대로 아주 슬프고 무서웠으므로, 우리 중 누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천막 안에 모여 벌벌벌 떨었다. 「수영을 하러 가자」 우리 중 누군가 말했고 「그래, 우리는 그러려고 왔었지」 누군가 대답했다. 새카만 거인의 연못 둘레엔 낙엽 교목들이 발광하는 잎을 떨구고 있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한 채로 연못까지 나아갔다.
베키 나 앙헬 유마 순서로 알몸이 되었다.
베키 나 앙헬 유마 순서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검은 물살을 가로지르며 나는 접영을, 배영을, 자유형을 했다. 멀리서 베키와 앙헬과 유마 모양의 어둠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둥글고 다양한 파형을 만들었다. 「저 바위에 누가 먼저 다다를지 내기할까」 그중 누군가가 외쳤고 첨벙첨벙, 대답도 신호도 없이 누군가가 출발했다. 나 또한 앞서서 떠난 그들을 뒤따라 한참을 헤엄쳤는데
머리 위로 무언가 집채만 한 것이
거인의 발이
지나갔다. 쿵, 연못 둘레의 낙엽들 휘날리고 쿵, 연못 중앙에 해일이 일고 쿵, 밤의 천장이 연못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세 발짝 만에 연못을 다 건너. 멀어져 가는 거인의 뒤통수를 우리는 다 보았고. 「돌아가자」 우리 중 누군가 말했고 「그래, 우리는 그러려고 왔었지」 누군가 대답했다. 연못을 배회하는 짐승들이 컹컹 울부짖었다. 동쪽에서 금박 날붙이들이 긴긴 몸뚱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정오에 맞추어 봉고 트럭은 출발했다. 앙헬은 늙은 기사처럼 능숙히 차를 몰았다. 유마가 전날 먹고 남은 생선을 간식으로 돌렸다. 우리는 루스티카 담배를 주고받았고 저속한 농담을 피워 댔다. 나는 문득 목에서 이물감을 느꼈는데, 빼고 보니 그것은 오토마타를 작동시키는 데에 쓰이는 녹슨 태엽이었다.
그날 베키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