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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68. [역경의 열매] 박부원 <1-8> 하나님 흙으로 사람 지으시고 코에 생기… 창조 섭리 배워
하나님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55년간 한결같이 가마 앞 지켜
박부원 장로가 도원요 가마에 장작불을 지피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나는 도자기를 빚는 78세 노인이다. 1962년부터 빚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55년이 흘렀다. 오랜 세월 흙을 만지다보니 처음엔 없던 흰 수염이 턱을 덥수룩하게 덮었다.
도자기를 빚다보면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감탄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창 2:7). 도자기도 비슷하다. 흙으로 모양을 다듬은 뒤 1300도의 가마 불 속에서 연단을 거치면 완성된 도자기가 나온다. 수천 점의 도자기를 만들었지만 똑같은 도자기는 한 개도 없다. 그래서 가마의 문을 열 때마다 어떤 도자기가 들어있을지 항상 설렌다. 55년간 한결같이 가마 앞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설렘 덕분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도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모두 각자의 개성대로 살아간다. 하나님도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스러움 안타까움 슬픔 기쁨 설렘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실 것이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좋은 도자기는 천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기다림, 세월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도자기는 불교와 관련이 깊다. 불교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도자기다. 그래서 내 주변엔 항상 보살이나 스님 등 불교인이 많았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 중에 크리스천은 극히 드물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종교를 숨긴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숨긴 적도 없다. 몇몇 스님들은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 공방에 발길을 끊기도 했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원고를 요청받았을 때 내가 겪은 역경이 무엇일까 고민해봤는데 ‘외로움’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자기를 빚는 반세기동안 내 주변엔 하나님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동료가 없었다. 그러나 78년 세월을 되짚어봤을 때 내가 거둔 ‘열매’가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실 도예에는 완성이 없다. 언제나 더 나은 작품을 위해 가마 앞으로 가야한다. 완성된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도자기 중에서도 특히 달항아리를 좋아한다. 달항아리는 18세기 정조 임금 때 탄생했다. 정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권좌를 놓고 쟁투를 했던 아픔을 겪었던 왕이다. 그는 서민의 생활을 잘 알았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 정조가 늦은 밤 달을 보다가 ‘도자기로 이런 아름다운 달을 만들 수는 없을까’ 생각했을 것이고, 도공들은 왕의 뜻을 따라 흙을 빚었다.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했던 도공들은 왕이 자신들을 알아주는 것이 기뻤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게 달항아리다.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나를 지금까지 보살펴주시고 동행해주셨다. 그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정조 시대 도공들과 같은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었다. 이제부터 반세기 넘게 도자기를 빚으며 만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정리=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 [역경의 열매] 박부원 <1> 하나님 흙으로 사람 지으시고 코에 생기… 창조 섭리 배워
* [역경의 열매] 박부원 <2> 빠듯한 살림에도 십일조… 신앙 모범 된 어머니
* [역경의 열매] 박부원 <3> 아무도 도자기 사지 않던 시절, 도자기에 홀려
* [역경의 열매] 박부원 <4> "최고의 도자기 만들겠다"… '도원요' 설립해 독립
* [역경의 열매] 박부원 <5> 돈 생겼다고 방탕한 생활하다 폐병에 걸려
* [역경의 열매] 박부원 <6> "작품에 완성 없듯이 주님께 가는 길도 끝없어"
* [역경의 열매] 박부원 <7>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나에게 명예박사 학위"
* [역경의 열매] 박부원 <8·끝> "주님의 아름다움 전하는 데 쓰임받기 원해"
◇약력=1938년 전북 김제 출생. 1962년 도암 지순탁 선생을 따라 도예에 입문. ‘분청사기 개인전’ ‘도쿠시마시 후원회 초대전’ ‘지당 박부원 개인전’ ‘한국전통도예 특별전’ ‘화가 도자 1000년의 미’ ‘왕실도자 500년, 50년의 설레임’ ‘도원요 초대전 법고창신’ 등 전시회 다수. 왕실도자기협회 회장, 세계도자기엑스포 추진위원 역임. 광주왕실도자기 초대명장. 현 한국도자재단 이사.
