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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외국시 신동향에서 한국시를 예감한다 (『시와 문화』, 2017년 가을호)
밥 딜런의 시가 한국시에 요구하는 변화의 목소리
이영숙
한 사회의 문화수준을 두텁다/얇다ㆍ깊다/얕다ㆍ높다/낮다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경계가 명확한 것도 아니고 서로 넘나들기도 하겠지만 굳이 가깝기로 따지자면 두께는 역사에서, 깊이는 철학에서, 높낮이는 문학에서 획득된다. 인문학적 가치와 물신주의적 가치는 빗금의 앞뒤에서 대립한다. 교양의 유무가 인간됨의 기준이 되는 사회와 빈부가 그것의 기준이 되는 사회의 차이이기도 하다. 대체로 전통사회가 전자에 속한다면, 현대사회가 후자에 속한다. 이제 흥부의 착한 심성은 무능으로 평가되고, 놀부의 탐욕은 능력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물질주의적 가치가 인문학적 가치를 압도할 때 정치적 부패와 패권주의가 그것과 손을 잡는다. 사통팔달 활보하는 신자유주의는 힘이 세다. 20세기에서 21세기에 이르는 동안 미국은 세계의 경찰노릇을 그나마 정신적으로 지탱해주던 미국정신을 버리고 물리적 힘을 앞세워 자국이익주의로 선회했으며, 마찬가지로 영국과 프랑스는 보수화 대열에 합류했다. 징후는 추세가 되고, 추세는 패러다임이 된다. 교육의 목표는 수정되고 체제는 재편된다. 가치는 전도되고 인간은 사소해진다. 그러나 예외적 지점에서 시대의 물살을 거스르며 독자적인 행보를 하는 것은 사회도 어느 집단도 아닌, 빗금 앞쪽에 속한 언제나 강한 개인들이다.
2016년 스웨덴 한림원은 가장 강한 개인들 중 하나인 밥 딜런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였다. 그는 1962년의 첫 앨범 《밥 딜런Bob Dylan》 이후 2012년 《폭풍우Tempest》에 이르기까지 정규 앨범만 30집 이상을 냈다.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작곡가 명예의 전당과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음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폴라음악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전세계 영향력 있는 가수 중 최소 두 번째[첫 번째는 비틀즈]에 꼽히고 있으며, 밥 딜런학(學)으로 번역되는 ‘Dylanology'와 딜런풍(風)으로 번역되는 ’Dylanesque‘의 주인이기도 하다. 대학에서는 ’딜런 시학‘이 강의되었으며, 브레히트나 랭보와 묶이거나 상징주의 등의 주제로 그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들이 이어졌다……. 조금만 품을 팔면 책이나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는 정보들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한국인이, 심지어 미국인조차도 그의 수상 소식에 경악했다는 기사들이 흘러나왔다. 대중가수라는 그의 아이콘 때문이었다. 특히 문학에 몸담고 있는 창작자 중 일부는 문학적 우월감으로 스스로 고양되면서 집단의 목소리를 빌려 밥 딜런을 서둘러 폄하하기도 하였다. ‘언제 적 밥 딜런인가!’ 6,70년대 그를 향유했던 세대조차 어리둥절해 했다. 미국인이라는 어부지리가 스웨덴 한림원의 속물화와 맞물렸다는 속단까지 떠돌았다. 극소수만이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극소수’와 ‘대다수’, ‘가장 강한 개인’과 ‘일개 대중가수’ 사이의 괴리를 봉합해서 길 끝까지 한 번 가보는 것이 이 글이 지금부터 할 일이다. 밥 딜런은 과연 시인인가.
