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중보자 없이 서야 하는 환란의 때야말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설 수 있습니다
회고하면서
'경험적 구원론'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다루어 보려는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데까지 건조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하였기에 이 글은 조직신학적 논술이라기보다 고백이나 설교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것이 본인의 의도이기도 했다.
나는 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적 이슈를 토론하기 좋아한다. 토론을 통해 문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떤 생각이나 이해도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아무리 새로운 이론도 조금만 관심 있게 찾아보면 이미 어느 때인가 깊이 다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 앞에 겸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기발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실 그럴 능력도 없다.
'구원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원론에 관한 여러 논쟁도 역사 속에서 충분히 거론되었다. 지금 우리가 논쟁하는 구원론에 관한 이슈도 우리 선배들이 다 다루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원론을 둘러싼 이론 논쟁이 사실은 조금식상하다. 너무 기발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이해와 성향에 따라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교회에 해를 끼치고자 하지 않기를 바란다.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긴장감
이제 나는 이 연재의 마지막 문제로 소위 마지막 환란의 때에 "중보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대쟁투, 614)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분명히 우리 재림교인의 신앙 의식에는 종말론적 긴장감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긴장감 중에서도 마지막 환란의 때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의식만큼 그들을 긴장시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 예수의 중보 없이 하나님 앞에서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가? 정말 인간이 온전히 완전해지지 않고서야 어찌 절대자 앞에 홀로 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혹시 우리 중 어떤 분들은 이 말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인간이 자신의 완전한 의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이해하는지 모르겠다. 진정 그렇다면 인간은 정녕 스스로 완전해지지 않으면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 말씀의 의미가 그런 것일까? 과연 마지막 환란의 때에 중보자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이 인간의 완전한 의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예수의 중보가 없는 이때야말로 오직 예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이제 그 이유를 살펴보자.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이들은 은혜로 의인된 사람들
화잇은 예수께서 모든 중보 사업을 마치고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선포하신 후에 환란이 닥친다고 하였다. "주님께서 성소를 떠나실 때 이 땅의 거민들에게는 암흑이 덮인다. 이처럼 두려운 시기에 의인들은 중보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한다"(대쟁투, 614). 여기서 핵심은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사람은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떻게 의인인가 자신들의 흠 없는 완전에 의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흠 많은 야곱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낱낱이 고백하는 사람들이다(대쟁투, 620 참조). 그들이 의지할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들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한 그 믿음을 근거로 그들을 의인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환란의 때에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철저하게 중보자의 은혜를 옷 입어야 한다.
환란의 때에 예수의 중보는 끝난다. 그러나 그 환란을 통과할 의인은 예수의 중보로 의인이 된 사람이다. 그들이 환란의 때를 통과하는 것은 예수의 의 때문이지 결코 자기의 의 때문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를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다. 우리는 실수와 약점과 죄를 낱낱이 주님 앞에 내놓고 온전히 그분의 의를 신뢰하여야 한다. 특별히 자기는 회개할 것이 없는 '더 거룩한 차원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이야말로 회개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연약한 형제를 사랑으로 권면할 책임이 있지 그들을 비난할 권리는 없다.
이 환란의 때에도 의인들은 야곱과 같이 “자신의 약하고 무가치한 것을 고백하고 더욱이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대쟁투, 617) 간구를 드릴 것이다. 사단은 이때 자기가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여하나님 앞에 그들을 고발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달으며 크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붙잡는 손을 놓지 않는다(대쟁투, 619~620). 그러므로 이 환란의 기간에도 여전히 의인들이 의지할 것은 자신들의 썩어질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한 마디로 중보자 없이 서야 할 환란의 때야말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설 수 있는 것이다.
연재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소위 영원 지옥설을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 종종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짧은 인생을 살면서 나쁜 짓 좀 했다고 영원히 끓는 지옥불에 그들을 태우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다. 틀림없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이치는 영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조금 착하게 살았다고 그것 가지고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하면 착각도 보통 착각이 아니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의로 하늘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보낸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구원에 있어 인간의의는 무용지물이다. 예수만이 희망이다. 이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자신들이 성자같이 변해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다. 천국은 인간이 얻기에는 너무나 비싼곳이다. 그래서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의는 이 땅에 묻고 다만 주님만을 높이자.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자.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경건과 의를 드러내며 형제를 비난하지 말자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잘 안다. 나를 아는 사람들도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기도하면서 주님께 물어본다. "주님, 저 구원 못 받나요." 그럴 때마다 주님은 "무슨 소리, 내가 널 구원했는데" 라고 말씀하신다. 나는 그게 성경의 약속임을 믿는다. 이렇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언제나 나를 살리고 회복시키고 힘을 준다. 그래서 난 오늘도 어제의 부끄러움을 딛고 일어서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다시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그분의 교회를 위해, 그리고 대학을 위해 작은 봉사라도 감당하려고 아침 길을 나선다. 그동안 10회에 걸친 연재에 호응해 준 독자들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