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선암사에서
모처럼 남도 여행길에 올라 남해의 해안선을 따라 흐르면서 해안 절벽에서 바다를 굽어보는 보리암, 향일암을 거쳐 순천 조계산 선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겨울 가뭄이 길었지만 선암사로 안내하는 긴 계곡에는 물이 찰찰 거리며 흘러 계곡의 웅장함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왼편의 계곡과 오른 편의 울창했던 산림 사이로 나 있는 완만한 경사 길을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삼십 여분 올라가니 처마선 날렵한 강선루가 보이고 일주문이 보였다. 아담한 범종루와 함께 대웅전이 고즈넉이 겨울 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산간 지방에서 살아온 탓인지 역시 사찰은 명산의 품에 안겨 있을 때가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으로 둘러 싸여서 고요에 젖은 선암사 경내에 조심스레 몸을 두고 보니 고색창연한 산사는 발자국을 떼어도, 목소리를 내어도 정적이 깨어질 것만 같아 조심스럽다
선암사는 참으로 보기 드물게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고 귀태가 나는 정갈한 도량이었다.
경내를 싸 안 듯이 흘러내린 조계산 한 자락은 그늘에서 한가로이 여물을 씹는 누렁 소의 배처럼 넉넉하고 부드러운 품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속살이 보이는 저 산자락에 연둣빛 새싹들이 올라 온 후 영산홍. 진달래가 앞 다투어 터지는 봄이 오고, 단풍으로 불붙는 가을이 오고, 흐린 하늘을 뚫고 펑펑 눈이 오면 대웅전 앞뜰에 선 중생들은 그 선경을 어떻게 감당할까?
스님들이 선방으로 쓰는 무우전 담장 좌우로 오래된 홍매화, 청매화가 산사의 운치를 한결 높이고 마치 다정한 사람들이 어깨를 겯듯이 추녀가 닿일 듯 세워진 건축물은 잘 손질된 정원수와 어울려 더 없이 정겨운 자태이다.
매화꽃 잔잔히 필 것 같은 오솔길, 금방이라도 고운 아씨가 나올 것 같은 소담스런 통문, 천년 고찰 선암사에서 무엄하게도 나는 사대부가의 정원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들의 마음을 끈 것은 선암사가 명승고적이면서도 나무의 결이 보일만큼 단청이 지워진 채로 있다는 것이다. 화려했던 단청이 지워진 채로도 관광객을 당당히 맞고 서 있는 천년 고찰의 우아한 자태를 보고 있자니 가슴 저 밑에서 진정 ‘그래야 한다.’는 반가움이 솟구치며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사찰의 진정한 모습을 찾은 것 같은 기쁨이 일었다. 아니함만 못한 단청을 입은 사찰에서의 실망을 수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단청이 없어도’가 아니라 ‘단청이 없어서’ 진정 빛나는 선암사와 ‘꾸미지 않아도’가 아니라 ‘꾸미지 않아서’ 진정 빛났던 내 옛 친구는 서로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며칠 전 저녁,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생 정숙이를 아느냐, 오늘 저녁 정숙이가 온다는데 영주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끼리 모여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앉은 자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이던 정숙이를 생각해 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가끔 같이 하교 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그녀는 반 쯤 가서 기계 소리 요란한 정미소 앞에 오면 ‘우리 집이야, 잘 가.’하며 먼저 들어갔다. 그녀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딸이었고 공부도 매우 잘 했다. 소박한 성격으로 특히 문학에 소질이 있었는데 중학교 때 그녀가 탈영병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눈물로 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녀에게 고민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기억의 끝이다.
결혼을 하고도 영주를 벗어나지 못한 나는 어쩌다 정미소가 있던 그 곳을 지나면 문득 무를 먹으며 연명하던 탈영병과 정숙이가 생각났다. 어디서 살까. 무엇을 할까. 그 때 그 소문은 아마 문학 병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닐까. 대답을 얻지 못하고 정미소가 있던 자리를 지나가게 되면 정숙이도 탈영병도 잊어버리곤 했다.
생사를 모르던 옛 친구를 만나려고 외출 준비를 하는 마음이 설레고 바쁘다. 몇 십 년 만에 동창생을 만나니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데 늘 편하게만 입어 왔던 처지라 아래 위 색깔이 잘 어울리는 근사한 옷도 없고 받쳐 신을 구두도 마땅치 않았다. 저녁은 전화 한 친구가 사기로 했는데 나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줄 선물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식당으로 갔다.
먼저 와 있던 친구들이 정숙이 이야기를 아는데 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현재 일본에서 문학 강의를 하는 교수라고 했다. 아! 성공했구나. 결국 문학으로. 성공한 인생이니 지성과 품격은 기본 일 테고 단단한 기반과 재력까지 갖추었을 것이니 화려하고 당당한 그녀의 출현이겠거니 하고 고대했다.
그런데 모두 들 어디 있느냐며 중얼거리며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나는 놀랐다. 우리는 시장에 갈 때도 그렇게는 안 입는데 명색이 일본 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십년은 더 되어 보이는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구색 맞는 옷을 찾으려고 쩔쩔매던 나를 나무라듯 색이 바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낡은 스웨터 위에 누비 점퍼를 겹쳐 입고 전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오천 원짜리 저녁밥을 감사하게 먹었고 하나하나 친구 이름을 확인하며 목젖이 보이게 웃어 재꼈고 우리들이 자랄 때 쓰던 사투리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녀의 얼굴은 오늘만 화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늘도’ 화장하지 않은 것이며 모자 밑에 눌려 있던 짧은 머리도 퍼머 한 적이 없는 검소하고 꾸밈이 없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자기가 번역한 책과 젓가락 받침 여섯 세트를 선물로 내 놓았다. 하나씩 나누어 가지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행기 삯 외에는 한화를 단 십 원도 가져가지 않았고 접시 닦기부터 시작하여 숙식을 해결하고 언어를 배우고 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로 대학의 강단에 서기까지의 성공담을 찡한 마음으로 들었다. 우리들이 궁금해 했던 그녀의 고민은 문학 병이 아니라 사실은 기울어진 가세였노라고 하는 솔직함이 신선한 충격이 되어 색을 벗은 채 서 있는 선암사 앞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역경 위에 당당한 현재를 세운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한 여자를 보았다.
화려하지 않는 옛 친구가 내면적으로 결코 초라하지 않았듯이 단청 벗어진 선암사를 결코 쇄락해 가는 사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청 벗어진 선암사는 꾸미지 않아도 풍기는 단아하고 근엄한 자태가 있으며, 도량 도처에 천년 세월의 겹을 천년의 향기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불심이 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중생이 한 순간, 숨기고 꾸미느라 피곤한 인생을 자초하다가 모처럼 가식의 옷을 벗을 수 있는 공간이라 확인하고 계산 없이 마음을 열고 무거운 가면을 벗어 던지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일행이 있어 곧 돌아서야 했지만 여유만 있다면 꼭 다시 찾아 와 보고 싶은 고찰, 선암사. 다음에 올 때는 계곡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아치형으로 아름답게 서 있는 승선교 교각 사이로 날듯이 서 있는 빨간 강선루를 보리라. 그 또한 절경이 될 것 같다.
단청 벗어져 천년의 세월이 그대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선암사는 그 때도 그 간의 세월을 더 얹어서 고고히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