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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산우회 제61차 정기산행, 단상 삼제(三題)
김 광 수
일제(一題), 소월의 단편소설「함박눈」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과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한국시문학사상 양대 시인이다. 두 분 시작품의 작품성과 예술성만으로도 단연 그렇다. 그것만으로도 족한데 우리나라 좋은 나라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을 이어주는 교량으로서의 역사적 가치도 있다. 이설조차 없다.
두 분 시인의 공통점은 힘겹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만해가 경학(經學)과 참선(參禪)을 겸비한 승려로, 호국불교와 경전연구가로, 독립운동가로, 시인으로, 소설가로, 문필가로 다양한 삶을 살았다면 소월은 오로지 천생 시인으로서 짧은 생을 살다 갔다는 점이다.
시 역시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이 있다. 만해의 시가 불교경전과 우리고전을 섭렵한 결과 고전시가의 흔적을 확실하게 지어버린 자유시, 형식과 내용 공히 천의무봉으로 언제 보고 읽어도 전위적이다.
소월의 시는 비교적 단조롭다. 이루지 못한 처음사랑을 필두로, 이루지 못한 모든 것에 대한 회한(悔恨)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비가(悲歌 elegy)다. 후회와 한 중 후회는 세계 공통의 정서다. 그러나 한은 가장 한국적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함에 대한 아쉬운 정서가 한이다. 단 한 번도, 그러니 늘 서럽다. 자기연민 아니겠는가.
소월의 전기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이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다. 거기 그의 만년이 소상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소월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인 단편소설「함박눈」의 내용도 언급되고 있다.
두 작품에 나타난 소월의 말년은 이렇다.
일련의 시「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진달래꽃」「못 잊어」 「초혼招魂」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의 주인공, 소월의 첫사랑은 ‘원옥’이란 이름의 동갑내기 처녀였다. 북간도로 이주, 귀향, 자살, 그녀의 짧은 일생이다.
결혼하고 아내에게 필명을 지어주고 시를 가르칠 정도로 아내를 사랑하려 노력했던 소월, 그러나 사랑은 의지가 아니고 감성이고 정서고 그리움이었다. 원옥을 항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미안한 마음, 실패한 사회생활, 서른 너머 소월은 술과 아편에 패배한 중독자였다. 가히 급전직하였다. 마침내 33세의 11월, 원옥과 뛰어놀던 동산의 커다란 소나무 아래서 그는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11월이면 눈이 내려 이듬해 4월까지 내린다 했다. 무려 6개월 일 년의 반이다. 소월의 주검은 눈 속에 묻혀 있다가 눈이 녹으면서 발견되었는데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한다. 참고사항들이다.
해환(海煥) 윤동주(尹東柱)와 더불어 인생을 시처럼 살다 간 소월, 공교롭게도 현재 발견된 시작품까지 132편으로 같다. 대표작을 비롯하여 대부분 유작인 것도 당연히 같다.
그러나 해환의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의지적 서정이라면, 소월의 시「산유화山有花」는 감상적 서정(感傷的 抒情 sentimentalism)이다. 꽃이나 새처럼 자연의 일부로 살다 죽고 싶었으나, 인생세간 사람으로서 희로애락의 원죄 속에 살다 죽어가는 자신을 한탄한 내용이다. ‘산에서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있네’에 이르면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무섭다.
소설「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를 정독하며 나는 평안도의 눈이 신기하기만 했다. 4월에 눈이 내리다니, 강설 가운데 적설이 녹다니? 소설「함박눈」을 구할 수 없을까? 「함박눈」을 구하기 위하여 한동안 고서점을 뒤졌으나 구할 수 없었다. 표지화의 일부인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가 섬찟하던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는 목하 내 책무덤 속에 파묻혀 있으니 정리할 기회가 있으면, 저자 등 잊혀진 일과 몬을 살려낼 기회도 있을 것이다. 몬은 그리스어로 사람과 사물이라 한다 오랜만에 한번 써봤지 뭐.
이제(二題), 문산(文山) 함박눈
산행지 경남 울주군 능동산, 산행날짜 4월20일(토), 모이는 곳 지하철1호선 동래역4번 출구, 준비물 도시락 간식 식수, 산행개요 배내고개 → 능동산 정상(981m) → 쇠점골 약수터→ 샘물산장 → 주암 마을 하산, 산행시간 3시간30분, 점심시간 포함 5시간, 차량이 배내고개(700m)까지 올라갑니다. 산행이 아주 용이하게 되어있습니다.
산행안내의 대략이다. 그럴 사하고도 근사하다. 그러나
20인승 미니버스에 문산회원 24명을 태우고 제법 굵은 빗줄기 속에서 용약 출발, 부산에서 내리기 시작한 비가 버스가 산길을 오르자 눈이었다. 배내고개에서 내리자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우와, 그때부터는 감탄과 감탄사 연속 연발이었다.
평생에 경험하리라 꿈도 꾸지 못하던 4월 하순의 함박눈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니, 암만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그냥 맛 뵈기로 잠시잠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등산을 포기하고 쉼터를 찾아들어야 할 정도로 눈송이가 크고 굵게, 오랜 시간 내렸으니 하늘이 내리시고 땅과 내가 맞이한 축복이었다.
