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휘는 석기(碩基), 자는 국첨(國瞻), 연일(延日) 정씨로,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다. 뒤에 모두 세 차례 이사하여 진주(晉州)에 살게 된 것은
학포(學圃) 휘 훤(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학포공은 천거로 현감에 제수되었고, 만년에 대평(大坪)의 강가에
고산정(孤山亭)을 짓고 노년을 보냈는데, 그 산수의 승경은 진주에서 으뜸이었다.
공은 처사 휘
환준(煥俊)의 막내아들인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장자(長者)의 모습이 있었다. 자라서는
어머니 손씨(孫氏)와
두 형님을 따라 지리산 아래 석남촌(石南村)에 남의 집을 얻어 살았는데, 그곳은 깊은 산골이었다. 공은 가난 때문에 제대로 어머니를 봉양할 수 없어 몸소 집안을 위해 매우 힘써 이윽고 집안이 조금씩 넉넉해지게 되었다. 이에 어머니께서는 맛있는 음식을 두루 먹으면서 편안하게 지냈고, 여러 형제들과 같이 살고 함께 먹으면서
맛있는 것은 사양하고 적은 것은 나누었다. 어머니께서 풍현증(風眩症)에 고생이 심해지자, 공은 손수 약을 먹여드리고 대소변을 소제하여 집안사람이 대신하도록 두지 않고 하룻밤에 수십 번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같이 한 것이 십년이 되자 어머니께서는 증상이 좋아졌지만 공은 그것으로 인해 병이 생기게 되었다. 어디론가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의 허락을 얻지 못하면 가지 않았지만, 한 번은 비가 내려 돌아올 기한을 넘긴 적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종신토록 함부로 나가지 않았다. 백형(伯兄)이 병이 든 지 2년이 되었는데, 공은 스스로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아 드리면서 “형님이 좋아하시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돌아가시자 그 그물을 잘라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어버이를 섬기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는 것은 마땅히 정 경독옹(鄭耕讀翁)과 같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공은 서른 살에 《소학》을 공부하면서 잠시도 그만두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유익함이 있는가?”라고 하자, 공은 “이것을 배워 사람되는 바를 알 것이니, 어찌 유익할 뿐이겠는가.”라고 하였고, 《대학》과 《서경》 〈무일(無逸)〉 편을 즐겨 외우면서, “다스림과 학문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내가 일찍 힘쓰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을 일컬어 ‘경독옹(耕讀翁)’이라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는데,
어버이 봉양 위해 앞 들을 경작하고 / 養親耕前野
성인을 사모하여 옛 책을 읽는다네 / 慕聖讀古書
나머진 힘으로 이루기 어려우니 / 其餘難力致
두 가지만 평생 일삼으리 / 兩事一生居
라고 하였으니, 말이 소박하고 신실하여 식자(識者)들은 공을 알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공은 몸소 가산(家産)을 일으켰으나 의를 행하는 것을 쉽게 여겨, 선대의 묘소에 성묘하기가 어렵게 되자 제전(祭田)을 마련하였고, 할아버지를 이은
소종(小宗)이 부족하다고 하자 바로 자기 것을 나누어 처소를 마련해 주었고, 궁핍한 이웃을 구휼하고 빈한한 선비를 보호함에 각각 차례가 있었고, 마을에 글방을 만들어 배우는 사람들이 지내게 하고 책이나 종이와 붓 같은 것들을 비축(備蓄)하여 갖출 수 없는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었고, 수레를 마련하고 말을 길러 혼사나 장례가 있는 사람이 빌려가기를 마치 자기 집에서 가져가듯이 하도록 하였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안팎의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일에 종사하도록 신칙하면서 “사람이 살면서 직분이 없으면 스스로 천하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대개 놀기를 일삼는 자제들이 더욱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일은 부지런한데서 이루어지니, 너는 네 아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某)와 모(某)는 모두 사문(斯文)의 선각자인데 지금은 돌아가셨으니, 애석하게도 너는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에 미치지 못하였다. 비록 그러하나 네가 뜻을 두는 지 여부에 달렸을 뿐이니, 너를 가르쳐 줄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마침내 나이 57세에 어머니보다 앞서 돌아가서 죽었는데도 오히려 눈을 감지 못하였는데, 어머니께서 어루만지며 “어찌 나 때문이 아니겠는가!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이에 눈을 감았다. 고종(高宗) 계사년(1893)에 여러 선비들의 청원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고,
갑령(甲令)대로 정려를 내렸다.
아들
제용(濟鎔)은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다. 네 아들을 낳았는데,
인영(仁永)과
덕영(德永), 모모(某某)이다. 둘은 이미 관례를 치렀고, 또한 자질이 빼어나 사랑스럽다.
창성(昌城) 조긍섭(曺兢燮)은 다음과 같이 논한다.
옛말에 “자질은 학문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나는 가만히 괴이하게 여겨, ‘지금 독서하는 것 역시 학문인데 어찌 능히 아는 것을 행하는 이가 드문가? 혹 아는 것을 행하지만 대부분 억지로 힘써 하거나 계교(計校)하기 때문에, 그 정성스럽고 확실하여 자연스럽기가 능히 아름다운 자품을 가진 자와 같지 못하니, 왜 그런 것인가?’라고 생각하였다. 정공(鄭公)은 비록 학문하지 않았고, 그 자취는 비록 그다지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컨대, 만년에 더욱 독실하였고 돌아가신 뒤에 더욱 드러난 것은 까닭이 있을 것이다. 이에 학문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또한 마땅히 후손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