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1890-1918)
1890년 6월에 빈에서 40km쯤 떨어진 툴론 마을의 역장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은 대대로 철도 공무원을 하면서 안정적인 삶을 누리는 집안이었다. 어릴 때는 유복했다고 한다.
15세 때 아버지가 죽었다.(매독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로 쉴레의 성격에 변화가 오면서 거칠어졌다. 어머니와 아주 많이 다투었다. 죽은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냉대 때문이라고 한다. 어머니도 친척에게 보낸 편지에 쉴레의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두렵다고 할 정도였다. 쉴레는 누이 동생인 게르티와는 아주 각별하여 주변에서 이상한 시선으로 볼 정도였다고 한다.
1906년에 빈 미술공예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미술 교수의 권유로 미술아카데미로 진학하였다고 한다. 그는 소묘에 뛰어난 솜씨를 가져서 교수가 순수 미술을 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학교의 전통적인 수업 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907년에 클림트를 만나서 미술의 재능에 대해서 칭찬을 듣고, 클림트를 스승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1909년까지 미술아카데미에서 미술의 기본기를 3년 동안 배웠다. 이때 젊은 예술가들이 ‘신예술 그룹’을 조직하였다. 보수주의자인 미술 교수 그린펜케론은 쉴레를 두고 ‘ 사탄이 너를 나의 반에 토해 놓았다.’라고 하였다 할 정도였다.
1910년에 자신의 미술을 적극 후원해주는 미술 평론가 아더 뢰쓸러를 만났다.(그가 쉴레의 전기를 남겼다.) 조롱하는 여자, 여자 누드, 폴디 로진스키, 앉아있는 소녀 누드, 팔장 낀 여자, 등을 그렸다.
1911년에는 빈으로 돌아와서 클림트가 소개해준 모델 발리 노이질은 만나서 동거하였다. 노이질은 쉴레의 그림에 선전적인 모델로 자주 나온다. 쉴레는 동거의 댓가를 한 푼도 내지 않고, 마음대로 옷을 입혔다, 벗겼다 하는 최고의 모델이었다. 노이질도 쉴레에게 아주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둘은 어머니의 고향인 크루마우로 이사를 갔다. 21세의 화가와 17세의 모델이 살아가는 생활 모습이 보수적인 주민들에게는 음란하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다시 이사하였다.
1912년에는 어린 아이들을 모델로 누드 그림을 그렸다. 마을 주민들은 어린 소녀를 유괴하였다고 고발하여 유치장에서 21일 보냈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의 화실을 수색한 경찰은 쉴레의 그림을 음란한 프로노로 단정하고 모두 압수하였다. 유괴사건은 무죄로 끝났지만 음란물 제작으로 3일간을 정식으로 구류를 살았다.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메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으므로 그는 오히려 더 유명인이 되어버렸다.
1913년에 빈에 새로운 거주지를 정하고, 돈많은 후원자도 만나고,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전시회도 열어서 성공을 거두었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그는 마지막 연인이 된 에디트 하름스를 만난다. 1915년에는 동것하던 노이질과 헤어진다.(기록에 의하면 떠나 달라는 말 한 마디에 아무 대꾸도 않고 당장 짐을 꾸려서 떠났다고 하였다.)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을 올리자 4일 만에 군에 소집당하였다. 그림의 솜씨를 알아 본 연대장 때문에 그림도 그리면서 비교적 자유롭게 군 생활을 하였다고 하였다.
1917년에 노이질이 적십자사 간호사로 지원하여 병사를 돌보다가 병사하였다.
1918년은 전쟁이 끝나면서 지독한 독감이 유럽 대륙을 휩쓴다. 클림트도 쓰러졌다. 이해에 전시회를 연 쉴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가 이해 10월 27일에 역시 독감으로 숨졌다. 3일 후인 10월 31일에는 쉴레도 아내를 따라 독감으로 눈을 감았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