***[역경의 열매] 박부원 <2> 빠듯한 살림에도 십일조… 신앙 모범 된 어머니
일찍부터 신문배달·막노동하며 고학
박부원 장로(앞줄 왼쪽)가 중학생이던 1950년대 초에 전북 김제 입석리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는 모습. 박 장로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이때부터 신문배달 등을 하며 고학(苦學)을 했다.나는 1938년 전북 김제 죽산면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제는 쌀이 많이 나는 곡창지대다. 김제평야에 흉년이 들면 나라가 굶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집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유학자였다. 갑자기 쏟아진 비 때문에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쫄딱 젖어도 나가보지 않았을 정도로 선비정신이 강하셨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기계를 만지다 1945년 광복 후 한국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땅을 팔아 장사를 시작했다. 일을 벌일 때마다 잘 안됐다. 가세가 점점 기울었다. 300여년 동안 대대로 지켜오던 집을 떠나 김제군 봉남면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여기서 방앗간을 시작했다. 노름에 손을 대는 바람에 방앗간마저 날리고 다시 마을 어귀에 큰 돌이 있다는 김제군 입석(立石)리로 집을 옮겼다. 피난민들이 몰려 살던 동네다. 장남인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학교를 자주 빠졌다. 낮엔 일을 하고 밤엔 헌책방에서 책을 빌려 읽었다. 하루가 지나면 대여료를 더 내야 해서 책 한 권을 빌리면 하룻밤을 넘기지 않으려고 밤마다 눈을 비볐다.
어머니는 신앙이 깊은 크리스천이었다. 유학자 집안으로 시집 왔지만 교회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그런 며느리를 막지 않았다. 보리가 비에 적든 말든 개의치 않았던 것처럼 며느리의 신앙생활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갔다. 교회는 집과 거의 붙어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어머니는 없는 형편에도 밥을 지으면 항상 성미를 떠서 교회에 가져갔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잠 3:9)는 성경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당시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그렇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가족 먹을 밥도 넉넉하지 않은데 왜 얼마 없는 쌀을 교회에 가져가시는 걸까.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쌀 한 톨 아쉬운 시절에 목사님을 위해 성미를 뜨는 어머니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십일조로 헌금할 돈은 다리미로 정성껏 펴서 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나의 신앙생활에도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 도자기가 팔리지 않아 생계가 어려웠을 때도 십일조를 거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신문배달을 했다. 신문을 다 돌리고 나면 신문 몇 부가 남았는데 그걸 호떡집에 가져다주고 호떡과 바꿔 먹었다. 하루는 혼자 호떡을 다 먹고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큰아들 준다고 된장찌개와 흰 쌀밥을 차려놓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난 아직도 그때 어머니에게 호떡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고등학교를 마치기 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경기도 파주 쪽에 돌산이 있었는데 거기서 돌을 깨며 돈을 벌었다. 공사판에서 등짐도 졌다. 어린 나이에 힘이 달려 일을 제대로 못하니 하루 종일 일해 봤자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밥값도 채 안됐다. 김제, 유학자의 집, 고학(苦學), 신문배달, 막노동…. 도자기와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내 도예의 길은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에서 우연히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3> 아무도 도자기 사지 않던 시절, 도자기에 홀려
도암 선생 찾아가 제자로 들어가… 강원도 산골서 세월가는 줄 몰라
1970년대 초반 고려도요에서 활동하던 도공들이 흙으로 도자기를 빚는 모습.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박부원 장로다.1962년 겨울,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한 골동품 가게에 진열된 분청사기 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멈춰 한참을 바라봤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릇의 발(바닥) 부분이 위를 향하도록 뒤집어져 있었다. 발의 모습은 마치 오래 신어서 바닥이 닳은 짚신 같았다.
“이 도자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 앞 다방에서 차(茶) 한잔 하고 있을 거요.”
골동품 가게 주인의 말을 듣고 곧장 다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도암 지순탁(1912∼1993) 선생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도자기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 당시엔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도공이 하대 받던 시절이었다. 다들 먹고살기 바빠 허리띠를 졸라매던 1960년대 초엔 도자기를 사겠다는 사람도 드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를 도자의 길로 강하게 이끄셨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뒤집힌 분청사기 그릇이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때 내 나이 스물넷이었다.