변화만큼 안정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갑자기 이루어졌다. 우연한 기회에 짐 모리슨에 관한 책을 읽고 그의 노래 몇 곡을 들은 필자의 일천한 경험을 뻔히 알고 있는 지인이 엉뚱하게도 밥 딜런에 대한 모처의 강의를 추천하였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결정 소식이 있은 즈음이었고, 강의 시작까지는 3~4개월의 여유가 있었다. ‘밥 딜런의 노래가사에 나타난 시의 언어’란 주제로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소 맹렬하게 밥 딜런을 듣고, 읽기 시작하였다. 밥 딜런에 관한 책들이 그 시기에 발맞춰 마치 필자를 위한 듯 숨가쁘게 번역되어 나왔다. 강의가 따분할 것 같았는지 강사의 실력이 암암리에 들통 났는지, 수강생 부족으로 ‘다행히도’ 그 강좌는 폐강이 되었다. 강의라는 강박이 해소되고 나니 오롯이 남은 것은 인간 밥 딜런이었다. 그는 10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기타를 들었으며, 시집을 주로 읽었으나 그 외에도 역사, 정치, 문학, 전기, 철학, 미술, 의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했다. 21세에 데뷔하여 24세에 이미 많은 돈을 벌었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나, 그는 단 한 번도 대중을 위한 음악을 만든 적이 없고, 자신이 만족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멈춘 적이 없다. 그럼에도 밥 딜런의 노래를 들을 것인가, 아니면 읽을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의 생애 내내 고루 던져졌다. 이는 ‘들어야 한다’거나 ‘읽어야 한다’가 아닌, ‘듣고 읽어야 한다’는 답변을 전제로 한 일종의 강조법으로 흔히 쓰였다. 한편으로 그것은 어느 하나가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음악성과 문학성의 길항관계를 드러내주는 은유이거나, 음악과 문학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 채 노래에서 한 몸이 되는 기이한 목격담을 간증하기 위한 글머리로도 쓰였다. 그의 부단한 자기갱신과 변화에 대한 팬들의 응답 같은 것이었다.
포크음악계의 정상에 있던 1965년,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The Time They Are A-Changin'>)과 로큰롤이 그 변화를 담아낼 그릇임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러나 민중은 그가 민권운동의 선봉에서 서서 자신들을 계속 이끌어주기를 바랐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조차 상업자본에 잠식되는 과정이나, 점차 물신화되어가는 미국적 가치를 지켜보면서 그 모든 문화적 우상들이 자신의 영혼을 구속하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는 어쿠스틱기타를 일렉트릭으로 바꿔들었다. 청중은 야유했고, 그는 민권운동의 영웅이라는 절정에서 곧장 정치적 변절자로 끌어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확고했다. “그때 나는 그때 너무 늙었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젊어”(<My Back Pages>)라고 노래하며 과거의 자신과 기꺼이 결별한다. 변화의 전통은 ‘더욱 더 젊어지는’ 쪽으로 수립되었고,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려드는 사회 시스템에 저항함으로써 그는 모든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었다. 71세에 발매된 《폭풍우Tempest》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지금까지의 밥 딜런을 능가하는 최고의 앨범’이란 찬사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난 내 개를 데려다가 털을 깎이고 목욕을 시켜서 돌려주는 곳을 찾아요
난 내 욕실을 가져다가 청소하고 내 담배를 돌려주며 내 애완동물에게 담배를 주고 내 새에게 수수료를 줄 개를 찾아요
난 내 개를 팔고 내 가위를 가져가고 동물을 사고 내 새를 훈련시킬 사람을 찾아요
난 내 새를 목욕시키고 내 개를 사고 내 가위를 가져가고 내게 담배를 팔고 목욕시킬 곳을 찾아요
난 수수료를 받아가 내 개를 팔고 내 새를 태우고 내게 담배를 팔 곳을 찾아요
내 물건과 내 의지를 가져가고 내 수수료를 세탁할 곳을 찾아요
