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 녹차밭과 영주산을 모두 하루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는 건 상당한 대장정이었고 모험적인 여행이었다. 제주에서 표선읍을 잇는 버스 노선이 성읍리를 통과하는데, 녹차밭과 영주산은 성읍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어 간선 버스가 정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인근으로 지선 버스가 하루에 손에 꼽을 만큼 다닌다는 것이었다. 미리 경로를 계산해 보니 한 번은 필히 걸어야 했다. 그럼에도 하루를 온전히 이 두 곳을 다녀오는데 투자한 것은 아직 사람들의 때를 많이 타지 않아 순수하고 고즈넉한 풍경에 끌렸기 때문이다.
성읍 녹차마을
먼저 찾아간 곳은 성읍 녹차마을이다. 성읍리에 도착하니 타이밍 좋게 녹차마을 방면으로 가는 버스가 바로 있어 잠시 기다렸다가 타고 이동했다.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갓길을 따라서 왔던 길을 거슬러 오르니 ‘오늘은 녹차한잔’이라는 제법 커다란 카페와 주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옆에 카트 체험장이 있고, 뒤편으로 쭉 녹차밭이 펼쳐져 있다. 들어가는 길을 살짝 헤맬 뻔했는데, 이정표를 겸하는 작은 팻말이 길을 잃지 말라고 무심한 듯 친절하게 방향을 알려 주었다.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니 잘 구획된 너른 녹차밭이 나타났다. 푸른 하늘을 뚫고 나온 강렬한 햇살이 녹차밭에 부서졌다.
바다가 햇빛에 반짝이듯 녹차밭도 눈부시게 빛났다. 일렁이는 초록빛 파도 사이에 풍경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어 모두가 쫓기지 않고 느긋하고 오붓하게 경치에 젖는 모습이었다. 한쪽에서는 한 일꾼이 농기계를 끌고 밭을 가꾸고 있었다. 청량하게 푸른 하늘과 뭉게뭉게 떠 있는 구름 아래 펼쳐진 녹차밭의 풍경은 제주의 다른 곳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한없이 평화로웠다.
녹차밭에는 인생샷 포인트로 사람들의 인기를 끄는 동굴이 있다. 녹차밭 중간쯤 나무들이 모여있는 곳 뒤로 내리막길이 있다. 그곳으로 내려가면 지대 아래로 폭이 넓은 동굴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굴의 깊이는 그다지 깊지 않다. 몇 발자국 걸어가면 막다른 곳이다. 그 가운데쯤 사진사가 서고, 동굴 입구의 한 가운데에 모델이 서면 촬영 준비는 끝난다. 울퉁불퉁하고 어두운 동굴을 액자로 삼아 밝은 바깥에 노출을 맞춰 사진을 찍으면 나무와 어우러져 함께 나오는 풍경이 제법 이국적이고 신비했다.
녹차밭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나와 카페로 향했다. 카페 1층에서는 녹차와 관련한 여러 가지 상품들을 살 수 있으며, 2층에서는 맛있는 음료를 만끽할 수 있다. 창 너머로는 녹차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풍경을 두고 맨입으로 있을 수가 없어 말차 밀크티를 주문했다. 은은하게 올라오는 차 향이 부드럽게 입안을 감싸고 돌았다.
카페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전망이다. 실내에서 보는 풍경도 멋지지만, 카페 외부에서 녹차밭을 조망할 수 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한라산의 기운을 밭은 녹차밭 전체가 한눈에 보인다. 축구장 위에선 보이지 않는 그라운드의 결이 관중석에 올라가면 깔끔하고 멋들어지게 보이는 것처럼, 녹차밭 또한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습이 그대로 보여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제주 고소리술
녹차밭과 영주산은 마을을 사이에 두고 정 반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번에 연결하는 버스도 없어서 결국 걷기로 했다. 3km 거리, 부담스러운 듯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를 얼마간 걸었을까. 2차선 도로변에 흥미로운 공간이 있어 슬쩍 들어갔다. 작은 폭포가 흐르고, 꽃들이 예쁜 소박한 정원과 전통적인 형태로 지어진 건물이 보였다. 제주 전통 술인 고소리술을 빚는 양조장이다. 고소리술은 고려시대 몽고인들에 의해 넘어온 증류기법이 그대로 전해지며 생산된 제주도 최초의 증류주이다. 소주를 만들 때 쓰는 도구를 ‘소줏고리’라고 하는데, 제주도 사람들은 이를 ‘고소리’라고 불렀다. 그 명칭이 그대로 술 이름에 들어간 것이다.
이곳에서 만든 술이 청와대 만찬주로 올랐다고도 하니, 술을 마셔보지 않아도 그 내공과 품질이 대단할 것이라는 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양조장 안은 작은 박물관처럼 꾸며져 있고, 고소리술에 대한 소개와 다양한 전시품들을 볼 수 있었다. 벽 뒤편에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직원은 일에 크게 몰두하였는지 내가 들어온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혹시나 방해가 되진 않을까, 조용하게 둘러보고 살며시 나왔다.
영주산
성읍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500m쯤 가면 영주산으로 향하는 좁은 임도가 나온다. 차를 타고도 이동할 수 있다. 완만한 오르막을 타고 600m를 더 오르면, 주차장과 함께 영주산으로 들어가는 울타리가 나온다. 제주에서 영주산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두말하면 입이 아픈 영산인 한라산의 옛 이름이 오늘날 성읍의 뒷산에 붙여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옛사람들은 이 산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신성시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영주산의 초입에는 사방이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 한가운데 두세 사람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다. 그 길이 제법 가파르지만, 뒤를 돌아보면 고도가 높아지며 함께 넓어진 풍경이 힘이 되었다.
가파른 초지를 지나면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이어진다. 계단은 밟고 밟아도 끝이 없는 것처럼 계속 상승한다. 금방이라도 하늘에 닿을 것 같은 계단을 지나면 드디어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에 서면 올라오면서 보이지 않았던 영주산 뒤편에 성읍 저수지를 낀 전원이 아주 푸르르고, 중산간에 솟은 셀 수 없이 많은 오름과 눈앞에 성큼 다가온 한라산이 아주 듬직하다. 반대편 동쪽의 푸른 바다에는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파도를 거스르며 역영을 펼치는 것처럼 역동적인 모습으로 떠 있다. 공기가 깨끗하고 하늘이 맑은 좋은 날씨였기에 어느 하나 빠지는 게 없이 풍경이 360도로 펼쳐졌다. 제주도의 모든 면면이 다 보이는 풍경과 함께, 마치 제주의 끝 내지는 제주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하늘 끝으로 향하는 것 같은 등산로와 사방으로 열린 풍경이 그 요인인 듯했다. 옛사람들도 오름의 이런 자태와 제주도의 다양한 면면이 아울러 보이는 풍경에 반했던 걸까. 이 산을 신성시했던 선인들의 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