도암 선생을 따라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산골로 들어갔다. 홍천엔 불을 피울 때 땔감으로 쓸 나무를 구하기 쉽다. 옛날 왕실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양구의 도석과 백토를 가져다 쓰기도 좋았다. 당시 우리나라엔 도자기 계승이 끊어진 상태였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할 당시 문화말살 정책을 펴 도공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도공들은 기록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자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게 재현작업이었다. 옛날 도자기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만드는 작업이다. 사찰에서 재로 옷감에 물을 들이는 것에서 힌트를 얻어 재로 유약 만드는 실험을 수없이 했다.
그땐 다들 가난했다. 당장 먹을 게 없었고 미래도 불투명했지만 흙을 만지고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게 좋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 포수’라는 사냥꾼이 가끔 꿩이나 토끼를 잡아 공방에 던져주고 갔다. 꿩과 토끼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고생할 때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와 메추리였다.
그렇게 2년을 버텼다. 1964년에 나는 도암 선생과 함께 경기도 이천 신둔면으로 자리를 옮겨 고려도요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구웠다. 이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도자기 굽는 법을 알려달라며 찾아왔다. 나는 가마의 책임자였다. 많을 땐 100명이 넘는 사람을 데리고 도자기를 구웠다. 남들이 10시간을 일하면 나는 15시간 일했다.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냈던 장기영(1916∼1977) 전 한국일보 사장이 가끔 이곳에 들러 도자기 몇 점을 고르고 금일봉을 주며 격려하곤 했다. 아내도 이때 만났다. 당시 다니던 교회 권사님이 소개를 시켜줬다. 아내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도자기가 안 팔려 생계가 어려웠을 때나 투병생활을 하며 생사(生死)의 기로에 있을 때 아내의 기도가 큰 힘이 됐다. 이 지면을 빌어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4> “최고의 도자기 만들겠다”… ‘도원요’ 설립해 독립
‘흙으로 아름다움 표현’ 사명 깨달아… 아내는 매일 나를 위해 새벽기도
박부원 장로가 1974년 만든 경기도 광주 ‘도원요(陶元窯)’ 가마 앞에서 박 장로 자녀들이 놀고 있는 모습.고려도요에서 도자기를 굽던 나는 1973년 한국민속촌이 세워질 무렵 이곳에 파견 와서 도자기 공방을 세우고 가마를 지었다. 그해 말엔 부산 동아대의 요청으로 학교에 가마를 묻어주고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러다 갑자기 도암 선생 밑에서 독립해 나의 길을 걷게 된 일이 발생했다.
당시는 한국 도자기의 대부분이 일본사람들에게 팔려나갈 때였다. 많은 일본의 도자기 애호가들이 한국을 찾았다. 내가 몸담고 있던 고려도요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당시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를 저격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23분의 일이다.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도자기를 사겠다는 일본인들도 사라졌다. 고려도요 생활이 어려워지자 도암 선생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도요를 나와 경기도 이천 수광리로 거처를 옮겼다. 우리 집은 마당이 좁아 가마를 세울 수가 없었다. 인근에 마당이 넓은 집에 살던 주민에게 “집을 바꾸자”고 했다. 외양간을 허물어 가마를 지었다. 내 입장에서는 일생의 꿈이었던 공방을 마련한 것이었지만 아내와 자녀들에겐 힘든 생활이었다. 새로 옮긴 집은 장롱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고 허름했다. 갑자기 많은 것이 불편해졌지만 아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교회에 나가 나를 위해 기도해줬다. 형편은 어려웠지만 한 번도 내색하지 않았다. 십일조도 꼬박꼬박 냈다. 아내는 나의 어머니를 닮았다.
얼마 뒤 다시 경기도 광주로 자리를 옮겼다. 광주는 조선시대 왕실 도자기를 생산한 사옹원 분원이 있던 곳이다. 아무래도 숭고한 역사가 있는 지역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곳에 ‘도원요(陶元窯)’를 세웠다. 도원요는 최고의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다.
처음엔 청자를 주로 빚었다. 한해 150점 정도 만들었다. 그러다 백자와 분청 위주로 만들었다. 나의 정서엔 분청이 더 잘 맞았다. 청자엔 불교적 의미가 많이 담겨 있는 반면 분청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서민적 인간미가 느껴진다. 분청에는 마치 따뜻한 인간의 체온이 흐르는 것 같다. 게다가 실용성이 있고 튼튼하며 조형미가 아름답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해주셨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선물은 기교가 아닌 본성적인 예술성을 달란트로 주신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가마와 함께 컸다. 흙을 조금 떼어주면 내 옆에서 흙장난을 하며 놀았다. 어떤 측면에선 그때부터 이미 나의 문하생이었던 셈이다. 그 영향으로 아들은 현재 내게서 도자기 굽는 법을 전수받고 있다. 딸은 고려대에서 도자사학을 전공했다.
