緖論 Ⅰ. 土俗信仰과 華嚴思想의 圖像的 象徵 A. 太陽崇拜와 毘盧遮那 B. 祖上崇拜와 蓮華藏世界 Ⅱ. 五方思想과 山川曼茶羅의 變容 A. 五方佛과 五臺山思想 | B. 華嚴禪과 山川曼茶羅 Ⅲ. 普賢行願과 彌陀淨土畵 A. 普賢行願品과 阿彌陀如來圖 B. 普賢菩薩行願贊과 阿彌陀八代菩薩圖 結論
緖 論
高麗佛畵는 현재 약 130여 점이 알려져 있다. 비록 넘칠 만큼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하나의 범주와 분야로 자리 매김을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연구논문과 저서들이 산발적으로 축적되어 왔기 때문이다.
高麗佛畵, 나아가서는 불교미술에서 접근방식만으로 분류한다면 미술에서 보는 불교와 불교에서 보는 미술로 나누어질 수 있다. 불교미술을 미술현상으로 보고, 불교미술품을 작품으로 보아 그 성격을 규명해나가면서 경전이나 교리 등을 참조하는 태도라면 미술의 시각에서 보는 불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교리와 정신 및 시대상황과 시대정신이라는 시각으로 미술을 보는 것은 불교에서 보는 미술이 될 것이다.
이 접근방식들은 원래 하나인데 둘로 나뉘어진 것이다. 즉 불교와 미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학문적 성취의 바탕 위에서 통합되어야 하는 분야인데도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교와 미술이 워낙 방대하고 심오하기도 하려니와 통합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불교의 교리 및 정신에 입각하여 미술현상과 미술문화를 재해석한다는 통합적인 시각에서 高麗佛畵를 천착함을 목표로 한다. 그 첫 번째 방향으로 高麗佛畵의 배경이 되는 사상 중에서 화엄사상의 위상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접근방식에 따라 먼저 토속적인 태양숭배사상의 도상이 高麗佛畵에 그려질 수 있었던 배경에 화엄사상의 포용성이 있다는 데 주목한다. 그리고 조상숭배사상 역시 毘盧遮那佛 혹은 阿彌陀佛의 蓮華藏世界와 연결될 수 있는 사상임을 밝힌다.
또한 지금까지 알려진 高麗佛畵의 분포에서 볼 때 彌陀, 觀音, 地藏, 釋迦 및 毘盧遮那佛으로 요약될 수 있는 분포구도는 비록 한정된 도상에 의한 분류이지만 전통적인 五方思想과 신라의 五臺山思想에서 체계화된 모습으로 보여지는 五方佛사상을 담고 있으며 그 도상들의 구도는 다분히 화엄사상을 표방하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것은 고려불화의 구도가 신라불교의 신앙행태를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阿彌陀如來圖 및 阿彌陀八代菩薩圖의 彌陀淨土 사상이 華嚴經의 「普賢行願品」 및 「普賢菩薩行願贊」에 근거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화엄경의 神衆思想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神衆幀畵가 高麗佛畵에서 그 해체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神衆畵 역시 밀교도상의 만다라적 전개와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高麗佛畵는 많은 부분 화엄과의 연관에서 고찰될 수 있으며 나아가 밀교도상과도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Ⅰ. 土俗信仰과 華嚴思想의 圖像的 象徵
高麗佛畵에는 불보살의 옷이나 배경 등 요소 요소에 문양들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불교의 도상인 경우도 있지만 불교와는 무관한 문양인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三足烏, 달토끼, 봉황, 용 등의 문양들은 高麗佛畵를 기점으로 볼 때 전대로는 고구려벽화와 상고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고, 후대로는 조선의 민화를 거쳐 오늘에까지 전해져 오는 것들이다.
이렇게 전통문양들이 불화에 그려질 수 있었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불교 자체의 포용력에서 온다. 그 포용력이란 불교 자체의 형성배경이 되는 인도의 풍부한 상징과 다양한 신앙 및 그 신앙의 변천과정에서 갖추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인도에서 불교의 발달에 따라 위축되었던 바라문교가 불교를 포섭한 힌두교로 변신하여 번창하자 이번에는 다시 불교가 힌두교와 인도의 민간신앙을 포섭하여 밀교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불교는 매우 탄력성있고 포용력이 큰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가 전파되었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토속신앙 역시 불교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상징이나 도상들이 습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에는 많은 토속신앙에 따른 제사가 있었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역대 왕들이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평왕 50년(628년) 여름에 큰 가뭄이 있어 시장을 옮기기도 하고, 용을 그리어 비를 빌기도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고구려에서도 역시 불법과 귀신을 함께 섬겼다. 舊唐書에는 구체적으로 靈星神과 日神, 可汗神, 箕子神 및 隧神 등이 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佛宇, 塔婆와 始祖神과 扶餘神의 神廟가 동시에 건축되었다. 또한 불교 수용 이후에도 10월에는 왕이 제사장이 되어 祭天儀式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예들을 보면 불교와 토속신앙과의 공존은 역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宣和奉使」, 高麗圖經에는 모래제사[祠沙]를 모시는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 외에도 嶽瀆 등 많은 신이 있다 했다.
이러한 토속신앙적인 제사는 불교와 별다른 마찰이 없이 거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의 왕들은 불교적인 법석과 도량을 연설하면서도 토속적인 산천, 조상에 제사지냈다. 민간에서는 액막이 주술이 불교의식과 나란히 행해지기도 했다. 高麗圖經에는 작은 나무배에 불경과 말린 식량을 싣고 재앙을 떨어내고자 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지는 方術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한국인들은 조상이건 불법이건, 제사를 지내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다를 바가 없다고 믿었음을 말해준다.
그 조상숭배와 함께 한국인에게 전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태양숭배사상이었다. 高麗佛畵에서 볼 수 있는 三足烏 등은 고려불화 이전의 시대에부터 태양의 상징도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상징은 불교에서 불보살의 위신력을 나타내는 卍자와 그 근원 및 위상에서 비슷하게 생각되고 있다.
