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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능가아발다라보경 제2권-3
2.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品]
대혜야, 구생(俱生)이란 수다원의 신견(身見)이니, 자기나 남의 몸 등의 4음(陰)은 색의 모습[色相]이 없기 때문이며, 색(色)은 조색(造色)과 소조색(所造色)에서 생기기 때문이며, 전전(展轉)히 서로 인(因)하는 모습[相]이기 때문이며, 대종(大種)과 색이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다원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를 관찰해 신견이 끊어지며, 이와 같이 신견이 끊어져 탐욕이 생기지 않는다. 이를 신견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의심의 모습[疑相]이란 법(法)을 얻어 모습을 잘 보고, 앞의 두 가지 신견의 망상을 끊으므로 법을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며, 다른 곳에 대하여 큰 스승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서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수다원이 의심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대혜야, 계취(戒取)란 무엇이고, 수다원이 계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태어나 몸을 받는 곳이 고통스러운 모습임을 잘 보기 때문에 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대혜야, 취한다는 것은 모든 어리석은 범부가 확고하게 고행을 받아들이고 익히는 것을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도구로 여기기 때문에 생(生)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니, 저 수다원은 이런 것을 취하지 않는다. 돌이켜 스스로 깨닫는 뛰어난 경계[自覺勝]를 향하고 망상을 벗어난 무루법상 (無漏法相)에서 방편을 행하여 계(戒)를 받아들이는 경우는 제외한다. 이를 수다원이 계를 취하는 모습을 끊는 것이라 한다.
수다원은 세 가지 번뇌를 끊어 탐욕과 어리석음이 생기지 않는다. 만약 수다원이 ‘어떤 번뇌도 나는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허물이 있게 되니, 신견(身見)에 떨어지는 것과 모든 번뇌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여러 많은 탐욕 중에 저들은 어떤 탐욕이 끊어졌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을 좋아하여 얽히고 탐착하는 것이다. 갖가지 방편으로 몸과 입으로 짓는 악업은 현재에는 즐거움을 받으나 미래의 고통을 심는 것이다. 저들은 그러한 탐욕을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삼매정수(三昧正受)의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탐욕이 끊어진다. 그러나 열반으로 나아가려는 탐욕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대혜야, 무엇이 사다함의 모습인가? 문득 물질의 모습을 비추어 망상이 생기나 상견(相見)의 모습이 생기지 않으며, 선(禪)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잘 보므로 곧 이 세상으로 돌아와 고통을 다 없애고 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다함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을 아나함이라고 하는가?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물질의 모습에서 성품이라든가 성품이 아니라든가 하는 견해가 생기니, 이러한 잘못을 보고 망상이 생기지 않게 하며, 번뇌를 끊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나함이라고 한다.
대혜야, 아라한이란 모든 선과 삼매(三昧)와 해탈(解脫)의 힘으로 번뇌의 고통이 망상이어서 성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라한이라고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세 종류의 아라한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아라한을 말씀하신 겁니까? 세존이시여, 적정한 1승도(乘道)를 얻은 아라한입니까, 보살마하살이 방편으로 나타내 보인 아라한입니까, 부처님께서 응화(應化)하시어 화현(化現)하신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적정한 1승도를 얻은 성문이지 다른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나머지는 보살행(菩薩行)을 하거나 부처가 응화하여 화현한 것이니, 교묘한 방편과 본원(本願)으로 인하여 대중 가운데 생을 받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부처의 권속을 장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망상처(妄想處)에서 갖가지 설법을 하기에 이른바 과위(果位)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니, 선(禪)을 얻는 자는 선에 들어가 모두 벗어나기 때문이다. 자심의 현량을 얻어 과(果)를 얻는 모습임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과를 얻는 것이라고 한다. 또 대혜야, 선(禪:4禪)과 무량(無量:4無量定)과 무색계(無色界:4無色定)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자심의 현량을 벗어나야 한다. 대혜야, 느끼고 생각하는 정수(正受)로 자심의 현량을 초월하려고 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에 헤아리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선(禪)과 4무량(無量)
무색(無色)과 삼마제(三摩提)
모든 느낌과 생각이 없어진 선정
마음의 헤아림이 거기에는 없다.
수다반나과(須陀槃那果)
왕래(往來)와 불환(不還)
또 아라한(阿羅漢)
이들의 마음이 곧 혹란이다.
선자(禪者)는 선정(禪定)과 선정의 반연[緣]
이것을 진제(眞諦)로 알고 단정하지만
이것이 곧 망상으로 헤아림이니
이를 깨달으면 해탈하리라.