내 영혼을 동물로 만들고 날 돌아가게 하고 내 발을 씻겨 주고 내 개를 가져갈 곳을 찾아요
내게 동물을 팔라고 하고 새에게는 털을 깎으라 하고 내 욕심을 사고 내 담배를 돌려줘요
변화의 동력은 그의 내부에 있었다. 밥 딜런을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노 디렉션 홈 : 밥 딜런>)2부의 첫 장면에서 그는 거리에 있다. 인접해 있는 세 개의 간판, 곧 <우리는 당신 개를 데려다가 털을 깎고 목욕시킨 후 돌려드립니다>와 <담배 가게>, <애완동물과 새 위탁 매매>를 그는 소리내어 읽는다. 간판 문구의 단순한 교체와 변용으로 시작된 즉흥적인 말놀이는 주체와 객체, 사물과 관념의 자리바꿈을 통과하면서 의미 없음의 의미와 낯선 시공간의 이미지를 생성한다. 점차 빨라지는 말의 속도와 ‘찾아요’로 끝나는 반복적 서술어가 손과 발을 들먹이게 만들고 춤을 부추기면서 리듬을 생성한다. 이들은 합류하여 노래의 가장자리를 맴돌다 이윽고 시의 직전 단계로까지 고조된다. 그가 25세 되던 해(1966년)에 찍은 이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같은 해 출간 예정이던 그의 단 하나의 소설집 『타란툴라』의 자동기술법에 사용된 어휘 체계와 그의 노래 가사들의 특징이랄 수 있는 은유 체계, 개방적이고 확산적인 사유 체계 등을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도처에 무자비한 원고로 인한 악몽 & 보라, 법의 여우에 대한 예언적이고 맹목적인 충성, 달거리 규칙을 지키는 큐피드 & 교의의 도취적인 유령들 …… 아니지 아냐 & 목욕 가운을 입은 뱃사공은 영원히 추방되기를 & 축성되어 생지옥의 선반에, 상상력이 부족한 수면에, 변화 없는 반복에, 들기를 & 매트리스 속에 숨어 파멸을 엿보며 기다리는 살찐 보안관 …… 할렐루야 & 떠돌이들의 왕초가 오네
― 「권총, 매의 입술책 & 벌받지 않은 떠버리」(『타란툴라』) 부분
그들은 교수형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팔고 있어
그들은 여권을 갈색으로 칠하고 있어
미용실은 선원들로 북적여
마을에 서커스가 왔다네
여기 경찰국장이 오시네
그들은 그를 거의 실신 상태로 만들었지
한 손은 줄타기 곡예사에게 묶여 있고
나머지 한 손은 그의 바지 속에 있네
그리고 폭동 진압대, 도무지 가만히 있지를 못해
그들은 어딘가로 가야만 하지
오늘밤 레이디와 내가 바깥을 쳐다보고 있을 때
폐허의 거리에서
―<폐허의 거리Desolation Row> 부분
흡사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는 것 같은 앞의 글은, 그러나 파편적이고 무의미한 구와 절이 모여 기만적이고 절망적인 하나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단어가 단어를 물고 나오는 자동기술법에서 연유한다. 원고, 법, 규칙, 교의, 추방, 보안관, 떠돌이들의 왕초가 중심이 되고 악몽, 예언, 충성, 도취, 생지옥, 파멸이 곁가지가 되면서, 큐피드와 유령을 만나 신화적 공간으로 이월된다. 이와 같이 초현실주의적 공간에서 시는 구와 문장의 우연한 축적과 변주를 통해 무의식을 드러내며, 이때 독자는 상상력을 통해 시에 참여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킴으로써 시를 완성한다. 그의 시를 듣고, 읽음으로써 대중은 자신도 모르게 초현실주의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그의 시가 시적 허구가 아니라 시인의 진실한 체험을 현재화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래 시의 등장인물들은 실재적 인물이고, 세계를 “폐허의 거리”로 만드는 것은 “그들”, 곧 현대적 종말을 초래할 물질주의다. 이어지는 연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신데렐라, 착한 사마리아인, 오필리어, 아인슈타인, 닥퍼 필스 등인데 이들은 각 분야를 대표하는 파편들로서, 로버트 셀턴은 이 시를 엘리엇의 「황무지」와 긴즈버그의 「포효」와 나란히 종말에 대한 가장 강력한 표현의 하나로 꼽는다. 일렉트릭으로 전환한 후 그의 시선은 자신의 내면으로 향했고 극단적 개인주의로 치달았으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는 욕망을 철저히 배제한 채 아웃사이더의 길을 갔다. 그러나 또한 그는 현실에서 발을 뺀 적이 없으며, 조직에만 가담하지 않았을 뿐 시적 상상력, 불의에 대한 경멸, 자유로운 영혼을 자신의 무기로 휘두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밥 딜런의 변화의 전통은 현재진행형이며, ‘변화만큼 안정적인 것은 없지요.’라는 그의 발화는 진실이다.