이곳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생각했다. 도자기를 ‘창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재료인 흙과 불은 이미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흙과 불로 도자기를 빚어 새로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기장이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5> 돈 생겼다고 방탕한 생활하다 폐병에 걸려
새벽마다 “살려주세요” 간절히 기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며 치료 확신
박부원 장로가 교회 부지를 기증해 2005년 4월 7일 현재 위치인 경기도 광주 도원요 옆으로 자리를 옮긴 옥토교회의 이전예배 모습. 맨 오른쪽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사람이 박 장로다.1974년 도원요를 세우고 얼마 뒤 한·일 관계가 다시 회복됐다. 일본인들이 다시 한국의 도자기를 사기 시작했다. 작품은 적은데 사겠다는 사람은 넘쳐나서 제비를 뽑아 살 사람을 정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주머니에 돈이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 주머니에나 손을 넣어도 돈이 다발로 들어있었다.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고 하셨는데 나 역시 생활이 부유해지니 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폈다.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며 몸을 함부로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게 보였다. 몹시 마르고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서울 종로2가 YMCA 앞에 있던 폐 전문병원을 찾았다. 이미 나의 폐는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의사의 진단 결과를 듣고 좌절감에 빠졌다.
‘이제 내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최고의 도자기를 만들 자신이 있는데 시작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약한 존재였다. 몸에 이상이 생기니 하나님을 찾게 됐다. 그땐 정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목이 터져라 기도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절실히 하나님을 찾았던 때가 투병생활을 하던 3년의 시간이었다. 새벽마다 교회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회개했고, 틈이 날 때마다 하나님을 찾았다. 이천석 목사님의 부흥회를 듣고 안수기도를 받으러 경기도 가평의 한얼산기도원도 찾아갔다. 치료에 진척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수록 희망이 생겼다. 몸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지만 하나님이 이대로 날 불러 가시진 않을 거라는, 분명히 나의 생명을 좀 더 연장시켜 주실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확신은 현실이 됐다.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당시 폐병 자국이 보인다. 절체절명의 고비를 신앙으로 극복한 경험은 이후 삶에 큰 도움이 됐다. 어려울 때 좌절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이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할 수 있었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건 이때뿐만이 아니다. 도원요로 거처를 옮긴 뒤 나는 고민이 있거나 작업이 잘 안 될 때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동해바다에 갔다. 그날도 새벽에 오토바이를 타고 강릉으로 향했다. 바다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굽이진 산길에서 마주친 대형 트럭을 피하려다 중심을 잃었다. “하나님!” 오토바이가 넘어지려는 순간 하나님을 찾았다. 오토바이는 도로 쪽으로 넘어졌다. 반대쪽으로 쓰러졌다면 내 몸은 오토바이와 함께 낭떠러지로 떨어졌을 것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내 마음속엔 하나님께서 항상 동행하신다는 확신이 생겼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또 다시 경제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경기도 광주에 사뒀던 땅을 조금씩 팔아가며 생계를 유지했다. 당시 우리 교회는 광주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내지 못해 없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가정 형편이 나아질 거란 보장도 없었지만 아내는 땅을 그만 팔고 남아있는 땅은 교회에 기증하자고 했다. 그래서 현재 내가 다니는 옥토교회는 우리 집 바로 앞에 자리 잡게 됐다. 병이 찾아오거나 갑작스럽게 사고가 발생하거나 경제적으로 생계가 어려워져도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모두 극복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6> “작품에 완성 없듯이 주님께 가는 길도 끝없어”
한국적 아름다움 구현한 달항아리… 일본 비롯한 전 세계에서 전시·소장
1982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박부원 장로의 ‘분청사기’ 개인전 모습. 맨 왼쪽 뒷모습이 박 장로다.1970년대 후반과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한국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그때는 나도 일본에서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76년 오사카 마이니치신문사 후원 초대전, 78년 기타규슈시 15주년 기념 한국도자기 초대전, 80년 도쿠시마 시장 초대 개인전 등을 열었다.
