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청도/불령사전탑 |
좁다란 골짜기의 절벽 위 널찍한 터에 자리하고 있는 전탑(塼塔)으로, 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쌓아 올렸다. 땅 위로 5단의 바닥돌을 놓고 1층의 기단(基壇)을 마련한 뒤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았는데, 오랫동안 무너진 채 방치되었다가 1968년에 다시 세워 놓은 것이어서 원래의 형태인지는 알 수 없다.
이 탑의 특징은 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한 점으로, 불상과 3층 석탑 무늬가 있는 벽돌로 쌓아 올려 탑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즉 길쭉한 벽돌의 옆면마다 연꽃받침 위에 앉아있는 3구의 불상과 2기의 석탑이 서로 교차하여 돋을새김 되어 있는데, 이러한 까닭에 이 탑을 ‘천불탑(千佛塔)’이라 부르기도 한다.
통일신라 때의 조각양식을 보이고 있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추측되며, 전탑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고 더욱이 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한 예는 극히 드물어 문화재로서 지니는 가치는 매우 크다.
![]() |
군위 제2석굴암 모전석탑
1층 기단(基壇) 위에 1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특이한 형태로, 전탑(塼塔:흙벽돌로 쌓아만든 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이다. 기단은 네 면마다 모서리에 2기, 그리고 그 사이에 3기 등 5기씩의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의 몸돌은 20여 단의 일정치 않은 돌을 포개어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전탑에서와 같이 아래·윗면이 층단을 이루고 있는데,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에도 다시 여러 단의 층단을 쌓아 점차 줄어들게 하였다.
지붕돌 한가운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과 보주(寶珠: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가 놓여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탑신을 다시 쌓으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었으나 비교적 탑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어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 전탑(塼塔)으로,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렸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을 이용하여 1층으로 마련하였다.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은 모두 벽돌로 쌓아올렸다.
2층 이상의 몸돌높이는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들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지붕은 벽돌로 쌓은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에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 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모조한 것이다.비록 모조품이긴 하나,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들을 통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이 탑을 여러 차례 보수하였고, 보수과정에서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
의성 탑리 오층탑 |
탑리 마을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5층 석탑이다. 낮은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전탑(塼塔)양식과 목조건축의 수법을 동시에 보여주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바닥을 깐 뒤, 목조건축을 본떠 가운데기둥과 모서리기둥 모두를 각각 다른 돌로 구성하였다. 탑신은 1층이 높으며 2층부터는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는데, 1층 몸돌에는 불상을 모시는 방인 감실(龕室)을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모습처럼 밑면뿐만 아니라 윗면까지도 층을 이루고 있는데 윗면이 6단, 아랫면이 5단이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목조건축의 지붕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각 부분에서 목조건축의 양식을 응용하는 한편, 곳곳에서 전탑의 조성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러한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분황사석탑(국보 제30호)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의 석탑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의성 빙산사지 오층 모전석탑 |
경상북도의 8군데 아름다운 경치 가운데 하나인 보현산 줄기 빙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돌을 벽돌 크기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으로 의성탑리오층석탑(국보 제77호)을 모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16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기단의 가운뎃돌은 기둥과 면을 이루는 석재를 딴 돌로 하여 15개의 돌로 구성하였다. 기단의 맨윗돌은 8개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탑신을 받치기 위해 괴임을 높게 얹었다.
탑신부를 보면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딴 돌로 모서리기둥을 세우고 정면에 네모진 공간을 마련해 놓았는데 이 공간은 불상 등을 모셔두는 용도로 쓰였다. 2층 이상부터 몸돌은 그 높이가 1층에 비해 반 이상 줄었으며, 5개의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각 4단씩이다.
지붕돌의 경사진 면은 각 5단의 층으로 이루어졌다. 정상의 머리장식부분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다.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후기∼고려 전기 사이로 추정된다. 의성탑리오층석탑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나 모전석탑으로서 아름다운 작품이다
![]()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솟은 꽃장식이 놓여 있다.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 |
경주 서악리 삼층모전석탑 |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무열왕릉 동북쪽 비탈진 곳에 서 있다.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기단(基壇)은 주사위 모양의 커다란 돌덩이 8개를 2단으로 쌓은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 윗면에 1층 몸돌을 받치기 위한 1장의 평평한 돌이 끼워져 있는데, 남산리 석탑에 3단의 층급이 있는 것에 비하면 간략화된 것이다. 탑신부(塔身部)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1장의 돌로 되어 있고, 1층 몸돌에는 큼직한 네모꼴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얇게 파서 문을 표시하였다.