신드롬과 징후
밥 딜런이 “내 안에는 몇 백 곡의 노래와 그만큼의 책을 쓰고도 남을 폭풍 같은 말들이 있다. 내 안의 이런 말들은 내 개인 자산이 아니다.”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그 말들은 누구의 것인가. 저 빗금의 앞쪽에 포진한 강한 개인들은 역사와 철학과 문학에 독자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장본인들이다. ‘폭풍 같은 말들’은 투쟁에 버금가는 역동적인 참여로 획득한 전리품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개인 자산이 아니’면서 한편 개인 자산이기도 하다. 계승받은 변화의 전통이면서 자신이 계승시킬 변화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이 국가의 경영이나 사회, 개인의 정체성에까지 침투한 현대에서 강한 개인들을 주목해야 할 이유다. 느닷없지만, 잠시 서태지를 경유해서 김경주를 찾아가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강한 개인이라는 공통분모 외에도 밥 딜런, 서태지, 김경주는 서로를 더 잘 이해시킬 수 있는 카드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과 같이 가수나 대중가요의 생명이 짧은데 비해 데뷔한 지 25년차에 접어든 서태지가 25주년 기념 콘서트(2017. 9)를 연다. 그는 이미 《Quiet Night》(2014)에 이르기까지 5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하였다. 그가 리더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이 댄스 뮤직을 유행시키면서 음악을 행위 하였고, 대한민국에 힙합, 뉴 메탈 등의 새로운 장르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믹싱, 프로듀싱, 엔지니어링 기술과 작사, 작곡을 비롯하여 음반 제작과 홍보, 유통의 전 과정을 자체 해결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언더그라운드에 묻혀 있던 한국의 래퍼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으며, 데뷔 1년 만에 우리 음악계에 랩을 하나의 장르로 위치시켰다. 그들은 《난 알아요》(1992), 《하여가》(1993), 《발해를 꿈꾸며》(1994), 《컴백홈》(1995) 등 네 개의 앨범을 발표한 후 해체되었다. 밥 딜런 역시 대학중퇴자였지만, 고교중퇴라는 서태지의 이력은 학력위주의 우리 사회를 꽤 오랫동안 진동시켰다.
서태지는 밥 딜런처럼 자신의 이름을 내건 첫 솔로앨범으로 《Seo Tai Ji》(1998)를 발매했다. 록 음악인 《Seo Tai Ji》는 미국 체류 상태에서 발표했으며 실제 앨범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음에도 100만 장 이상이 판매되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대한 향수와 더불어 첫 솔로앨범이라는 부가가치가 붙었고, ‘선수’답게 외부에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도 한 몫을 하였다. 현실의 부조리에 대해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던 <하여가>와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시대유감> <필승>의 후속편에 대한 기대 같은 것도 있었을 터였다. 현실비판적인 요소를 여전히 내장한 채 그는 “내 서랍 아래로 감춰둔 비의/ 내게 남은 마지막의 대안/ 순간 눈을 감아 바람을 난 모으고 있어/ 너의 음모를 증명할 진실 카운트”(<틱택>를 노래한다. 사회’에서 ‘운명과 역사’로 스케일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변화의 전통 상에서 하나는 ‘포크의 왕’이라고 불렸고, 하나는 ‘문화대통령’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정도의 재능’(대산문학)을 가진 자라 불린 이는 김경주다. 그는 두 번째 시집 『기담』(2008) 중 「무릎의 문양」이 2008년 작가와 평론가가 뽑은 좋은 시로 선정되면서 1집인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2006)에서 보여준 문학적 징후에 빠르게 답하였다.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권혁웅)이라는 전망이나, “좋은 시집은 늘 행간마다 엄청난 분량의 빈 공간이 놓여 있다. 그 빈 공간은 ‘불보다 더 짚은 바람의 수분’(「白夜」)을 머금은 채 무시로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고 감각을 자극하며 보다 큰 육체의 파동 속에 독자 혼자 가만히 놓여 있게 한다”(강정)는 발언들이 그것이었다. ‘이 세상에 없는 계절’처럼 그의 등장은 낯선 것이었다.