“또 대혜야, 두 종류의 깨달음이 있으니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觀察覺]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서 계착하는 자리에 건립하는 깨달음[妄想相攝受計着建立覺]이다.
대혜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란, 성품의 자성상(自性相)을 깨달아 이 4구(句)를 벗어나고는 얻을 수 없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여 얻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대혜야, 저 4구란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 있음ㆍ없음ㆍ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음, 상(常)과 무상(無常)을 벗어 나는 것이니, 이를 4구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를 벗어나면 이를 일체법(一切法)이라고 한다. 대혜야, 이 4구로 모든 법을 관찰하는 것을 반드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대혜야, 무엇이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인가?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여, 단단하다거나 축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움직인다고 계착하는 것이다. 진실하지 못한 망상의 모습인 4대종(大種)에 종(宗)과 인상(因想)과 비유를 세워 계착하고는 진실하지 못한 것을 세우고 또 세우는 것이다. 이를 망상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세우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를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이라고 한다. 만약 보살마하살이 이 두 가지 깨달음의 모습을 성취하면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의 모습을 끝까지 잘 알고 구경의 방편을 잘 알게 되며, 무소유를 깨닫고, 수행하는 행상(行相)과 지위(地位)를 관찰하여 초지(初地)를 얻으며, 백 가지 삼매에 들어가 차별된 삼매를 얻게 된다. 백 명의 부처와 백 명의 보살을 보고, 과거와 미래 백 겁 동안의 일을 잘 알게 되며, 빛이 백 개의 국토를 비추고, 상상지(上上地)의 모습을 알며, 큰 원이 수승해지고, 신통력이 자재해지며, 법운지(法雲地)에서 관정을 받아 여래의 자각지(自覺地)를 얻게 되며, 마음을 열 가지 다함이 없는 법[十無盡句]에 잘 집중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고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며 광명으로 장엄하게 된다. 이는 자각성락삼매정수(自覺聖樂三昧正受)를 얻기 때문이다.
또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4대(大)와 조색(造色)을 잘 알아야 한다. 보살이 4대와 조색을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저 진제(眞諦)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배운다. 저 4대가 생기지 않는 것임을 이렇게 관찰하고, 관찰한 후에는 이름[名]ㆍ모습[相]ㆍ망상(妄想)의 범위와 자심현량(自心現量)의 범위와 바깥 경계의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깨닫는다. 이를 자기 마음이 나타낸 망상의 범위라고 하니, 삼계를 말한다. 저 4대와 조색을 관찰하여 4구를 벗어나 모두 청정히 하고, 아(我)와 아소(我所)를 벗어나 여실한 모습인 자상의 범위에 머무르면, 생김이 없는 자상[無生自相]을 이루게 된다.
대혜야, 저 4대종(大種)이 어떻게 조색(造色)을 생기게 하는가? 축축하다는 망상대종[津潤妄想大種]이 안팎의 수계(水界)를 생겨나게 하고, 감당할 수 있다는 망상대종[堪能妄想大種]이 안팎의 화계(火界)를 생겨나게 하고, 펄럭이며 움직인다는 망상대종[飄動妄想大種]이 안팎의 풍계(風界)를 생겨나게 하고, 물질을 끊고 자른다는 망상대종[斷截妄想大種]이 안팎의 지계(地界)를 생겨나게 한다. 색(色)과 허공이 함께하여 삿된 진리에 계착하면 5음(陰)의 모임이라는 사대조색이 생긴다.
대혜야, 식(識)이란 온갖 자취의 경계를 좋아함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므로 다른 곳으로 나아가 계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대혜야, 지(地) 등의 4대와 조색 등에 4대연(大緣)이 있으나, 그것은 4대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품ㆍ형상(形相)ㆍ처소(處所)ㆍ짓는 방편[作方便]은 성품이 없으며 대종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품ㆍ형상ㆍ처소ㆍ짓는 방편이 화합해서 생기므로 형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4대와 조색이라는 상(相)은 외도의 망상이지 내가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대혜야, 모든 음(陰)의 자성상(自性相)을 말하겠다. 무엇을 모든 음의 자성상이라고 하는가? 5음을 말하니, 무엇이 다섯인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이다. 4음은 물질이 아니니,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을 말한다. 대혜야, 색이란 4대(大)와 조색(造色)으로서 각기 그 모습이 다르다.