일본은 문화적인 면에서 한국보다 훨씬 앞선 나라였다. 하지만 우리 도자기엔 일본 도자기에는 없는 혼이 담겨 있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도자기는 태어나는 것이고 일본의 도자기는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80년 일본 도쿄 긴자마수사카야 백화점에서 개인전을 열었을 때는 당시 조선일보 일본 특파원이던 허문도(1940∼2016) 전 국토통일원 장관이 전시회장에 들렀다. 나의 도자기를 둘러보던 그가 물었다.
“왜 이런 훌륭한 도자기 전시회를 한국에선 하지 않습니까?”
“한국엔 도자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당시 나는 허 전 장관과의 만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허 전 장관에게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2년 뒤다.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간 그는 나에게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회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시 한국에선 도자기 전시회를 한다는 게 매우 드문 일이었다. 허 전 장관의 도움으로 82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게 된 ‘분청사기’ 개인전은 한국에도 우리 도자기의 멋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나는 조선시대 달항아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애썼다. 한국적인 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계인이 좋아하는 달항아리를 만들려고 했다. 조선시대 달항아리는 희고 둥글고 매끈한 것이었지만 나는 켜켜이 결이 있고, 결을 채우는 색이 있는 달항아리를 만들었다. 당시엔 반달 모양의 그릇 두 개를 붙여 달항아리를 만들었지만 나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18세기엔 그 시대의 달항아리를 만드는 방법이 있는 것이고 지금은 지금의 방법이 있다. 그 시대에 머물러 있지 않고 더 좋은 달항아리를 만드는 것은 우리 사기장이들의 사명이다.
해외에서도 이렇게 만든 나의 작품들을 인정해줬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일본이 아닌 전 세계에서 도자기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97년엔 러시아 민속박물관에서 한국전승도자전을 열었고, 99년엔 미국 시애틀 박물관에 초청받아 한국 전통 도자기 만드는 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현재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엔 내가 만든 유백 달항아리가 소장돼 있고,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앤드앨버트 박물관엔 분청사기와 제작 도구가 진열돼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민속박물관에도 내 작품이 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도자기의 길에는 ‘완성’이 없다. 완성된 신앙이란 없는 것과 같다.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하는 것처럼 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선 끊임없이 굽고 또 구워야 한다. 올해로 내 나이 일흔여덟이다. 그러나 아직도 도예가로서 더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끊임없이 더 가까워지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7>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나에게 명예박사 학위”
도자 문화에 기여한 공로 인정 받아… 거짓말 않는 불 앞에 최선 다했을 뿐
박부원 장로(왼쪽)가 2008년 9월 26일 열린 제11회 광주 왕실도자기 축제에서 조억동 당시 광주시장으로부터 ‘광주 분원 왕실도자기 초대 명장’ 증서를 받고 있다.도자기를 구운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흙과 불에 미쳐서 산 세월들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일본 활동보다 국내 활동에 주력했다. 거의 매년 전시회를 열었고, 2001년엔 세계도자기엑스포 추진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렇게 살다보니 2008년 9월에 경기도 광주시로부터 광주왕실도자기 초대 명장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왕실도자기 명장은 도예에 대한 식견이 높고 뛰어난 기량을 갖춰야 한다. 도자기 문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고려해 선정한다. 명장 자격을 받으면 세계도자비엔날레 등 각종 도자 행사 때 초청받는다.
2014년 5월엔 전북 전주대에서 명예 문화기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통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한 것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명장에게 명예박사 학위가 수여된 것은 처음이다. 난 형편이 어려운 집안의 장남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야 했다. 돈을 버느라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했고, 중학생 시절에도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그 뒤로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막노동을 했기에 나로서는 사실상 처음 받는 학위가 박사였던 셈이다.