밥 딜런이나 마찬가지로 시적 소재나 대상에 대한 접근 방식, 독자에 대한 불친절, 실험성과 파격적 요소를 갖춘 시인이란 점에서 김경주는 한국시단의 선두주자에 속한다. 시라는 형상과 음악, 극이라는 질료의 배합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김경주 이전에도 시극 형태의 실험들이 있어왔지만, 김경주처럼 본격적인 적은 없었다. 『기담』의 해설을 쓴 강계숙의 말대로 황지우의 「석고 두개골」이나 장정일의 「잔혹한 실내극」 등은 실제 무대화가 가능한 소극으로 분류할 수 있는 반면, 김경주의 것은 관념의 영역 내에서만 무대화되는 불가능한 극으로서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 시집의 「테레민을 위한 하나의 시놉시스(실체와 속성의 관점으로)」에서 전생에서의 음악(테레민)이 현세에서 안인희라는 피아노 조율사로 환생하고, 테레민의 작곡가가 음악으로 환생하는 등 “사람이 음악으로 태어날 수 있고 음악이 사람으로 다시 환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동시에 이 극은 칸트의 형이상학이 놓친 지점을 포착하려는 의도를 포함하여 “장르 미상의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욕망한다.” ‘장르 미상의 새로운 예술적 경지’가 현실에 안착한 것이 그의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2014)에부터 최근의 『나비잠』』(2016)까지의 본격적인 시극집이다. 이들은 모두 무대에 올릴 수 있고, 이미 올리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렇다면 그는 새로운 장르를 발명한 것이 된다.
김경주는 ‘현재 무경계 문화펄프 연구소 <추리닝바람>을 운영하며 연극, 공연, 전시, 인디영화 등에서 다양한 독립문화작업을 하고 있다.’는 이력이 말해주듯 시, 혹은 언어를 다룬다는 총체적 측면에서 또한 만능 엔터테이너다. 자신의 시를 기획하고, 운용하며, 매니지먼트를 존중한다는 점과, 번역서와 실용서를 내거나 대필작가, 야설, 무협지 작가를 겸하던 때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그것을 매문(賣文)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김경주는 서태지의 사업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른바 작품성과 대중성을 공유할 수 있는 기질적 근거라고나 할까.
혼성교배적 속성이 강한 그의 시들은 기형(奇形)과 시차(時差)라는 주제를 바탕에 깔고, 기형인 영혼의 기미(幾微)를 음악과 극으로 형상화하려고 시도하면서(『기담』은 아예 인형의 미로, 인어의 멀미, 활공하는 구멍이라는 세 개의 막(幕)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차를 시적 방법론으로 사용한다. 일테면 바람, 숨, 휘파람, 언어가 넘나드는 대상의 무수한 전이를 통하여 그의 관념은 감각적으로 용해된다. 기형이 영혼이고 음악과 극이 뼈라면 시차는 살을, 철학은 그의 시에 근육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작업의 궁극은 언어의 자유를 위한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의 언어관을 대표한다.
(1)
수십 개의 창(窓)을 띄워두고 나는 갇힌다 어휘로 내려가 나는 발음한다 이 말을 스치고 지나가는 침묵은 깊은 설질(雪質)을 남긴다 말에서 흘러나오는 향연에 참여하기 위해 기억은 자신을 담고 있는 육체와 성애(性愛)를 꿈꾼다 말의 교미를 피하려는 새들이 내 어조 속에 가라앉는 다 말의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색연필 껍질을 벗기다가 몇 개의 색을 뜯어 먹고 나의 해동(解凍)에 참여한다 스무 살엔 ‘냉장고’라는 단어를 아켜서 그를 해변으로 끌고 가 바다 속에 던졌다
―「팬옵티콘」 부분
그리고 이 시의 말미에는 “다음을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시오”는 제안 내지는 강요가 서술되어 있다. ‘창: 교미/ 침묵: 색연필/ 기억: 창/ 교미: 밀항선/ 색연필: 헝겊/ 냉장고: 배후’가 그것이다. 각각의 단어들을 교체하면 다음과 같다.