대혜야, 물질이 없는데 넷이라는 숫자가 있는 것은 아니니, 마치 허공과 같다. 이는 마치 허공이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는 것이어 서 숫자를 벗어났지만 망상으로 하나의 허공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대혜야, 이와 같이 음(陰)도 숫자의 모습을 초월하여 숫자를 벗어나고,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며, 4구를 벗어난다. 숫자의 모습이란 어리석은 범부가 언어로 말하는 것이지, 성현의 경지는 아니다.
대혜야, 성인은 환(幻)과 같은 갖가지 색상(色像)에 대해 다르다든가 다르지 않다든가 하는 시설(施設)을 벗어났다. 또 꿈이나 그림자처럼 사람의 몸은 다르고 다르지 않음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대혜야, 성스러운 지혜로 같은 음(陰)에 나아가 망상이 나타나면 이를 모든 음의 자성상(自性相)이라고 한다. 너희는 이것을 없애버려야 하며, 없앤 후 적정한 법을 말해 주어 여러 불국토에 있는 모든 외도의 견해를 끊어 주어야 한다.
대혜야, 적정을 말할 때 법무아(法無我)의 견해가 청정해져 부동지(不動地)에 들어가게 되며, 부동지에 들어간 후 무량삼매(無量三昧)에서 자재함[自在]과 뜻대로 나타나는 몸[意生身]을 얻고, 여환삼매(如幻三昧)를 얻어 구경의 힘[力]과 밝음[明]과 자재함[自在]을 통달하게 되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거두어 이롭게 한다. 마치 대지가 중생을 받아들여 키우는 것과 같으니, 보살마하살이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것도 이와 같다.
또 대혜야, 모든 외도에는 네 가지 열반이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성자성(性自性)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온갖 상(相)과 성품이 성품이 아니라는 열반과, 자상(自相)과 자성(自性)이 성품이 아닌 줄 깨닫는 열반과, 모든 음(陰)의 자상과 공상이 상속하여 흘러드는 것을 끊는 열반이다. 이를 모든 외도의 네 가지 열반이라 하니, 내가 말한 법이 아니다. 내가 말한 것은 망상식(妄想識)이 멸하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는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께서는 8식(識)을 세우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만약 세우셨다면, 왜 의식(意識)을 벗어나라 하시고, 7식(識)을 벗어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의 인(因)이 되고, 저것의 반연(攀緣)이 되기 때문에 7식이 생기지 않는다. 의식이란 경계의 분단(分段)에 계착해서 생기고, 습기가 장식(藏識)을 자라나게 하고 의(意)와 함께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계착해서 생각하는 인연으로 생기며, 무너지지 않는 몸의 모습[不壞身相]인 장식이 인이 되어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를 반연해 계착하는 마음이 모여 생기며, 전전하며 서로 인(因)이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바다의 파도와 같다. 자기 마음이 나타낸 경계에 바람이 부는 것이니, 생기거나 없어지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의식(意識)이 없어지면 7식(識)도 없어진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열반의 성품이
만들어지거나 함께하는 모습이라 하지 않는다.
망상과 이염식(爾炎識)
이것이 없어지는 게 내가 말하는 열반이다.
그것이 인(因)이 되고 그것이 반연하여
의취(意趣) 등이 몸을 이룰 때
인이 되어 주는 것, 이 마음이니
식이 의지하는 곳이다.
물의 흐름 사라지면
파도가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의식이 없어지면
온갖 식도 생기지 않는다.
“또 대혜야, 이제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을 설명하겠다. 만약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을 잘 분별하면, 너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은 망상을 떠나 자각성지[自覺聖]에 이르러, 외도가 모두 향하는 선견각(善見覺)인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지는 망상이 끊어질 것이다. 연하여 일어난 온갖 모습은 망상자성이 행한 것이므로, 다시는 망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대혜야, 무엇이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인가? 언설망상(言說妄想)ㆍ말한 사실의 망상[所說事妄想]ㆍ상망상(相妄想)ㆍ이익망상(利妄想)ㆍ자성망상(自性妄想)ㆍ인망상(因妄想)ㆍ견망상(見妄想)ㆍ이룬다는 망상[成妄想]ㆍ생긴다는 망상[生妄想]ㆍ생기지 않는다는 망상[不生妄想]ㆍ상속한다는 망상(相續妄想)ㆍ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縛不縛妄想]이니, 이를 망상자성이 분별하는 통상(通相)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언설망상인가? 온갖 미묘한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읊는 소리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계착하는 것이니, 이를 언설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말한 사실의 망상인가? 말한 사실에 자성이 있어 성지(聖智)가 안다는 것이니, 이것에 의하여 언설망상이 생긴다. 이를 말한 사실의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상망상인가? 저 말한 사실이 있다는 데에 의지해 마치 사슴이 갈증이 나서 갖가지로 계착하는 것처럼 계착하는 것이다. 이는 단단하다거나 축축하다거나 따뜻하다거나 움직인다거나 하는 모습에, 모두 성품이 있다고 여기는 망상이다. 이를 상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이익망상인가? 온갖 금과 은과 진기한 보배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를 이익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자성망상인가? 자성(自性)이 이와 같은 것을 지니고 있어 다르지 않다고 하는 악견의 망상이다. 이를 자성망상이라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인망상인가? 인(因)이나 연(緣)이라고 하여, 있고 없는 데 따라 인을 분별하여 모습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인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견망상인가? 있음과 없음, 같음과 다름, 함께함과 함께하지 않음과 같은 악견이니, 외도가 망상으로 계착하는 망상이다. 이를 견망상이라 한다.