자랑처럼 늘어놓은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내가 ‘왕실도자기 명장’이나 ‘명예박사’란 호칭을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가마 문을 열 때마다 초조한 마음으로 ‘좋은 도자기가 탄생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람의 능력엔 한계가 있다. 겉모습을 완벽하게 빚었어도 1300도 가마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어느 부분이 소홀했는지 금방 티가 난다. 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마 문을 열 때마다 항상 설레고 궁금하다. 2012년 5월 예술의전당에서 열었던 달항아리 전시회 이름도 ‘왕실도자 500년, 50년의 설레임’으로 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나는 그냥 최선을 다할 뿐이고 그 뒤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 어떤 도자기가 완성됐을지 궁금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기다려야 한다. 항아리가 식기 전에 가마 문을 열면 항아리는 깨져버린다. ‘달항아리의 일인자'라는 이름을 얻게 된 비결도 ‘기다림’이다. 대부분 예술 분야는 천재성을 타고나야 한다고 하지만 도자기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농사와 같다. 가을곡식을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거둘 수는 없는 것이다.
가끔 나의 도자기를 보고 위로받는 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사실 나는 왕실도자기 명장이라는 거창한 칭호보다 이런 게 더 좋다. 한번은 한 목사님으로부터 “당신의 도자기를 보고 위로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목사님은 한때 꽤 큰 교회를 담임했던 분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당시 강대상에 오르는 걸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목회자가 강대상에 설 수 없다는 건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마음 아픈 일일 것이다. 그 후로도 종종 목사님을 만나 도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할 수 있는 위로는 이런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흙과 불)을 이용해 도자기를 만들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통해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를 할 수 있다면 이것도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아닐까 싶다.
***[역경의 열매] 박부원 <8·끝> “주님의 아름다움 전하는 데 쓰임받기 원해”
하나님 주신 자연 자체가 선교 도구… 세대 초월 사랑받는 작품 만들고 파
광주왕실도자기 명장 박부원 장로(오른쪽 두 번째)와 한신대 신학대학원 연규홍 원장(맨 오른쪽)이 2014년 11월 4일 서울 강북구 한신대 신대원에서 열린 ‘달항아리’ 기증식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민일보DB도자기를 구우면서도 항상 신학에 관심이 많았다. 1988년 장신대 평신도교육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2년간 신학을 배우면서 깨달은 건 직접 말씀을 전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주신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고 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 하나님의 손길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손수 지으신 자연을 보며 ‘참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래서 나는 자연(흙과 불)으로 만든 도자기를 통해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쓰임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2014년 11월에 있었던 일이다. 연규홍 한신대 신학대학원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의 달항아리를 기증해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사연은 이랬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신대 신대원 출신 목사가 연 원장을 찾아와 적금통장을 건네며 좋은 일에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통장엔 1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한신대는 한국적 신학을 표방했지만 정작 한국적 상징물은 하나도 없었다. 연 원장은 예비 목회자들이 역사적 인식을 갖췄으면 하는 바람으로 나에게 연락한 것이다. 연 원장은 20여년 전 내가 다니는 옥토교회의 전신인 광주제일교회에 설교하러 왔다가 나와 인연을 맺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연 원장의 갑작스러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어른이 두 손으로 안으면 품 안을 가득 채울 크기의 ‘백자 달항아리’를 내놓았다. 한 점만 있으면 외로울 수 있기 때문에 백자 달항아리와 짝을 이룰 분청 달항아리까지 건넸다. 학생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주신 예술적 영성을 달항아리에서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항아리는 지금도 한신대 신대원 장공기념관 1층 로비에 전시돼 있다.
나는 항아리를 기부하며 “항아리는 채우는 것과 비우는 것이 중요한데 신학생들이 세속적인 바람을 비우고 하나님의 영성을 가득 채웠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항아리는 채움과 비움이 반복된다. 추수를 하면 건강한 씨앗을 골라 항아리에 담고,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그 씨앗을 꺼내 밭에 뿌린다. 항아리엔 항상 좋은 씨앗을 채워 넣고 또 비워야 한다. 내 안에도 좋은 씨앗을 채워 넣어야 한다. 고신대 총장이신 전광식 교수님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 신동아학원 이사장인 홍정길 목사님은 나의 작품세계를 충분히 이해하며 내 안에 좋은 씨앗, 하나님의 마음을 채워주신 목회자들이다. 그 좋은 씨앗을 꺼내 다른 이들에게 전하면 씨앗은 새로운 생명이 되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심어질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아름다운 도자기들은 그 옛날 무명(無名)의 도공들이 만든 것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대가 바뀌어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나의 도자기 인생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나의 도자기는 완성되지 않았다.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을 수 있는 도자기를 만들고 싶은 게 나의 꿈이다. 이를 통해 내 이름이 드러나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이 나타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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