A. 太陽崇拜와 毘盧遮那
옛부터 한국에서는 하늘과 태양에 제사를 지냈다. 부여의 迎鼓, 고구려의 東盟, 예의 舞天 등은 祭天儀式이었다. 고대인들은 하늘과 태양이라는 인격신에 공경의 예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면 인격적인 보답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불교가 수용된 이후에 하늘과 태양에 제사지내던 사람들은 불교에서도 그들의 신앙과 같은 요소가 있는지 살폈을 것이다. 그리하여 毘盧遮那佛과 蓮華藏世界는 태양신앙과 하늘신앙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을 것이다. 毘盧遮那佛은 대승경전에서, 그리고 蓮華藏世界는 華嚴經, 梵網經, 淨土經 등에 두루 설해졌다.
三足烏의 도상은 6세기 고구려 집안의 벽화고분 중에서 오회분 5호묘와 오회분 4호묘에서 해신이 이고 있는 태양의 안에 그려져 있다. 三足烏가 태양을 상징하는 도상의 예는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도 태양은 國祖나 始祖의 근원적인 상징으로 생각되었다.
고구려의 주몽은 닷되들이 만한 큰 알에서 나왔다고 했다(生一卵, 大如五升許). 신라의 시조인 朴赫居世는 박 모양의 알에서 나왔으며(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昔脫解는 다파나국에서 알로 태어났다(有娠七年乃生大卵)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알은 태양이거나 태양신, 혹은 천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많은 주장들이 있다. 그런 각도에서 생각한다면 삼국의 시조들은 그들의 탄생을 태양신이나 천제와 결부시켰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태양신 혹은 천제는 후손에게 영험을 베풀 줄 아는 인격신이었다.
주몽이 군사에게 쫓기자 魚鼈의 다리를 놓아 추격병을 따돌린 것은 인격신의 영험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태양에서 인격신으로서의 조상을 보았다. 그것이 태양숭배와 천제숭배의 정체일 것이다.
불교 역시 최고 지상의 존재에서 바치는 상징으로서 태양의 비유를 도입했다. 잡아함경에는 ‘어둠을 뚫고 허공에 청정한 광명을 비치나니 비로자나란 청정한 광명이 들어남이다’라고 하여 태양을 연상케 하는 묘사를 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 등의 불과 보살들에게 태양의 상징을 부여했다. 毘盧遮那佛 혹은 노사나불은 光明遍照로 번역된다. 광명이 두루 비친다는 뜻이다. 대승불교의 다음 단계로 분류되기도 하는 밀교에서는 大毘盧遮那佛을 大日如來로 번역했다.
굳이 번역하자면 ‘큰 해와 같은 부처님’이니까 역시 태양신과 유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毘盧遮那佛은 일반적으로 화엄의 주불로 여겨진다. 다른 대승경전, 특히 법화경에서도 毘盧遮那佛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화엄경의 毘盧遮那佛보다 덜 발전한 개념인 壽命無量의 부처님이라 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毘盧遮那佛을 위시한 불보살의 상징으로서 高麗佛畵에서는 卍字가 도입되고 있다. 이를테면 보스턴 미술관 소장의 華嚴經變相圖, 쾰른 미술관의 毘盧遮那三尊圖 등에는 가슴에 瓔珞의 형태로 卍字가 그려진다. 그리고 X선 촬영을 통해서 보면 不動院의 毘盧遮那佛圖에는 사방연속무늬처럼 卍字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마치 태양광선이 사방 팔방으로 방사하는 효과를 연상케 한다. 실제로 이 卍字가 전통적으로 태양의 상징으로 쓰였으리라 생각되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武周新字에는 날 일(日)자가 태극 등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卍字는 원래부터 불교의 상징이 아니었다. 慧苑의 華嚴音義에 의하면 則天武后 治世인 長壽 2年(693)에 한자에 편입되었다고 했다. 이후 이 卍字는 불교에서 불보살의 大人像으로 나타날 때 태양이거나 태양과 같은 신격으로 사용되었다. 毘盧遮那佛의 正覺을 핵심사상으로 하는 화엄경과 그 화엄의 사상에서 卍字는 毘盧遮那佛과 蓮華藏世界, 혹은 해인과 같은 깨달음의 현현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義湘의 海印圖, 즉 華嚴一乘法界圖에서는 법성을 증득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을 찾아가는 도인의 굴곡이 卍字와 같다는 주장도 있다. 의상의 해인도에서는 右旋의 卍의 굴곡을 따라 그려졌다. 이를 본딴 것으로 생각되는 명효의 해인삼매론에서는 左旋의 卍으로 그려졌다. 역시 卍字를 통하여 화엄사상에서 의미를 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高麗佛畵에 나타나는 卍字와 함께 千輻輪文은 화엄경(80권)의 「如來十身相海品」의 사상을 도해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먼저 卍字를 보면
여래의 가슴에 大人像이 있어 모양이 卍자와 같으니 이름이 吉祥海雲이라 한다. 摩尼寶華로 장엄하고 일체의 보배색으로 갖가지 光焰輪을 발하여 법계에 충만하며 널리 청정하게 하며 다시 묘음을 내어 바다처럼 깊은 불법의 세계를 널리 펼치니 이를 53번째 대인상이라 하니라 (如來胸臆에 有大人相하야 形如卍字하니 名吉祥海雲이라. 摩尼寶華로 以爲莊嚴하고 放一切寶色種種光焰輪하야 充滿法界하야 普令淸淨하며 復出妙音하야 宣暢法海하니 是爲五十三이니라)
했던 것이다. 광염을 발하여 법계를 충만하게 한다는 표현은 다분히 태양과 그 덕을 연상하게 된다. 이러한 화엄의 포용력은 조상숭배사상에서도 훌륭한 전거를 마련해준다.
