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해란강 그리고 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
중고시절, 청년시절에 가장 애창했던 노래였던 “선구자”의 1절 가사로 인하여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청년들이 꿈꾸며 방황하며 거닐었던 해란강을 알았다. 노래를 부를 때 마다 내 나름대로 대지를 적시며 유유하게 흐르는 멋진 강을 연상하곤 하였다.
선구자를 부른지 40십여 년 만에 단체 관광 팀을 따라서 드디어 해란강과 조우하게 되었다. 목을 길게 빼고 강다운 강을 찾았는데 강이 보이지 않았다. 용정 시내 관광을 마치고 명동촌으로 출발한다는 안내에 당황하여 ‘해란강이 빠졌다’고 말했더니 ‘해란강은 창문으로 보는 차창관광이라며 앞으로 한 번 더 지나가게 되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보라’고 하였다.
차창 관광이라는 말에 적이 실망하였다. 강변에 서서 인사도 하고 강물에 손을 적셔보고 강물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는데 ...... 어쨌든 창밖으로 바라본 강은 상상 속의 강이 아니었다. 강이라고 부르기에는 폭도 좁고 물의 양도 많지 않은 그저 그런 작고 평범한 강에 불과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 개인적으로 용정에 가서 비암산에 올라갔다. 용정이 한 눈에 보였다. 작은 도시 용정은 계란 노른자처럼 평야에 둘러싸여 있었고 그 평지에 하천이 구불구불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평야는 “서전벌”이고 구불거리는 하천이 “해란강”이라고 하였다.
구불거리는 큰 시내가 해란강이라는 말에 다시 한 번 실망하며 저런 곳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라니 하며 ‘가사가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였다.
며칠 전에 도문에 다녀왔다. 도문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차가 강 옆의 길을 끼고 달렸다. 큰 강의 물이 유유하고 도도하게 흐르며 아름다운 산천경관을 만들고 있었다. 풍광이야 다르지만 순간 섬진강이 떠올랐고 탄성이 터졌다.
동행하는 분들이 그 강이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도문 가까이에 와서 합수되어 함께 흐르는 강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해란강이 부르하통하와 합수해서 흐르다가 도문에서 다시 가야하와 합수되어 두만강으로 들어가고 두만강이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에 가슴이 찡하였다.
해란강은 두만강의 한 지류로서 화룡에서 발원하여 용정, 연길을 거쳐 도문으로 가서 두만강과 합수되는 장장 145km가 되는 장강이었다. 360여리 길을 허위허위 달리며 연변 조선인들의 벼농사를 일구어준 어머니 강이었고, 조선인들을 살려준 자비로운 젖 줄기였다.
1890년 청은 조선인 월경개간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4보 39사 124개 갑, 415개의 패를 설치하여 조선 개간민 전부를 이 행정조직에 편입시켰다.
조선인 거류지의 가장 큰 중심지가 되는 4보는
진원보(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등 대안지역),
수원보(용정시 삼합, 지신향 일대),
안원보(화룡시 덕화, 용신, 숭선, 로과 일대),
영원보(용정시 광개향, 도문시 일부)였는데
이들 보중에 진원보를 제외한 3개의 보는 해란강이 흐르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1880년대 조선인들은 두만강 상류지역인 무산대안, 회령대안, 종성대안, 온성대안, 경원대안에
서 개간을 하였으나 1890년대 4보 39사 설치와 조선인 전문개간지역 형성으로 말미암아 조선인촌락은 두만강북인지역에 자리를 잡았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엽에는 조선인들의 생활중심권이 점차 부르하통하, 해란강, 가야하등 으로 옮겨졌다.
연변지역은 조선인에 의하여 수전이 개발되기 전까지 한전이 주를 이루었다. 한전에 보리, 밀, 수수, 옥수수, 조와 콩류를 심었다. 1890년 용정시 개산툰진 광소일대에서 처음으로 수전을 개발하여 벼를 심었고, 1900년 해란강반 서전평원의 대불동일대에서 연이어 수전을 개발하여 벼를 심었다. 1905년 훈춘 마적달 오도향, 밀강향 중강 등지에서도 수전이 개발되었다.