(2)
수십 개의 교미를 띄워두고 나는 갇힌다 어휘로 내려가 나는 발음한다 이 말을 스치고 지나가는 색연필은 깊은 설질(雪質)을 남긴다 말에서 흘러나오는 향연에 참여하기 위해 창은 자신을 담고 있는 육체와 성애(性愛)를 꿈꾼다 말의 밀항선을 꿈꾸는 새들이 내 어조 속에 가라앉는다 말의 동굴 속에서 하루 종일 헝겊 껍질을 벗기다가 몇 개의 색을 뜯어 먹고 나의 해동(解凍)에 참여한다 스무 살엔 ‘배후’라는 단어를 아껴서 그를 해변으로 끌고 가 바다 속에 던졌다
독자가 참여하여 (2)의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이 시는 완성되지 못한다. 단어들을 모두 다 교체한다 하더라도 (2)에서 어떤 의미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의미 없어 보이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수십 개의 창을 띄워두고 나는 갇힌다’는 「파놉티콘」의 자발성을 유의미하게 한다. 우리는 시적 언어보다 시적 행위가 중요시되는 시의 탄생을 보고 있다. “라미가 는에게 저녁에 손을 잡아주었다 귀머리가 를에게 속삭였다 손에 목을이 달렸다 라미가 을의 생존을 물었고 분홍귀가 욜을 불러냈다”(「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베리에게」)에서도 볼 수 있듯 시인은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하겠다는 의지가 없어야 하고, 독자도 무엇을 받아들일 의욕을 갖지 않아야 이 시들은 시로서 완성된다. ‘는’이나 ‘를’, ‘목을’ 등에 자신에 맞는 언어를 넣어 굴려보는 것이 이 시를 행위하는 방법으로, 앞서 읽은 밥 딜런의 말놀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는 이후의 시집 『시차의 눈을 달랜다』(2009)와 『고래와 수증기』(2014), 그리고 여러 권의 산문집과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그의 일관된 변화 양상을 미리 보여준 징후 같은 것이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김경주에 대한 정보에 의하면, 그는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으며, 김수영 문학상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그의 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는 미국 대표 문학지인 『보스턴 리뷰』지에서 ‘2014년 최고의 시 TOP 20’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미국, 프랑스, 스웨덴, 멕시코 등에서 여러 작품이 꾸준히 번역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밥 딜런이 ‘귀로 듣는 시’를 대중화했다면, 서태지는 록의 대중화를, 김경주는 ‘행위하는 시’를 대중화하고 있다. 자신의 음악과 문학을 스스로 관리하는 엔터테이너로서, 또한 변화의 전통을 스스로 수립한 강한 개인이라는 공통점으로 이들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유일한 대표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필자도, 독자도 이미 알고 있다.
가장 강한 개인과 한국시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는 문장은 세계의 변화 속도를 보여주지 못한다. 18세기 이후 줄곧 사용되면서 ‘변화’라는 단어보다 어느새 더 낡았기 때문이다. 광케이블의 속도를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만들어진 문장을 대체할 수 있는 광케이블적인 ‘것’이 나와야 할 판이다. 어디에서나 새로움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린다. 한국시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한국시가 변화해야 한다는 동어반복적인 주문은 현재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속도에서 비롯된 착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새로움이 만약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면 말이다.
밥 딜런은 사실 누구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무슨 요구를 할 성향의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의무와 권리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친 이력이 그것을 말해준다. 미국의 스웨덴 대사가 대독한 노벨문학상의 수락 연설에서 “저는 스스로에게 ‘내 노래들이 문학인가?’라고 물을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웨덴 아카데미에 대단히 감사합니다. 시간을 내어 바로 그 질문을 생각해보신 데 대해, 그리고 결국, 그런 멋진 답변을 주신 데 대해서요.”라고 말했을 때, 이는 겸손보다 그의 진실에 가깝다. 그러나 그가 시/문학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시가 요구하는 바를 우리가 상상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스웨덴 아카데미가 했듯이, 필자 또한 그를 대신해 ‘그의 노래들이 시인가?’라고 물었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의 한국시를 놓고 보았을 때 부정적 측면에서 자주 지적되는 것은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자폐적 공간으로의 도피, 혹은 과잉된 자의식의 흘러넘침, 극단적인 해체 등이 소통의 부재라는 용광로로 모여드는 양상이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는 없겠으나, 저 빗금 앞쪽을 향한 변화의 전통을 내장한 강한 개인이야말로 궁극적으로 보편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는 자가 아닐까 한다. 강한 개인들이 각각의 처소에서 시를 쓰며 변화의 전통을 이어갈 때 한국시도, 한국도, 세계도, 물신주의 쪽으로 기운 무게중심을 인문학적 가치 쪽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저 빗금의 앞쪽에 자리잡고 들어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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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꼽꼽 씹어가면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