B. 祖上崇拜와 蓮華藏世界
우주, 천체 및 靈獸瑞鳥 등의 신앙과 함께 한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조상숭배였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에 보면 南解次次雄 3년에 朴赫居世의 시조묘가 세워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조상숭배는 옛부터 내려온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炤知麻立干(495년)에 시조묘에 대한 御祀는 神宮으로 바뀐다. 2년에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9년에는 시조의 탄생지인 奈乙에 신궁을 안치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조에 대한 제사가 조상에 대한 제사로 바뀌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겠지만 이후 智證麻立干, 眞德王 등의 치세에 신궁에 제사기록이 남아있는 등 御祀는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조상숭배사상은 고유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많은 변천을 겪어 오늘에 전하여 왔을 것이다. 그 중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유교의 조상숭배사상도 있겠지만 불교의 윤회설, 내세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저승에 대한 관념이 불교의 지옥과 극락이라는 개념과 연결될 수 있으며 토속신앙에서 일컫는 환생 역시 불교의 윤회설과 융합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불교의 정토사상은 한국인에게 조상이 사후에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것으로 믿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불화에 결정적으로 많은 阿彌陀, 觀音, 地藏菩薩을 비롯한 阿彌陀三尊圖나 阿彌陀八代菩薩圖 등을 남겼을 것이다.
특히 지장사상은 한국인의 저승사상과 비슷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지장보살은 아미타불의 권속으로서 지옥에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극락으로 천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으므로 특히 친근한 존재이기도 하려니와 宋高僧傳의 「唐池洲九華山化成寺地藏傳」의 주인공 金喬角 스님이 신라의 왕족이라는 점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더욱 신라인에게 친근하게 신봉될 수 있었을 것이며 이후 지장신앙, 나아가 정토신앙의 촉매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지장사상은 五臺山사상에서 정립된다. 즉 南臺에 지장보살이 현신하며, 普天은 유언에 地藏房을 남쪽에 두어 지장보살상을 안치하고 붉은 바탕에 지장 및 팔대보살을 그리라 했다. 그리고 福田 五員을 두어 낮으로는 金剛般若, 밤으로는 占察禮懺을 읽게하여 金剛社라 부르라 했다.
그리고 眞表律師 및 心地의 地藏感應은 신라시대 지장사상의 심도를 짐작케 해준다. 진표율사는 23세에 亡身懺의 끝에 지장보살이 현신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고쳐주고 정계를 준다.
心地는 向堂禮拜 끝에 팔뚝과 이마에 피가 흐르자 지장보살이 매일 위문했으며 簡子를 전해주었다고 했다. 이후 고려 태조가 개국초 서경에 세웠다는 십대사 중에 지장사 및 地藏方里가 보이며 地藏寺를 통한 불사 등을 베푼 것으로 보아 고려에도 지장사상이 성행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 唐末의 僞經 佛說豫修十王生七經 등의 등장으로 시왕사상이 지장사상과 결합하여 고려불화를 위시하여 조선의 지장탱화 또는 감로탱화의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 외에도 布施나 造像, 寫經의 護法 공덕과 전통적인 孝 思想 및 조상숭배사상이 결합하여 지장사상과 시왕사상을 포함한 정토사상을 더욱 쉽게 한국인의 귀의처가 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이러한 호법공덕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에 金銀字寫經이 있다.
그런데 국왕을 비롯하여 왕공귀족이나 지방의 토호들의 施財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경 중에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지장사상과 연관을 짓기 어려운 大方廣佛華嚴經 및 「普賢行願品」 등이 보이고 있다. 이것은 조상숭배 사상과 정토사상 및 화엄의 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를테면 延祐7年 조성된 지장시왕도에는 탈락이 심한 편이지만 화엄과의 관계를 유추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명문이 있다.
탈락된 글자를 무시하고 억지로 읽는다면 명문의 내용은 고령의 어머니가 사후 지장보살의 인도에 따라 극락정토로 가십사 하는 발원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사후 명복을 비는 지장시왕도에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이 寫經되는 것이니 화엄사상과 정토사상을 같은 범주에서 생각했던 고려인들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나아가 高麗圖經 卷17의 「靖國安和寺條」에 의하면 阿彌陀堂에 觀音과 地藏을 봉안하고 東廡에는 祖師像을, 書廡에는 地藏像을 그렸다는 대목이 보인다. 그러므로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지장사상이 지옥사상이라기보다는 극락정토사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장이 아미타불의 권속으로서의 정토사상을 대변한다고 보면 「普賢行願品」에서 죽음에 이르러 미타불을 면대하련다는 화엄의 사상과 밀접한 관련하에서 지장사상이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로 미루어 보아 한국의 불교는 토속신앙의 큰 흐름인 태양신 숭배와 조상숭배의 상당부분을 공유하는 신앙이며 그 중에서도 화엄과 긴밀한 유대를 맺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화엄과의 친화관계를 보다 잘 보여주는 것이 산천만다라이다.
Ⅱ. 五方思想과 山川曼茶羅의 變容
화엄의 포용력은 산하대지에도 적용된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인 한국에서 한국인은 단순한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생활과 신앙과 나아가서는 조상숭배 및 천제 혹은 하느님 사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한국인의 조상은 天帝 桓因이다. 桓因은 ‘밝음의 근원’이라 풀이해서 태양신이거나 하늘님, 혹은 하느님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고대인에게 하늘과 태양은 동시에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환인의 서자인 桓雄이 이 땅에 처음 내린 곳이 太白山이었다. 그리고 환웅의 아들이 檀君 王儉이라 했으니 한민족은 하늘민족이요, 태양신의 자손이 된다.
또한 산은 하느님의 자손들과 하늘을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왕검은 구월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국인은 개국주인 왕검의 예를 따라 죽어 산에 묻힘으로써 환인, 혹은 하느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음직도 하다.
이러한 산악신앙은 불교에서 어떻게 해석될까. 화엄경의 神衆思想은 그 습합의 근거를 제공한다. 華嚴神衆은 화엄경(60권)의 제1장 「世間淨眼品」에는 護法善神들, 道場神들, 阿修羅, 迦樓羅, 羅喉羅, 緊那羅 등의 신들과 함께 대지와 수목의 신들이 33천왕 등과 함께 부처님 곁에 있다고 했다. 또한 화엄경(80권)의 제1장 「世主妙嚴品」에는 主城神, 主地神, 主山神, 主藥神 등의 十住衆 등이 소개되고 있다.
