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세여신(審勢如神)- 형세 살피기를 귀신처럼 한다.
의령군(宜寧郡) 정곡면(正谷面) 중교리(中橋里)에서는 삼성(三星)그룹 창업자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고향 집에는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하나의 관광명소로 자리 잡아 가고 있고, 풍수지리(風水地理) 공부하는 사람들도 현장실습 코스로 단체 방문하고 있다.
의령 중교는 조선 선조(宣祖) 때부터 자리 잡은 경주이씨들의 집성촌인데, 호암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儒學)을 해온 집안으로 그의 조부 문산(文山) 이홍석(李洪錫)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의 제자로 유학으로 이름이 났고, 문집 ‘문산집(文山集)’을 남길 정도로 시문(詩文)에도 능했다. 그가 기업가면서 고미술을 좋아하고 삼성문화재단(三星文化財團)을 만든 것도 다 유래가 있는 것이다.
호암은 다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정자인 문산정(文山亭)에서 ‘통감(通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등을 5년간 공부했다고 한다. 이때 배운 ‘논어’는 호암이 평생 가장 좋아하는 책이 되었고, 그의 경영철학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사업하는 데 있어서 창업 이후 신용을 기업의 생명으로 삼아 왔는데, 이것도 ‘논어’에 있는 ‘신의가 없으면 설 수가 없다(無信不立)’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10세 때 진주의 지수면(智水面) 승산리(勝山里)에 있는 지수국민학교(智水國民學校) 3학년에 편입하였다. 지수국민학교는 조그만 시골학교지만, 우리나라 유수의 대기업 창업주 세 사람이 다닌 유서 깊은 학교였다. LG 그룹의 창업주 구인회(具仁會) 회장, 효성그룹의 창업주 조홍제(趙洪濟) 회장과 삼성의 창업주 호암이었다.
함안군 군북 톨게이트에서 나와 북쪽으로 국도를 따라 4㎞ 정도 가다 보면 의령의 관문인 정암(鼎巖)이 나오는데, 남강에 가로놓인 다리 오른쪽으로 강 가운데 조그만 바위가 솟아 있다. 그것이 정암(鼎巖)인데, 우리말로 솥바위라 한다. 그 바위 주위 30리 안에서 큰 부자가 세 명 나온다는 전설이 있는데, 전설처럼 세 명의 부자가 나와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이 삼성그룹이다.
호암은 그 뒤 서울 수송초등학교, 중동중학을 거쳐 20세 때는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하여 시대의 흐름을 신속하게 감지하는 감각을 익혔다. 이런 어린 시절의 여러 지방을 옮겨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한 것이 새로운 시대변화에 적응하는 훈련이 된 것 같다.
삼성이 오늘날 이렇게 성장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호암의 판단력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여 거의 실패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정확한 판단력 때문이다. 많은 사람을 채용하여 일을 맡겼지만, 배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반항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사업에 실패하지 않고, 사람에게 배반당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판단력 덕분이지만, 정확한 판단력은 결국 풍부하고 치밀한 자료수집에 바탕한다.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가 정확한 판단을 낳기 때문이다.
그가 만년에, 오늘날 세계 최고의 기술을 자랑하며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반도체(半導體) 사업과 디자인에 투자하게 하여 그의 사후에 삼성이 대규모로 확장되는 기반을 마련해 두었다. 80년대 초반 일본의 소니는 회사 규모나 제품 수준이 삼성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하게 앞서 나갔다. 그러나 이때 소니는 음악, 공연 등 문화사업에 투자하고 있었다. 20년 정도 지난 지금 반도체나 디자인에 심혈을 기울인 삼성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하고 있는데, 소니는 지금 이미 삼성에게 압도당했고, 회사 존립도 어렵게 되어 있다.
심세여신(審勢如神)이란 말이 있는데, 삼성의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회장에게 가장 적절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審 : 살필 심. *勢 : 기세 세. *如 : 같을 여. *神 : 귀신 신.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