대혜야, 무엇이 이룬다는 망상인가?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는 생각으로 결정론(決定論)을 이루는 것이니, 이를 이룬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생긴다는 망상인가? 있고 없음의 성품에 반연(攀緣)하여 계착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 생긴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인가? 모든 성품은 본래 생김이 없으므로 종자(種子) 없는 인연에서 인(因) 없는 몸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이를 생기지 않는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상속한다는 망상인가? 저들이 모두 상속하는 것이 마치 금실[金縷]과 같다고 하는 것이니, 이를 상속한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인가? 인연에 묶이는 것이 마치 사람이 방편으로 묶었다가 풀었다가 하는 것과 같다고 계착하는 것이다. 이를 묶이고 묶이지 않는다는 망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망상자성(妄想自性)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에 대해서,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한다. 대혜야, 연(緣)에 의지해서 일어난다고 계착하니, 계착한다는 것은 온갖 망상으로 자성(自性)에 계착하는 것이다. 이는 환(幻)으로 갖가지 몸을 나타내 보이면 범부는 망상으로 갖가지 다른 환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대혜야, 환과 온갖 모습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환이 온갖 모습의 인(因)이 아니어야 하고, 만약 다르지 않다면 환과 온갖 모습은 차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대혜야, 너를 비롯한 나머지 다른 보살마하살은 환으로 연기(緣起)하는 망상자성을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고 계착하지 말라.”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은 경계에 묶이고
깨달음은 지혜를 따라 움직이니
무소유(無所有)와 훌륭한 곳[勝]에서
평등한 지혜가 생긴다.
망상자성(妄想自性)이 있다고 하지만
연으로 일어나니, 없는 것이며
혹 망상을 받아들인다 해도
연으로 일어나니 망상이 아니다.
온갖 연[支分]으로 법이 생기지만
환과 같으니, 이루어지지 않고
그 모습 갖가지로 있으나
망상이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은 곧 허물이니
모두 마음이 속박되어 생긴 것
망상으로 알지 못하여
연기(緣起) 위에서 분별한다.
이 모든 망상의 성품은
이것이 바로 연기(緣起)이니
망상으로 온갖 모습 있어
연기 위에서 분별한다.
세제(世諦)와 제일의(第一義)
제삼(第三)은 인(因)이 없이 생기는 것
망상으로 세제(世諦)를 말하니
끊으면 성인의 경계이다.
마치 수행하는 것과 같으니
하나에서 온갖 모습이 나타나지만
저 법에는 온갖 모습이 없는 것처럼
망상의 모습도 이와 같다.
마치 갖가지 눈병처럼
망상으로 여러 색(色)이 나타나고
눈병에는 색도 없고 색 아닌 것도 없는 것처럼
연기의 깨닫지 못함 역시 그렇다.
마치 정련한 진금(眞金)처럼
모든 더러움 멀리 없애니
허공에 가리는 구름 없듯이
망상의 맑아짐도 역시 그렇다.
망상에 성품이 없고
그의 연(緣)으로 일어나는 것도 없으니
건립(建立)과 비방(誹謗)이
모두 망상이기에 허물어진다.
망상은 성품이 없지만
연기한 성품은 있다고 하면
성품이 없으면서 성품이 있는 것이니
성품 있음과 성품 없음이 생기게 된다.
망상이란 인(因)에 의지하여
저 연기를 얻으니
모습과 이름이 항상 서로 따르며
모든 망상을 일으킨다.
끝내 성취 못하리니
곧 모든 망상을 건너라.
그런 후에 청정함을 알 것이니
이를 제일의(第一義)라 한다.