나아가 산악신앙 및 신중사상의 결합은 화엄과 선이 결합된 상태에서 이를테면 山川曼茶羅라고 부를 수 있는 형태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애불, 산중사찰 등은 산천만다라로 불리우는 밀교적인 개념을 잘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국의 만다라란 일본이나 티벳의 兩界蔓茶羅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禪佛敎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에서 淸淨曼茶羅, 伽藍曼茶羅, 山川曼茶羅 등의 형식을 말한다. 청정만다라는 佛頭骨을 모셨다는 오대산 寂滅寶宮의 예에서, 가람만다라는 금강계 만다라의 형식을 연상케하는 불국사의 가람배치 등에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산천만다라는 그 범주가 넓다. 그만큼 한국인이 산천에 넓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한국인은 불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산과 계곡에 佛寺를 짓고 불탑을 세웠다. 바위에는 磨崖佛을 새겨 모셨다. 나아가 금강산의 경우처럼 봉우리에 불보살의 명호를 붙여 주었다.
금강산은 澄觀의 華嚴經疏에서부터 비롯하여 불교의 성지로 여겨졌다. 그런데 금강산의 주요 봉우리는 대체적으로 불교, 혹은 화엄과 연관이 있는 불보살의 이름이 붙어있다. 즉 최고봉인 1638m의 비로봉, 동쪽의 관음연봉, 남쪽의 지장봉이 그러하다. 그리고 북쪽의 오봉산 중에 석가봉이 있으니 서쪽에는 아미타, 혹은 미타, 세지봉 등의 이름이 있음직도 한데 아직까지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산봉우리에 불보살의 명호를 붙이는 풍조는 선종의 발달과 연관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과 관련이 있는 불보살의 명호가 주요 봉우리를 차지하는 것은 한국의 선종이 화엄과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동서남북의 사방과 중앙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상은 오방사상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역시 화엄사상과 연관이 있다.
A. 五方佛과 五臺山思想
삼국유사에는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가 五類聖衆의 주처로 여겨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테면 동쪽의 觀音菩薩, 남쪽의 地藏菩薩, 서쪽의 無量壽佛 및 大勢至菩薩, 북쪽의 釋迦佛 및 오백 阿羅漢 그리고 중앙의 毘盧遮那佛 및 文殊菩薩이다. 다시 단순화하면 동관음 남지장 서미타 북석가 중비로 혹은 문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오방불의 구도가 高麗佛畵에서도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즉 미타, 관음, 지장, 석가 그리고 毘盧遮那佛의 빈도와 분포를 보여주는 것이다.
高麗時代의 佛畵라는 제목의 책에 수록된 불화 133점의 분포를 보면 淨土往生類(阿彌陀圖 47, 觀經圖 5, 觀世音 34, 地藏 20, 觀音地藏 2, 彌勒 2)가 110점으로 가장 많고, 다음이 佛傳類(羅漢 9, 釋迦 3, 如來 1, 涅槃 2)가 14점, 華嚴(毘盧遮那佛圖 3, 華嚴經變相圖 1, 藥師神將 2)관계 불화가 6점, 그리고 密敎 및 民間信仰(摩利支天2=日炎, 熾盛光如來1=北斗七星) 3점 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오방에 오불을 배대하는 것은 금강산의 명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사상이다. 그것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관음 지장 미타 문수신앙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거국적인 신앙행태였음을 알 수 있다.
관음신앙의 예를 들면, 먼저 문수신앙을 신라화하였던 慈藏이 千部觀音을 조성한 공덕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한국화엄의 開祖라 일컬어지는 義湘은 관음응신에 따라 낙산에 관음도량을 세우고 있다. 김대성은 불국사 창건당시부터 관음전을 세웠다 했다.
고려시대의 관음신앙으로 고려사 「세가」의 기록을 보면, 의종 신미 5년(1151) 여름 기유일에 왕이 명령을 내려 沈香木으로 관음보살상을 조각하여 내전에 두게하고 중들에게 음식을 먹였다고 했다. 원종 계유 14년(1273) 3월 경오일에 황후가 일찍이 洛山寺 관음 여의주를 얻어 보자고 하였으므로 송분이 가는 편에 이것을 보내었다.
충혜왕 계미 후 4년(1343) 6월 정사일에 왕이 嬖臣 金善莊이 차린 忌日齎를 위해 觀音房에 갔다. 공민왕 5 경술 19년(1370) 여름 4월에 기둥이 아홉이나 되는 큰 규모의 觀音殿을 影殿에 지었다. 6월 계해일에는 觀音殿의 제3층 상량 중에 26명이 압사했다. 태후가 듣고 공사의 중지를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고 했다.
또 고려사 「열전」을 보면, 백선연은 임금의 나이대로 동불 40구와 관음도 40장을 조성해서 4월 초파일에 別院에서 등불을 켜 놓고 왕의 복을 빌었다. 왕이 밤에 미복차림으로 참관하였다. 그리고 점쟁이 영의는 의종에게 왕에게 수명연장을 위해 天帝釋과 觀音菩薩을 모시라고 권하고 왕은 많은 화상을 조성하여 절로 보내고 祝聖法會를 주, 군 부담으로 열었다.
安和寺에는 帝釋, 觀音, 須菩提를 만들어 밤낮으로 중들에게 염송하게 하는 連聲法會를 열었다. 신라시대의 관음응신 및 성불신앙보다 영험을 위한 불사가 강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장사상 역시 충분한 영험담이 있다. 지장사상은 관음사상과 함께 개원 4년 선무외에 의해 지장법 또는 지장화상법으로 밀교에 전입되었다. 그런데 삼국시대에 이미 지장신앙이 보고될 만큼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뿌리가 깊다. 지장경이 번역된 것은 北涼(397~439)시대였으므로 삼국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추론의 근거를 보면, 隋代(581~617)에 번역된 占察經은 진평왕(579~632)대의 원광(555?~638?)에 의해서 점찰교법과 점찰법회, 점찰보 등이 행해졌다고 했으므로 중국에서 번역되자마자 신라에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삼국유사에는 오대산 및 진표율사를 중심으로 지장신앙이 소개된다. 오대산에서는 南臺 麒麟山에 팔대보살을 위시하여 일만 지장이 있다고 했다(卷第三 「塔像第四」, 臺山五萬眞身; 卷第三 「塔像第四」, 「溟州 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 또 보천은 유언으로 南臺에 地藏房을 두라 했다(卷第三 「塔像第四」, 「臺山五萬眞身」).
