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18회>退溪小傳
陶山書堂과 栗谷
그 잠언에 대해서는 퇴계의 제자인 구봉령(具鳳齡)이 후일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서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는 뜻은 깊고 간절하였다. 그와 같은 잠언은 어찌 율곡 한 사람이 받들어 행하야 할 일이겠는가. 나도 또한 마땅히 그 잠언대로 살아나가야 하겠기에 그 잠언을 나 자신도 벽에 써붙이고 그대로 실천하기를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남겨준 그 잠언은 어찌 그 시대 그 사람에게만 국한된 명언일 수 있으랴.
그 잠언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영원불멸의 대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율곡은 훗날 퇴계가 세상을 떠난 뒤에 옛 스승을 생각하며 석담일기(石潭日記)
속에서 퇴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12월 신축(辛丑)에 숭정대부판중추부사 이 황(崇政大夫判中樞府事 李滉)이 돌아가셨다.
그는 성도(性度)가 온순(溫醇)하며 순수하기 옥(玉)과 같은 어른이셨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율곡은 제자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일년 동안은 부인 방에도 들어가
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해 6월에 영의정 심연원(領議政 沈連源)과 대제학 정사룡(大提學 鄭士龍) 등이 상감에게
「퇴계에게 벼슬을 내릴 것」과 「경상감사로 하여금 퇴계를 설득하여 서울에 올려 보내도록」 어명을 내릴 것을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은 퇴계에게 다시 대사성의 벼슬을 내리며, 경상감사로 하여금 퇴계를 속히 상경하게 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퇴계는 경상감사를 통해 그 사실을 알자 즉시 소(疏)를 올려 질병으로 관직을 감당하기 어
려움을 성상에게 호소하였다. 그 상소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신이 비록 무식하오나 젊을 때부터 임금 섬기는 도리를 들었사온 바 어명에 좇아야 한다는 것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재력이 부족한 사람이 과분한 벼슬 자리를 누리려고 하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더구나 소신처럼 병으로 폐인이 된 자가 녹을 도적질하는 것은 심히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되옵니다. 직무를 감당해 내지 못하면서 물러나지 않는 것은 임금을 속이는 일이나 다름 없사오니, 마땅히 소신으로 하여금 고향에 그대로 눌러 있으면서 몸수양이나 하도록 특별 윤허를 내려 주시옵소서」
퇴계의 그와 같은 상소문을 받아 읽은 임금은 크게 실망하여,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
를 내렸다.
「이제 그대의 소를 읽어보니 그대는 몸이 불편하다는 점을 들어 서울에 올라오지 않을 것을 굳게 고집하니 이는 사람을 얻어 정치를 바르게 해 보려는 나의 뜻을 빼앗김과 다름이
없구려. 내가 실로 덕이 없고 사리에 어둡기 때문에 그대가 의를 지키고 도를 지키기 위해
벼슬을 사양하는 모양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구려. 그대는 나의 간곡한 뜻을 헤아려 다시 한번 상경을 고려해 주기 바라오.」
이상과 같은 친서를 받아 읽은 퇴계는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어서 9월달에 병구(病軀)를 이끌고 상경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셔서 다시 대사성(성균관 최고의 벼슬.정삼품)의 벼슬을 제수하며 이렇게 말씀하였다.
「선비의 기풍이 아름다워야만 그 나라가 잘 되는 법인데, 지금 우리 나라의 선비들의 기풍은 매우 퇴폐되었소. 이는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니 경은 대사성으로서 나를 도와 나라의 기풍을 바로 세워주기 바라오.」
퇴계는 성은에 감동하여 마지못해 대사성의 직책을 다시 맡았다.
그러나 한달이 지나자 병이 다시 도져서 중책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11월에 또다시 사표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직책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국록만 받아먹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사임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해 12월에는 특별히 친필로 가선대부공조참판(嘉善大夫 工曹參判)으로 승진을 시켰다. 그리고 약과 음식까지 보내 주면서
「특별 말미를 줄 터인즉 병조리를 마음껏 하라.」
하는 특별 분부까지 내렸다.
그리하여 재삼 사표를 내었으나 모두 허락되지 않아 할 수 없이 명을 받들어 무리하게 직책을 감당해 나갔다.
이듬 해인 59세 때에 퇴계는 분황(焚黃:벼슬하게 된 것을 조상의 무덤에 고하는 의식)을 하려고 특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왔다. 그 때에는 몸이 몹시 쇠약해 졌으므로 조정에는 돌아가지 아니 하고 집에서 휴양을 하여 서장을 올려 사임을 원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이번에도 허락을 내리지 아니 하므로﹐ 퇴계는 부득이 고향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분황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온 채 부르심에 응하지 않음은 신자(臣子)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오?」
하고 퇴계를 은근히 나무란 적이 있었다.
퇴계는 그러한 비난에 대해 정중하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임금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난들 어찌 모르리이까. 임금님께서는 자꾸만 벼슬을 내려주시지만, 나는 본래부터 벼슬을 싫어하는 데다가 근자에는 몸이 너무도 쇠약해 직책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표를 내놓고 상경을 하지 않을 뿐이오. 분황을 빙자하고 귀향하여 상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과 너무도 다른 일입니다. 임금님을 섬기는데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으오리까.」
이해 5월에 또다시 사표를 올렸으나 허락이 내리지 아니 하므로 7월에 또다시 사표를 올
렸더니 임금은 그제서야 허락을 내려 참판을 갈고, 퇴계에게는 한직인 중추부사(中樞府事)의 벼슬을 내리며, 경상감사에게 명하여 퇴계댁에 식량을 제공해 드릴 것을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이 때부터 마음놓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게 되었
는데 5년전부터 짓기 시작한 도산서당을 완성한 것도 바로 이해 가을의 일이었다.
서당 건물을 5년이나 걸려 지었다고 하면 그 규모가 굉장한 것처럼 오해할지 모르나, 알
고 보면 3간짜리 서당과 8간짜리 제자들이 거처할 숙소와 모두 해야 조그만 건물 두 채일 뿐이다. 남들 같으면 두세 달이면 거뜬히 지어버릴 수 있는 건물을 5년이나 걸려 완성시킨 것은, 돈이 없어서 공사 중에 몇 번이고 짓다 말고 짓다 말고 했기 때문이었다.
건물이 완성되자, 제자들을 가르치는 마루방은 「암서헌(巖棲軒)이라 이름 하였다. 퇴계가
거처하는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명명하였다.
그리고 서당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져 있는 제자들이 거처하는 건물은 「농운정사(隴雲精舍)라고 불렀다.
퇴계는 완락재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좌우에 가득히 쌓아놓은 책을 줄곧 읽고 있었다.
책 읽기에 지치면 산과 들을 산책하며 언제나 사색에 잠겨 있었는데, 그의 선호한 성리학
의 이론은 그런 때에 착착 심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에도 퇴계는 가세가 곤궁하여 겨우 끼니를 이어 나갈 정도였였다. 제자들이 많다
고는 하지만 그들에게서 사례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숙식까지 이쪽에서 제공해 줄 지경이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곤궁해도 그런 기색은 눈꼽만큼도 나타내지 않고 언제나 화락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그처럼 곤궁한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는 생활을 초월하여 정신 수양에만 치중했던 까닭에 도가 더욱 깊어져서, 언제든지 기쁨
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18회>끝