망상에 열두 가지 있고
연기법에 여섯 가지 있으나
스스로 깨달아 이염(爾炎)을 알면
그것에는 차별이 없다.
다섯 가지 법이 진실하고
자성(自性)에 세 가지 있으니
수행하여 이것을 분별하면
여여(如如)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여러 가지 모습과 연기(緣起)
그들의 이름이 망상을 일으키니
저 모든 망상의 모습이
저 인연으로 생긴다.
깨달은 지혜로 잘 관찰하라.
연(緣)도 없고 망상도 없으니
이루고 나면 성품이 없는 것
어찌 망상으로 깨달으랴.
저 망상자성이
두 가지 자성을 건립하여
망상이 갖가지로 나타난 것을
청정한 성인의 경계라 한다.
망상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아
연기한 것을 망상으로 계착하니
망상과 다른 것이라 하면
곧 외도의 주장에 의지하는 것이다.
망상으로 생각을 말하니
견(見)으로 인하여 화합하여 생긴다.
두 가지 망상을 떠나면
그런다면 곧 성취하리라.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자각성지(自覺聖智)의 모습과 1승(乘)을 말씀해 주십시오.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말씀해 주시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들은 자각성지의 모습과 1승을 잘 알아, 다른 가르침을 말미암지 않고 불법(佛法)에 통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너희를 위해 말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과거의 성인들께서 알고 있는 것을 서로서로 전수해 주었으니 ‘망상에는 성품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보살마하살이 홀로 고요한 곳에 있으면서 스스로 깨달아 관찰하고, 다른 가르침을 연유하지 않고 망상의 견해를 벗어나면, 위로 승진(昇進)하여 여래지(如來地)로 들어갈 것이다. 이를 자각성지의 모습이라고 한다.
대혜야, 무엇이 1승의 모습인가? 1승도(乘道)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나는 1승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1승도의 깨달음을 얻는가? 받아들이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이 망상인 줄을 알아 여실한 곳에서 망상을 내지 않는 것이니, 이를 1승의 깨달음[一乘覺]이라고 한다. 대혜야, 1승의 깨달음이란 다른 외도ㆍ성문ㆍ연각ㆍ범천왕(梵天王) 등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여래만이 얻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1승이라고 한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왜 3승만 말씀하시고 1승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스스로 반열반법(般涅槃法)에 들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에게는 1승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성문과 연각은 여래가 조복시켜 적정한 방편을 주어 해탈을 얻은 것이지 자기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1승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또 대혜야, 번뇌의 장애와 업의 습기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성문과 연각에겐 1승을 말하지 않았으며, 법무아(法無我)를 깨닫지 못하고 범부의 생사[分段死]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3승을 설한 것이다. 대혜야, 저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 나아가서 법무아를 깨달을 것이다. 그들 모두는 일어난 번뇌와 허물과 습기를 끊고는 삼매의 즐거움에 맛들이고 집착해 성품이 아닌 무루계(無漏界)를 깨달을 것이다. 깨달은 뒤에는 다시 출세간(出世間)의 가장 높은 무루계에 들어가 온갖 요인[衆具]을 만족할 것이며, 여래의 부사의하고 자재한 법신(法身)을 얻을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제천승(諸天乘)과 범승(梵乘)
성문승(聲聞乘)과 연각승(緣覺乘)
제불여래승(諸佛如來乘)
나는 이 모든 승(乘)을 설했다.
나아가 마음이 움직이면
모든 승이 구경(究竟)이 아니니
그 마음이 다 없어지면
탈것도 없고 탈 사람도 없으리라.
내세울 수레가 없는 것을
나는 1승이라 하니
중생을 인도하려고
여러 승(乘)을 분별해 설한 것이다.
세 가지 해탈과
또 법무아(法無我)
번뇌와 지혜(智慧) 등을
해탈하면 멀리 벗어나리라.
마치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가
항상 파도 따라 뒹굴듯이
성문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아서
모습이라는 바람[相風]에 끝없이 흔들린다.
저들은 일어난 번뇌를 없애고
습번뇌(習煩惱)와 어리석음 제거하고는
삼매의 즐거움에 맛들이고 집착해
무루계(無漏界)에 안주(安住)하리라.
구경(究竟)에 나아갈 곳도 없고
또한 물러나 돌아올 곳도 없으니
모든 삼매의 몸을 얻어
겁(劫)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으리라.
마치 정신없이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후 깨어나듯
저 법을 깨닫는 것 역시 그러하니
부처의 위없는 몸[無上身] 얻으리라.
[출처] 능가아발다라보경-제2권-3|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