眞表律師는 二七日의 五輪撲石에 의한 亡身懺으로 지장보살의 淨戒 및 地藏, 慈氏菩薩의 摩頂을 받았다고 했다(卷第四 「義解第五」, 「眞表傳簡」; 卷第四 「義解第五」, 「關東楓岳鉢淵藪石記」). 또한 心地는 俗離山 永深의 果訂法會에서 向堂禮拜를 하면서 팔뚝과 이마에 피가 흘러 지장보살의 위문을 매일 받았다고 했다(卷第四 「義解第五」, 「心地繼祖」).
고려시대의 지장신앙은 기록이 많지 않으나 地藏房里라는 큰 동리가 있었으며, 공민왕 임진 원년(1352) 5월 무인일에 왕의 생일축하연 대신 地藏寺 스님 천 명에게 음식을 주었다고 했으므로 미루어 지장사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아미타신앙은 신라에서 此岸淨土, 나아가서는 新羅佛國土의 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역시 삼국유사를 보면, 먼저 아미타신앙을 반영하는 기사로서 南山 避里村의 念佛師의 彌陀念佛소리는 360坊 17萬戶에 낭랑히 들렸다 했다(卷第五 「避隱第八」, 「念佛師」). 月明은 亡妹를 위해 향가를 지어 彌陀刹에서 만날 때까지 도 닦아 기다리고자 한다고 했다(卷第五 「感通 第七」, 「月明師兜率歌」).
그러므로 신라에 있어서 미타신앙은 매우 보편적임을 알 수 있는데, 金仁問의 석방을 기원해 세운 仁容寺의 觀音道場은 인문이 귀국하는 해상에서 죽자 미타도량으로 고쳐졌다(卷第二 「紀異第二」, 「文虎王法敏」). 그리고 彌陀佛 火光後記에는 金志全이 甘山寺를 세우고 石彌陀 1軀를 봉안했다(卷第三 「塔像第四」, 「南月山」). 또 桂花王后가 昭成大王이 崩御함에 敏藏寺에 彌陀像 및 神衆像을 봉안했다
민장사는 미타불의 창사연기가 서린 곳으로 믿어졌다 (卷第三 「塔像第四」, 「鍪藏寺彌陁殿」). 그리고 道成嵓의 僧 成梵이 太平興國七年壬午에 萬日彌陀道場을 열고 精勤하기 오십여년에 많은 祥瑞가 있었다 했다(卷第五 「避隱第八」, 「包山二聖」).
오대산 普天의 유언에는 서대에 남면하여 미타방을 두고 무량수불상과 백지에 그린 무량수여래 및 대세지보살을 안치하고 복전 오원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 8권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을 하며 수정사라 하라 했다.(遺事卷第三 「塔像第四」, 「臺山五萬眞身」)
이렇듯 신라시대에 왕공귀족에서부터 천한 종에 이르기까지 至心으로 歸命했던 아미타불이지만 고려시대에도 그 신앙의 심도를 짐작할 수 있는 기사들이 있다.
먼저, 의종 12년 홍두적의 침입 이후 태조, 충선왕, 충목왕 등 9묘의 신주는 향교에서 제향하다가 임시로 숭인문 미타방에 모셨다고 했다. 또, 김치양은 궁성 서북 모퉁이에 十王寺를 짓고 鐘을 조성하면서 “동방의 나라에서 살고 있을 동안 같이 善을 닦고 후에 서방정토로 가서는 함께 正覺의 證果를 얻자”라는 명문을 새긴 바 있다.
그러므로 毘盧遮那佛과 文殊菩薩을 중심으로 관음 지장 미타 석가의 구도는 이미 신라시대에 정착되어 기층신앙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오대산신앙이다. 8세기초인 705년, 오대산에 진여원을 지으면서 본격화한 것으로 보이는 오대산사상에서 오방불 구도가 13세기와 14세기의 高麗佛畵에서 유사한 구도를 보여주는 것은 어떤 배경에서일까.