문의 좌우에는 1구씩의 인왕상(仁王像)이 문을 향해 조각되어 있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으며, 처마는 평행을 이루고 있다. 이 탑은 독특한 기단 형식으로 미루어 보아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보물 제124호)을 모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남산리동삼층석탑이 기단 위에 3단의 층급을 둔 것에 비해 여기서는 1장의 돌로 이루어진 생략된 형식을 하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퇴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석탑으로 추측된다. 각 층의 몸돌에 비하여 지붕골이 커서 균형이 맞지 않고 둔중한 느낌을 주며 보존상태도 좋지 못하다.
![]() |
경주 남산동 쌍탑 |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쌍탑이 동·서로 건립된 특이한 예의 두 탑이다. 동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 올린 모전석탑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서탑은 전형적인 3층석탑의 양식이다. 동탑은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이 넓게 2중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잘 다듬은 돌 여덟개를 한 단처럼 짜 맞추어 기단부(基壇部)를 이루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돌 하나로 만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과 낙수면이 모전석탑처럼 똑같이 각각 5단으로 층을 이루고 있다. 서탑은 윗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2층 기단은 한 면을 둘로 나누어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새겼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돌 하나로 되어 있고 각 층에 모서리기둥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이와 같은 쌍탑은 대체로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지는데 비해, 이 동·서 두 탑은 각각 양식이 다른 흔치않은 모습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며 마주 서있다.
![]() |
경주 천북 오야리 모전석탑
자연암반을 바닥돌 삼아 그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이다. 탑신의 1층 몸돌에는 문(門)모양을, 2층 몸돌에는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3층 몸돌은 없어졌다.지붕돌은 흙벽돌로 쌓아올린 전탑(塼塔)의 양식을 모방하여 아래·윗면이 모두 층단을 이루고 있으며, 1·2층 지붕돌은 4장의 돌로 짜여 있다.
3층 지붕돌은 일부가 파괴되어 있는데, 다른 탑에서 옮겨다 얹은 것으로 보인다.자연암반을 바닥돌로 하여 세웠다는 점이 독특하고, 탑 구성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
강진 월남사지 모전석탑 |
모전석탑(模塼石塔)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탑으로, 재료는 돌이지만 그 형태가 벽돌로 쌓아올리는 전탑(塼塔)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탑은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에 있어서 중요한 탑이다.
기단은 1층으로 바닥돌 위에 기둥모양의 석재를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은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낙수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기단이나 낙수면의 양식이 전탑을 흉내낸 탑이면서도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모전탑이라 할 수 있다.
![]() |
제천 장락리 모전석탑 |
모전석탑이란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탑(模塼塔)이라고도 한다. 탑이 서있던 절터가 논밭으로 변하여 절의 규모는 알 수 없고, 7층에 이르는 거대한 이 탑이 주위를 압도하듯 버티고 서 있다.
회흑색의 점판암을 사용한 탑으로,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만은 점판암이 아닌 자연석으로 하여 1층을 마련하였으며, 그 위로 벽돌로 이루어진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탑신은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두는 곳으로, 1층의 네 모서리에는 점판암 대신 화강암을 다듬은 기둥을 세워 그 모습이 특이하다.
또한 남쪽과 북쪽면에 사리를 두는 감실(龕室:불상이나 사리 등을 모시는 방)을 설치하여 문을 달아 놓았는데, 현재 남쪽의 것은 없어졌다.1층의 남쪽과 동쪽면이 몹시 부서져 있는데 이러한 피해는 2층의 지붕돌까지 이르고 있다.
