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단종대왕(端宗大王)이 왕위를 선양했을 적에 忠臣과 열사들이 단종을 위하여 전후로 목숨을 바친 자가 많았는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병자육신전(丙子六臣傳)>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므로 단종 때의 일을 언급할 적에 사람들이 반드시 6신 이라고 칭하였다. 경성에서 남쪽으로 10리쯤 되는 한강 너머 노량진 강가에 다섯 기(基)의 묘소가 있으니,각각 짧은 비갈에 朴氏之墓,兪氏之墓,李氏之墓,成氏之墓,成氏之墓,라고만 표시하고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는 6섯 성씨 중에 4墓만 있고, 2墓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이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6신의 墓라고 전해온 것이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다, 成氏의 墓가 2이 있는 것은 총관(摠管)과 승지(承旨) 부자가 함께 목숨을 바쳤기때문이다,
河氏의 墓는 영남의 선산에 있고 柳氏의 墓만 유독 소재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짐작컨대 육신이 죽을 적에 그 종족(宗族)이 망하여 없어져 의인(義人)이 시신을 거두어서 묻었으나, 나라에서 금하는 것을 무릅쓰고 주선하였으니 형편상 어렵고 쉬움이 혹 차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혹은 고향에 시신을 묘셔다 장례하기도 하고,혹은 끝내 시신을 땅에 묻지 못했는가 보다,
또 듣자하니 총관의 墓소가 또 홍주의 고향에 있다고 하는데, 혹자가 말하기를 "형벌을 받은 뒤에 지체(肢體)를 각각 하나씩 묻어서 이렇게 된 것이다,"라고 한다,
만일 이말이 과연 맞는다면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천추에 눈물을 자아내게 할 만하다, 또 이곳에 成氏의 墓가 둘이 있는 것은 근래 노인들이 귀와 눈으로 실제 접한 것이고 전해 오는 말을 근거할 수 있으나, 어느 해인가 권세 있는 귀인이 강가에 별장을 지으면서 부근의 묘소에 있는 비갈을 모두 제거하였다,
권세 있는 귀인이 실세한 뒤에 어떤 사람이 예전의 비갈이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다시 수습하여 세웠으나 미처 다시 세우기 전에 나중에 쓴무덤들이 그 사이에 많이 섞여 있어서 成氏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또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成氏의 한 묘소를 혼동하여 분별할 수가 없었고, 그 비갈을 잃었기 때문에 지금 成氏의 묘소인 줄 알 수 있는것은 단지 하나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당초에 4성씨의 신하를 장례할 적에 하씨와 유씨의 묘소도 이 가운데에 있었는데 연도가 오래되어 혹 成氏의 한 묘소처럼 장소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슬프다, 6신이 죽을 때에 살아남은 자손들이 없고 오직 朴氏만이 유복의 손자가 있어 이름이 노예에 뒤섞여서 수사(收司)를 면하였다, 몇 대가 지난 뒤에야 조정에서 비로소 충성을 가엾게 여겨 녹용하였다,
6세손 익찬(翊贊) 숭고(崇古)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노량진의 묘소는 비록 근거할 만한 문적이 없어 의심하고 있으나 5섯 비갈에 4성씨가 있으니, 이것이 충분히 증거가 될 수 있다,
또 어찌 姓氏만 있고 이름이 없다 하여 믿지 않고 돌보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옛 봉분을 더 쌓고 새 비갈을 세웠으며, 또 상공(相公) 허목(許穆)에게 비문을 요청하니, 이름하기를 '육신의 총비문(六臣疑塚碑文)'이라 하였으나, 미처 비석에 새기지 못하였다,
금상(今上) 5년 기미에 성상이 노량진에서 열무하실 적에 여러 공경(公卿)들의 아룀을 따라 강 건너에서 묘를 바라보시고는 한탄하고 감회를 일으키시어 묘역에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도록 명하였다,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이에 분발되어서 묘소 곁에 사우를 창건하고 육신을 나란히 제향하였다, 17년 신미에 上이 장릉(章陵)에 전알하러 가실 적에 연(輦)이 묘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성상은 또다시 관직을 회복하고 치제하게 하였으며 이어서 "민절(愍節)" 이라는 편액을 내렸다,