그것은 숭불국가인 고려가 신봉할만큼 굳건한 신앙과 교학체계를 오대산 사상이 확립했으며 고려에서는 별다른 거부반응없이 수용하였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에 있어서의 오대산의 의의는 신라불교의 독자적 이론, 사상 및 신앙체계를 확립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불교의 원형적인 신앙체계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
오대산은 번화한 종풍을 선양했다기보다는 불두골을 모신 청정만다라, 오방오불에 의한 가람만다라와 소재도량 및 호국불국토 사상에 의한 산천만다라의 구심점으로서 한국불교신앙의 의지처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배경에 화엄사상이 굳건한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B. 華嚴禪과 山川曼茶羅
동양에서 오방사상의 기원은 五嶽思想이라 할 수 있다. 舜임금이 오악에 제사를 지냈다고 했으니 그 유래가 깊다. 신라 역시 三山五嶽을 섬기는 전통이 있다 했으므로 오대산 신앙에서 오방사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오대산을 眞聖이 거주하는 佛壇으로 생각한다는 이른바 산천만다라 사상은 인도의 전통신앙과 불교신앙, 나아가서는 신라의 토속신앙까지 결합된 다원적인 차원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인도에서는 만다라나 얀뜨라의 영향으로 불단을 신성의식화한 청정만다라 사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토속신앙으로서의 三山五嶽사상과 신성한 금기지역으로서의 蘇塗신앙이 있었다. 그것이 불교를 매개로 결합하게 되는 것이니 그 과정에서 다시 토속적인 星宿信仰 및 음양오행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擇地法, 圖讖 등이 결합하였을 것으로 본다. 특히 밀교적인 만다라 사상과 선사상이 결합하여 전국토를 만다라의 형태로 생각하는 풍조가 성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특히 九山禪門에서 實相山派의 개조인 洪陟은 화엄교문은 물론이고 산천, 지령을 포함한 제신을 인정하는 포용력을 보여준다. 또한 大安寺의 터를 고르면서 觀地相法을 도입한 것으로 보이므로 밀교적인 擇地法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화엄과 선의 교섭은 均如 등이 이끌었던 화엄계통의 선종과 결합하게 되거니와 조계종 중흥을 이룬 知訥은 華嚴成起觀을 바탕으로 頓悟圓修를 거쳐 頓悟漸修로, 화엄의 圓頓信解門을 도입하여 定慧雙修를 내세우는 普照禪을 수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화엄과 선의 교섭을 잘 보여주는 高麗佛畵로서 不動院의 毘盧遮那佛圖가 있다. 도상의 設彩는 통상적인 高麗佛畵의 방식인 오채 중심의 극채색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구도는 禪畵를 연상케하는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水墨淡彩로 그려진 禪畵에 濃彩를 가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엄의 毘盧遮那佛을 그린 이 그림에는 중국의 송말 원초에 활약했던 선승 兩澗子曇(1249~1306)의 찬문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보건대 화엄은 선종과 긴밀한 유대를 맺으면서 영향력을 미쳤으며, 오대산의 오방에 가람을 조성하거나 금강산의 봉우리에 불보살의 명호를 붙일 때 화엄사상이 반영될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포용적인 틀 위에서 화엄사상은 미타정토 사상과의 교섭을 통해 高麗佛畵에 압도적인 화엄사상과의 연관을 보여주는 도상을 남기고 있다.
Ⅲ. 普賢行願과 彌陀淨土畵
淨土란 불보살이 머무는 淸靜光明覺의 세계를 일컫는다. 대승불교에서 정토라 할 때는 모든 경전과 불보살의 주처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승에서의 정토는 華嚴經의 蓮華藏世界, 法華經의 靈山會上, 大乘密嚴經의 密嚴淨土 등과 함께 毘盧遮那佛의 靈山淨土, 彌勒佛의 龍華世界, 阿彌陀佛의 極樂淨土, 藥師如來의 藥師淨土, 阿閦佛의 阿閦佛國土 및 彌勒菩薩의 兜率淨土, 觀音菩薩의 觀音淨土 등이 망라된다.
그러나 특별한 정토를 지칭하지 않을 경우는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를 가리키는 경향이다. 그만큼 아미타 정토신앙이 폭넓은 저변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미타신앙은 인도의 비슈누(Vishnu), 브라흐마(Brahma), 시바(Siva)를 중심으로 하는 정토사상이 般舟三昧經, 無量壽經 등의 대승경전을 거치면서 왕생사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대중적인 의미에서의 정토에 대한 개념은 불멸 후 석존을 대신할 부처로써 十方遍滿佛인 毘盧遮那佛과 함께 등장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 발전과정을 보면, 먼저 龍樹의 阿彌陀本願, 稱名, 念佛思想이 無着의 攝大乘論, 世親의 往生論 등을 거치면서 중국으로 소개된다. 중국에서는 慧遠류, 道綽 善導류, 慈愍류의 삼 부류를 지나면서 정토사상이 선양된다.
이 과정에서 정토사상은 염불만 하면 불보살이 극락왕생을 도와준다는 이른바 他力門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自力門에 의한 수도를 통하여 열반에 이른다는 불교의 이상이 변질된 것으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자력문과 타력문, 혹은 난행문이나 이행문이 수행과정이나 교리에서 확연히 구분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수행자나 학자의 근기나 성취에 좌우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高麗佛畵 역시 통념적인 분류와는 다른 성격이 엿보인다.
高麗佛畵에서 수적으로 가장 많은 정토계열의 도상, 이를테면 정토화는 정토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타력문이요, 이행문으로 분류할 만도 하다. 그러나 자력문 혹은 난행문이라고 할 수 있는 선종계열의 禪畵에 비하면 오히려 난행문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선종화가 수묵화 혹은 水墨淡彩를 위주로 하고 정토화가 極彩色의 濃彩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우선 착안된다. 또한 선종화는 禪旨를 선양할 수 있는 활달한 逸筆의 筆意를 앞세우는데 반해 정토화는 엄정한 교리의 도상화에 따른 기법의 숙련과 회화적 완성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선종화에 비해 정토화는 꼼꼼한 設彩와 背彩 등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도상적 의미보다도 高麗佛畵를 난행문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소의경전에서 온다.
일반적으로 정토화의 소의경전은 觀無量壽經과 無量壽經을 들 수 있다. 觀無量壽經에 의한 불화에는 觀經變相圖, 地藏十王圖 등이 있다. 그리고 無量壽經에 의한 불화에는 阿彌陀三尊圖, 阿彌陀來迎圖 등이 있다. 高麗佛畵에서 많이 그려진 정토화가 무량수경 계통에 속한다.
그런데 觀無量壽經은 易行門이요, 無量壽經은 難行門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高麗佛畵는 난행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경향의 대표적인 도상으로 湖巖美術館 소장의 국보 218호 阿彌陀三尊圖를 들 수 있다.
보통 아미타삼존은 阿彌陀佛과 觀音菩薩, 그리고 勢至보살이다. 세지보살 혹은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 보처보살로서 지혜문을, 반면 관음보살은 왼쪽의 보처보살로서 자비문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세지보살이 지장보살로 바뀌어 그려진 예를 이 삼존도에서 볼 수 있다.
세지보살은 오대산에서 무량수불과 함께 서쪽에 주처한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검색해보면 세지보살에 대한 언급이 세 번, 오대산에서만 보일 따름이다.