각 몸돌을 덮는 지붕돌은 재료가 벽돌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경사면 위아래 모두 층급을 두었으며 처마도 짧고 수평을 이룬다.지붕돌의 네 귀퉁이에는 아래위로 구멍을 뚫어 풍경을 달도록 하였다.탑의 머리부분에는 머리장식이 없어지고 장식받침인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는데, 그 윗면 한가운데에 동그란 구멍이 있고 구멍둘레로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1967년 무너지기 직전에 탑을 해체하여 보수했는데, 7층 지붕돌 윗면에서 꽃무늬가 조각된 청동조각이 발견되어 혹 탑의 머리장식이 아닐까 한다.탑신 전체에는 표면에 회를 칠했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어 주목된다.만드는 형식이나 돌을 다듬어 쌓아올리는 수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 |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 |
이 탑은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틀을 마련하여 세운 7층의 모전석탑이다.모전석탑은 전탑을 모방한 탑으로, 돌을 벽돌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이다.월정사에 딸린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하였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어서,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예불을 드리는 단 만을 두는 곳을 말한다.이 탑의 바닥돌은 화강암의 모서리를 깍아서 6단으로 쌓아올렸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돌로 만든 벽돌을 사용해서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을 쌓고 있는 이 돌벽돌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일정치 않은 크기로 잘려있으며 정교하게 표면이 잘 정돈되어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1층 몸돌은 15단을 쌓아올려 만들었고, 2층 이상부터 7층까지의 줄어드는 비율은 매우 부드럽다.
1층 몸돌의 남쪽면 가운데에 마련되어 있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은, 문짝으로 1장의 돌을 세웠고 가운데에 철로 된 문고리가 달려있다.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은데 이는 벽돌탑의 고유한 형식이다.
추녀는 반듯하지만 마무리부분에서 살짝 들려있고, 그 아래위로 방울을 다는 구멍이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단,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로 돌벽돌 2장을 얹은 후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돌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서,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지붕돌 추녀마루가 치켜올려진 것은 시대적 양식에 따른 것이며, 머리장식을 뚫어서 조각한 점도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탑앞에는 절할 때 쓰는 돌이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연꽃무늬, 안상(眼象) 등은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72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塔誌石) 5개와 금·은·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어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다.다만 정암사 내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보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고려시대로 짐작해볼 수 있다.
![]() |
여주 신륵사 전탑 |
아래로 한강이 굽어보이고 강 건너 멀리 평야를 마주하고 있는 경치좋은 바위 위에 이 전탑이 세워져 있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이르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안동지역에서 몇 기가 남아 있다.
탑은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기단과 계단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탑신부는 흙벽돌로 6층까지 쌓아 올렸는데, 그 위에 다시 몸돌하나를 올려놓고 있어 7층같아 보이기도 하는 애매한 구조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전탑과 달리 몸돌에 비하여 지붕돌이 매우 얇아 전체가 주는 인상이 사뭇 독특하다.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3층이 2단, 4층 이상은 1단이며, 지붕돌 위로도 1층은 4단, 2층 이상은 2단씩의 받침을 두었는데 이 또한 특이한 형태이다.
꼭대기에 머리장식이 있기는 하나 얇다.탑의 북쪽으로는 수리할 때 세운 비가 전해오는데, 거기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있다.조선 영조 2년(1726)을 뜻하지만, 이 때 다시 세워진 것이므로, 지금 탑의 형태를 만들 당시의 원래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돌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수리되는 과정에서 벽돌의 반원 무늬 배열상태가 어지럽혀지고, 전체 형태가 다소 변형된 것으로 보여진다.
![]() |
음성 모전석탑 |
모전석탑은 전탑(塼塔: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의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돌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이다. 이 탑은 원래 교동사터에 남아 있던 것으로, 1946년 수봉초등학교로 옮겨 놓았다가 1995년 이곳 음성 향토자료박물관으로 다시 옮겨 세웠다.
1층 기단(基壇)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인데, 현재 탑신의 2층과 5층의 몸돌이 없다.1층 탑신의 몸돌 네 면에는 중앙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새겼다.지붕돌은 아래 ·윗면 모두 전탑에서와 같이 층단을 이루고,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 이후 안동, 의성 등지를 중심으로 전탑과 모전석탑을 세우던 시기에, 그 지역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2005.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