아~이보다 전에는 이른바 육신의 묘라는 것이 다만 구릉의 한 줌 흙더미이고 부식된 한조각 빗돌이어서 강가의 늙은이와 나루터의 아전들이 오갈 적에 은밀히 이곳을 가리키며 말로 서로 전했었는데,이제는 이 사실이 공경의 아룀에 올랐으며 성상이 두 번이나 보시고 융숭한 예를 내리셨다, 그리하여 이미 봉분을 쌓고 나무를 심으라는 은혜로운 명령이 있었고, 또 사우를 세워 제향을 하고 관직과 품계를 다시 회복하였으며,제사를 특별히 내려주고 화려한 편액을 밝게[ 게시하였다, 조정에서 표창함이 이와 같이 빛나고 드러났는데도 마침내 슬픈 마음을 일으키는 유허(遺墟)에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두어서 충성스러운 혼과 굳센 넋으로 하여금 황폐한 풀과 차가운 연기와 도깨비들이 떼 지어 울부짖는 가운데 길이 매몰되게 한다면, 당시 의사들이 봉분을 쌓고 비갈을 세운 고달픈 마음을 저버림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오늘날 성조(聖朝)에서 충신을 표창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는 보기 드문 은전을 헛되게 함에 가깝지 않겠는가, 朴公의 영혼 또한 어찌 '내 다행히 남은 혈손(血孫)이 있다,'고 말씀하시겠는가, 숭고의 손자인 청안현감 경여(慶餘)가 이를 깊이 염려하고 여러 어른들과 상의하여 이 일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해서 신도(神道)에 비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와서 명문(銘文)을 부탁하므로 나는 늙고 혼몽하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생각하기를, "그렇다, 노량진의 묘소가 육신의 무덤이 됨은 믿을 만하고 의심할 수 없음이 참으로 그대 조고의 유의(遺意)와 같다, 저 옛날 장릉의 지위와 칭호가 회복되지 않음을 때에는 오히려 기휘(忌諱)하는 바가 있어서 감히 끝까지 말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조정에서 육신에 대하여 흔쾌히 권장해 주어서 풍성(風聲)을 길이 세울 뿐만 아니라 장릉을 복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노량의 묘소에 있어서만 유독 의심스러워 신빙할 수 없다 해서 단단한 돌을 깍아 사실을 기록하여 옛날에 어두운 것을 제거하고 새로 드러냄을 이루어 지금에 밝혀서 장구한 후세에 분명히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그 일을 차례로 기술하고 명한다,"
옹기종기 무덤 있는데
각각 표시한 글이 있어
다섯 비갈에 네 성씨 기록 되었네
오래 전 부터 전해 오기를
육신 충절 묻힌 곳이라 하고
성씨는 여섯 이 건만
이곳에 네 분만 갖추어졌네
화가 일어난 날에
의를 사모하여 묻은 것이니
그 이름을 쓰지 않음은
까닭 있어서 임을 알겠노라
어찌하여 후세 사람들은
여기에 의심을 하는가
비록 문적이 없어서이나
실은 기휘함을 염려한 것이라지요
다행히 성조를 만나
성상의 마음에 감동함이 있으니
충절을 표창함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네
백일의 광채가
깊은 땅속까지 통하여
넓은 도량과 큰 은덕
형용하여 말할 수 없어라
옛날에 기휘하던 것
이제는 모두 피함이 없다오
생각건대 차례로 표시한 글
저와 같이 없어지지 않았고
또 봉분하고 나무를 심어
이와 같이 훌륭하니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을
이제는 끝낼 수 있으리라
취금헌은 후손이 있어
함께 육신의 제사를 주관하네
전하여 육세에 이르러서
무너진 묘소를 수리하고
또 비문을 기술하였으나
아직도 곧바로 쓰지 못하였는데
지난해에 이르러
장릉을 복위 하였다오
무덤을 높여 새로 만든 듯하고
여러 석물을 다 구비하니
군주와 신하는 일체인데
일이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이곳에 묻혀 있는 넋을 받듦은
더욱 의심할 것이 없도다
분명히 글을 새겨서
천년만년 길이 보이노니
부디 영령들이여
끝까지 이곳에 모이소서,
숙종34년 무자년(1708년)
의령 남구만은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