이유가 뭘까. 어쩌면 아미타불과 함께 오대산의 서쪽에 주처한다고 했으니 아미타불의 협시로서 중복되었다고 느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오대산사상에서 거론은 되었지만 세지보살은 적어도 삼국유사가 집필될 무렵까지는 밀교 등과 결합하여 발전하거나 보편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고려에 접어들면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그려진 이 삼존도는 왜구, 홍건적 및 몽고의 병란과 무신의 난 등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고려의 시대상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관음보살 및 지장보살이 산 사람을 정토에로, 그리고 亡者를 지옥에서 극락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는 신념이 반영되어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高麗佛畵에서 난행문이라고 하는 무량수경이 도상의 소의경전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려인의 상근기적 기질이겠지만 사실 고려의 불교는 어려운 교학보다는 불교의례에 치중하였으며, 不立文字를 내세우는 선종이 보편화된 시대였다.
그렇다면 유독 高麗佛畵에 보이는 난행문의 증거로서의 아미타불 도상은 고려의 신앙행태라기보다는 전시대인 신라에서 내려온 관행이라고 볼 수도 있다. 화엄사상은 그러한 가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를테면 해동화엄의 開祖라 일컬어지는 義湘(625~702)은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서민불교적인 彌陀淨土信仰을 고취한 바 있다. 義湘은 화엄본찰인 부석사에 毘盧遮那佛과 함께 無量壽佛, 즉 阿彌陀佛을 모셨다.
또 동해 낙산에 補陀落迦山 정토를 연상케하는 관음도량을 세웠다. 그러므로 義湘에 의하여 미타정토사상이 고취된 일면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화엄이라는 엄정한 교학과 교리에 바탕하므로써 미타정토사상 역시 상근기 정토인을 위한 정토사상이 중심이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화엄과 정토사상의 연관성은 義湘 뿐 아니라 중국 화엄종의 澄觀, 宗密에서도 발견된다. 澄觀(738~839)은 大方廣佛華嚴經疏 卷56에서 緣境念佛門, 攝億唯心念佛門, 心境俱泯念佛門, 心境無碍念佛門, 重重無盡念佛門의 五種門念佛을 통하여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는 주장을 펼쳤고, 宗密(780~841)은 그의 저서인 華嚴經 普賢行願品疎鈔 제4에서 稱名염불, 觀像염불, 觀相염불. 實相염불의 사종염불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澄觀과 宗密의 주장은 역시 염불의 대상인 아미타불이 毘盧遮那의 덕을 나타내며, 극락정토 역시 華藏世界의 佛土에 포함된다는 사상으로 집약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 역시 화엄의 세계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특히 澄觀은 無量壽經을 인용하면서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是心是佛是心作佛)”이라 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五種문염불이 화엄의 세계에서 비롯하되 무량수경에 연결될 수 있는 개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화엄세계란 高麗佛畵에서 「普賢行願品」과 普賢菩薩行願贊으로 요약될 수 있다.
A. 普賢行願品과 阿彌陀如來圖
정토화의 소의경전은 淨土三部經이다. 즉 佛說阿彌陀經, 佛說無量壽經, 佛說觀無量壽經이 그것이다. 그런데 高麗佛畵에 나타나는 아미타불은 정토삼부경의 도상화라기보다는 아미타여래와 그 권속에 치중한다. 오히려 그 도상의 근거는 華嚴經의 「普賢行願品」이 가깝다.
여기서 말하는 「普賢行願品」이란 당나라 貞元 14년(798)에 般若三藏이 번역한 40화엄의 40권에 해당되는 「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의 약칭이다.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설한 법문을 담고 있다. 井手誠之輔는 이 「普賢行願品」의 사상이 정토계 아미타불화의 조성동기가 된다고 보고 있다.
직접적인 도상의 근거가 아니더라도 보현보살의 행원에 나타난 上求菩提와 下化衆生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서 불화가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보현보살의 十種廣大行願 중에서 보면 上求菩提로는 1. 禮敬諸佛 2. 稱讚如來 3. 廣修供養 4 懺罪業障 5. 隨喜功德 6. 請轉法輪 7. 請佛住世 8. 常隨佛學이 해당된다고 보면 下化衆生으로는 9. 恒順衆生 10. 普皆廻向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至元 23年(충렬왕 12년, 1286)에 조성되었으며, 島津家 舊藏本이라 부르는 이 阿彌陀如來圖에는 蓮花生과 阿彌陀淨土 往生의 발원이 명기되어 있다. 화엄사상의 연관에서 바라보면 연화생은 40화엄의 게송을 보더라도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菩提記를 받는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이 불화의 아래 좌우에는 忠烈王과 원성공주의 극락왕생을 비는 嬖行 廉承益의 발원을 선승 自回가 명문으로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 게송은 연화생의 게송 바로 앞에 실려있다.
이르되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일체의 장애를 모두 떨어내고 아미타불을 맞대어 안락찰에 왕생하를 원하노라. 그 안락찰에 태어났으면 일체의 원만하고 남김 없는 임종시의 소원을 성취하여 일체의 중생계를 이롭고 즐겁게 하리로다. (願我臨欲命終時에 盡除一切諸障礙하고 面見彼佛阿彌陀하야 卽得往生安樂刹이로다 我旣往生彼國已에 現前成就此大願하고 一切圓滿盡無餘하야 利樂一切衆生界로다)
라고 했다. 그러므로 연화생이란 일체중생계를 이롭고 즐겁게 하는 상징적 표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연꽃은 上求菩提와 下化衆生의 상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대목은 「普賢行願品」의 십종광대행원에 대한 해설과 공덕이 서술된 부분이다. 즉 아미타여래의 안락찰에 왕생하고 중생에게 베푼다는 보현행원의 사상이 아미타여래도의 사상이 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보현보살에 의해 아미타여래라는 정토불의 개념이 구현되고 있으므로 정토개념은 화엄사상과 연결되는 개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荻原寺 所藏本의 아미타여래도는 아미타정토보다는 화엄의 세계로 인도하는 아미타여래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고 井手誠之輔는 설명한다. 아마도 島津家 舊藏本보다 동세가 크고 색채가 발랄하므로 왕생자를 내영한다기보다는 가슴의 卍字와 손바닥의 천복륜문으로 보아 연화장 세계로 인도한다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井手誠之輔의 이러한 견해는 매우 설득적이다. 왜냐하면 均如(923~973)의 普賢十種願往歌, 즉 향가인 普賢十願歌 11수는 高宗 38年(1251)에 개판된 釋華嚴敎文記圓通抄에도 실렸다고 했으므로 도진가 구장본 아미타여래도가 조성되었던 당시까지도 불렸다고 볼 수 있다. 향찰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으므로 그만큼 대중적인 기반을 가졌으리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B. 普賢菩薩行願贊과 阿彌陀八代菩薩圖
「普賢行願品」은 아미타 팔대보살도의 조성과도 관련이 있다. 아미타 팔대보살이란 阿彌陀如來와 普賢菩薩 文殊菩薩을 중심으로 觀音 地藏 彌勒菩薩, 그리고 虛空藏 金剛藏, 除障碍 보살을 일컫는다. 소의경전은 不空이 번역한 八代菩薩曼茶羅經으로 알려져 있다. 만다라라는 이름과 특히 허공장, 금강장, 제장애 보살들의 구성으로 보아 밀교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八代菩薩曼茶羅經에서 인용한 八代菩薩讚이 실린 곳이 普賢菩薩行願贊이다. 普賢菩薩行願贊 1권은 「普賢行願品」 전 62偈의 別譯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阿彌陀八代菩薩의 근거를 찾아 역추적해 들어가면 八代菩薩曼茶羅經이 나오고 다시 보현보살행원찬을 거쳐 「普賢行願品」으로 이어지는 화엄사상과의 연관이 밝혀지는 셈이다.
