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으로 가요
키보이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거예요
불타는 그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젊~음이 넘치는 해변으로 가요
달콤한 사랑을 속삭여줘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거예요
불타는 그입술 처음으로 느꼈네
사랑의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연~인들의 해변으로 가요
사~랑한다는 말은 안해도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거예요
나는 나는 행복에 묻힐거예요
Keyboys
국내 최초의 록 그룹 '키보이스' 60년대초, 미8군 무대를 벗어나 일반대중에게 선보인 국내 최초의 록그룹중 하나가 '키보이스'이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초기 그룹사운드로는 '코끼리 브러더스'와 '신중현의 에드포' 그리고 그 유명한 '김씨스터즈'의 남동생들로 구성된 '김브러더스'정도가 있다 '키보이스'의 오리지널 1기 라인업은 윤항기(드럼), 차도균(베이스),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키보드), 차중락(보컬)의 5인조로 시작했다
63년 종로의 유명 음악감상실 ‘디쉐네’는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그랬듯 일반대중들 앞에서 국내 최초로 록사운드를 연주했던 '키보이스'의 데뷔공간이었다. '이종환' 씨가 사회를 맡고 있던 '디쉐네' DJ박스 옆에 임시로 만든 간이무대에서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고 리드기타 '김홍탁'은 기억한다. '차중락'은 긴 부츠를 신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는 모창으로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고, 사촌형 '차도균'은 첼로로 베이스를 시도해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윤항기'는 맹인가수 '레이 찰스'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 맛깔나게 노래를 부르기도했다 그러나 각자 개성과 음악 역량이 출중한 멤버들은 새로운 그룹을 창시하거나 솔로 독립을 꿈꾸며 67년부터 핵분열을 시작했다 오리지널 멤버 중 가장 늦게까지 키보이스에 남았던 만능 연주자 '옥성빈'마저 69년9월초 후기 멤버들과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시민회관 소울파티 무대를 마지막으로 탈퇴를 선언했다.
이로써 오리지널 멤버 전원이 '키보이스'를 모두 떠나고 조영조, 박명수, 장영 등으로 구성된 후기 멤버들은 개인적 기량이 출중했던 1기와는 달리 탄탄한 팀워크로 구성된 연주와 구성진 하모니로 큰 사랑을 받았다. 71년 7인조로 거듭난 후기 멤버는 조영조, 오정소, 백승진, 이광일, 조기상, 장영, 박명수.로써 브라스 연주를 가미한 음악적 변신으로 ‘시카고 사운드’라는 새 유행어를 낳았다. 현재 대중들이 기억하는 키보이스의 히트곡들은 대부분 후기 멤버들의 노래가락이다.
그 중 ‘해변으로 가요’는 여름철이면 어김없이 불리어지는 영원한 젊은이들의 주제가로 여전히 군림하고 있다. 국내 록그룹들의 모태라 할만한 '키보이스'가 개척하고 들려준 음악은 비록 음악적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처음 시도되는 트로트와 록이 접목된 구성진 노래가락이었다. 그들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록그룹들은 '키보이스'가 부정할 수 없는 한국 록그룹의 개척자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순식간에 장안의 스타로 등극했고, 한국 그룹사운드 역사의 맨 앞줄에 기록된다. 이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해변으로 가요’는 단숨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어 모았다. 그리고 한 세대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가요사의 수치스러운 장면이자 역사이기도 하다. ‘해변으로 가요’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이 노래의 진짜 주인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고 번안곡을 당연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키 보이스’의 노래들도 상당수가 번안곡이었다. ‘해변으로 가요’ 역시 일본 노래의 번안곡이었는데, 워낙에 히트하면서 언젠가 정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6년, 일본 밴드인 아스트로 제트(Astro Jet)의 리더이자 재일교포인 이철은 ‘고히비토타쓰노 하마베(해변의 연인)’를 작곡했다. 그는 1967년에 한국을 찾아 공연하면서 다른 이에게 부탁하여 이 곡을 한국어 노랫말로 바꿔 들려주었다.
‘해변의 연인’이 맘에 든 키보이스는 자신들이 이 곡을 부르기로 하고 허락을 구했다고 하지만, 정작 음반에는 원작자의 이름이 없었다. 후에 작사•작곡가의 이름이 수정되는데, 그 자리는 엉뚱하게도 김희갑을 거쳐 키보이스 2기 멤버였던 장영의 이름이 채우게 된다. 무려 37년이 지난 후인 2007년에야 한국의 법정은 원래의 주인을 인정했다. 훔친 노래가 한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가 될 수 있었던 시대, 그리고 ‘대중가요는 대중이 검증한다’는 주장, 이 모두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나 키보이스는 다른 의미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대중의 기호를 따르는 활동과 번안곡 연주에 만족하지 못한 김홍탁은 좀 더 색다른 음악, 다시 말하여 록 음악을 하고 싶었다. 장차 기타의 가능성을 넓혀놓게 될 그가 키보이스를 떠나 결성한 밴드가 히화이브(He 5)였고, 구성원에 변화가 생기며 확대된 팀이 히식스(He 6)였다. 또 다른 전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