1906년 연길청 용지사 대교동의 14세대 조선족농민들은 최초로 공동으로 수로(1308m)를 만들어서 관개를 하였고 그 후 용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의 투도구, 평강 등지의 조선족들도 수로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1910년 말에는 벼농사지역이 두만강, 해란강안 산곡으로부터 서전평원, 평강평원 및 북부의 부르하통하, 가야하, 훈춘하류지역으로 널리 확장되었다.
해란강을 학습하고 나니 해란강이 위대하게 보였다.
독립투사들이 말을 딜리는 해란강은 나중의 일이었고 조선 경제 파탄과 정치의 폭정에 시달려서, 가뭄과 기근에 시달려서 신세계에 대한 꿈을 품고 월강한 이주민들을 받아서 생명을 살려준 강이었고 조선인들이 낯선 이국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어머니 강이었다.
간도 개척의 역사를 알고 보니 선구자는 말을 달리는 자들이 아니고 온갖 고난과 고초 속에서 황무지와 야산을 개간하여 평강벌과 서전벌을 일군 조선의 수탈과 학정을 피해 도망쳐 나온 천더꾸러기인 농민들, 천민들인 "수전개간민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수전 개발로 경제적인 기반이 닦인 터 위에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지사들이 모여들었고 해란강이 흐르고 있는 도시들인 화룡, 용정, 연길, 도문은 독립의 운동의 온상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도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우리 역사가 그분들께 진 빚을 다시금 깊이 생각하였다.
감사한 마음으로 해란강을 바라보니 고향 마을 뒤로 흐르는 만경강처럼 다정하였고 섬진강처럼 금강처럼 내 가슴으로 흘렀다.
해란강이 형편없이 보여서 실망했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리 시인께서 해란강변에서 최초로 개발된 수전을 보여주셨다. 그 논들은 조선인들의 수전개발을 기념하기 위해서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도록 두었는데 적당히 크고 작은약간 둥글며 네모난 논들이 다정하게 이웃해 있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받아서 갖은 고생을 치루며 최초로 수전을 일구어낸 조선인 농부들, 진정한 선구자들의 땀방울 흘리는 얼굴이 하늘에서 아른거렸다.
눈을 뜨니 해란강 노래가 들린다.
해란강 6
김학송
하나의 민족을 등에 업고
해란강이여
눈부신 갈망으로
울먹이는 강이여
너는 우리의 마음이요 노래다
우리의 숨결이요 맥박이다
우리의 두루마기요 행주치마다
우리의 조상이요 신앙이다
이제 너는 미래 속에 길이길이
우리의 날개가 되리니
해란강 1
김학송
사연 많은 해달 싣고 굽이굽이
파도 높은 세월 싣고 천리만리
평강벌에 계절이 벼꽃처럼 하아얗게
모아산에 진달래 불꽃처럼 빠알갛게
그사이 강산은 수없이 바뀌고
아이들은 자라서 로인이 되고
오, 너의 가슴팍을 휘젓고 간
백의의 눈물은 얼마였던고?
해란강 8
김학송
구월의 들국화 하늘종 울리고
축복의 해살
황금이 논벌에 쏟아지는 날
이백만송이 진달래로
고이 엮은 영광의 꽃다발
삼가 그대의 파도 앞에 올리나이다
작다고 하기에 너무나도 위대한
우리의 어머니- 해란강이여
2018.6.2.토요일
우담 초라하니
* 참고서적
연변조선족사 상, 김영만외 12인 공저, 연변인민출판사 간.
시와 사진으로 보는 연변, 연변조선족자치주관광국 편, 연변인민출판사 간.
시련의 열매, 최근갑 저, 료녕민족출판사 간.
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김춘선 저, 고대민족문화연구원 간.
첫댓글 ㅋㅋㅋㅋㅋㅋㅋ
강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지요
실제로 어떤 역사가 있었는지, 어떤 역할 그런게 중요합니다. 즐감 감사~~~~
좋은 시
감사요.
경험을 토대로 써주신 이야기도 멋지지만 이글을 쓰시기 위해 다방면으로 정보를 모으시고 풀어내신 과정이 대단한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