아미타 팔대보살을 그린 그림의 예로는 현재 10여점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도상에서는 직접 普賢菩薩行願贊과의 연관을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普賢行願品」 사경 중에는 다라니의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忠肅王 3년(1334)에 書寫된 湖林美術館 소장의 「紺紙金泥普賢行願品」 1권 및 경도 국립박물관 소장의 「白紙金泥普賢行願品」에는 般若三藏이 번역한 「普賢行願品」을 사경한 후에 끝부분에 ‘速疾滿普賢行願陀羅尼’라 덧붙이고 出行願讚後 註記를 첨가했다.
그러므로 불공이 번역한 보현보살행원찬 1권을 원전으로 했음을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 때 高麗佛畵에 나타나는 정토적 경향의 도상에 있어서 화엄사상은 절대적 영향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미타팔대보살도는 아미타삼존도에 비하여 분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분화하여 별존으로 그려지는 도상들을 신중도, 혹은 걸 수 있는 그림으로 그려질 때에는 신중탱화라 부른다. 그런데 신중탱화는 高麗佛畵에서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 같지가 않다.
오히려 비로자나 삼존, 혹은 아미타삼존에서 팔대보살, 지장보살에서 지장시왕 등으로 분화하거나 관음보살처럼 별존으로 분화하는 초기형태를 高麗佛畵에서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아미타사상이나 신중사상의 배경에 소의경전으로서 화엄경이 연결되어 있음을 생각할 때 高麗佛畵에서 조선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불화, 탱화 등에 화엄이 끼친 영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結 論
한국 불교의 주축이 되는 사상들 중에서 화엄사상은 신라시대부터 굳건한 위상을 지켜왔다. 자장은 화엄에 근본을 두는 문수신앙을 중국의 오대산에서 이 땅으로 들여왔다. 화엄초조라 할 수 있는 의상은 관음의 보타락정토사상을 고취했다. 미타정토사상은 화엄경의 普賢行願品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음과 세지 역시 화엄과 간접적인 영향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장보살은 아미타 정토사상과 지옥구제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신라인의 신앙에 따라 세지보살 대신 오방불의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오대산 가람만다라와 금강산의 산천만다라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오방불사상 즉 중앙의 비로자나와 문수를 주축으로 동 관음, 남 지장, 북 석가의 분포는 신라에서 비롯하였으되 고려로 계승되어 高麗佛畵의 핵심적인 주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배경에 화엄사상의 포용력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高麗佛畵에 은밀하게 그려지는 전통도상 중에 三足烏는 태양을 상징한다. 화엄의 본존 毘盧遮那佛은 光明遍照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태양신숭배사상은 어렵지 않게 화엄사상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조상숭배사상에서의 저승은 비교적 단순한 개념이어서 잘 조직화된 불교의 지옥 및 극락사상에 습합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그런데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은 화엄경의 보현보살 행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협시인 관음보살, 세지보살 혹은 지장보살과 팔대보살 역시 화엄사상과 연관에서 고찰될 수 있다. 나아가 高麗佛畵에 특히 아미타의 접인 또는 내영사상이 많은 것으로 보아 보현행원의 사상에서 전개된 정토사상이 충분히 조상숭배사상과 융섭될 수 있었을 것이다. 화엄사상은 그 뿐만 아니라 선과 결합하면서 밀교적인 개념을 도입하여 산천만다라로 전개되었다. 오대산 만다라는 전통적인 오방사상을 바탕으로 화엄의 문수신앙을 신라화하려는 신라인들의 의지에 의해 차토불국의 사상을 청정만다라, 산천만다라, 그리고 가람만다라로 전개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금강산에 화엄불국적인 만다라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신라인들의 그러한 만다라 사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므로 태양숭배, 조상숭배, 산악숭배 등의 모든 토속신앙을 포용한 화엄사상의 바탕에서 高麗佛畵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그려진 정토주제의 불화를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井手誠之輔의 탁월한 견해대로 아미타불화 및 아미타팔대보살도 등이 화엄의 보현행원사상에 근거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경전적인 연관성만으로는 왜 고려인들이 그토록 어려운 無量壽經 중심의 阿彌陀 接引 및 來迎圖 형식의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설명에는 미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큰 흐름이 화엄사상이라는 것은 매우 보편적인 인식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불교미술, 나아가서는 불화의 도상화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히는 연구는 그다지 진척이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사상과 도상을 분리하여 생각하거나 불교미술을 불교의 정신과 시각에서 접근한다는 단순명료한 명제를 간과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향후 이러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정립될 수 있는 많은 학문적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