산행계획 완전 무산, 새로 일정을 짜야 할 지경이었으니 한담배참의 혼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한 시간 남짓 산길을 걸을 수 있었으니 전화위복이었다.
울산시학생연수원 한 칸을 빌어 점심식사, 뷔페식 음식의 성찬, 말의 성찬, 웃음의 성찬 기타, 명실 공 진수성찬이었다. 식사와 뒤풀이를 마친 시간인 오후 2시경 함박눈은 비 되어 내리더니, 파래소 구경 가기 위하여 버스에서 내리는 시간에 귀신같이 멈췄다. 과연 문산에 문신(文神)이었다.
‘아름다운 문인들과 아름다운 사람들이 오르니 문산은 지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산입니다’라는 최연근 회장님 말씀은 명언이다. 이 말을 되새기며 다음 정기산행을 기약하고 기다릴 것이다.
다시 버스를 타니 굵어지는 빗방울, 해산하는 시간까지 오락가락이었으니 오늘은 함박눈과 비 더불어 보낸 하루였다. 소월의 단편소설「함박눈」을 오래오래 되새기고 거론한 이유다. 이쯤에서 아는 체 하기다.
눈, 귀한 우리말 고유어다. 한자어 설(雪)은 참고사항이다. 한글창제 당시 우리말은 평성(平聲 낮은 소리) 상성(上聲 낮다가 높아지는 소리) 거성(去聲 가장 높은 소리) 입성(入聲 빠르게 끝나는 소리)이라 하여 사성(四聲)이 선명했다.
그것이 고저장단(高低長短)으로 단순화된 것도 문제인데, 오늘날 높은 소리는 단음으로, 낮은 소리는 장음으로 퇴화하고 있다. 음성이 단순해지고, 그것을 기록하는 글자가 사라지는 것은 기존의 말글이 사라지는 현상이다. 진실로 우려할 만한 현실이다.
문득 4월에 내리는 함박눈 등 모든 아름다운 것들, 완성된 것들은 허망하고 슬픈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완성과 더불어 사라지거나 형체가 바뀌기에 그런가? 구체적 물상을 허무란 정서로, 관념적 마무리로 한 편의 시를 만들 수는 없을까?
속절없이 가는 시간 세월 잡으려들지 말고, 오래 살아야 좋은 문학작품도 써서 남길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욕심이 과한가?
4월 · 함박눈
마지막 꽃들이 지고 있어요
하느작하느작 내리는 허무虛無,
대지를 적시고 눈물로 고여
윤회輪廻의 슬픔을 가르치고 있어요.
삼제(三題), 아프다
지도자가 이끄는 세상은 먼 곳에서는 찬사와 공감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까운 데서는 참말과 직언이 들린다. 청백리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아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더욱 좋을 거라는 낭만적 기대가 순전히 욕심이라는 생각이 아프다.
지배자가 군림하는 세상에서는 먼 데서는 욕설과 불평소리가 들리고, 가까운 곳에서는 거짓말과 곡학아세하는 곡언이 들린다. 호가호위하는 소리와 면종복배하는 소리도 들린다. 그것이 아프다. 음성 아닌 음향인 그것을 질리도록 들었어도 여전히 들리고, 앞으로도 계속 들릴 것이라는 예감이 아프다.
지도자의 세상은 맑고 밝고 따뜻하다. 그곳에서는 오곡백화가 자란다. 오곡은 사람의 생존을 책임지고, 백화는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착한 오곡백화가 연약해 보이는 구체적 현실이 아프다.
지배자의 세상은 어둡고 음습하다. 그곳에서는 독초와 독버섯이 자란다. 독초와 독버섯은 인간을 두렵게 하고, 생명 자체를 위협한다. 독초와 독버섯의 강성이, 그 무례함과 악랄함이 오곡백화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예감이 아프다.
인생세간과 정경사문 온갖 곳이 보임과 느낌 그대로라 해도, 문학하는 세상에서만은 들리지 않으리라 여겼던 욕설과 불평, 곡언들이 난분분한 것이 아프다. 규모가 작을 따름, 그 교활함과 야비함은 정경사문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하다 싶은 것이 아프다.
우리들 문산의 지도자와 회원들이 아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간절하게, 또 곡진하게.
첫댓글 문산은 늘 새롭습니다. 귀한 소설가선생님의 후기로 되새겨보니 선인들의 그 글귀가 귀하게 다가옵니다.
일정에 차질을 보상이라도 하듯 파래소폭포의 그
늘 글 기근에 허덕이던 편집장의 애소를 이리 명문으로 답을 주시다니, 광수 부회장님! 귀한 후기 감사히 받아 안습니다. 허벅지게 내리던 4월의 함박눈, 온 산을 희게 싸 안아 봄을 덮고, 꽃을 덮고, 잎을 덮더니, 우리에겐 깨끗한 감성 하나 남았습니다. 아름다운 산-문산은 이번 4월 깨끗하고 순결한 산으로 기억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광수 올림. 늘 반갑고 고마운 두 분 심성과 글이 눈꽃보다 곱습니다. 그래도 만춘달 눈꽃 말고 한겨울 설화雪花되어 영원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